풍기역 광장에 우뚝 서 있는 30m 높이의 급수탑. 50t의 물을 저장하던 전국 최대의 급수탑으로 중앙선 위를 달리던 모든 증기 기관차가 풍기역에 멈춰 물을 보충했다. 급수탑 옆에는 2012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증기기관차 901호가 서 있다.
1941년 7월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풍기역은 여전히 새마을호를 포함해 수많은 열차가 서는 중앙선의 주요역이다(위).
새마을호를 개조한 쉼터. 풍기역을 찾은 여행객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다.
386.6㎞.
서울 청량리역과 경주의 경주역을 잇는 중앙선의 총 길이다. 그 중간인 199㎞ 지점에 풍기역이 있다. ‘풍성할 풍(豊)’, ‘터 기(基)’의 풍기. 이곳은 소백산 죽령의 남쪽, 고단한 시절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던 땅, 전쟁도 스쳐간 땅, 예부터 십승지 중 하나라 했던 땅이다. 중앙선을 달리는 모든 기차는 이 땅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 풍성한 터에 잠시 머물러 휴식하고 힘을 충전한다. 기차에게도 사람에게도 힘을 주는 곳, 그곳이 풍기다.
#1. 모든 기차의 휴식처이자 물 보급처…위풍당당 풍기역
풍기는 고려 때부터 기주로 칭해져 오다 공양왕 때 은풍현으로 편입되었고, 조선 태조 때 기천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문종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매안하면서 은풍의 풍(豊) 자와 기주의 기(基) 자를 따서 풍기라고 불렀다.
풍기역은 풍기 읍내의 서부리에 자리한다. 옛날 풍기성의 서문 자리다. 금계천과 남원천이 마을을 두고 흐르고, 그 마을 앞 서문 밖에 풍기역이 서있다. 지금의 역전통로 자리에는 서쪽 성벽이 있었다. 이곳은 옛날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던 죽령 옛길의 한 토막이다. 남원천을 건너면 죽령 옛길의 첫 주막거리였던 ‘자갈모래주막거리’인 자갈모룽이다. 그 유명한 죽령 바람이 자갈을 날린다는 곳이다.
풍기역은 1941년 7월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1942년 3월13일 조선총독부관보 고시 333호)했다. 역 앞에는 30m 높이의 급수탑이 우뚝 서있다. 무려 50t의 물을 저장했던 전국 최대의 급수탑이다. 중앙선 위를 달리던 모든 증기 기관차는 모두 풍기역에 멈추었다.
증기기관차는 물을 끓여 발생시킨 증기로 구동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죽령을 앞두고 기차는 숨을 고르고 힘을 재충전해야 했다. 죽령을 넘어온 기차들은 그 힘겨운 전진을 보상해야 했다. 풍기역의 급수탑은 기차들의 휴식처이자 물 보급소였다. 풍기역 급수탑의 물탱크가 전국 최대의 저수량을 가진 까닭이다. 그 육중하고 도도한 무쇠장정들에게 힘을 공급해 준, 위풍당당 풍기역이었다.
#2. 난세의 피난처 풍기, 그리고 풍기 인견을 전국으로 실어 나른 풍기역
역이 자리함에 따라 옛 서문 밖에는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져 마을은 크게 확장됐다. 역 주변에는 숙박시설과 음식점, 잡상 등이 생겨났다. 풍기 장터는 풍기성의 동문에 있었다. 장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구름밭이라 했던 장터는 바람에 구름 가듯 역 앞으로 옮겨졌다.
격암 남사고는 소백산을 향해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첫째로 가리킨 곳이 바로 풍기역의 뒤쪽, 풍기인삼의 텃밭이자 훗날 정감록마을이 된 금계동이다.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 많은 사람이 평화와 안락을 찾아 풍기로 왔고 그들은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착했다. 풍기에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과 덕천에서 남하한 직물 기술자들이 많았다. 1930년대, 그들은 족답기(쪽닥 베틀, 인견을 짜는 수동기계)를 짊어지고 정감록에서 말한 ‘난세의 피난처’를 찾아 풍기로 들어왔다. 그들은 인견사를 원료로 한복 속옷감 따위로 쓰이는 인견직을 짰다. 이것이 바로 ‘풍기인견’의 시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으면서 ‘풍기인견’은 전국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0년 풍기의 족답기는 100대 정도에 불과했지만 1942년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중앙선의 개통과 함께 성황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풍기의 족답기는 1천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어났다. 기차는 풍기 인견을 전국으로 실어 날랐다.
#3. 20㎞ 북쪽 죽령역에 있는 군수품 차량을 회수하라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철도는 비상 국무회의의 의결로 현지 동원령이 발령되었고, 기관사들은 밤낮으로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전쟁은 중앙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격전이 계속되었다. 아군의 방어선은 거듭 무너졌고, 한 달여 만에 적은 소백산 정상까지 밀고 들어와 있었다.
그해 7월26일 영주군(현 영주시) 풍기역. 24세의 젊은 기관사 김노한에게 군 수송지휘부(RTO)의 명령이 떨어졌다.
“20㎞ 북쪽 죽령역에 있는 군수품 차량을 회수하라.”
대기 중인 기관차 한 대를 가지고 적지로 들어가 군수품 적재 차량을 회수하라는 지시였다.
‘기관차 한 대를 몰고 적지로 들어가라니….’
