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 출처 : 천주교 용어사전)
한자 [使徒] 라틴어 [Apostolus] 영어 [Apostle] 그리스어 [Apostolos]
1. 의의 : 사도는 그리스어로 ‘파견된 사람’, ‘소식의 전달자(Apostolos)’라는 뜻이다. 이 칭호는 예수님의 12제자에게 붙여졌다. 그러나 성서에서 사도로 불린 자는 사도 바오로를 비롯해서 모두 14명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받은 사명과 권한을 이들에게 주시어 온 세상에 파견하셨다.
2. 12사도 : 열두 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베드로의 동생),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의 형, 長야고보), 요한(요한 복음·3개 서간·묵시록의 저자), 필립보(베드로와 안드레아와 같이 벳사이다 출신), 발토로메오(나타나엘), 토마(디디모), 마태오(레위라고도 함, 세리, 마태오 복음 저자),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次야고보), 유다(타데오, 차야고보 형), 시몬(가나안 혁명 당원), 마티아(유다 대신 선택받음) 등이다.
3. 베드로: 베드로는 사도의 으뜸으로 그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 특별하고도 유일한 직무가 주어졌다(마태 16,18).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단이 교회를 통치하는 집단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랍비들처럼 제자들이 스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그분에 의해 권한을 받았다.
베드로는 마티아를 선택할 때 자격을 검토하였다(사도 1,21-22).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단은 성령 강림절에 후보 마티아와 요셉 바르삽바(유스도) 중에서 마티아를 사도로 선택한다.
4. 바오로 : 사도 바오로는 예외였다. 그의 소명은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로마 1,1) 직접 그리스도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갈라 1,1).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항상 그의 인격적인 무가치함을 의식했으며(1고린 15,9),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사도 9장) 그가 체험한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에 근거를 두었다.
5. 임무 : 사도들의 기본 임무는 그리스도 부활의 실재를 증거하는 것이었다(사도 1,8; 2,22; 10,39-41). 이 증거의 행위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목격 증언(사도 10,32)과 느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그리스교적 신앙의 증거가 그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이 기본 임무는 후계자들에게 이어진다.
따라서 이들의 후계자인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조직하고(신품권), 가르치고(교도권), 관리할(사목권)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전 교회에 대한 책임을 위임받았던 것처럼 그 후계자인 교황도 모든 주교들과 함께 한 단체,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신품권과 교도권과 사목권을 갖는다. → 교계 제도
6. 열둘의 의미 : ‘열둘’이라는 숫자의 중대성은 베드로가 유다 대신 마티아를 채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마태 19,28; 루가 22,30) 열두 옥좌에 앉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잘못 이해하였다. 사도들은 최후의 심판과 연결하여 생각했으나, 실은 새로운 이스라엘 교회 위에 있는 사도들에게 미래의 권한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무관하지 않다. 이 지파들은 생명의 열두 근원이므로 이스라엘의 기초가 된다. 사도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의 초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계승한 것이라고 요한 묵시록은 말하고 있다(21,12-14). 따라서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로서 그리스도 권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에페 1,20; 1고린 3,11).
12사도 (나무위키)
https://namu.wiki/w/12%EC%82%AC%EB%8F%84
가톨릭의 표기 | 개신교의 표기 | 라틴어 표기 | 상징물[4] | 축일 |
그리스어 표기 |
베드로 | Petrus | 열쇠, 성서, 역십자가, 수탉, 배 | 6월 29일 |
Πέτρος |
본명은 시몬 바르요나(요나의 아들 시몬). 가톨릭 초대 교황. 상징물인 열쇠는 가톨릭 교황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이다.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수제자, 예수 승천 후, 교회의 지도자. 네로가 로마를 불태우던 당시 체포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함. |
안드레아 | 안드레 | Andreas | X자형 십자가 | 11월 30일 |
Ανδρέας |
시몬 베드로의 동생. 전승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함.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하는데,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X였기 때문. 이 때문에 X자 십자가가 그의 상징이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러시아의 수호성인. |
대(大) 야고보 | 야고보 | Iacobus Maior | 금빛 가리비, 호리병, 칼, 모자, 지팡이, 자루 | 7월 25일 |
Ιάκωβος |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의 형. 별칭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 사도 중 최초 순교자. 헤롯 아그리파 1세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예수가 각별히 대우한 제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 |
요한 | Ioannes | 독수리, 성서, 솥, 성배, 뱀 | 12월 27일 |
Ιωάννης |
대(大) 야고보의 동생. 별칭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 요한 복음서, 3개의 요한 서간, 요한묵시록[5]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가 각별히 대우한 제자. 자신이 쓴 기록에선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 자신을 표현한다. 12사도 중 유일하게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했다는 인물. 성작에 든 뱀은 독이 든 잔을 상징하는데, 사도가 잔을 축복하자 독이 뱀으로 변했다고. 흠좀무. |
필립보 | 빌립 | Philippus | 빵, 원형 십자가 | 5월 3일 |
Φίλιππος |
세례자 요한의 제자이며 바르톨로메오를 예수에게 소개하였다. 그리스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하였다고 함. |
바르톨로메오 (나타나엘) | 바돌로매 (나다나엘) | Bartholomaeus (Nathanael) | 3개의 은색 단도, 벗겨진 살가죽 | 8월 24일 |
Βαρθολομαίος ή Ναθαναήλ |
나타나엘이 바르톨로메오의 본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참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 채로 칼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지고 그 후 머리가 베어졌다고 한다. 그의 상징이 은색 단도와 벗겨진 살가죽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 |
토마스 | 도마 | Thomas | 직각자, 작살, 허리띠 | 7월 3일 |
Θωμάς |
솔직한 성격으로, 예수 부활 때 구멍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나서야 부활을 믿은 사람. '의심 많은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표현 'a doubting Thomas'가 유래된 배경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인도 공화국의 수호성인. 그 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모 마리아가 승천되면서 그 징표로 토마스에게 자신의 허리띠를 주었다는 전승에서, 허리띠는 그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토마스 복음서가 있다. |
마태오 | 마태 | Matthaeus | 은색 돈자루, 종이와 펜 | 9월 21일 |
Ματθαίος |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라고 보긴 하는데, 이름만 빌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이 많다.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마태오의 상징물들은 그의 전직이 세리(즉, 세금징수원)인데서 유래했으며, 덕분에 마태오는 회계사, 금융업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
소(小)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Iacobus Minor | 톱, 방망이 | 5월 3일 |
Ιάκωβος ο μικρός |
가톨릭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대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며 야고보서의 저자.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형제 야고보를 저자로 보며, 이 야고보는 관여한바 없다고 본다. 바리사이파에 의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다음 일제히 돌로 쳤다고 전해진다. |
유다 타대오 | 다대오 | Iudas Thaddaeus | 창, 돛단배 | 10월 28일 |
Θαδδαίος |
일명 관대한 유다. 가리옷 사람 유다와 동명이인.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함 |
시몬 | Simon Cananeus | 물고기, 톱 | 10월 28일 |
Σίμων ο Κανανίτης |
시몬 베드로와 동명이인. 알패오의 아들로 소 야고보의 형제. 열심당원[6]. 사도행전 1장에서 이스라엘을 지금 회복 시킬지 묻는 이가 바로 이 시몬이 아닐까 추정한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다고 하는데,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몸을 세로로 갈라 죽이는 형벌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상징물에 톱이 들어가 있는 이유가 이것. |
마티아 | 맛디아 | Matthias | 도끼 | 5월 14일 |
Ματθίας |
가리옷 사람 유다 축출 후 새로 뽑힌 사도. 악숨 지역(지금의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다 큰 도끼에 찍혀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
12사도에 들지 않은 사도 |
사도 바오로 | 바울 | Paulus | 책, 칼 | 6월 29일[7] |
Παύλος |
통칭 이방인의 사도. 본명 사울. 열성 유대교 신자였으나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였다고 한다. 상세 내용은 항목 참조. |
바르나바 | 바나바 | Barnabas | | 6월 11일 |
Βαρνάβας |
본명 요셉. 사도 바오로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사촌이였던 마르코와의 선교활동 문제로 바오로와 갈라섰다 화해하였다고 한다. |
12사도 자리에서 축출된 자 |
이스카리옷 유다 | 가롯 유다 | Iudas Iscariot | 짚으로 엮은 은전 30개, J | 그런 거 없다 |
Ιούδας Ισκαριώτης |
예수를 은 30개에 팔아넘겨 배신, 후에 자책하며 자살하였다고 함. 'J'는 검은색의 로프줄로 자살한 유다를 상징한다. |
¿Cómo murió cada uno de los apóstoles?
