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6월 9일 월요일]
《계갑일록 癸甲日錄 만력 30년 계미년 1583년 8월
숙헌 문하생들, 매화에게, 사초 몰래 보기, 관비 옥비, 서애 발문 》
○ 1583년 8월 5일 (갑인). 맑다. 숙헌의 문하에 출입하는 유생 중에 해주(海州)에 사는 박여룡(朴汝龍)과 서울에 사는 유홍(兪泓)의 아들 유대진(兪大進) 등이 마음대로 반궁(泮宮 성균관)에 들어가서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무리는 쫓아내고 동류들을 몰아서 상소하였는데, 상사(上舍)로는 겨우 30명밖에 안 된다고 한다. 생원(生員) 이귀(李貴)는 광질(狂疾)이 났다가 겨우 나았는데, 그는 밤낮으로 친분이 있는 여러 학생의 집에 가서 나올 것을 애걸하여 이 일을 만들었다고 하니, 코웃음을 치지 않는 이가 없다.
[팔경별첨] 이귀는 1623년 능양군 이종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주동자다. 젊어서부터 일을 꾸미는 술수에 능했음을 볼 수 있다.
○ 1584년 2월 15일 (임술). 맑다.
화분 안의 매화에게[贈盆梅]란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모진 바람 매서운 눈발 뒤에도 살아 남아 / 護得風着雪虐餘
얼굴빛 처음 뿌리날 때와 변함이 없네 / 容顔不改着根初
밝은 창가에서 조용히 대하면 맑기가 물 같으니 / 明窓靜對淸如水
못난이가 어찌 쓸쓸히 홀로 지냄을 한하리오 / 鈍滯何須恨索居
하다.
매화가 주인에게[梅贈主人]란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꽃다운 맹서가 유달리 주인과 깊어 / 芳盟偏與主人深
옹색한 집 쓸쓸한 집에도 옮길 적마다 따랐다네 / 小齋寒齋取次尋
섣달의 바람 서리에도 의탁할 데가 있음을 알아 / 歲暮風霜知有托
성긴 그림자를 송죽(松竹)의 그늘에 잘 의지했다네 / 好㻋影倚凊陰
하다.
○ 2월 24일 (신미). 맑다. 들으니, 한림(翰林) 김신원(金信元)이 사초(史草)를 쓰다 마침 일이 있어 승지소(承旨所)로 가서 한참 있다가 돌아와 사초를 보니 놓인 자리가 바뀐 흔적이 있기에 아무래도 의심쩍다 했더니, 과연 주서(注書) 신응명(辛應命)이 몰래 사초를 보고서 그 가운데 숙헌을 논한 한두 단락을 신응명이 밖으로 누설하여 김신원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기회를 엿볼 틈이 없었다고 한다. 신응명은 신응시(辛應時)의 아우이다. 들으니, 호원(浩原)이 나를 가리켜, “밤을 타서 권세 있는 이에게 출입하면서 사특한 언설을 많이 한다.”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이덕형(李德馨)이 일러준 말이다.
[팔경첨언] 사초를 몰래 보고 내용을 밖으로 누설하여 사관 김신원을 제거하려고 한 주서 신응명은 이이 추종자다. 동인들에 비해 서인들은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간교하기가 그지없음을 알 수 있다.
○ 5월 17일 (임진). 사헌부에서 또 옥비(玉非)의 사건을 논하니, 윤허하지 않다. 옥비는 경원(慶源) 관비(官婢)인데, 성화(成化) 연간에 한 진주(晉州) 사람이 북도의 변장(邊將)으로 있으면서 경원 기생을 첩으로 들였으니, 그가 곧 옥비이다.
같은 고을의 군사 강필경(姜弼慶)이 경원에 충군(充軍)이 되어 지난 가을에 순찰사의 장계에 고하여 윤승길(尹承吉)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삼아 옥비의 자손을 조사해 내니 그 수효가 매우 많았다. 사목(事目) 내용에 의하면, 자손으로 남자일 경우에는 그 아내까지, 여자는 그 남편까지 모두 연루하고, 그 붙어사는 자는 그 주인까지 모두 강제로 데려오라고 되어 있었다.
윤승길이 장계를 보내어 아뢰기를,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따름은 이치에 매우 어긋나는데, 하물며 그가 정처(正妻)도 아닌 우연히 만나 첩으로 데리고 사는 자에게 같은 경우로 논단(論斷)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옥비가 남쪽으로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 열읍(列邑)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을 사람들이 그의 근본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로 논함은 더욱 억울한 일이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윤승길이 반쯤 조사해 내다가 어버이 병환으로 중도에서 돌아가고, 성영(成泳)이 후임으로 진천(鎭川)까지 와서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위(金偉)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어 전후 조사해 낸 것이 5백여 명인데, 자손을 제외하고 아내가 되어 남편을 따라오기도 하고, 더러는 남편이 되어 아내를 따라오기도 하였으며, 그 아내와 남편은 양민(良民)ㆍ천민(賤民)을 가리지 않고 한집안 식구로 논단하여 집안 식구들이 남아 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인들은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를 붙여 그 주인까지 아울러 강제로 데려왔으므로 더러는 한 여자에 두 지아비가 아울러 관여되기도 하고, 또 첩으로 인하여 그 정처(正妻)까지 데려오기도 하여 사족(士族)들도 그 속에 많이 끼어 있게 되었다.
