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師品(법사품) 第十
4. 게송으로 거듭 밝히다
이 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도에 머물러서 자연의 지혜를 이루려면
항상 마땅히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는 사람을 항상 부지런히 공양할 지니라.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는 사람을 항상 부지런히 공양할 것이니라.' 했지마는
공양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가 직접 공부 왜 안하겠습니까.
그건 당연히 따르는 일이죠.
여기‘자연의 지혜’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거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도 본래 있는 것에 대한 발견인 것이고
또 이것은 조작된 지혜가 결코 아닙니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지혜라고 하는 것,
이것은 절대 조작된 지혜가 아닙니다.
자연의 지혜입니다.
본래 있는, 저절로 그러한 지혜!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無師智(무사지)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어떤 스승이 전해줬다, 전해 받았다, 이런 표현을
편의상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 주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無師智(무사지)죠.
스승 없는 지혜!
스승이 전해줄 수 없고 전해 받을 수도 없는 그런 지혜!
전해주기로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라후라 에게 주었을 것이고
사랑했던 부인이나 자기를 키워준 마하파자파티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얼른 달려가서 부왕에게 드렸을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죠.
無師智(무사지)고 自然智(자연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돼요.
우리들 자신 속에 이미 다 갖추고 있는 건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엇에 짓눌렸는지
탐 진 치 삼독과 온갖 업장과 관습에 그만 가려져서
그야말로 아주 밝고 뜨거운 태양이 있음에도 두꺼운 구름이 끼워 버리면
그만 춥고 어두운 겨울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 인연이 멀어서 잠깐 못 볼 뿐입니다.
그와 같이 정말 무사지! 자연지!
부처님의 지혜도 그와 같다 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위대성을 철저히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이것을 느끼고 깨달아가고 해야 이것이 진짜 불교지,
그렇지 않고 항상 어디 가서 매달리고 내달라고 조르고 부탁하고 이래서,
그저 청소나 해주고 품삯이나 조금 얻어오는 그런 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불교가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사회를 선도하는 대안으로서의 종교는 못되죠.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최소한도 전통불교, 정통불교에 있어서는 불교의 바른길을 제시해야 되고
또 최첨단 불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래서 늘 앞서가야 되죠.
불교 안에서도 앞서가는 가르침, 앞서가는 소견, 앞서 가는 지혜를 제시해야
불교도 살아남을 수가 있고 발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염화실과 인연 맺은 법우님들은 깊이 이해하셔서
모두가 법사가 되고 모두가 법사노릇을 적극적으로 하셨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 일체 지혜(一切智慧)를 빨리 얻으려면
여기 일체지도 앞에서 말한 자연지나, 무사지나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면 일체 것을 다 안다고 하는 뜻에서 일체지 이니까요.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고 또 받아 지니는 사람을 공양할 지니라.
받아 지니는 사람을 공양하고 위하고 공경 존중하는 일이나
또 직접 묘법연화경을 받아서 읽고 쓰고 외우고 남을 위해서 이야기 해주는
그런 일이나 같은 거죠.
‘나는 법화경 지닌 사람만 위하겠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닌 사람을 위하는 사람은
곧 지니기도 하고 공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보면 분별해서 얘기 하는 것 같지만 내용은 하나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알라.
그는 부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얼마나 좋습니까?
어릴 때 선생님께 작은 심부름 한 번 해드린 것이
두고두고 거의 몇 달 흐뭇한 일이고 친구들에게 자랑거리였듯이
아무리 우리가 성장해서 성인(成人)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면 이건 정말 자랑꺼리입니다.
가문의 영광이죠.
중생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사람이니라.
이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는 모든 사람들은 청정한 국토를 버리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여기에 태어난 것이니라.
좋은데 얼마든지 가서 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온갖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되고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은 현실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하여
바른 삶을 제시하고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제시하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일깨워 주는 그런 일을 하려고
‘여기에 태어난 것이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태어났다고 칩시다.
모르고 태어났어도 이러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 하셔야 합니다.
불교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무런 목적 없이 ‘어쩌다 보니까 왔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하해서 설명할 수야 없지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마음껏 위해 줘야지요.
그리고 모르지 않습니까? 사실은 전생에 그런 원력을 세우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력을 기억 못하기 때문에 모를 뿐이지 원력을 세우고 왔을 거란 말입니다.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여기에 태어난 것이니라.”
언젠가도 말씀 드렸나요?
성철스님께서 구산스님이 열반 하셨을 때
“구산스님 지옥 가시요” 이렇게 조사를 써서 보낸 거죠.
가장 친한 도반이 죽었는데 지옥 가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런데서 멋지게 밝혀졌지요!