Gabriel Ariza 4 abril, 2015
http://infovaticana.com/2015/04/04/como-murio-cada-uno-de-los-apostoles/

El Sábado Santo es un buen día para recordar lo que la tradición de la Iglesia enseña sobre la muerte de los Apóstoles. La única muerte de los apóstoles registrada en la Biblia es la de Santiago, que consta en Hechos 12:2. Según el relato el rey Herodes mató a Santiago “a espada” – probable referencia a ser decapitado. La tradición de la iglesia más comúnmente aceptada, concerniente a la muerte de un apóstol, es la del apóstol Pedro que fue crucificado boca abajo en Roma, en cumplimiento a la profecía de Jesús (Juan 21:18). Mateo sufrió el martirio en Etiopía, muerto por una herida de espada. Juan enfrentó el martirio cuando fue hervido en un enorme caldero de aceite hirviendo durante una ola de persecución en Roma. Sin embargo, fue librado milagrosamente de la muerte. Entonces fue sentenciado a las minas en la prisión de la isla de Patmos, y fue ahí donde escribió su libro profético del “Apocalipsis”. Posteriormente, el apóstol Juan fue liberado y llevado de regreso a lo que hoy conocemos como Turquía. Él murió muy viejo y fue el único de los apóstoles que murió pacíficamente. Santiago, el líder de la iglesia en Jerusalén, fue arrojado de una altura de más de 30 metros desde el pináculo sureste del templo, cuando se rehusó a negar su fe en Cristo. Cuando descubrieron que sobrevivió a la caída, sus enemigos lo golpearon con un garrote hasta matarlo. Este fue el mismo pináculo donde Satanás había llevado a Jesús durante la tentación. Bartolomé, también conocido como Natanael, fue misionero en Asia. Él testificó en lo que hoy es Turquía y fue martirizado por su predicación en Armenia, donde fue desollado con un látigo hasta morir. Andrés fue crucificado en una cruz en forma de “X” en Grecia. Después de haber sido azotado severamente por siete soldados, ellos ataron su cuerpo a la cruz con cuerdas para prolongar su agonía. Sus seguidores reportaron que, cuando él era llevado a la cruz, Andrés la saludó con estas palabras; “Hace mucho he deseado y esperado este feliz momento. La cruz ha sido consagrada por el cuerpo de Cristo colgado en ella.” Él continuó predicando a sus verdugos por dos días hasta que murió. El apóstol Tomás fue traspasado con una lanza en la India, durante uno de sus viajes misioneros para establecer ahí una iglesia. Matías, el apóstol elegido para remplazar a Judas Iscariote el traidor, fue apedreado y luego decapitado. El apóstol Pablo fue torturado y después decapitado por Nerón en el año 67. También hay tradiciones referentes a los otros apóstoles, pero ninguna que cuente con una base histórica o tradicional confiable.
열두제자
http://www.mariasarang.net/book/bbs_view.asp?index=maria2000_dictionary&page=1&no=41&curRef=41&curStep=0&curLevel=0&col=1&sort=1
1. 베드로 : 축일 6월 29일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에서 태어난 시몬은 예수께서 ‘반석’이란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새로 바꾸어주셨으며 요르단 강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마르코3,16;루가6,14) 결정적인 부르심 또는 가이사리아의 선언 후입니다.(마태16,18).
그때까지는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마르코1,16.29.36;루가5,3.4.5.10).
당시 히브리인, 특히 평민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는데 때로는 별명만 쓰다가 본 이름을 잃는 경우까지도 있었습니다(마카상2,2-5).
12사도의 대표.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탁월했던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예수님의 몸에 대해 염려가 많았으며
- 배반하고서 즉시 통회를 함(다윗 왕과 비슷)
- 예수 부활 후에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시고 그 응답을 보시고 교회의 모든 권한을 맡김(요한복음)
- 성령강림후 3천명에게 영세를 줌
-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구출됨(사도 12, 6-19)
- 첫 번째 공의회를 예루살렘에서 소집을 함
- 로마에 전교 중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다 예수께서 ‘네가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말을 듣고 로마에 다시 들어가 순교를 하심. 사도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전이 베드로 대 성전임.
2. 안드레아 : 축일 11월 30일
- 안드레아란 ‘남자다운, 용감하다’란 뜻입니다.
- 베드로의 동생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음.
-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과 예수님을 찾아가 하루를 묵고 예수의 제자가 됨.
- 첫 번에 예수님을 만나 그의 형제인 시몬을 데리고 온 이가 안드레아였음.
- 빵 5개로 예수께서 기적을 하실 때 소년을 데리고 왔었으며,
- 예수님 부활 후에는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 발칸반도를 거쳐 그리스에 가서 전교를 하심
- 안드레아는 X형의 십자가에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라고 기도하며 순교를 당하심.
3. 야고보 : 축일 7월 25일
- 사도 요한의 형으로 큰 야고보라 부름
- 아버지는 제베데오이고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의 친척 살로메
- 별명은 폭풍의 아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냉대할 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려 동네를 전멸시키자고 함
- 예수님을 지상 통치자로 생각
-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서 따른 사람
- 헤로데의 박해 때 예루살렘에 남음. 44년 파스카 축일전날(성금요일) 참수로 순교
- 12사도중 제일 보수파(유대법에 철저)라 할 수 있음.
