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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1995년 作)
第1章 いつか会える
01 "理想の女性”諦めきれず 12
02 "理想の男性”とほど遠かった 15
03 仕事したい、何でもやるぞ 18
04 涙で語った思い出の歌. 21
05 私には口がある! 24
06 元気をくれた一言 27
07 人生変えた紙吹雪 30
08 運命鑑定師大先生の療法 33
09 永さんゴメンナサイ 36
10 友の国の平和を願う 39
11 なぜか涙がこぼれる 42
12 母が消えてしまった 45
13 "隠しジジイ”がいる!? 48
14 憎しみ、偏見を溶かす 51
15 機械に頼り過ぎでは 54
16「右腕一本の自由を」57
17 一緒にチョゴリを着た友 60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1 이상형의 여자를 포기 못하고 12.
02 이상형의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15
03 일하고 싶어, 뭐든지 하겠다 18
04 눈물로 해설방송을 한 추억의 노래 21
05 나에게는 예쁜 입이 있다! 24
06 기운을 차리게 한 한마디 27.
07 인생 바꾼 종이 눈보라 30
08 운명감정사 대선생의 충격요법 33
09 에이(永) 씨 죄송합니다 36
10 친구나라의 평화를 바란다 39
11 왠지 눈물이 흘러내린다 42.
12 엄마가 사라져버렸다 45.
13 "물건 감추는 마귀할배"가 있다!? 48
14 증오, 편견을 녹이다 51
15 기계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54.
16 "오른팔 하나의 자유를" 57
17 함께 저고리 입던 친구 60.
第2章 元気のもと
18 大声は七難バラス 64
19 いい男の極致 67
20 松本先生と朝鮮の子どもたち 70
21 泥棒めがけ棒を振り下ろす 73
22 "永遠の男性”との再会 76
23 実った執念の似顔絵 79
24 成さねば成らぬ何事も 82
25 秘訣は内から輝くこと 85
26 家族とは血の絆だけか 88
27 川崎→大阪、苦行の一日 91
28「ハリ」を打たれ大ショック 94
29 親友に歌ってくれた白竜 97
30 優しいお母さん馬の愛情 100
31 出会いをつづける大切さ 103
32 素敵なロマンの旅人 106
33 統一への熱い想い 109
34「ミホアルダン号」の奇跡 112
35 月光仮面のオジさんだ 115
제2장 활력의 근원
18 큰 소리는 여러 재난의 해소, 64.
19 좋은 남자의 극치 67.
20 마츠모토 선생님과 조선의 아이들 70.
21 도둑을 향해 막대기를 내리치다 73.
22 "영원한 남자"와의 재회 76
23 결실을 맺은 집념의 초상화 79
24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일이 82.
25 비결은 안에서 빛나는 것, 85.
26 가족이란 피의 유대뿐인가? 88.
27 가와사키→오사카, 고행의 하루 91
28 '침'을 맞게된 큰 충격 94
29 절친에게 불러준 노래 백룡(白竜) 97.
30 상냥한 어미 말(馬)의 애정 100.
31 만남을 이어가는 중요성 103.
32 멋진 낭만의 나그네 106
33 통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 109
34 "미호아르단호(ミホアルダン号:俊馬)의 기적 112
35 달빛가면의 아저씨이다 115.
第3章 ボッカリと
36 どうせなら楽しく貧乏 120
37 羽子板屋に一生かけて 123
38 子どもが描いた戦火の悲惨 126
39 憧れの着物 129
40 着物とゲタへの恨み越えて 132
41 夢は「本の学校」 135
42 ああ、またドジっちゃった 138
43 歌いつづけ28年、走りつづけ23年 141
44 夢に挑戦する林クン 144
45 憧れの長英さんと 147
46 何てったってハートだぜ 150
47「女性を輸入したら」とは・・・ 153
48 不気味で怖い無言電話 156
49 ステキな埋蔵金探し 159
50「自分にピッタリの世界」162
51 ただ今、駒形茂兵衛大特訓 165
52 子育ての秘訣は「愛」 168
53 悪いのは軍隊、戦争… 171
54 私ト出会ッテホシイ 174
55 今日も走る、走る、走る 177
56 夢の精と現実の権化と 180
제3장 불쑥(포근, 덥썩)하고
36 이왕이면 즐겁게 가난극복 120.
37 깃털제기채 만들기에 평생을 123.
38 어린이가 그린 전쟁의 비참 126.
39 동경하는 기모노 129.
40 기모노와 게타에 대한 원한을 넘어 132.
41 꿈은 "책 학교" 135.
42 아, 또 망했네 138
43 노래 부르기 28년, 계속 달리기 23년 141
44 꿈에 도전하는 임(林)군 144
45 동경하는 장영 씨와 147.
46 누가 뭐라해도 마음가짐이다 150.
47 "여성을 수입한다면"이라니... 153
48 섬뜩하고 무서운 무언 전화 156.
49 멋진 매장금 찾기 159
50 '나에게 딱 맞는 세계' 162
51 지금 고마가타 모헤에 대특훈 165
52 육아의 비결은 '사랑' 168.
53 나쁜 건 군대, 전쟁... 171
54 나와 만나기를 원한다 174
55 오늘도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177
56 꿈의 정과 현실의 화신과 180.
第4章 ごエンしだい(御緣次第)
56 やりました、一本刀土俵入り 184
57 素晴らしい長英さんの役者魂 187
58 自爆した若き日本兵 190
59 素敵な素敵な岡本文弥さん 193
60 大道芸人でデビューして 196
61 とびっきりの朝食 199
62 パワㅡ豊かな母と娘 202
63 常に距離感を保つ 205
64 それでも行かなくっちゃ 208
65 これ以上、傷付けないで 212
66 すごいなァ"男のオバさん” 215
67 二人三脚の奮闘はつづく 218
68 この人は、きっと天使 221
69 戦後50年、今なお翻弄 224
70 気は優しくて力持ち 227
71 元次郎さんの歌人生 230
72 太鼓って何ていいのだろう 233
73 人間が持つ自然治癒力 236
74 素敵な赤ひげ先生 239
75 今後もたくさんの出会いを 242
76 あとがき 245
제4장 운멍적인 만남을 하고 싶다
56 해냈습니다, 외길 씨름판에 들어가 184
57 훌륭한 나가히데 씨의 배우 영혼 187
58 자폭한 젊은 일본병 190.
59 멋진 오카모토 분야 씨 193.
60 길거리 배우로 데뷔 196.
61 월등한 아침 식사, 199.
62 활럭 넘치는 엄마와 딸 202
63 항상 거리감을 유지한다 205.
64 그래도 가야지 208.
65 더 이상 상처받지 마 212
66 대단하네 "남자 아줌마" 215
67 2인 3각의 분투는 계속된다. 218
68 이 사람은 분명 천사 221
69 전후 50년, 여전히 농락 224
70 마음은 착하고 힘이 세다 227.
71 겐지로씨의 노래 인생 230.
72 북이 뭐가 좋을까, 233.
73 인간이 가진 자연 치유력 236
74 멋진 붉은 수염 선생님 239.
75 앞으로도 많은 만남을 242.
76 후기 24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1 "이상형의 여성" 포기 못하고
반갑습니다, 박경남(朴慶南)입니다. 얼빠지고경박하고 느림보인 결점투성이인 나에게 "만남"과 관련 해서만은 내가 자랑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금만 느긋한 기분으로 저의 다양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에 꼭 함께 해주시기바랍니다.
