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참판 윤공 신도비(參判尹公神道碑)
지난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 흉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선조(先朝: 숙종)의 대신(大臣)과 노장(老將)을 모조리 제거한 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짓을 하려고 하였다. 윤각(尹愨) 공은 무장 가운데 가장 위엄과 명망이 있는 분으로 이 때문에 화를 당했다.
당시 무옥(誣獄)이 크게 일어났는데, 공의 죄안(罪案)이 된 것은 두 죄수가 가정한 말 뿐이었다. 공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끝내 견지하며 놓아주려 하지 않아 삼 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 아, 천하의 원통한 일 중에‘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보다 큰 것은 없으니, 지금도 혈기가 있는 자라면 모두 팔뚝을 휘두르며 절치부심한다. 지금 공이 죽은 일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공은 자가 여성(汝誠)이며 선조는 파평(坡平) 사람이다. 고려 때 시중을 지낸 돈(敦)이 함안(咸安)으로 나가 다스리면서 자손들이 그곳에 본적을 두었다. 우리나라에서 판봉상시사를 지낸 기견(起畎)은 영의정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구(遘)를 낳았는데 병조 참판을 지냈다. 4대가 지나 참의 의(顗)라는 분이 있었고, 이분이 휘 우진(又進)을 낳았는데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욱(㮋)을 낳았는데 선전관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익상(翊商)을 낳았는데 진사시에 합격하고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부친이다. 대사헌공의 본생부(本生父)는 천뢰(天賚)인데, 무략으로 현달하여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공은 본디 장수 집안 자제인데 대사헌공은 우암(尤菴송시열) 선생이 남쪽으로 귀양 갈 때 유생들과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고, 공의 형 원(愿)은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당화(黨禍)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귀양 갔으며 공 역시 이때 과거를 그만두었으니, 그 연원이 이와 같다.
공은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무겸에 제수되고 선전관으로 옮겼다. 숙종께서 후원에서 열무(閱武)하다가 공의 준수한 풍채를 보고 지목하며,
“저 수염 난 사람은 누구인가?”
하였다.
비변사 낭청을 겸하자 정승 이세백(李世白)이 큰 그릇으로 여겨 자문하여 결정한 일이 많았다.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품계를 뛰어넘어 도총부 도사에 임명되고 경력으로 승진하였으며 초계 군수(草溪郡守)가 되었다. 영남 사람은 모질고 어리석어 부자 사이에도 서로 너나들이 하였는데 공이 글을 지어 타일렀다.
또 형제간에 소송하는 자는 지성으로 타이르니 풍속이 점차 변하였다. 얼마 후 묘당에서 차례를 따르지 않고 발탁할 자를 천거하였는데, 공이 으뜸이었다. 전주 영장(全州營將)에 임명되고 조정으로 들어가 금군장(禁軍將)이 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성진진(城津鎭)이 고을 아래에 있어 으레 방어사를 겸하였는데, 지위가 목사보다 낮아 매번 모욕을 당하여 좋지 않은 감정이 쌓였다. 공이 가서 자신을 낮추면서도 체통을 지키니, 북쪽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전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707, 숙종 33),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명되고 얼마 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옮겼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 바다로 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있어 인재를 모았는데, 정승 이이명(李頤命)과 우리 중부(仲父) 귀락공(歸樂公)이 공을 천거하였으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금위영 중군(禁衛營中軍)에 임명되었으니, 이 역시 이 정승이 천거한 것이었다. 마침내 가선대부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병사(南兵使)에 임명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712, 숙종 38), 청나라 사신이 와서 백두산(白頭山)의 경계를 다시 정하려 하였기에 조정에서 공을 시켜 가서 보게 하였다. 공이 몸소 험한 곳을 다니며 산천의 형승을 몹시 자세히 알아내어 지도를 만들어 올리니 성상께서 몹시 칭찬하셨다. 겨울에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옮겼다가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훈국 별장, 어영청 중군, 금군 별장을 지내고 부총관을 겸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715, 숙종 41),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거쳐 통제사가 되었다. 지추공(이천뢰)이 예전에 이 직임을 맡아 성곽을 대거 수리하였으나 오래되어 훼손되었는데, 공이 다시 찬란하게 일신하였다. 공은 침착하고 중후하며 관대하면서도 엄격하였다. 판결에 뛰어나고 치밀하게 관리하여 비록 관리의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신중하여 비용을 절약하니,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창고가 넘쳤다. 특히 폐단을 혁파하여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는 데 힘썼는데, 비록 조정의 명령에 관계되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반드시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실질적인 혜택을 강구하였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많이 얻었다.