- 유해는 예루살렘에서 스페인의 꼼포스텔라로 옮김(이곳을 순례하며 교육시킨 것이 오늘날의 꾸르실료로 발전)
4. 요한 : 축일 12월 27일
- 요한은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
- 복음사가임(요한 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
-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동생
- 별명은 형과 함께 천둥의 아들
- 성격은 괄괄하고 활달함
-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히 사랑함)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끝까지 남았음
- 43년 박해 때 에페소로 피난 - 스미르나 - 뻴가모 - 빠아디파 - 필라델피아 - 라오디케아(교회의 지도자가 됨)
- 95년 제2의 네로라고 하는 도미시아노 황제 박해 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요한의 묵시록을 저술
- 사랑의 사도라 불리우며, 애덕은 그리스도교의 기초이고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치 않는다고 함
5. 필립보 : 축일 5월 11일
- 필립보는 ‘말의 친구’,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
- 벳사이다 출신(요한 14, 7)
- 스케디아 지방에서 전교
- 78년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 유해는 로마의 열두 사도 성당에 안치
6. 바르톨로메오 : 축일 8월 24일
-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탈미)의 아들’이란 뜻으로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아들’ 또는 ‘물을 높은 곳에 바치는 분의 아들’이란 뜻임.
- 바르톨로메오는 성(姓)이고 이름은 아마 ‘나타니엘’(요한 1, 21)일 것임.
-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성령강림후 인도까지 전교, 또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전교하며 왕과 왕비를 개종시킴
-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하면 소아시아 지방인 아르메니아에서 전교
- 알바누시아에서 산채로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달려 목을 베어 죽임
- 유해는 알바누시아에 있다가 메소포타미아에 옮겼었고 839년에 로마로 옮겨 티베리아 강 가운데 있는 섬의 성당에 안치됨
- 거의 모든 해석학자들이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이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요한1,45)
7. 마태오 : 축일 9월 21일
- 사도이며 동시에 복음사가임
- 마태오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며 또한 ‘위대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의 Magnus와 ‘하느님’이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을 위한 위대한 자’가 될 것이며, 또는 ‘손’이란 라틴어의 manus와 그리스어의 Theos의 합성어로 본다면 ‘하느님의 손’이란 뜻이 됩니다.
- 이름은 레위일 것임
- 출생은 갈릴레아 지방
-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는 세리였으며 주의할 일은 마르코와 루가가 단순히 마태오라고 하여 토마스 앞에 기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자신은 세리라는 직책을 밝히고 토마의의 다음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9년간 유다와 에디오피아에서 전교활동을 함
- 에집트의 에깃부스왕의 왕자를 기적으로 치유함. 이로써 왕가 전체가 신자가 되고 왕의 딸 에피케네이아도 동정녀로 지내기로 서약함. 그러나 헤르따고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고 에피케네이아와 결혼을 하려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자 공주도 죽이고 마태오도 죽임(90년).
- 유해는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모셔짐
8. 토마스 : 축일 7월 3일
- 별명은 ‘의심 많은 사람’, ‘증거를 볼 때까지 믿지 않는 고집이 센 사람’
- 토마스는 쌍둥이라는 뜻. 그래서 요한은 그를 쌍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갈릴레아 출신의 어부
-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 최후의 만찬 때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했고, 부활 때에도 믿지 않다가 예수를 보고 나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함
- 인도에서 전교활동 함
- 우상숭배 교도들에 의해 창에 맞아 순교함
9. 야고보 : 축일 5월 1일
- 예수님의 친척이라도고 하였고 요셉, 시몬, 유다의 형제(마태13,55).이며 소 야고보(마르코15,40-41)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알패오와 마리아(마태27,56)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가 되었습니다(사도15,13;갈라1,19). 빌레크벡크의 연구에 따르면, 그의 부친 알패오는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남편 글레오파(요한19,25)와 같은 인물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라 하였는데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필립보와 같이 지냄
- 엄격한 생활을 함(금육, 금주, 수염과 머리를 안 깎음)
-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떠밀려 땅에 떨어뜨린 다음 돌로 쳐죽임을 당함
- 유해는 예루살렘에 안치되었다가 후에 이탈리아의 앙코나의 성 칠리아고 성당에 안치됨
10. 시몬 : 축일 10월 28일
- 시몬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 라는 뜻을 가진 시므온(시메온)의 약어임
- 별명은 카나나이오스 또는 젤로테스(혁명당원)임
-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하여 혁명당원 시몬이라고 부름.
- 젤로테스는 기원 후 70년의 예루살렘멸망 때까지 가장 과격한 이스라엘 독립 운동당이었습니다.
- 전설에 의하면 페르시아에서 체포되어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하며 또는 동방 전승에 의하면 에뎃사에서 평화로이 운명했다고도 합니다.
11. 유다(JUDAS,THADDAEUS : 타대오) : 축일 10월 28일
- 유다는 ‘하느님은 찬양 받으소서’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의 ‘여후다’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유다의 다른 이름은 타대오서 이는 ‘왕을 붙드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웠음
- 타대오(마태10,3;마르3,19)와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루가6,16)는 동일 인물이며 그리고 어느 고사본에는 타대오 대신에 렛베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사촌
- 메소포타미아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에뎃사에서 선교하고 또 아르메니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건설하고, 그로테스탄으로 옮겨 그곳에서 화살에 맞아 순교함
12. 마티아 : 축일 5월 14일
-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요셉과 함께 추천되어 제비를 뽑음으로써 사도로 정해진 분
- 그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히 기록되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처음에 유다에 이어서 이방지역인 이디오피아에서 전교했다고 함
- 죽음에 관해서는 십자가형, 참수, 석살 등 여러 설이 있슴
-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십자가형을 당한 후 도끼나 미늘창으로 시체가 토막내어져 순교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슴
(참조) 유다 이스카리옷
- 배반자
- 사도단에서 경리를 맡음
- 자객이라고도 함
-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배반의 죄를 범한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예수님을 팔아 넘긴 카리옷 사람 유다”라 불릴 것입니다.
[교회상식 교리상식] 97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1) 안드레아
이번 호부터는 12사도의 생애에 대해서 한 사도씩 알아보도록 합니다.
첫 번째로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 성경에 나오는 안드레아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입니다. 안드레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을 지니는데 기원전 2~3세기부터 유다인들 사이에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는 안드레아가 예수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카 5,1-11; 요한 1,35-51 참조). 공관복음에서는 배경이 갈릴래아 호숫가인데, 요한복음에서는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를 먼저 부르셨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아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나아가 안드레아는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런 차이를 감안하면서 네 복음서 내용을 종합하면, 안드레아는 고향이 벳사이다요 직업은 어부였으며,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에 형 시몬과 함께 카파르나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가파르나움과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마을들로 서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아 사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목들을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요한 6,1-15)에서 안드레아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년이 가진 것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게 되지요. 안드레아는 또한 예수님을 만나뵙고자 하는 이방인(그리스 사람)들의 부탁을 예수님께 전해드립니다(요한 12,20-6).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한 것까지 고려한다면, 안드레아 사도는 크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내실있게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 안드레아는 형 시몬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함께 예수님께 종말에 관한 질문을 하는 네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마르 13,3). 특이할 만한 것은 열두 제자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안드레아를 포함한 이 네 제자가 늘 첫 번째로 거명된다는 점입니다.
◇ 전승에서 본 안드레아
안드레아 성인에 관한 그림이나 조각 작품들을 보면 등에 한결같이 Ⅹ형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Ⅹ형 십자가는 안드레아 사도를 나타내는 고유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성인이 Ⅹ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이 복음선포를 시작했을 때 안드레아는 흑해 서부 스키티아 지방에서 선교했습니다. 또 다른 전승들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가 선교한 지역은 오늘날의 터키 지역은 물론 그리스와 불가리아 지방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 그리스 정교회가 많이 분포돼 있는 지역이기도 하지요. 그래선지 안드레아 사도는 오늘날에도 그리스 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지요.