먼저 내가 태어나는 원천이 된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1917(다이쇼 6)년생인 아버지는 여덟 살 무렵 할아버지를 따라 할머니와 함께 한국 경상북도의 산골 고향을 떠나 부산항에서 파도가 거센 현해탄을 넘어 멀리 일본으로 건너왔다.
오사카 선착장에서의 견습공을 시작으로 공원, 택시 운전사 등 일본 각지를 전전하는데 타고난 성미가 거칠어 싸움은 다반사, 엄청난 망나니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이름도 '박팔수(朴八寿)'라는 좋은 본명이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권팔(權八)'이라고 불리며 아버지가 길을 걸으면 '권팔이 왔다!' 하고 집들의 창문과 문이 황급히 닫혔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에 서른 번이 넘는 맞선을 거듭해도 좀처럼 잘 성사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토에서의 일로, 외모가 좋은 여성을 앞에 두고, 다소 긴장한 권팔 씨의 귀에, "거칠어 보이니 그만두자..."라고 말하고 있는 옆방의 상대측 가족들 속삭이는 목소리가, 맹장지 너머로 들려왔다.
자존심만큼은 남들 10배나 높은 권팔 씨. 어떤 자리에서든 모욕은 용서할 수 없다. "뭐라고! 깡패 취급하지 마". 벌떡 일어선 그는 눈앞의 상을 뒤집고 바로 도박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판돈을 혼자서 모두 거머쥐었다. 돈을 되찾으려고 쫓아온 몇 명의 도박꾼들과 시조가와라(四条河原) 강변에서부턴 시작된 싸움은 가모가와(賀茂川)강 속에까지 들어가 엉겨 붙었다. (왠지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만, 대단한 힘으로 모두를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돗토리의 외딴 시골에서는 이번에야말로 맞선이 성공하기를 조부모가 학수고대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해진 소식은 아들이 유치장에 들어가 있다는 내용이다.
'아아' 하고 깊은 한숨이 조부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정말 난처한 일입니다). 서른 살이 넘도록 반려자를 만날 수 없는 권팔 씨의 마음속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만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친구에게 그 이상형을 득의양양하게 말했더니, '그런 여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라고 일소에 부쳐진 뒤, 이어서 '그래, 그래, 딱 한 명 딱 맞는 여자가 있었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이제 일본에는 없어'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모국으로 가기 위해 시모노세키항으로 가족들과 함께 갔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것으로 만사 끝이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다." 라고 염원하다가 겨우 발견한 "이상적인 여성"을 포기할 수 없는 권팔 씨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걸고, 곧바로 한달음에, 시모노세키를 목표로 떠났다.
우연을 기다리는 '만남'도 있지만, 스스로 적극적으로 움직여 생겨나는 '만남'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 하늘이 도와서인지 폭풍 때문에 배는 출항하지 않았고, 그 여성은 아직 시모노세키에 있었던 것이다. 꼭 만나고 싶다는 한 남자의 열정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는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1996 04 0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2 이상형의 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두에서, 권팔씨(아버지)가 시모노세키까지 "이상형인 여성"을 한결같이 추구해 갔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매사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양과 음, 행과 불행, 이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가 봅니다.
행복이 가득한 권팔씨와는 대조적으로, 또 한쪽의 주인공인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생각치도 못한 재난이 되었다. 그녀의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서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운이 나빴다." 라고 밖에 위로할 수 없는 나의 어머니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살에 일본에 온 어머니는 오사카 땅에서 5남매 중 막내로 귀여움을 받으며 공주처럼 자랐다. 늘 조용히 독서하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동경의 눈길를 쏟았다고 한다.
본명은 김점임(金点任). 호리호리하고 곱상스러운 외모에 상냥하고 얌전한 어머니는 모두에게 사요짱(小夜ちん)으로 불렸다. "스물네 개의 눈동자"에 나오는 오이시(大石) 선생님처럼 분교에서 조용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꿈이라는 사요짱이었다.
사요짱은 난데없이 찾아온 낯선 남자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깜짝 놀랐다. 왕자님 같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눈앞에 서 있는 건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런데 첫째 오빠는 권팔씨의 끈질긴 구혼과 남자다움에 반하여 "좋아, 누이를 주겠다."고 멋대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사요짱에게 권팔 씨는 '이상형의 남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당시 일가를 지휘하고 있던 존경하는 오빠의 말에 '싫다!' 고 말할수도 없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돗토리현의 오시노즈초(鳥取県大篠津町)라는 시골에서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전후의, 일본 전역이 궁핍 생활의 절정기라, 잠자는 두세 시간 외는, 배고픔을 안고 종일 일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다. 게다가 겨우 손에 넣은 '이상적인 여성'을 내버려두고 남편이 된 권팔 씨는 결혼 후에도 전혀 안정을 찾을 기미가 없다.
그러던 중 난산으로 첫 여자아이를 잃은 후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내가 활기를 찾게 해주겠다(?) 라는 듯이 어머니의 태내에 깃든 것이다.
한밤중 재봉틀 일을 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만삭의 배가 아프기 시작해 황급히 몸을 눕히자마자 '응아!' 하고, 제가 나타났다고 한다(그 정도의 순산으로, 조산부를 부르러 갈 사이도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재빠르고 멋지게 내가 이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호기심 많은 나는 세상을 빨리 보고 싶어서인지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숫자)에 맞추어 1월 23일에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다.
나의 탄생은 아버지 권팔 씨의 인생을 바꿨다. 내 아이를 안아 올린 아버지는 몸이 떨리는 감동과 함께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이런 나에게도 아기가 생겼구나. 야쿠자(건달) 생활에서 발을 씻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이제는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권팔 씨는 이름도 ‘박정신(朴正信)’으로 바꾸고 심기일전, 땅에 발을 붙이고 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상 인사도 곁들인 저의 탄생기였습니다. (1996 04 1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3 일하고 싶어, 뭐든지 하겠다
"오랜 경력을 가진 분 같아 보는군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곁으로 보이는 풍격(?) 때문일까. "불과 몇 년 전부터"라고 대답하면 "와-"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경우가 많다. "정말, 정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스스로 자신의 꿈을 계속 접어 왔다. 재일 외국인으로서 제약과 유교 윤리를 절대의 가치로 여기는 아버지의,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굴레 속에서 늘 "체념"이라는 두 글자를 어릴 때부터 가슴에 달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마이너스 요인을 안고 있다. 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자. 뒤돌아보던 ‘삶의 방식’을 어느 날 과감히 긍정적으로 싹 바꿨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어떤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세상과 자신을 향해 내딛은 첫 걸음이지만 경력도 없고 젊음도 없다. 신문이나 잡지의 구인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훝어봐도, "내세울만한 점"이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게 현실은 냉엄하다.
그렇게 되면 지위나 재산보다 가져야 할 것은 친구다. 편집 일을 하는 친구와의 인연으로 언론 관계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이 생겼다.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이 도전해 보고 싶다!" 는 나의 기개에 감응했는지 지인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은 모 신문사의 "보도사진집" 한권을 통째로 제목과 사진설명을 쓰는 일이었다.
엽서 한 장 쓰는 것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나에게 글을 쓰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쑥스러운 일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 숙제는 제일 하기 싫은 숙제였는데...