무술년(戊戌年, 1718, 숙종 44), 총융사에 임명되었다. 상벌이 엄명하여 군중이 숙연하였다.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후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금군 별장으로 대궐에 숙직하였는데, 성상이 사대(賜對)하고 탄식하기를,
“내가 이렇게 눈병이 들어 경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한스럽다.”
하였으니, 지우를 입은 것이 이 정도였다.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경종이 처음 즉위하자 조중우(趙重遇)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 장씨(張氏)의 작위와 호칭을 복구하도록 청하였다가 대간의 말 때문에 국문을 받게 되었다. 공은 상을 당해 집에 있었는데, 어떤 이가 나가지 말라고 권하자 의연히 말하기를,
“화가 두려워 일을 피하는 짓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다.”
하였다.
병조로 옮겼을 때 최석항(崔錫恒)이 장관이었는데, 자기 사인(私人) 남태징(南泰徵)을 곤수(閫帥)에 의망하자 공이 안 된다고 고집하며,
“이 사람은 등용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훗날 남태징은 과연 역모로 주살당하였다. 훈련원 도정과 경연 특진관을 겸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 체직되어 좌윤에 임명되고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다. 겨울이 되자 시사가 일변하여 공은 삼화(三和)로 귀양 갔다. 얼마 후 체포되자 아들들이 곁에서 울부짖었는데,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하늘처럼 밝은 성상이 계시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스스로 변론한 뒤 제주(濟州)로 이배되었으나 중도에 다시 체포되었다. 온갖 일을 꾸며내었으나 죄를 만들기에 부족하여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 모두 일곱 번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처리를 말소하고 혹독하게 고문하였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는 사람들이 장하다고 여겼다.
마침내 갑진년(甲辰年, 1724, 경종 4) 1월 10일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 60세였다. 손수 유서를 써서 아들들을 경계하였는데, 자획이 평소와 같았다. 공이 감옥에 있을 때 많은 저자의 백성이 공의 아들들에게 죽을 먹이면서 ‘예전에 공이 원통한 일을 해결해 준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다.
지금 성상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주살하고, 이듬해 봄에 원통하게 죽은 신하들의 관직을 모두 회복해주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윤 아무개의 일은 지극히 원통하고, 또 다른 무신들과 자별하다.”
하고, 특별히 병조 판서에 추증하고 자손들을 녹용하였다.
그러다가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 3) 흉당이 다시 정권을 잡자 증직을 거두었다. 신유년(1741) 가을 다시 돌려주었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매우 독실하여 계모를 잘 섬기고 형제와 우애하고 친족을 후대하였으며 자제에게 겸손하고 신중하라고 가르쳤다. 평소 지낼 적에는 담박하여 기호가 없었으며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청탁을 일삼지 않았다.
매일 일찍 일어나 관을 바로 쓰고 띠를 두르고 손님을 맞이하고 문서를 처리하는 데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여가가 있으면 책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예서에 가장 익숙하였다. 궤안과 책상자를 항상 제자리에 두어 가로놓이거나 주름지지 않게 하며 말하기를,
“바르지 않은 것을 보면 내 마음이 불안하다.”
하였으니, 타고난 자질이 이처럼 아름다웠다.
이 때문에 공을 만난 자는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한가하여 항상고상한 시를 읊고 투호(投壺)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시비와 선악의 구분은 칼로 두 조각 낸 것처럼 하여 사생과 화복이 눈앞에서 결판나더라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흉당이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한 이유는 이것이었다고 한다.
공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혼인하였으니 병사 행성(行成)의 딸이다. 어질고 후하며 부덕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다시 광주 김씨(光州金氏)와 혼인하였으니 진사 명뢰(命賚)의 딸이다. 화가 일어나자 규방에서 나오지 않고 3년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며 밤이면 한데 서서 하늘에 빌었다.