안드레아 사도는 로마제국 네로 황제 치세 때인 기원 후 60년 11월 30일 아카이아(오늘날 그리스 남부 펠레폰)의 파트라이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 모두 11월 30일을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로 지냅니다. 안드레아 사도를 처형한 아카이아 지방 로마총독은 에게아테스였습니다.
성인은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것이 아니라 밧줄로 십자가에 묶여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성인이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만, 그 십자가가 X형이라는 이야기는 14세기쯤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 있다가 357년에 성인이 순교한 그리스 파트라이로 다시 옮겨졌다고 합니다. 그 후 1208년에 이탈리아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유해가 옮겨졌고, 15세기에 두개골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됐습니다. 그러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의 유해를 다시 그리스의 파트리아로 보냈습니다. 1054년 정교회와 분리된 이후 900년이 지나서 정교회와 다시 화해를 이룬 표시였다고 합니다.
한편 안드레아 사도는 또한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데, 이는 4세기 쯤에 사도의 유해 일부가 스코틀랜드로 옮겨졌다는 전승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기에는 안드레아 사도의 십자가를 뜻하는 Ⅹ형 십자가가 그려져 있지요.
[평화신문, 제975호(2008년 6월 22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98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2) 베드로(상)
이번 호부터는 12사도 가운데 으뜸인 베드로 사도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알아봅니다. 이번 호에는 먼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까지 베드로의 삶을 살펴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요나(또는 요한)의 아들이었고, 안드레아의 형이었습니다. 고향은 벳사이다였고, 직업은 어부였지요. 예수님을 만났을 당시에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카파르나움에서 장모와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마르 1,29-31).
시몬은 무식하고 평범한 어부였습니다만,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첫 제자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를 케파, 곧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케파란 '바위'라는 뜻의 아람어이고,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마태오복음(16,13-2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해 제자들에게 물으시자 시몬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길지만 중요한 대목이어서 성경 본문을 그대로 적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8-19).
이 대목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 곧 반석으로 삼으신 이유인데, 시몬의 신앙고백이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사실, 시몬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은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기에 오히려 행복하다고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친히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시고 이어서 계속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몬을 베드로 곧 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몬 베드로에게 맺고 푸는 권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성경적 근거가 되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사도들의 으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시몬은 어떤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초석으로 삼으시고 하늘나라 열쇠까지 주신 걸까요?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시몬 베드로의 성격을 조금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우선 베드로는 용기 있고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서는 모습(마르 1,16-20),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지니고 있던 칼로 대사제의 종을 내리치는 모습(요한 18,1-11) 등은 이런 면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덤벙대는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물 위를 걷겠다고 나섰다가 바람이 불자 두려워져 물에 빠지게 되자 살려 달라고 외치는 모습이라든가(마태 14,22-33),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해 칭찬을 받았지만 곧 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안 된다고 펄쩍 뛰는 모습(마태 16,13-23) 등이 그러합니다.
비겁하고 소심한 성격도 있는 듯합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 신도들과 어울리며 음식을 나누다가 할례받은 유다인 신도들이 내려오자 음식 규정을 어긴다는 지탄을 받을까봐 몸을 사리는 태도가(갈라 2,11-14) 그러하지요.
붙잡히신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 집으로 갔다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치자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모습은(루카 22,54-62) 심성이 착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충정이 대단한 제자였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는 전갈에 무덤으로 달려가고(루카 24,1-1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호수로 뛰어드는( 요한 21,1-14) 모습이 이를 말해줍니다.
이런 시몬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 마침내 교회의 반석으로 사도들의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양떼를 잘 보살피라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요한 21,15-19).
[평화신문, 제976호(2008년 6월 29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99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3) 베드로(하)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으로 케파, 곧 베드로라는 이름을 예수님께 받은 시몬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의 맏이로서 교회를 이끌기 시작합니다. 이번 호에는 주님 승천 후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베드로 사도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간곡한 당부를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먼저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 대신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될 사도를 뽑는 일을 주도합니다(사도 1,15-26).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 받은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굳세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평범하고 무식한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성령을 받아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놀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회개합니다. 베드로의 첫 오순절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된 이들이 삼천 명이나 됐습니다(사도 2장).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님 이름으로 불구자를 고치는 첫 기적을 행합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 달려온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3장). 그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이가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됐다고 합니다(사도 4장).
사도행전 전반부는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뿐 아니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며 또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는 등 박해 받는 모습을 곳곳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삶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을 지고 가야 하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 베드로 사도의 삶은 어떻게 펼쳐졌을까요?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불렸습니다. 교회 기둥으로서 베드로 사도가 수행한 대표적 역할은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빚어진 할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여서 한 회의입니다. 할례 논쟁은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도 모세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빚어진 논쟁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유다인이나 이방인에게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시며, 이방인이나 유다인이나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설파함으로써 할례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지중해 해안도시인 카이사리아와 야포 같은 인근 도시들은 물론 안티키아와 갈라티아 같은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또 일부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그리스 도시인 코린토에서도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들 소아시아 지역과 그리스 도시들에서 실제로 지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만약 이들 도시들에 머물렀다면 아마도 이 도시들에서는 주로 유다인을 찾아 복음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할례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주셨다"(갈라 2,8)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이 말에서 할례받은 이들은 유다인을, 다른 민족들은 이방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안티오키아를 거쳐 말년에는 로마로 갔으며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또 순교한 때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전해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기록은 로마에서 25년 동안 살았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연도도 기록에 따라 빠르게는 55년부터 늦게는 65년 또는 67년 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네로 황제의 대박해 때에 로마의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순교한 바티칸 언덕에 오늘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이 우뚝 서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은 성 베드로 대성전 중앙 제대 아래 지하에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자신같이 부족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서, 또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지만 자신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원했다고 하지요.
또 베드로는 평소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또 특히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것을 가슴아파하며 눈병이 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벽에 첫 닭이 울때면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쇠와 함께 새벽 닭도 베드로 사도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평화신문, 제977호(2008년 7월 6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0 - 12 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4) 토마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인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의심 많은 사도로 알려져 있지요. 토마스 사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 성경에서 본 토마스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열두 사도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토마스를 언급할 뿐(마태10,3 ;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그 이상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토마스 사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토마스의 신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선 토마스는 '쌍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요(요한 11,16 ; 20,24 ; 21,2). 그렇지만 누구와 쌍둥이인지 아니면 왜 쌍둥이라는 별명을 가졌는지는 성경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토마스 행전」이라는 위경(僞經)에서는 토마스를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라고 적고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네요.
요한복음에서 제시하는 토마스 사도의 면면을 잠시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 첫째,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러 베타니아로 가실 때에,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11,16)하고 동료 제자들에게 말하지요. 여기에서 토마스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충성심이 강하고 의지가 굳은 제자로 나옵니다.
둘째, 14장에서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시자 토마스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는 기개 대신에 다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의 토마스 사도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셋째, 20장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난 후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20,24-29).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15절)라는 토마스의 반론은 예수님께 대한 부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갑시다"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예수님을 보았을 때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하지요.