그런데 속마음과는 달리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네- 맡겨만 주세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물러설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분명 숨어 있다(정말이예요). 남들이 할 수 있다면 나라고 못할 것이 없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기로 했다. 지우개와 연필을 움켜쥐고 원고지와 씨름하는 나날이 시작된다.
때를 같이해 다른 친구로부터는 인터뷰 기사의 의뢰가 왔다. 내친김에 '해 볼 게요' 라고 즉답한 것은 좋았는데, 허당인 나는 바로 큰 실수를 하고 만다. 첫 번째 인터뷰 상대는 '폭풍 슬람프(*1984년 결성된 록밴드)'의 '선플라자 나카노(*サンプラザ中野1960~음악인)' 씨였다.
덜렁이인 나는 흥분해서 혼자서 떠들어댔다. 귀가해서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나카노 씨의 육성은 '예'와 '아니요'와 '아하하'의 웃음소리뿐. "아, 어떡해, 기사를 쓸 거리가 없다."
어딘가에 숨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이제는 프로다. 도망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을 보쳐먹고 나카노 씨에게 전화를 했다. 웃으면서도 흔쾌히 수화기 너머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럭저럭 기사가 정리되었다. 게다가 나카노 씨와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콘서트나 뒤풀이 파티에도 초대되는 행운까지 따라왔다.
"보도사진집"도 무사히 완성하고 결광술을 손에 쥐었을 때의 마음의 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떻게든 될 거야'의 자신감과 낙천가 기질을 배운, 나의 잊기 어려운 첫 일과의 '만남'이었다. (1996 04 18)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4. 눈물로 해설한 추억의 노래
"사람(人)과 꿈(夢)을 합치면 덧없다는(儚い)..."는 말이 된다. 설령 덧없는 것이라도 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도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 덧없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한 번뿐인 내 삶에 꿈의 빛이 필요하다.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딛자마자 뜻하지 않게 글쓰는 일을 만나게 되었다는 지난 이야기에 이어지는 것은 나와 ‘꿈’의 만남이다. 구인 모집 신문 광고란을 샅샅이 살펴보던 중 한쪽 구석의 작은 글씨에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라디오 단파 방송 학원생 모집"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어렸을 때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꿈 중 하나가 아나운서였다. "어차피 안 되니까" 라는 말과는 작별하고 삶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무모하든 망신이든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발성 연습에 빠른 말... 일주일에 한 번 단파 교실에서 스무 살 전후의 여성들에 섞여 발성연습을 한다고 목청을 높혔다. 나가 그리던 꿈을 향한 도전이 반짝반짝 빛났음에 틀림없다. 6개월의 커리큘럼이 끝나갈 무렵, 강사의 한 사람인 디렉터 무토 씨가 나의 프로필에 "작가"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글쓰는 일을 하는군요. 그럼 4월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되니 그 구성작가를 해보지 않겠습니까?"라고 권유를 해줬다.
구성작가? 무엇을 하는 일인지 잘 모른 채 반사적으로 입으로는 "네,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뭔들 못할 게 있나 라는 마음가짐이다.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프로그램 구성을 하는 이면의 일로, 당연하게도 마이크를 앞에 둘 기회는 전혀 없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기라 딱 한 번 특별히 미니 한국어 강좌를 하게 됐고 내친김에 추억의 노래라는 코너에서도 이야기하게 됐다.
"앗싸!" 드디어 마이크를 통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꿈꾸는 기분으로 마이크 앞에 앉았다. 고른 곡은 '꿈이여! 유메요(ゆめよ)"였다. 재일교포 2세인 내가 처음 부조(父-祖)의 땅 한국 신라의 도읍 경주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추억 깊은 곡이다.
멜로디가 스튜디오 안을 흐르기 시작했다. "고향"을 만났을 때의 나의 심정과 그 정경을 이야기하면서 어느새 나는 눈물로 목이 메어 있었다. "아, 모처럼 방송했는데 실패해서..." 낙담하면서 다음 주 방송국에 간 나에게 편지 뭉치가 기다리 있었다.
"눈물의 방송"에 감동했다는 많은 젊은이들로부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경남씨와 이야기하다'라고 하는 나의 프로그램이 생겨났다(지금은 종료). 포기하지 않고 있으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1996 04 25)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5. 나에게는 예쁜 입이 있다!
다소 어색하지만 괜히 피식 웃어서일까,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학창시절에는 박경남 스마일로도 불렸다. 특히 카메라를 앞에 두면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웃는다.
웃는 않는 얼굴 사진은 "웃지 말라"고 주의를 받은 증명사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인 것 같다. 웃는 결과를 낳은 원인을 나의 "외모와의 만남"으로 생각해 보았다. 모두가 태어날 때 '이런 모습으로 해 주세요'라고 자신의 얼굴을 선택하지 못한다.
권팔 아버지는 60세가 넘어서도 거리에서 "이런 미남자 본 적 없다"며 낯선 여자가 따라올 정도의 상남자(라고들 한다). 사요(小夜) 어머니는 지금이야 이빨 빠진 할머니이지만 내가 어린 시절 여학생들에게 "어머나, 기시 게이코(*岸恵子-きしけいこ여배우1932~)다" 라고 하며 달려와 안기던 소문난 미인이었다.
그런데 ‘미남자’와 ‘미녀’를 결합하면 ‘잘 생긴 아이’가 생길 법도 하지만 ‘유전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열성 유전(?) 견본품인지 부모님의 각 부분을 ○×로 구분하자면, 머리, 얼굴 윤곽, 눈, 코 등은 나에게는 모두 신기할 정도의 ×표를 모아 이루어져 있다.
초등학교 때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용모가 변변찮음을 한탄하며 어떻게든 고쳐보고 싶다며 쓸데없는 저항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코(콧뼈가 조금 솟아 있다)를 어머니처럼 곧게 하기 위해 멍청한 나는 망치로 코를 낮추려고 두드려 보앟지만 낮아지기는 커녕 빨갛게 부어오르기만 했다(정말 위험한 일을).
그런데 그 아버지의 코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과음한 상태에서 면도를 하려고 했는지 면도칼의 손잡이를 잘못 다루어 코의 일부가 싹둑 잘려 버렸다(?)고 한다. 모두가 "어머, 코가 떨어졌다"며 박장대소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떨어진 코를 얼른 주워 제자리에 붙였다고 한다.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거짓말 같은 진짜 이야기다. 아버지의 코에 있는 기운 자국에 관한 이런 사유를 들은 이후, 나는 코를 낮추려고 하는 코 때리기를 그만두었다. 얼굴 한가운데에 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외모에 전혀 자신이 없던 내가 번쩍 눈을 뜬 것은 어머니의 말 한마디였다. 열두세 살의 피어나기 시작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위로해 주었다(결코 배려 없는 심한 말투이긴 하지만).
"가엽게도 모두 부모의 나쁜 점만 물려받아서 진짜 볼수록 이상한 얼굴이네. 그런데 입 부분만은 귀엽게 생겼네."라고.
그렇다! 아버지의 작은 입과 어머니의 큰 입이 중화되면서 내 입은 이상적인 크기와 상태가 되어 있지 않은가. 나의 매력 포인트는 입이다! 나에게는 입이 있어! 이후 유일한 자랑의 입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늘 입가에 웃음을 띠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함께 있으면 즐겁고 분위기가 밝아진다고 자석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에게만 있는 '아름다운 부분'이 반드시 하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갖기만 하면 그 자신감이 금상첨화가 되어 생생하고 멋지게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1996 05 02)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6. 기운을 차리게 한 한마디.