젊은 기관사의 눈앞에 가족들 얼굴이 스쳐갔다.
“못 갑니다. 저 보고 죽으란 말입니까!”
그러나 기차는 달려야 했다. 가서 무기와 식량 등 군수품이 가득 실린 열차를 되찾아 와야 했다.
“우리는 죽령역에 가서 열차를 구출해 와야 한다.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는 함께할 기관조사 두 사람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기관사들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후 7시20분경, 결국 세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풍기역을 출발한다. 기관차는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는 죽령역을 달리기 시작했다. 적군의 총알이 빗발쳤다. 잠시 후 총알을 맞은 기관차 물탱크에서 콸콸 물이 새기 시작했다. 그들은 희방사역(현 소백산역)을 통과해 죽령터널 속에서 기차를 멈췄다. 나무토막에 걸레를 감고 물탱크의 총알 구멍을 두들겨 막았다.
기차는 다시 전진했다. 죽령역에 도착한 그들은 유치되어 있는 군수품 차량을 전부 연결했다. 풍기역까지 20㎞. 그들은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무사히 되돌아왔다.
김 기관사는 전쟁 직후 6·25 종군기장을 받았다. 그는 1971년 12월, 꿈을 품었고 목숨을 걸었던 이 기찻길에서 퇴직했다.
#4. 인삼 향 그윽한 풍기역
지금 역 광장에는 여전히 급수탑이 우뚝 서 있다. 그 위용은 사뭇 줄었지만 옛날의 위풍당당했던 시절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급수탑에는 커다란 풍기 인삼이 그려져 있고, 내부는 영주시의 홍보관으로 쓰이고 있다.
역 앞에는 풍기인삼시장이 버티고 서있다. 1990년에 건립한 건물에는 45동의 업소가 들어서 있다. 주변 전통시장의 35개소를 합하면 80여개의 인삼 가게가 밀집되어 있다. 옛날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소백산의 산삼 씨앗을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는 이름 높은 풍기 인삼. 풍기 인삼을 담았던 종이에서는 몇 달이 지나도 인삼 내가 풍긴다고 했고, 두세 번 달여 먹어도 좋을 만큼 약효가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삼은 열여섯 냥, 금산삼은 열 냥, 풍기삼은 여덟 냥을 한 근으로 쳐서 값을 매겼다고 하고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 300g은 다른 지방의 인삼 375g과 같게 쳤을 정도다. 지금 이곳 풍기인삼시장에서는 연간 약 75t의 수삼이 거래된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풍기인삼축제 때에는 전국 각지의 사람이 풍기역을 찾는다.
역사 주위에는 인조견 상점이 늘어서 있다. 소위 ‘냉장고 섬유’라는 인조견은 그 시원함과 화려한 색상들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여름이 시작되는 5월부터 시작해 8월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인조견을 사러 풍기를 찾는다. 역전에는 3일과 8일마다 풍기장이 열린다.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명물이다.
풍기역은 인근의 소백산과 부석사, 소수서원 등 이름난 관광지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동양대학교도 위치해 있어 통학 수요도 꽤 있는 편이다. 고정 승객이 많지는 않다. 인구 자체가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 앞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도 준비되어 있다. 새마을호 열차를 개조한 선비객차다. 풍기역에서 내일로 티켓을 구매한 여행자들과 단체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풍기역은 여전히 새마을호를 포함, 중앙선 전 열차가 서는 중앙선의 주요역이다. 기차는 더 이상 물을 채워갈 일 없지만, 이곳에 내린 사람들은 그윽한 인삼향을 품고 간다. 흡! 기차에 오르기 전, 한 번 더 호흡하는 것도 잊지 않고….
풍기역 급수탑 옆에는 증기기관차 한 대가 서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운행했던 증기기관차 901호다.
국내에서 증기기관차가 운행을 중단한 것은 1967년이었다. 이후 일부가 관광열차나 임시열차로 운행됐지만 이마저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동해남부선 관광열차로 운행되다가 83년 멈춘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를 마지막으로, 증기기관차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 같은 존재였다.
‘129호’가 운행을 멈춘 지 11년이 지난 94년, 국내에 새로운 증기기관차가 들어왔다.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에서 관광열차로 운행하기 위해 증기기관차 한 량을 들여온 것이다. 바로 901호 증기기관차였다.
증기기관차 901호는 94년 7월 중국 창춘에서 생산해, 그해 8월5일 부산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미카도(Mikado)형 텐더식 증기기관차로, 2개의 전륜과 8개의 동륜, 그리고 2개의 후륜을 갖추고 있다. 기관차 앞쪽에는 보일러가 있고, 뒤쪽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별도의 탄수차가 연결되어 있다. 석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는 다른 증기기관차와 달리 석유를 주 연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증기기관차가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태우는 연료만 다를 뿐, 증기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같아 증기기관차로 인정받았다.
901호는 2000년까지 서울역에서 원당과 송추, 의정부를 지나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교외선 주말관광열차로 운행됐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기관차의 과다한 연료소모와 유지 보수의 어려움 때문에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이후 수색차량기지 한구석에 있던 901호는 2009년부터 점촌역의 체험학습장에 전시되어 역의 명물이 됐다. 그리고 2012년 2월28일, 901호는 3년간 정들었던 점촌역을 떠나 새 둥지인 풍기역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급수탑과 함께 풍기역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