이런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토마스가 용감하면서도 의심이 많은 또 소신을 굽히지 않지만 일단 승복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 나타나셨을 때에 토마스가 시몬 베드로를 비롯해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들 제자들의 출신지가 모두 갈릴래아 지방인 것으로 미뤄 토마스 역시 갈릴래아 출신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정도가 성경에서 우리가 토마스 사도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 전승에서 본 토마스
전승에 따르면,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러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 토마스는 인도를 배당받았다고 합니다. 토마스가 인도에 가기를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하시어 인도의 군다포르 왕실의 궁전을 짓는 목수로 팔려가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곳에서 왕궁 건축 기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 써버렸고, 왕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됐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왕도 회심했다고 전해지지요.
잠시 샛길로 빠집니다만, 토마스 사도가 건축가,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것도 이런 전승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는 12사도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데 토마스 사도는 목수들이 사용하는 ㄱ자를 들고 있는 형상입니다.
인도 서남부 케랄라 주에는 말라바르 전례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토마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교회의 기원이 토마스 사도에게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군다포르 왕에게서 탈출한 후 말라바르 지방으로 내려와서 7개의 교회를 세웠으며, 기원 후 72년 7월 3일 마드라스 시 북쪽에 있는 밀라포레 근처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유해는 4세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 에데사(오늘날 터키의 우르파)로 옮겨졌고, 나중에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지방 키에티 주의 오르토나로 옮겨졌다고 하지요.
교황 바오로 6세는 토마스 사도의 순교 1900주년인 1972년에 사도를 인도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습니다.
[평화신문, 제978호(2008년 7월 13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1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5) 야고보(大)
12사도 가운데 야고보 이름을 가진 사도는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요한의 형 야고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두 사도를 구별하기 위해 요한의 형 야고보를 큰(大) 야고보, 다른 야고보를 작은(小) 야고보라고 부르지요. 이번 호에서는 큰 야고보에 대해 알아봅니다.
◇ 성경에서의 야고보
야고보는 제베대오 아들로서 요한의 친형입니다. 또 관련되는 성경 말씀들을 종합하면(마태 27,56; 마르 15,40 ; 16,1),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루카 5,10)로서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야고보는 아버지 제베대오와 동생 요한과 삯꾼들과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지요(마태 4,18-22; 마르 1,16-20).
아버지가 삯꾼을 부릴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야고보 집안은 시몬 베드로에 비해 경제적 형편이 나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 함께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 수 있었을 것이고(마태 27, 55-56), 예수님께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 29,21)하고 청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에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마르 3,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 야고보와 요한의 불같은 성격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말할 정도로 과격한 성격을 드러냅니다(루카 9,51-56). 야고보가 나중에 사도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순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시몬 베드로와 동생 요한과 함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당신이 영광스럽게 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실 때에 이 세 사람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으며(마르 9,2), 수난 전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이(마르 14,33) 이를 말해 주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함께 있었던 야고보는(요한 21,2)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자 예루살렘의 이층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내다가 마티아 사도를 뽑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 받아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1-2장).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박해를 받기 시작할 때에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습니다(사도 8,1-2). 그러다가 44년 쯤에 헤로데 임금에 의해 순교합니다(사도 12,2). 이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유다를 다스린 헤로데 임금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 1세입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교회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지요.
◇ 전승에서의 야고보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러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에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스페인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채 다시 유다 지방으로 돌아왔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스페인 서북부 지방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 대성당에서는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페인 북부 지방에 모셔져 있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을 받은 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의 한 동굴에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발견돼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 도시 이름을 '별의 들판' 곧 콤포스텔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9세기쯤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이 도시는 또 이슬람교도들에게 침공 받았다가 재건됐는데 그때부터 야고보 사도 이름을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불렀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입니다.
이후 야고보 사도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순례하는 성지가 됐고, 오늘날도 유럽인들에게는 예루살렘과 로마와 더불어 3대 순례성지 중 하나로 꼽히지요.
다른 한편 사도 야고보는 중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 중북부 지역을 침공했을 때 백마를 탄 투사가 돼 이들을 앞장서서 무찔렀다는 전설도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스페인 예술작품들에서 종종 말을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도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이탈리아에서는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요. 로마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는 야고보 사도 조각상도 지팡이를 든 순례자 모습입니다.
[평화신문, 제979호(2008년 7월 20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2 - 12 사도에 대해 알고 싶어요(6) 요한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큰(大)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복음사가이며 신약성경 서간 3편과 묵시록의 저자이기도 한 요한에 대해 알아봅니다.
◇ 성경에서 본 요한
요한은 성경의 12사도 명단 가운데서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형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시몬. 큰야고보에 이어 세 번째로(마르 3,17), 마태오와 루카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에 이어 네 번째로(마태 10,2; 루카 6,14) 등장합니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다음 두 번째로 언급됩니다(사도 1,13). 이 사실은 12사도 가운데서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큰야고보에 대한 설명에서도(979호, 7월 20일자)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은 12사도의 으뜸인 시몬 베드로 및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신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마르 5,37 ; 루카 9,28; 마태 26,37). 예수님 지시에 따라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러 간 제자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였습니다(루카 22,8).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께서 12사도 가운데서 갈릴래아 호숫가의 고기잡이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와 요한을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당신이 세우실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신다는 공적 차원을 띤다고 할 수 있겠지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다거나(마태 16,18-19),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신신당부하시는 말씀에서(요한 21,15-19)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에 대한 각별함은 좀더 개인적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후 만찬 때에 요한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은 것이나(요한 13,2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신 것에서(요한 19,27)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부활 후에도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수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고(요한 20,5),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이야기해 준 제자도 요한이었습니다(요한 21,7).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요한'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밝힐 뿐입니다. 이는 요한의 겸손함과 함께 예수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신했는지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전면에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다가 불구자를 고쳐주고(사도 3,1-10),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또 최고의회 앞에서는 담대하게 설교를 합니다(사도 4,1-22). 나아가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를 통해 그곳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리도록 합니다(사도 8,14-25). 바오로 사도는 이런 요한을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부르지요(갈라 2,9).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요한의 생애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중에 묵시록을 썼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묵시 1,9).
◇ 전승에서 본 요한
2~3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요한은 생애 후반기에 소아시아의 에페소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저술한 곳도 에페소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에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유배되기 앞서 로마에서 체포돼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요한은 에페소에서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제위 98~117) 치세인 100년에 사망했습니다. 요한은 죽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형 큰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반면에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복음사가로서 요한을 나타내는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요한은 또 뱀이 있는 성작으로도 상징되는데 요한이 독이 든 잔을 받고 축복을 하자 독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
[평화신문, 제980호(2008년 7월 27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3 - 12 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7) 필립보
필립보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열두 사도 명단이 언급될 때에 이름만 나옵니다(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4; 사도 1,13). 이에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필립보와 관련된 일화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필립보 사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필립보는 시몬 베드로 및 안드레아와 고향이 같습니다. 벳사이다 출신이지요(요한 1,44). 필립보라는 이름(Φιλιπποs)은 그리스어로 "말(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다음날 필립보를 만나시고는 "나를 따르라" 하고 부르십니다(요한 1,43).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나타나엘은 사도 바르톨로메오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게 있습니다. 율법에 약속된 그분을 보았다는 필립보의 말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게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핀잔을 주지요. 그러자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하면서 거듭 설득합니다. 여기서 필립보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확신에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묵고 계시는 곳을 알고 싶다고 물었을 때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신 예수님 말씀을 상기시키지요. 이는 필립보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직접 가서 본 안드레아나 요한의 다른 제자에게서 예수님에 관해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필립보 역시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요한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를 제외하고도 세 번에 걸쳐 필립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첫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군중에게 먹일 빵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자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요한 6,5-7).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시험하고자 하신 질문이었는데 필립보는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그분을 만났소"라고 말하고 또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설득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보면, 필립보는 계산에 치밀하고 현실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안내하는 대목(요한 12,21-23)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하자 필립보는 안드레아에게 이 말을 전하고 또 안드레아는 필립보와 함께 예수님께 전합니다. 여기서는 왜 필립보가 예수님께 직접 전하지 않고 안드레아를 통해서 전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잘 몰라서였을 수도 있고 자기보다는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더 가깝다고 여겨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경우를 헤아려서 행동하는 것이 필립보의 성격인 듯합니다.