"이래서는 안 돼. 생명력이 약해지고 있다.” 지난해 여름의 일이다. 절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감기 기운이 있긴 했지만 단순히 감기때문만 아니라 심신이 피곤하고 나르지근하고, 힘을 내려고 애써 보아도 활력, 기력, 의욕 등의 "기운"이 조금도 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대학생 때도 비슷한 상태에 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니나 다를까 차에 치여 생명력이 풍전등화 같이 꺼져버릴 것 같았던 적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 버리는 나는(타고난 운명때문일까), 가해 운전사가 은행 강도를 하고...라는 그때의 기상천외한 후일담도 들어간 에세이집("두둥실 달이 솟아 오르면")을, 마침 간행하기 위해, 최종 체크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체험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발이 땅에 붙어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고 의식도 허공을 날 뿐이다. 그런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 주간지 취재로 급히 나가사키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무려 당일치기 강행군으로! 혹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비장감마저 느끼며, 나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도쿄를 떠났다.
목적지는 나가사키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운젠후겐다케(*雲仙普賢岳:화산폭발)의 피해지 근처의 미즈에초(瑞恵町)이다. 이곳에서 피재지의 개들을 돌보고 있는 수의사 미야자키 아키요시(宮崎昭義46세) 씨를 찾아갔다.
안내를 받고 미야자키 씨 댁 거실에 앉은 내 눈앞에, 시원한 수박과 대접에 듬뿍 담긴 사라우동(*나가사키전통우동) 등이 가득 놓였다. "먼 곳을 오셨습니다. 자, 어서 많이 드세요." 중키에 다부진 미야자키 씨의 함박웃음이 그 커다란 대접과 어울린다.
소와 돼지 전문 의사인 미야자키 씨는 처음에 두세 마리라면 맡아 볼까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끌려온 것은 아홉 마리나 돼었다. 후겐다케의 분화는 전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개는 무려 스물일곱 마리나 늘어나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오두막 개집으로 향했다. 미야자키 씨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개들은 일제히 꼬리를 흔들며 엄청난 기세로 튀어나왔다. 개들은 크게 소리를 내며 크게 환영하다가 그친다. 미야자키 씨는 일일이 개에게 말을 걸고 끌어안아 주었기때문이다.
호스로 물을 내리며 오두막 개집 청소를 시작한 미야자키 씨의 이마에서는 금세 줄줄 땀이 쏟아지며 티셔츠가 땀에 젖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본업 중간중간 돌본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산책, 먹이 주기, 청소 등을 부부가 함께 하는 대분투의 매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봉사활동 차원이다. 개를 처분하라는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미야자키 씨는 이 후 비록 더 많이 늘어나더라도 어느 개에게나 입양인을 찾아줄 때까지는 열심히 돌보겠다고, 아무런 꺼리낌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모두 생명을 가졌기때문에 당연하다." 고 하는 그 한마디의 신선함에 깜짝 놀란다. 그렇다. 이런 사고는 생명에 대한 정성, 빛남, 무게 등을 떠올리게하는 무엇보다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인데도 사람들은 그 기본을 잊기 쉽다.
"친척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놀러와요."라는 미소의 배웅을 받고 귀로에 오른 나는 어느새 온몸에 기운이 차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의 생명력을 멋지게 회복시켜준 미야자키 씨와의 잊지 못할 만남이다. (1996 05 09)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7 인생을 바꾼 종이조각 눈보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박경남이라는 본명 외에 "아라이 게이코(新井慶子)" 라고 불렸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본명이 역시 좋지 않을까, 하고 '박경남(朴慶南)'으로 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명을 사용하게 되어 좋았던 것 중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왠지 갑자기 인기인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아라이 게이코였을 때는 비참했다. 항상 짝사랑하고 관심을 가졌던 남자애는 으레 내 절친한 친구를 좋아하는 등 괴로운 경험만 했다.
그런데 이릉글자 획수가 좋았는지, 아니면 경남이라는 이름의 울림이 좋았는지 이름을 박경남으로 되돌리자마자 사태가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갑자기 예쁘게 변신한 것도, 물론 요염해진 것도 결코 아니다).
교토에서의 대학 시절, 내가 호의을 보일 때마다 "어떤 실수라도 한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어, 인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멍해질 뿐이었다.
그런 어떤 실수가 낳은 에피소드를, 얼마 전, 뜻하지 않게 십여 년 만에 만난 당시 친구가 들려주어 너무 깜짝 놀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종이 조각 눈보라 기억해?"
무슨 말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아니, 내 인생을 바꾼 중요한 일이었는데 정말 기억이 안 나!" 꽤 맥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 "종이조각 눈보라 사건"의 전말을 말해주었다.
같은 대학 동아리 활동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그로부터 교제를 신청받은 것은 축제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OK해줄 때까지 하숙집 앞에서 주저앉아 기다리겠다며 어지를 부리는 그에게 "너를 친구로 여기고 대하고 있는 거야"라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뜻 포기해 주었고, 내 기억은 거기서 뚝 끊어져 있다. 그가 말해준 후일담에 따르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 말에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고 대학 내에서의 복잡한 사정도 더해져 대학을 그만둘 결심을 했다고 한다.
집에서도 나오고 도쿄에서 새출발을 할 각오로 교토역으로 향하기 위해 짐을 들고 산조 게이한(三条京阪)역에 서 있는데 그곳으로 마침 내가 다가오고 있었다고 한다. 넓은 교토에서 대단한 우연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뭐 하고 있는 거야?" 라고 가볍게 말을 건넨 것 같다(이 사실을 잊어 버릴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출현에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도쿄행 학생 할인권을 나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나는 그 할인권 종이를 그의 손에서 왈깍 빼앗아 그가 말릴 틈도 없이 잘게 짝짝 찢더니 도쿄에 가는 것 그만두라며 그 자잘한 종이 조각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위를 향해 힘껏 흩날려 버렸다고 한다.
그 종이조각은 강한 바람을 타고 훨훨 종이 눈보라가 되어 하늘로 빨려 들어가듯 화려하게 날아올라 갔다. "그럼 안녕!" 라고 말하고 내가 떠난 후, 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후 그는 대학으로 돌아왔고, 졸업 후에는 가업을 이어 이제 어엿한 청년 사업가다. 그때의 종이조각 눈보라가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절절히 술회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나와의 산조 게이한역에서의 만남은 귀중한 것이 되었다.
사람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소중한 ‘만남’을 어느 순간에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악연에 떨면서 신기함도 느끼게 되는 그와의 재회였다. (1996 05 1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8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8. 운명감정사 대선생의 충격요법
낮에 집에 있으면 방문판매하는 사람이 자주 찾아온다. 어느 화창한 오후, 운세를 봐준다는 젊은 여성이 현관문에 서있다. 평소에는 웃으며 거절해버리는데 순박하고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려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그녀는 내 손금, 이름 획수 등을 운운하며 미간에 주름을 지어가며 문제점을 차근차근 말한다. 그말에 "그래요 그래 과연그렇군요...."라면셔 맞장구를 치며 웃어대는 나에게 그녀는 김이 빠진 듯했다.