데려올 때 도보나 혹은 말도 타고, 혹은 수레로 혹은 업혀서 오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어지러우니 듣는 이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도 많았다. 식사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기를, “김위(金偉)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였다.
15일에 사간원에서 장계로 사건을 밝혀 석방해 주고 아울러 김위도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우상 정임당(鄭林塘)이 장계를 올리려고 영상에게 말하니, 영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임당이 연석(筵席)에 들어가 혼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은 임금의 의사를 알고 거슬리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정철도 박순과 같았으므로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의(淸議)가 일어나 정철을 비난하였다. 어제 승지 정사위(鄭士偉)가 또한 이 사건을 계주(啓奏)하였으니, 임금께서 나이 많은 이와 홀어미는 참작하라는 말이 계셨으므로 임금의 의향도 조금 변한 것을 알고 이런 주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위에 대해서는 일체 논급(論及)하지 않았으니, 요즘 정철ㆍ박순 등 사류(士類)들의 처사가 이러하다.
[팔경첨언] 성화 연간은 당나라 헌종 때인 1465년부터 1487년까지다. 경원 기생 관비의 100년 전의 일을 들추어서 5백여 명 후손들과 연루자들을 모두 체포 압송하여 벌하는 조선왕조가 참 엄격하다. 그러므로 송익필 역시 노비의 후손이므로 안씨 집의 종으로 환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철과 박순의 비호를 받아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송익필이 복수를 위해 모함한 사건이 정여립 모반이다.
○ 우경선의 일기 뒤에 2수를 지음[題禹景善日記後二首]
서애(西厓) 류성룡
고인은 오늘 이미 유명을 달리 했으니 / 故人今日隔幽明
만사는 망연히 한 꿈속에 깨는구나 / 萬事茫然一夢驚
난실에서 좋아한 것 취미 서로 같아서인데 / 蘭室已忻同臭味
모진 바람 몰아쳐도 마음과 정 변치 않네 / 風終不改心情
살아 생전 불우함이 어찌 운명이 아닐소냐 / 生前枘鑿寧非命
죽은 뒤 서주됨은 평론이 다시 있을 테지 / 身後犀珠更有評
한 권의 남긴 책자 못난 친구 보관하네 / 一卷遺編留損友
무덤의 풀 다시 나와도 목이 메어 흐느끼네 / 雖經宿草亦呑聲
눈이 높아 한 세상 사귄 사람 적었고 / 眼高一世從遊少
당시의 인물들을 대단찮게 여겼다네 / 不歎當年大小兒
말과 수레 거리 메워도 문 닫아 거절했고 / 車馬滿街常閉戶
서릿발 같은 정직한 말 온 좌중이 놀라도다 / 風霜驚座聘危辭
바닷 비에 기 젖으니 나라 위해 충성했고 / 旗沾海雨勤王苦
영문의 밤에 별 지니 대명이 쓰러졌다 / 星殞營宵大命隳
살아 남은 이 인생 가시덤불 속인데 / 未死餘生刑棘裏
호소할 길 아득하여 슬퍼만 하네 / 籲天無路只傷悲
또 씀[又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모든 서민들이 사당(邪黨)함이 없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비(阿比)함이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바른 도는 세우지 않고 사람이 각기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서로 따른다면 혼란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 지금 우경선의 일기를 보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니, 그 재앙이 여기서부터 비롯됨을 슬퍼하는 것이다.
또 씀[又]
위의 계미일록(癸未日錄)과 갑신일록(甲申日錄)은 죽은 친구 경선(景善) 우성전(禹性傳)이 저술한 것이다. 나는 경선과 동년생(同年生)이고, 퇴도 선생(退陶先生)의 문하에서 배울 때에 뜻이 맞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갑자년 가을에 내가 용궁(龍宮)에 내려가서 외삼촌의 상(喪)을 치를 때, 비로소 경선과 수회촌(水廻村) 여관방에서 만났다. 다음해에 경선이 한성(漢城)의 낙선방(樂善坊)에 나아가서 나와 함께 독서한 지 거의 반년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우정이 매우 두터워졌다.
그 뒤 나는 병인과(丙寅科)에 오르고, 경선은 정묘과(丁卯科)에 올라 또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게 되었다. 우리가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 언론이나 처리하는 일이 비록 서로 모의하지 않아도 거의 들어맞았으며, 세로(世路)가 많이 험악하게 되어서는 영고성쇠가 같지는 않았으나 평소에 서로 사이 좋게 지내던 뜻만은 하루처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경선은 눈이 높아 세간 사람들을 허여해 줌이 적어 뜻에 맞지 않는 자와는 비록 얼굴을 마주하더라도 함께 말하지 않았고, 이따금 문을 닫아 걸고 사람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원망을 많이 사서 곤궁하고 불우하게 지내면서도 끝내 변치 않고 죽었으며, 죽은 뒤에도 벼슬을 삭탈당하는 화까지 입었으니, 슬프다! 그가 간직하고 있던 서적들은 난리통에 잃고 흩어져 거의 없어지고 오직 이 일기 1권과 또 나와 주고받던 편지만이 그의 집에 남아 있을 뿐이다.
경선의 아내 허씨(許氏)가 모두 가져다 내게 보내 왔다. 내가 책을 어루만지면서 세 번 탄식하고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으니, 이는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다시는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고, 우리 무리들이 더욱 쇠해짐을 슬피 여겨서이다. 만력(萬曆) 경자년(선조 33년, 1600년) 5월 11일 서애(西厓)는 하상(河上)에서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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