셋째,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는 대목(요한 14,8-11)입니다.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필립보의 말에서 계산을 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호된 질책을 당하지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예수님 부르심에 제자가 됐으면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해 깨우침을 받곤 했던 필립보는 성령강림 후 사도단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성경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는 흑해 서부 스키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년에는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지내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하지요. 이때 필립보 나이는 87살이었다고 합니다. 필립보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딸 또한 아버지 곁에 묻혔다고 전해집니다. 필립보 사도의 유해는 그 후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로 이장됐다가 다시 로마에 있는 12사도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필립보 사도의 축일은 5월 3일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포목업자와 모자 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한편 사도행전 8장에서 필리포스의 선교 활동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 21장에는 바오로 사도와 카리사리아에서 복음 선포자인 필리포스 집에 머물렀으며 그에게는 네 딸이 있었다고 언급돼 있지요. 이 필리포스는 사도 필립보가 아니라 스테파노와 함께 일곱 봉사자(부제) 중 한 사람으로 뽑힌 필리포스(사도 6,4-5)를 가리킵니다.
[평화신문, 제981호(2008년 8월 3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5 - 12 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8) 바르톨로메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살갗을 벗기우는 형벌을 받으며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르톨로메오
바르톨로메오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1,13)에 이름이 나오지만 그 밖에는 성경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바르톨로메오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인이라고 봅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지요.
우선 사도 명단과 관련해서 공관복음에서는 바르톨로메오는 필립보와 짝을 이뤄 나오거나 아니면 필립보 다음에 나옵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는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등으로 언급됩니다(마태 10,2-4). 또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마르 3,18; 루카 6,14) 순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습니다(마르 6,7; 루카 10,1 참조). 그렇다면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짝을 이뤄서 파견됐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또한 그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요한복음에는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나타나엘이 언급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요한 1,35-51). 여기에서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제자가 됩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임을 알 수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나타나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요한 21,1-3).
이런 정황들로 짐작컨대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르톨로메오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동일인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 명단에 이름이 나란히 있다고 해서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억측이며,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를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도 추측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 명단(1,13)에는 바르톨로메오가 필립보와 짝이 아니라 마태오와 짝을 이루는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렇지만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렇다면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요한 21,1), 예수님께서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고 말씀하실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한 인품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또한 예수님을 뵙고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 외에는 성경에서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전승에서 본 바르톨로메오
바르톨로메오는 히브리 말로 톨마이 또는 탈마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원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예수였는데 예수님과 이름이 같아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고 하는 설도 전해집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성령강림 후 사도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할 때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이란을 거쳐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또 그곳 신자들에게 마태오복음 사본을 전해주고 왔다고 하지요. 소아시아의 리카오니아를 비롯해 카스피해 남쪽 에티오피아(오늘날 이란 북부)까지 바르톨로메오의 선교지였다는 전승들도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유다) 사도와 함께 아르메니아에도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 아르메니아는 이미 4세기에 최초로 복음화가 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르메니아 복음화 1700주년을 기념해 아르메니아를 방문하기도 했지요. 바르톨로메오와 유다 두 사도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지역 왕의 동생을 개종시켰다는 이유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순교와 관련, 참수당했다는 설도 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창에 찔려 순교했다는 설도 있고, 마치 나무 껍질을 벗기듯이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유해는 여러 경로를 거쳐서 10세기 말에 로마 시내를 흐르는 테베레 강에 있는 섬(이졸라 티베리나)의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또 두개골 일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모셔져 있다고 하지요.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축일은 8월 24일에 지냅니다.
[평화신문, 제982호(2008년 8월 17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5 - 12 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9) 마태오
마태오는 세리이며 마태오복음을 쓴 복음사가로 알려져 있는 사도입니다. 이번 호에는 마태오 사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본 마태오
마태오는 열두 사도 명단 가운데서 일곱 번째(마르 3,18; 루카 6,15) 혹은 여덟 번째(마태 10,3; 사도 1,13)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에서는 그를 세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태 9,9). 이에 비해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마태오를 열두 사도 명단에 포함시키면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세리의 이름이 마태오가 아니라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르 2,14; 루카 5,27).
이런 차이로 인해 마태오와 레위가 동일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갖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시몬에게 케파(베드로)라는 다른 이름을 주셨지요. 마태오에 대해서도, 원래 이름은 레위였는데 예수님께서 마태오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마태오와 레위가 동일인이라면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카파르나움에서 세리로 일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소문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마치 창녀나 죄인들처럼 멸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는 과도한 세금 징수를 통해 부정하게 돈을 착복하는 일이 많은 데다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는, 유다인들 편에서 보면 매국노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종하기를 꺼려하고 죄인 취급을 하는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대한 마태오의 처신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마태오는 부르심을 받자 "모든 것을 버려둔 채"(루카 5,28) 예수님을 따랐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까지 하지요(마태 9,9-13 ; 마르 2,13-17 ; 루카 5,27-32). 죄인인 자신을 불러주시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응답하는 마태오의 자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지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야기와 열두 사도 명단을 제외하고는 마태오에 관한 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1장을 토대로 볼 때, 마태오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때가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승에서 본 마태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는 처음에는 주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약 15년 동안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히브리어로 복음을 써서 남겨주고는 다른 나라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고 하는데 마케도니아와 파르티아, 시리아, 카스피해 남쪽의 에티오피아(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가 아님)도 활동 무대였다고 전하지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마태오 사도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자료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순교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순교하지 않고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순교 장소 및 순교 방법과 관련해서도 주장이 엇갈립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는 전승도 있고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또 칼에 찔려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고, 화형을 당하고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지요.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마태오 사도 유해는 이탈리아 남부 티레니아 해(海) 연안 항구도시 살레르노의 대성당에 모셔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마태오 사도 축일은 9월 21일이며, 은행원을 비롯해 회계업무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사도는 장부를 펼쳐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집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는 열두 사도 조각상에서도 마태오 사도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요.