"정말로, 밝은 성격을 가지신 분이시네요." 라고 말하는 동그란 안경 속 그녀의 눈도 동그랗다. "살다 보면 힘든 일, 슬픈 일, 여러 가지 일이 많지만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가야죠. 운명은 내 힘으로 바꾸는 것이니까."
내 말에 "그렇죠..."라며 고개를 깊이 끄덕이던 그녀는 비로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장을 팔겠다는 목적도 잊고 돌아갔다.
나와 "운명감정사"의 첫 만남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더 다른 대학 청강생을 한 뒤 나는 고향으로 끌려갔다. 유교의 화신 같은 아버지는 여자가 일 따위를 해서 자립하려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시집가서 남자를 따르는 것이 제일이라고 연일 나를 몰아세웠다.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는 나에 대한 아버지의 짜증이 폭발하는 것은 대부분 밥 먹을 때이다. 때문에 제대로 끼니를 먹지 못해 점점 말라가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이러다 딸이 죽을 지 모르니 살을 좀 찌운 후 다시 (괴롭힘을) 시작하자고 말하는 별난 아버지다. 그런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만큼 괴롭혀 두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모의 사랑이다!" (과연, 그렇군요).
덕분에 확실히 웬만한 것은 헤쳐나가는 인내력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어떤 사람도, 아버지와 비교하면 온화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건 지금의 생각이고, 그 당시에는 지옥의 나날. 그래서 견디기 힘들었던 나와 어머니는 신문 광고란의 모든 고민해결이라는 상담코너에 시험 삼아 매달려 보기로 했다.
근처 여관의 넓은 방 하나에 자리 잡은 그 훌륭한 선생님 앞에 나는 얌전하게 앉았다. 생년월일, 관상 등을 감정한 뒤 60대 중반 정도의 남성 감정사는 무겁게 선언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밖에 길이 없습니다. 자살하거나 미쳐버리거나 하는 두 길이 있습니다."
조상들의 응보를 풀기위해, 굿을 해야 함으로 큰돈이 필요하다며 이어지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순간 분노와 투지가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너무하다, 너무해. 이 세상에 태어나 여기까지 살아온 내가 너무 불쌍하다. 단 한 번뿐인 모처럼의 인생인데, 어떻게 하든지 내 손으로 행복을 만들어아 하겠다> 라는 투지다.
굳게 결심한 나였다. 설령 여러 악연으로 가득 차 비참하기 짝이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력은 절대적으로 그보다 강하다. 어떤 숙명이라도 반드시 바꿀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깊이 일깨워준 것은 감정사 대선생님의 충격요법(?)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하라주쿠에서 "곧 베스트셀러가 될 거예요" 라고 말해준 여성 감정사의 매력적이고 빛나는 선전에 한번더 믿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1996 05 2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9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09. 에이(永) 선생님 죄송합니다.
"동그라미나 네모가 많아서 한글은 꽤 어려울 것 같네요." "아니요, 조금도. 아주 합리적인 문자로 읽는 방법만이라면 몇 시간이면 됩니다. 일본어와 어순이 거의 같으니 이렇게 배우기 쉬운 말은 없어요."
한글에 관해서 이런 대화를 자주 한다. 자신감 있게 대답하고 있는 자신에게 다소 민망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일본 학교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학습하지 않으면 우리말(한국어)이 몸에 배지 않는다. 집에서 부모가 사용했기 때문에 간단한 내용이라면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지만,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역시 어렵다.
내가 한글과 제대로 만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같은 재일교포 학생들에게 권유받아 공부를 시작했다. 열 개의 모음과 열아홉 개의 자음으로 조립된 기호 같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 한글로 내 이름을 쓸 수 있었을 때는 묘하게 자랑스러워 공책에 여러 번 적어 보았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간판이나 안내서를 읽을 수 있고 서툴러도 말이 통했을 때는 기뻤다. 모국어와의 만남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덜렁대기 좋아하고 부족한 나는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담이 많았다. 라디오에서의 개인적인 체험을 정리한 "꿈이여!"의 출판 파티에서, 참석자에게 선물한 사인을 한 책에 "꿈이여"라는 한글의 일본식 발음과 소리의 울림이 비슷한 "金이여"라고 써 버렸다. 나중에 잘못을 지적받고 책을 선물한 모두에게 바르게 쓴 "夢よ”라고 쓴 스티커를 보내야 했다.
"이것(‘꿈이여’)을 '금(金)이여' 위에 붙이면 현실(금) 위에 이상(꿈)이 있고, 이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곁들였다.
최근 작품인 "두둥실 달이 떠오르면" 때는 제목을 한글로 사인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달과 닭의 철자가 가까워 무심코 "두둥실 닭이 떠오르면"으로 실수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또 실수를 하고 말았다. "두둥실..."로 세이큐(青丘)문화장려상이라는 상을 받았는데, 에이 로쿠스케(*永六輔
1933~2016 방송작가) 씨가 NHK의 "뉴스의 시점"에서 그 이야기와 함께 한국어로 축하의 말을 해 주셨다.
그 축하의 한국어를 에이 씨에게 미리 가르쳐 줄 때 "유(ユ)"를 "요(ヨ)" 라고 종이에 잘못 썼고, 나를 믿은 에이 씨는 TV 카메라를 향해 그대로 "경남 씨, 쵹하합니다" 라고 여러 번이나 말해버린 것이다. 정말 에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음날, 나는 몸져누워 버렸다.
이런 내 실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의 부탁을 받고 다음 주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덕분에 기초부터 제대로 복습할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도움이다. 자, 힘내 보자. (1996 05 3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0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0. 친구 나라의 평화를 바란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언덕길을 자전거로 달리면 3분 정도 거리에 "앙코르-톰"이라는 캄보디아 레스토랑이 있다. (JR 도쿄 마치다역 남쪽 출구 도보 1분 <0427 44 4354> 멋진 가게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들려 보세요)
내가 처음으로 그 가게 문을 밀고 안을 조심조심 들여다본 것은 6년 전의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라는 리드미컬하고 통통 튀는 목소리에 이끌려 한 발을 들여놓자 커다란 눈동자의 캄보디아 여성이 온 얼굴을 미소로 가득 채우며 반겨주었다.
"경남 씨? 그럼 경짱이라 부르면 되겠네요. 저의 이름은 세탈린입니다. 키가 작으니까 세탈린(*背が足りない세가타리나이)으로 기억해 주세요.” 그게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고, "이렇게 밝고, 활기찬 사람 본 적 없다." 고 서로가 같은 인상을 품은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넉살좋은 "세탈린과 경짱" 콤비가 시작된 것이다.
세탈린은 19년 전 문부성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와, 대학원을 수료 후 얼마 후 레스토랑을 열었다. 나와 만난 것은 개점 2년이 지나 본궤도에 오를 무렵이었다. 나도 일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첫발을 뗄 무렵으로, 분명 만날 때마다 "힘내자" 라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번역, 통역, 교사, 강연 등으로 과도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그녀와 역시 일에 쫓기게 된 나의 시종일관 절묘한 콤비 모습은 아직도 공사 모두 이어지고 있다.
함께 강연하면 그녀는 공연장을 열광시키고 나는 울린다. 놀러 나가면 연계 플레이로 금세 취소석을 확보하는 등 그야말로 손발이 척척 맞는다.