“도가 높으신 당신이 지옥 안가면
누가 지옥에 가서 지옥 중생을 구제 하겠습니까?”
그것은 내용을 알고 보면 극찬의 말씀입니다.
지옥에 가서 지옥에 빠지지 아니하고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은
아주 힘들어요.
그 나름대로 자기들의 업이 너무 짙어서 지옥 갔는데
그런 사람들을 돌이킨다는 것은 이건 쉬운 일이 아니 예요.
그런데 ‘지옥 가서 그런 사람들을 제도 하십시요.’ 하는 그런 의미니까
이건 도반을 위해도 그렇게 위할 수가 없는 거죠.
여기도 보면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여기에 태어난 것이다.”
좋은 국토에 가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구산큰스님께서 얼마든지 극락 아니라,
극락보다 열배 더 좋은 국토에 태어나실 수 있지요.
그렇지만 지옥에 가셔서 지옥 중생을 제도 하셔야지.
또 스님들이 열반 하시면 그 축원문에
速換娑婆(속환사바) 빨리 이 사바세계에 돌아오십시오.
往生極樂之大願(왕생극락지대원) 이런 표현 아니 해요.
스님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좀 사람을 차별하는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 신도들에게는 ‘극락에 가십시오.’
‘고생스럽게 살았으니까 극락에 가십시오.’
그것도 좋게 해석하면 좋은 축원 입니다.
그런데 정작 스님들을 축원할 때는 극락에 가란 말 절대 안 써요.
“사바세계에 오십시오” 이래요.
이 아주 희로애락과 온갖 생활고로 찌들려 있고
전쟁터와 같은 매일 시시비비와 우여곡절이 들끓는 여기에 다시 오라고 해요.
빨리 와서 이러한 세상을 평정 시키고 제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속환사바’ 사바세계로 빨리 오시라고 합니다.
“빨리 시바세계에 오셔서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축원합니다.
의미 있는 축원이니까 들어둘 필요가 있죠.
그렇게 일반인들에게 하는 축원과, 스님들께 하는 축원이 다릅니다.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는 모든 사람들은
청정한 국토를 버리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여기에 태어난 것이니라.”
이건 우리가 축원하지 않더라도 이미 “속환사바”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에 빨리 오셔서 중생들을 제도 하십시요." 하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태어나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태어나서
이 나쁜 세상에서 최상의 법을 널리 연설하리라.
‘최상의 법,’ 바로 법화경이죠.
응당히 하늘의 꽃과 하늘의 향과 하늘의 훌륭한 의복과
하늘의 아름다운 보배로써
이건 저기 하늘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뜻이 아니고 경전에서 늘 그렇습니다.
'최상의 꽃과 최상의 향과 최상의 훌륭한 의복과 최상의 아름다운 보배로써'
이런 뜻 이예요.
법을 설하는 사람에게 공양할 것이니라.
우리가 왜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님께 올리려면 과일도 최고급 과일을 사고,
모든 올릴 거리를 적게 사도 가장 깨끗하고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사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죠.
내가 열반한 뒤 나쁜 세상에서 이 경전을 받아 지니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합장하고 예경(禮敬)하기를 세존께 공양하듯이 하여야 하느니라.
‘세존께, 부처님 앞에 공양 하듯이 공양해야 한다.’
이것은 법화경 빽으로 공양 받는 건 아니지요.
사실은 내가 늘 말씀 드렸듯이 행복의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길 때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바로 이겁니다.
그래서 '세존께 공양하듯이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모든 사람을 세존처럼, 부처님처럼 받들고 공양하고 섬기자." 하는 그런 이야기죠.
훌륭한 반찬과 맛좋은 진수와 갖가지 의복으로 이런 불자에게 공양하고
잠깐이라도 그 법문을 들을지니라.
진리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죠.
만일 이 다음 세상에 이 경을 받아 지니는 사람은
내가 그를 인간에 보내어 여래의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니라.
저를 포함해서 이 시간 법화경 공부를 하는 모든 분들,
또 그 외에 다른 장소 다른 인연으로 법화경 공부를 하는 모든 분들은
전부 여래께서 인간 세상에 우리를 보내어서
부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이구 어쩌다보니까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렇게 해석할 필요 없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비하 합니까.
자기 값은 자기가 매기는 거예요.
부처님의 안목으로 본다면 어마어마한 값 인데,
그것은 덮어 놓고라도 일반적으로라도 인간의 값은 인간이 매기는 것이고
또 특히 자기의 값은 자기가 매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아끼고 존중할 때 딴 사람도 나를 아끼고 존중하게 돼 있죠.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천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을 천시하고 만만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상식적인 이치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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