사도 마태오는 마태오복음의 저자인가
사도가 된 세리 출신의 마태오가 실제로 마태오복음을 썼을까요? 2세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마태오가 히브리어로 말씀들을 편찬했는데 저마다 힘 닿는 대로 이를 번역했다"고 주장한 이후 사도 마태오가 마태오복음의 저자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세리 출신의 사도 마태오가 마태오복음의 저자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마태오복음의 저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도 유다교 계율과 유다인들의 관습을 잘 아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마태오는 이 복음서가 씌어지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마태오복음이라고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마태오 사도를 마태오복음의 저자로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평화신문, 제983호(2008년 8월 24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6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10) 작은(小) 야고보
열두 사도 가운데 야고보라는 이름을 지닌 사도는 둘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 야고보를 큰(大) 야고보라고 부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小) 야고보라고 부르지요. 이번 호에서는 작은 야고보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보는 작은 야고보
신약성경에서 '작은 야고보' 곧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이름은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모두 사도들의 명단과 관련해서지요(마태 10,3;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이와 별도로 '작은 야고보'라는 이름이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실 때에 이를 지켜보던 여인들을 언급하는 부분에서입니다.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보고'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마르 15,40). 다른 한편으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도 몇 차례 등장합니다(마태 13,55 ; 마르 6,3 ; 갈라 1,19). 또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야고보 이름도 나옵니다(사도 12,17 ; 15,13 ; 갈라 2,9).
옆길로 새는 것 같습니다만 우리말 「성경」의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이 41번 나옵니다. 이 이름 가운데서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인 큰 야보고는 항상 요한과 함께 나오기에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작은 야보고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다른 야고보, 곧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야고보와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시하면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또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신약성경에 41번이나 나오는 야고보는 두 사람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이고, 다른 하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또한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한 인물이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그 야고보입니다(갈라 2,9).
따라서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 사도는 '작은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서 요세(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고 어머니가 마리아인 '작은 야고보'와 같은 사람입니다. 물론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라 그 친척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알패오가 아니라 "클로파스의 아내"(요한 19,25)로 나옵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 전통은 그 당시에 한 사람이 두 이름을 갖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이런 전통적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는 성경에서 "주님의 형제"라고 부르는 인물로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초기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한 사도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런 주장은 최근 들어 반론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장에서는 열두 사도와 예수님의 형제들을 완전히 구분합니다(1,12-14). 바오로 사도도 야고보와 열두 사도를 구분합니다(1코린 15,5-7). 또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뽑으신 후였습니다(3장). 나아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는 말을 들으며 배척을 받으셨을 때에는 이미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였습니다(마르 6장).
이런 반론을 따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야고보와 동일인이 아니라고 본다면, 우리는 사실상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전승에서 보는 야고보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동일시하면서 야고보 사도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서 헤제시푸스는 야고보가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졌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야고보 사도는 때때로 몽둥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요.
작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은 필립보 사도 축일과 함께 5월 3일에 지냅니다.
[평화신문, 제984호(2008년 8월 31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7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11) 시몬과 유다
시몬과 유다는 성경의 열두 사도 명단에서 열 번째나 열한 번째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나옵니다. 이번 호에는 시몬과 유다에 대해 알아봅니다.
시몬
시몬은 열두 사도 명단에서 '열혈당원'으로 소개됩니다(마태 10,4 ;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열혈당원은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로마제국에 맞서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을 꾀하던 이들을 일컬었지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들이 한결같이 시몬을 열혈당원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께 제자로 부름 받기 전에 이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것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만, 별칭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몬이 열혈당원으로 활동했음을 확인해주는 표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열두 사도 명단 외에는 시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형제인 시몬입니다(마태 13,55 ; 마르 6,3). 따라서 애석하게도 사도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시몬 역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전승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카나 혼인잔치의 주인공 신랑이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탄생 소식을 천사에게서 전해들은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6세기쯤에 유포된 「시몬과 유다 수난기」 같은 위경에 따르면, 시몬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톱질로 몸이 잘리는 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시몬 사도의 상이나 그림은 톱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시몬의 율법에 대한 열정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열혈당원이라는 말 자체에 열정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시몬 사도 축일은 10월 28일에 지냅니다.
유다
유다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나옵니다(루카 6,16 ; 사도 1,13). 반면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타대오라고 부르지요(마태 10,3 ; 마르 3,18). '다두'라는 세례명은 이 타대오를 한자식으로 표기해서 부른 것입니다.
복음서들에서는 이렇게 유다와 타대오로 이름이 달리 표기돼 있을까요. 어쩌면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의 저자들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을 혼동하지 않도록 일부러 타대오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의 그리스식 이름이 타대오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교회 전통은 초기부터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타대오를 같은 인물로 여겨왔습니다.
성경에서 열두 사도 명단 외에 이 유다의 이름이 나오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2절로, "유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라고 나오지요. 이 표현으로 미뤄 초기 교회에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유다 이스카리옷을 구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전통은 오랫동안 이 유다가 유다 서간을 쓴 저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 1,1)와 동일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인 셈입니다. 마르코복음 6장 2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고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말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들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유다서 저자이자 예수님의 형제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의 하나로 야고보의 아들이자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유다에 대해서도 더 확인할 길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전승이나 전설에 따르면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혈당원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또 위경인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에서는 유다가 시몬과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시몬이 톱질로 순교당한 데 비해 유다는 창에 찔려 순교했거나 또는 도끼로 참수형을 당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 사도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유다 사도 축일을 시몬과 같은 날인 10월 28일에 지내는데, 이 또한 시몬과 유다가 함께 활동하고 순교했다는 전승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제985호(2008년 9월 7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7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11) 시몬과 유다
시몬과 유다는 성경의 열두 사도 명단에서 열 번째나 열한 번째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나옵니다. 이번 호에는 시몬과 유다에 대해 알아봅니다.
시몬
시몬은 열두 사도 명단에서 '열혈당원'으로 소개됩니다(마태 10,4 ; 마르 3,18 ; 루카 6,15 ; 사도 1,13). 열혈당원은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로마제국에 맞서 무력으로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을 꾀하던 이들을 일컬었지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들이 한결같이 시몬을 열혈당원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께 제자로 부름 받기 전에 이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것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만, 별칭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몬이 열혈당원으로 활동했음을 확인해주는 표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열두 사도 명단 외에는 시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형제인 시몬입니다(마태 13,55 ; 마르 6,3). 따라서 애석하게도 사도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시몬 역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전승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카나 혼인잔치의 주인공 신랑이었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탄생 소식을 천사에게서 전해들은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6세기쯤에 유포된 「시몬과 유다 수난기」 같은 위경에 따르면, 시몬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톱질로 몸이 잘리는 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시몬 사도의 상이나 그림은 톱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시몬의 율법에 대한 열정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열혈당원이라는 말 자체에 열정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시몬 사도 축일은 10월 28일에 지냅니다.
유다
유다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나옵니다(루카 6,16 ; 사도 1,13). 반면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타대오라고 부르지요(마태 10,3 ; 마르 3,18). '다두'라는 세례명은 이 타대오를 한자식으로 표기해서 부른 것입니다.
복음서들에서는 이렇게 유다와 타대오로 이름이 달리 표기돼 있을까요. 어쩌면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의 저자들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을 혼동하지 않도록 일부러 타대오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의 그리스식 이름이 타대오라는 설도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교회 전통은 초기부터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타대오를 같은 인물로 여겨왔습니다.