어느 날 같은 신문지상에 우연히 다른 기사로 소개돼 두 사람의 얼굴 사진이 위아래로 나열된 것을 보고 "역시 콤비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우울하거나 기죽어 있을 때 앙코르 톰의 문만 열고 들어가면 세탈린의 미소를 만날 수 있다. 내 마음의 버팀목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세탈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일본에 온 이듬해 정변이 일어나 폴 포트 정권하에서 부모, 동생들의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는데, 친했던 친구들의 소식도 그때 끊겼다. 평소 내색도 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속 아픔을 접하며 말문이 막혔다.
모국을 걱정하며 함께 좋은 나라로 만들자고 다짐한 친구들은 사라졌지만 일본에는 경짱도 있어 다행이다라고 하는 그녀의 울먹임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눈물로 구겨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번에는 웃음이 그 뒤로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일본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세탈린은 조국 아이들에게 보낼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친구의 나라 캄보디아의 평화를 간절히 바란다.
(1996 06 06)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1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1. 왠지 눈물이 나온다.
"도쿄 비빔밥 클럽"은 키치죠지(吉祥寺)에 있는 작은 라이브 하우스이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도착해 봤지만 남은 것은 앙코르곡뿐이었다. 그런데 장내는 만원이었다. 뒷쪽에서서 까치발을 하여도 앞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연장 안에 가득한 열기와 여운을 감싸듯 귀에 익은 멜로디가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장고(조선 전통의 긴북)에 리듬을 맞추면서 변인자 씨의 활기찬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재일교포 2세인 그녀가 부르는 아리랑에 제대로 한국의 흙냄새가 풍겨온다. 시야가 가려진 만큼 소리가 온몸으로 스며들어 가슴에 뜨거운 것을 느끼는 순간 벌써 눈물이 내 뺨을 적시고 있었다.
이별의 애절함을 띤 아리랑 곡은 조선을 대표하는 민요로 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가사나 멜로디가 다른 아리랑이 각 지방마다 25개 정도는 된다고 한다.
언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내 몸속 깊이 파고든 이 곡을 처음 사람들 앞에서 부른 것은 4년 전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스크자키를 할 때였다.
아리랑을 모르는 젊은 청취자로부터의 "경남 씨, 한 번 불러주세요"라는 요청에 응해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불렀다. 방송 후 소감을 담은 많은 엽서가 도착했는데 그중에 "듣다가 울컥했어요." 라는 대학생이 보낸 것도 있었다.
어느 날 언론인 구로다 기요시(*黒田 清1931~2000)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에 가본 적도 없는데 아리랑을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쏟아진다고 해서 놀랐다. 그런데 얼마 전 처음 보는 50대 여성(일본인)으로부터도 "이상하게도 나도 그래요"라고 같은 말을 들었다. 아리랑의 멜로디는 왠지 사람을 울린다.
두 달전 쯤 전에 오키나와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방청객이었던 오키나와의 젊은 여성으로부터 훗날 편지를 받았다. 내용을 조금 발췌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역사를 들으면 그 현장을 본 적도 없는 제가 눈물이 나고 감동이랄까, 그냥 애틋해지는 건 왜일까요. 슬퍼서라기 보다 까닭모르게, 가슴이 울컥해 집니다."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배우고 싶다고 하었다.
조리 있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가슴을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사람끼리의 연결은, 더 좋다. 라이브 출연 밴드의 이름은 "도쿄 비빔밥 클럽"이다. 밥과 나물 등을 비벼 먹는 비빔밥, 이름 그대로 일본인과 재일교포 등의 비빔법과 같은 밴드다.
인자 씨의 절절한 아리랑에 또 다른 보컬 박보 씨가 부르는 동요 "유야케 고야케(*夕焼け小焼け-일본 전래 동요)"의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겹쳐지면서 두 개의 절묘한 화음이 만원 공연장 전체를 상쾌하게 뒤덮고 있었다.
(1993 06 13)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2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2. 어머니가 사라져 버렸다.
부모와 자식은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거지까지 닮는 것일까. "유전의 법칙"의 위력이라는 것이야말로 위대하다.
예전에는 이상적인 여성이라고까지 추앙받았던 사요짱(어머니)이었지만, 내면을 보면 허당이고 덜렁대기 좋아하는 성격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대로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라며 아버지는 늘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장사를 하는 우리 집에 무엇보다 소중한 도장, 통장 종류까지 어머니 손에 닿으면 금세 사라진다. 항상 엄마가 얼빠진 짓을 할 때마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곤 했다.
한 번은 어머니 자신이 사라져 버린 난처한(!) 일도 있었다. 내가 중학생 때였다. 오사카에서 돗토리의 막내딸(어머니) 집에 놀러온 할머니를 역까지 배웅하러 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사카행 특급은 오전 10시 20분 출발이었다.
집안의 분주함과 아버지의 까칠함을 숙지하고 있는 어머니인데, 점심을 지나 저녁이 되어도 실종된 채 시간만 지나갔다. "혹시 유괴, 아니면 사고?" 나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었다.
평소엔 내내 호통만 치던 아버지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고 바쁘게 혼자 분주하게 일했다. 그 어느 때보다 평정한 모습이 오히려 내심의 당황스러움을 나타낸다. 우리의 걱정이 정점에 달했던 밤 열 시가 넘어서야 어머니는 돌아왔다. 다다미 위에 몸을 내던지며 "아, 힘들어"라는 한마디를 했다.
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한다. 아침에 "잠깐 갔다 올게"라며 집을 나간 지 열두 시간은 족히 지난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걱정했지만, 무사한 얼굴을 보자마자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울컥 솟아오른다.
그런 딸의 화난 얼굴 따위는 모른 채하고 축 늘어진 사요짱(엄마)은 "나중 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듯이 어이없게 공백의 12시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짐을 들고 할머니를 지정석에 앉힌 것까지는 좋았지만 할머니와 수다를 떨던 중 그만 열차가 출발해 버려 내릴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어떻게든 내려주세요. 우리 남편은 무서워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나요"라며 차장에게 매달려 봤지만 들어줄 리도 없다. 특급열차 이기 때문에 다음 정차는 돗토리에서 멀리 떨어진 오사카 쪽 역이었다. 지갑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어머니는(할머니도 잔돈밖에 없었다) 우연히 같은 차량에 탑승한 지인에게 돈을 빌려 겨우 하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또 엄마다운 일이 터졌다. 돗토리로 돌아갈 생각으로 환승한 전철을 잘못 타서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오카야마였다.
멍하니 서 있었지만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 우리 돗토리를 목표로!" 하고 마음을 추스려 전철을 갈아타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열화처럼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어머니를 위해 말없이 우동을 만들기 시작했다(아버지는 요리를 잘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허당 엄마와 오랜 시간 살아온 탓인지 나도 엄마 못지않은 허당 2세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도 역까지 황급히 자전거를 타고 나가 전철을 타려는데 오른발에 베이지색 로우힐, 왼발에는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이 스쳤다. 그 엄마에 그딸이라더니. (1996 06 20)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3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3. "물건 감추는 마귀할배"가 있다!?