성경에서 열두 사도 명단 외에 이 유다의 이름이 나오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2절로, "유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라고 나오지요. 이 표현으로 미뤄 초기 교회에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유다 이스카리옷을 구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전통은 오랫동안 이 유다가 유다 서간을 쓴 저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 1,1)와 동일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인 셈입니다. 마르코복음 6장 2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고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말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들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유다서 저자이자 예수님의 형제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의 하나로 야고보의 아들이자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유다에 대해서도 더 확인할 길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전승이나 전설에 따르면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혈당원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또 위경인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에서는 유다가 시몬과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시몬이 톱질로 순교당한 데 비해 유다는 창에 찔려 순교했거나 또는 도끼로 참수형을 당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 사도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유다 사도 축일을 시몬과 같은 날인 10월 28일에 지내는데, 이 또한 시몬과 유다가 함께 활동하고 순교했다는 전승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제985호(2008년 9월 7일), 이창훈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09 - 12사도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13) 마티아
마티아는 예수님께서 친히 사도로 택하신 제자는 아닙니다. 마티아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 대신으로 사도단이 뽑은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 이야기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는 마티아 사도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본 마티아
신약성경에서 마티아는 사도행전에서 딱 두 번 나옵니다.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하는 대목에서입니다(사도 1,13.26).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한 사도는 다른 제자들과 성모님과 다른 여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것은 이때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당시 모습(사도 1,15-26)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형제들이 모여 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직책을 대신할 사도를 뽑는 문제와 관련해서 발언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서에서"(사도 1, 21-22) 사도를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제안에 따라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가려서 앞에 세우고 나서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마티아의 신상에 대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티아는 예수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사도들과 줄곧 함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티아는 처음부터 열두 사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측근에서 따라 다니던 가까운 제자에 속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겠지요. 후대 전설에 따르면, 마티아가 예수님의 일흔 두 제자(루카 10,1-2) 가운데 하나라고도 하는데,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승과 전설에서 본 마티아
마티아는 사도단에 합류한 후 처음에는 유다 지방에서, 나중에는 콜키스(오늘날 흑해 동부 그루지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티아 사도는 세바스토폴리스(오늘날 흑해 동부 연안 도시 수후미)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가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248?~330)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그후 다시 독일 남서부 국경 도시 트리어로 이장됐습니다.
그러나 다른 설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첫 순교자 스테파노처럼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유다인들은 마티아 사도를 돌로 쳐 죽인 후에 다시 도끼로 목을 쳤다고 합니다. 유해는 나중에 로마로 옮겨졌다가 다시 트리어로 옮겨졌다고 하지요.
트리어로 옮겨진 마티아 사도의 유해는 베네딕토 수도원 성 마티아 성당에 안치됐다고 합니다. 트리어는 마티아 사도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트리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의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마티아 사도 축일은 5월 14일에 지냅니다. 예전에 부르던 '마지아'라는 세례명은 마티아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마티아 사도의 이름과 관련해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마티아라는 이름은 당시 그리스어 권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마티티아'에서 유래하는데 "야훼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흔한 이름인 마티아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침내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해 열두 사도단에 합류한 것은 그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야훼의 선물", "하느님 은총"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은 우리 자신이 잘 나서라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보시는지요.
[평화신문, 제987호(2008년 9월 28일), 이창훈 기자]
성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 ‘바오로 해’
(2008년 6월28일~2009년 6월2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바오로 해’를 선포하면서 특별히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로 신자들이 성 바오로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하고 따라서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파를 초월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며 일치를 모색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 해’ 기간 동안 매월 첫째 주 서울주보에 바오로 사도의 생애, 서간, 사상, 영성 등에 대한 내용을 안내한다.
바오로 사도, 그는 누구인가?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긴 수염, 마른 뺨의 평범한 얼굴, 보통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손에는 성경과 칼을 들고 있다. 허공을 향해 무언가를 응시하는 두 눈에서 비범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성화에 나오는 바오로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지난 6월 28일, 바오로 사도의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바오로 해’의 막이 열렸다. 바오로 사도가 2000년 만에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바오로 사도의 중요성은 그리스도 교회 역사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모범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교를 특정 민족과 지역에 머물지 않는, 인류 전체의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주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초대 교회 때 유다교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이 무척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초창기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심지어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다교를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충돌하기까지 했다. 교회가 분열될 위기였던 것이다. 이런 어려운 사태를 수습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주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한 인물이 바로 바오로이다.
바오로 사도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라는 과장된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분명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와 두 기둥을 이루는 초대 그리스도교 최고의 지도자였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무려 13권을 바오로가 직접 쓰거나 그의 제자들이 기록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학,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고 열렬한 그리스도의 추종자, 이방인의 사도로 변모했으며 끝내 순교로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고 하겠다.
바오로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다(필리 3,5; 갈라 1,14). 열심한 유다인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물론 가르침의 골자는 성경과 율법이다. 유다인의 삶의 중심은 철저한 율법 준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비참한 역사 속에서도 줄기차게 정체성을 간직하며 살아오게 한 힘은 야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힘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 중에서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느님의 율법을 복종하고 지키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생활했다. 사울(사울은 바오로가 가졌던 유다식 이름이다)은 율법과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데 열심이었던 율법학자였고 바리사이파였다(필리 3,5; 사도 23,6). 한 마디로 그는 출세가 보장된 전도양양한 유다인 사회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실제로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갈라 1,13)라고 고백했다.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백성들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는 스테파노를 체포해 최고의회에 넘기고,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돌팔매질해 죽였다. 사울은 현장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그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보통의 유다인들처럼 스테파노가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하고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는 것에 크게 반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그는 유다교의 호위병처럼 활동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유는 사실 율법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의 눈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율법과 유다 전통을 뒤흔드는 위험한 사람들이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파 유다인이었던 사울은 이 같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보고 격분했을 것이다. 바오로의 유명한 회심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사도 9,2)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일어난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며 정점이 되었다.
사울과 그 일행이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사울의 둘레를 비췄다. 그리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울은 땅에 엎드려 두려워 떨며 말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바오로는 주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졸지에 소경이 된 바오로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다. 바오로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난생 처음 당한 일에 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는 사흘 동안 어둠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길이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렬한 빛과 함께 만났던 예수님, 그분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분이셨다. 그런데 또한 그분은 분명히 자신 앞에 살아 계셨다. 그는 비로소 그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었다. 동시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순간 바오로는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강철같이 단단한 사나이, 바오로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는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 후 바오로는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놀라운 업적과 활동자체가 그리스도 현존의 기적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사건으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분노케 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회심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유다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다.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열렬하게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박해하던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 당연히 유다인들의 의심과 비난, 미움을 받았다. 또한 교회 내적으로도 끊임없이 “당신에게 사도의 자격이 있는가?”라는 곤혹스런 질문을 받아야 했다. 유다인들에게 붙잡혀 돌팔매질을 당하고, 감옥살이도 했다. 교회 안팎으로 공격과 비난을 받았지만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바오로는 20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교회 역사상 인류 복음화의 최고 사도이다. 그가 선포한 복음의 메시지와 감동적인 삶은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3일 서울대교구 주보 5-6면]
첫댓글 와.... 이 많은 자료를...! 대단하세여! 글구 감사합니다 !!!
별말씀을요. 생각보다 시간 많이 안 걸렸어요. ^^; 고맙습니다.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강의 전 질문으로 저희가 많이 부족한 지식을 채우게 되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