"어머, 큰일났어." 어머니가 소리칠 때마다 "또야, 또 뭐가 없어졌어?" 라고 생각하곤 했다. 뭔가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는 어머니를 위해 어릴 때부터 늘 집안 구석구석 물건 찾기를 도와왔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으로 고향을 멀리 떠난 지금도 나는 그 물건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마감을 앞두고 원고를 쓰려고 하면 필요한 자료, 테이프 종류가 꼭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김없이 물건 찾기부터 시작하게 된다. 종일 온 집안을 뒤적이다가 겨우 찾아 일에 착수하려 할 무렵에는 녹초가 되어 연필을 잡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다.
생각해 보면 귀중한 인생의 절반 정도의 시간은 물건 찾는 데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전까지 거기에 있었을 것이 한눈 판 틈에 왠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마귀의 소행 같다.
목걸이, 시계, 지갑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을까. 좀(꽤) 기상천외한 발상이지만 집 안 어딘가에 잡귀신 같은 "물건 감추는 할배"가 있어, 잇히히 하면서 닥치는 대로 숨기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내 임종시의 머리맡에는 그 할배가 불쓱 나타나, 지금까지의 전리품을 수납한 큰 골판지 상자를 "자, 여기 있다!"라고 하며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하는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게 한다(추억 깊은 수많은 물건을 보고는 그리움과 아쉬움에, 죽음을 앞두고 누어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는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상자에는 분명 집 열쇠가 몇 개는 들어 있겠지.
그만큼 자주 열쇠가 행방불명이 되곤하는데, 바로 얼마 전의 일로 현관문을 나서는데 덩렁대는 집주인을 대신해 조심하지 않는다고 걱정했는지, 저절로 문이 잠겨 버렸다. 덕분에 도둑밎을 염려는 없어졌지만 나까지 출입이 안 된다. 외출에서 돌아와 어쩔 수 없이 창문으로 넘어가려하고 있는데 함께 온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뭐 하고 있어?" 하고 깜짝 놀랐다.
설명을 들은 친구는 즉시 열쇠수리사를 불러 주어(친절한 친구입니다), 떳떳하게 현관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나니까 어쨌든 여러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 이 글도 2B 연필로 썼지만 필수품인 지우개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지 하고 있었는데, 때맞추어 택배가, 도착했다!! 다음 출판을 위한 것으로 출판사에서 보내온 원고지 꾸러미 속에 덤처럼 지우개가 세개나 함께 들어 있었다. 마음씨 좋은 편집실의 젊은 여성 모리 씨의 배려다. 아마 경남씨 곤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아 깜짝 놀랐고 또 고맙다.
모자람이 많은 만큼, 주변 사람의 도음을 많이 받게 된다(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허당짓을 할 때마다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은 물건이 아님을 깨닫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막 교체한 새 열쇠가 벌써 보이지 않는다. 아, 또 마귀할배의 저주일까.
(1993 06 27)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4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4. 증오, 편견을 녹이다
어느 날 별 생각없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에이 로쿠스케(*永六輔 방송작가 1933~ 2016)씨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귀에 들어왔다.
"일본인은 수를 세는 하나, 둘, 셋을 영어나 프랑스어로는 곧잘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이웃 나라(*한국)의 수 세는 법은 모르는군요. 저도 그랬는데 이상하지 않아요? 일본어 히토츠, 후타츠, 미츠에 해당하는 한국말은 하나, 도울, 세에라고 하고 이치, 니, 산은 이루, 이, 사무 라고 하거든요."
정말 그렇다. 평소에 접하는 기본적인 것부터, 이웃 나라에 접근해 보려는 에이 로쿠스케씨의 생각에 공감이 갔다. 인연이란 고마운 것이다. 이 에이로쿠스케 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게 되었다.
졸작 "두둥실 달이 뜨면"에는 관동대지진(*1923년 9월) 때 페닉 상황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난동을 부리려 한다”는 유언비어에 현혹된 일본인 폭도들로부터의 목숨을 걸고 조선인 300여 명의 생명을 지켜낸 요코하마 쓰루미 경찰서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 오카와 츠네키치(*大川常吉 1877~ 1940) 서장은 유언비어를 증명하기 위해 한 되나 되는 우물울을 천 명이나 되는 폭도들 앞에서 마셨다고 한다. 이 오카와 씨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소개하려 하는데, 에이 씨는 내가 이야기도 하기 전부터 이미 눈가가 눈물에 졎어 있었다.
울컥 가슴이 뭉클해져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많은 조선인이 살해된 그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에이 씨인데도 시대를 초월한 아픔을 간직한 듯했다. 훗날 나는 아사쿠사에 있는
"사이존지(最尊寺)의 한 방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다.
한 달에 한 번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여 근황 보고를 겸해 만담을 즐기는 모임이라고 한다. 이 절 주지의 아드님인 에이 씨의 참석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쓰기보다 말하는 것을 단연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화려한 무대다.
덜렁대는 나는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붉은 천이 깔린 한 단계 솟아오른 고좌에 앉았다. 금사은사로 수놓은 눈에 띄는 한복 차림을 한 나의 첫마디가 "저가 마치 히나마츠리의 공주 같네요"라고 말하자 모두들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타고난 개그맨(?)을 자처하는 나도 싱글벙글이다.
관동대지진 때의 오카와 씨의 이야기를 하고 한복을 설명하며 나의 첫 무대는 무사히 끝났다. 출구에 서 있자니 부드러운 표정을 한 노인이 "경남 씨, 정말 미안하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관동대지진 직후 눈앞에서 조선인 대학생이 살해될 뻔한 것을 당시 소년이었던 그 사람은 무서워서 몸이 움츠러들어 도울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에이 씨의 삼촌 혼다 테루오 씨다. 그는 가메아리(*亀有: 東京都葛飾区)에 있는 렌코지(蓮光寺)의 주지를 맡고 있다.
그때의 일을 나에게 사과해 주시는 것이다. 그 대학생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재빨리 그를 감싸안아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역사의 틈을 메우고 증오하고 편견을 녹여나가는 것은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자연스럽고 솔직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역시 우리들인 것이다. (1993 07 04)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5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5. 기계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취미는 뭡니까?" 라는 물음에 당황하고 대답이 궁해 초조해져서인지 "그냥 멍하니 있는 거예요" 라고 얼빠진 말을 해버린다. ‘음악감상’ ‘독서’ ‘스포츠’... 따위 자신있게 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집에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서 그냥 앉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운동 부족에 군것질이 더해져 나날이 몸은 무거워져 간다. 글을 쓰는 것이 살을 빼는 작업이 되지 않고 살을 찌우는 것이다. 배를 만지며 "정신차려, 정신차려" 라고 말하는 요즘의 자신이 무섭다.
몸이 풍선처럼 불어나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에게 끌려가듯 얼마 전 마침내 스포츠 클럽이라는 것에 갔다. 지금 바로 등록하면 입회금이 공짜라는 등 접수 여성의 상냥한 응대에 이끌려 등록해 버렸지만, 바로 받게 된 오리엔티어링으로 초장부터 좌절하고 말았다.
후안무치하게도, 날씬한 트레이닝복에 몸(살덩이? )을 억지로 채워 넣은 나는, 강사라는 직함의 근육으로 단련된 남자로부터 용구 사용법 등의 설명을 들으며 지도를 받는다. 그런데 이게 뭐지! 넓은 공간에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제의 다양한 건강기구가 즐비해 있는 것을 보고는 딴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다.
"자, 이 위치에 앉아서... 박 선생님, 제대로 하세요!" 기구의 색과 서늘한 감촉 때문인지 치과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두리번거리다가 금방 꾸중을 듣고 만다.
러닝머신은 버튼 하나로 각도와 속도가 달라지며 지정 장소에 손가락을 놓으면 삐소리와 함께 맥박수와 에너지 소비량 등이 색상별로 표시된다. 러닝머신의 벨트 위에서 마냥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 예전에 키우던 햄스터로 보여 잠시 는을 팔고 말았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매뉴얼대로 묵묵히 기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대학생 정도의 남자와 젊음이 폭발하는 여자들이라는 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대로 아름다운 몸이 있는데 말이야. "걸어라, 걸어!" "전철에 앉지 말고, 서 있으면 돼!" 그런 쓸데없는 참견을, 그들의 귓가에 속삭여 버릴 것 같다.
게다가 요즘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 아래로 손을 뻗으면 물이 나오고 씼은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말려주기도 한다. 편리함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계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우리는 생체 본래의 힘을 약화시켜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내 몸에서 나는 목소리를 조용히 들으면 사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이고머니나 됐다, 됐어.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건강의 징표이다. 살아있음을 즐기는 것이 "취미"다. 멋지다. 그런 날이 계속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1993 07 11)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6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6. "오른팔 하나의 자유를"
만나서 좋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다시 알게 되었다. 매력적인 사람과의 만남은 인생의 묘미라고 해도 좋다. 처음엔 책으로 만났다. 후지카와 케이(*1949~)씨의 "건성으로(上の空)" (三五館)란 책에서였다. 사고로 목뼈가 부러져 경추를 손상당한 후지카와 씨가 6년에 거쳐 쓴 책이다.
쓴다고 해도 어깨 아래 감각은 전혀 없고 펜을 잡을 수도 없다. 작가 시이나 마코토(*椎名誠1944~)씨의 격려를 받아 구술로 먼저 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또 마지막에는 펜을 입에 물고 써 나갔다.
십여 년간 편집자였던 후지카와 씨인 만큼 테이프를 재생한 원고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쳐 정성껏 그야말로 뼈를 깎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을 이어붙여 겨우 완성한 혼신의 힘을 쏟은 한 권의 책이다.
후지카와 씨가 처한 상황은 매우 어렵다. 몸이 마비돼 움직이지 않는 만큼 통증이 없다면 몰라도 끊임없이 통증과 저림이 엄습한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의식의 80%는 몸의 통증 쪽을 향하고, 나머지 20%로 간신히 응대하기 때문에, 어느새 대응이 건성으로 되어 버린다고 한다.
책의 제목에 관심이 끈다. 나는 언제나 주의력이 산만하고 남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지만, 후지카와 씨에게 생기는 건성은 정말 괴로운 것이다. 또 후지카와 씨와 두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부인이 지병인 불면증이 심해져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에도 가슴 아프다.
이런 상황을 들으면 심각하고 무거운 투병기 같지만, 문구에서 풍겨오는 것은 신기할 정도로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뭉클한 유머와 위트가 가득하다.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을 소탈한 개사곡(*가사만 바꾼 노래)으로 멋지게 나타내 버리는 정신력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게 한다.
"거리감" 내가 좋아하는 말이야. 사람이든 물건이든 처지든 무엇이든 딱 좋은 거리감을 갖고 싶다고 평소 스스로 마음먹고 있지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후지카와 씨는 그 거리감의 달인인 것 같다. 질병, 자신, 주위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두기는 멋지다고 해도 좋겠다.
꽃다발을 들고 도쿄 아사야(阿佐谷)에 있는 후지카와 씨의 집을 방문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나에게,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맞이해 주어 깜짝 놀랐다. 후지카와 씨의 친절한 배려에 나는 긴장도 풀리고 평상심으로 돌아왔다.
한글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도 말입니다..."라고 수다가 멈추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휠체어 위의 후지카와 씨의 조용하고 상냥한 모습에 어느새 이쪽이 감싸여 간다. 힘든 상황일수록 사람은 진가를 알 수 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적어도 오른팔 하나의 자유를 원하지만 푸른 하늘 아래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면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다." 후지카와 씨의 글 속 말을 되새기며 귀로에 올랐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후지카와 씨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일까 하고 반문하면서. (1993 07 18)
●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7 (재일작가 박경남 1950년생)
제1장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
17. 함께 저고리 입던 친구.
도쿄시내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내 책을 읽은 것이 인연이 되어 친해진 여자가 신부였다. 신랑집은 아사쿠사(浅草)의 유명한 신발 가게를 하고 있으며, 신부집도 칸다(神田)의 오래된 가게를 하는 집안의 아가씨이다. 에도(江戸) 정서를 풍기며 화려한 잔치가 펼쳐졌다.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던 중 그녀의 간절한 희망으로 민족의상 한복을 입기로 했다. 신부의 친구 대표로 축사를 하는데 만장의 시선 속에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신경이 곤두선다. 한복 차림이 되면 나라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강심장인 나도 긴장이 된다.
요즘 강연 등으로 한복을 입을 기회가 많다. 그때 간단한 한복 강좌도 하게 된다. 위아래가 나누어져 있고 상의를 저고리, 하의를 치마라고 하며, 입고 벗는 것은 2, 3분이면 할 수 있으며 나이에 관계없이 선명하고 밝은 색의 옷감을 사용한다는 것과 신발은 고무신이라고 하며 산발 앞 끝이 뱃머리처럼 젖혀져 오른 모양이라는 것 등을 설명해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한복이 날개다."라고 생각하먼서 내가 입은 전통의상인 한복을 통하여 이웃나라 문화의 일면을 접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설명을 한다. 실제로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의 균형감과 완만한 선은 아름답다.
2년 전쯤 역시 책을 읽고 편지를 준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일본인인 그녀의 꿈이 한복을 입어 보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런 꿈이라면 간단하고 바로 실현할 수 있어요"라고 하며 가지고 있던 한복 한벌을 보내 주었다. 보내온 사진 속에서 살짝 수줍어하는 그녀의 한복 차림은 귀여웠다.
나에게도 그녀와 같은 꿈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모국에서 한복을 만들어 입는 것이다. 여권을 내기 어려워 오랫동안 포기했던 모국 방문이었지만 유방암을 앓았던 친구가 "내가 건강할 때 함께 당신의 모국을 가보고 싶다"는 말에 쫓기어 7년 전에야 그 꿈이 실현됐다.
서울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한복집에서 두 사람이 형형색색의 천 중에서 나는 분홍색, 친구는 와인 레드를 골라 만들었다(하루 이틀이면 된다). 여행 중 알게 된 한국 여성이 내 한복 모습을 보고 "잘 어울려요, 역시 한국인 같아요" 라고 말해줘서 너무 자랑스럽고 기뻤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친구와는 그 후에도 파티 등에서 그때의 한복을 함께 입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부모님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고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우정의 온 힘을 쏟아준 채 그녀는 암의 전이로 타계하고 말았다. 덕분에 즐거운 한국여행의 추억이 깃든 와인색 저고리와 함께 그녀를 배웅해 주었다. 하늘 위에서 그녀도 가끔 입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 7월은 그 절친 오시무라 케이코의 3주기이다.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싶다, 그리고 일본과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싶다던 그녀를 저고리 옷고름을 맬 때마다 떠올린다.
(1993 0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