상(喪)을 당하자 밤낮으로 슬피 통곡하며 지극히 슬퍼하다가 병이 들었다.사는 집 처마 밖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는데 모두 흰색이었다.공보다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일이 알려지자 그 절행을 표창하는 정려가 내렸다. 공은 처음에 공주(公州)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1) 9월 본주(本州) 한양동(漢陽洞)의 오좌(午坐)의 언덕으로 옮기고 두 부인을 모두 부장하였다.
이부인은 1남을 두었으니 참봉을 지낸 우정(禹鼎)이다. 김부인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계정(啓鼎)과 진사를 지낸 창정(昌鼎)이며 사위는 사인(士人) 신철(申㬚)이다. 우정의 아들은 광연(光淵)이며 딸은 사인 이이병(李頤炳)에게 시집갔다. 사위 신철의 아들은 광주(光胄)이며 그밖의 아들들의 남녀는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성고(聖考숙종)께서 재위하실 적에 / 聖考在宥
북소리 듣고 장수를 생각하셨네/ 鼙鼓興思
공이 무인으로 모실 적에 / 公侍武帳
분주하면서도 위의가 있었네 / 蹌蹌有儀
왕이 이르기를, 누구인가 / 王曰誰與
저 아름답고 수염 난 사람은/ 彼美而偲
아, 내게 훌륭한 신하 있으니 / 嘻予有臣
간성과 같은 자질이로다 / 干城之姿
굳센 힘으로 사방에 가니 / 剛力四方
어디를 가더라도 마땅했네 / 靡適不宜
치적이 성대하니 / 厥績旣茂
중외의 사람들이 의지했네 / 中外攸毗
조정에 들어가 금군을 맡아 / 入典禁旅
한번 성상께 다가갔네 / 一近丹墀
용안이 예전과 달라져 / 天顔非昔
성상께서 탄식하셨네 / 天語絫欷
신하는 절하고 머리 조아리니 / 臣拜稽首
눈물이 턱까지 흘렀네 / 有淚橫頤
병조 참판이 되었으니 / 夏卿之貳
기보(祈父)의 아래였네 / 祈父之埤
어찌 국궁진췌하여 / 曷不盡瘁
남다른 지우에 보답하지 않으랴 / 以答殊知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 天崩地坼
거센 불길이 사방으로 퍼졌네 / 劫火四馳
감옥에서 죽는 원통함은 / 北寺之寃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슬퍼하네 / 今古同悲
나는 하늘에 호소하고 싶지만 / 我欲籲天
아득하니 어디로 가리오 / 莽蕩何之
오직 한결같은 마음은 / 惟有一心
죽어도 변치 않았네 / 之死靡緇
돌아가 선왕을 뵙더라도 / 歸拜先王
부끄러운 말 없으리라 / 庶無愧辭
금강은 넘실거리니 / 錦水湯湯
공의 이름 밝게 전하리라 / 公名昭垂
먼 훗날의 사람에게 / 有來千億
이 명을 보이노라 / 視此銘詩
--------------------------------------------------------------------------------------------------------------------------------------------------------------------------
[脚註]
[주01] 참판 윤공 신도비:
이 글은 윤각(尹愨)의 신도비이다. 윤각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성(汝誠)이다. 1664년(현종 5) 2월 26일에 태어나 1724년
(영조 즉위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그런 …… 모른다〔莫須有〕:
송(宋)나라 악비(岳飛)가 모함을 받았을 때 진회(秦檜)가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며 결국 악비를 죽였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아무 근거 없이 남을 모함하는 것을 말한다.《宋史 卷365 岳飛列傳》
[주03] 고상한 …… 같았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정로장군(征虜將軍)을 지낸 제준(祭遵)을 말한다. 제준이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막하에 유술(儒
術)을 갖춘 사람을 등용하고 주연을 베풀 때는 고아한 노래를 부르고 투호(投壺)를 하였다고 한다.《後漢書 卷50 祭遵傳》
[주04] 사는 …… 흰색이었다:
흰 제비는 이변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윤각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05] 북소리 …… 생각하셨네:
《예기》〈악기(樂記)〉의 “군자는 큰북 작은북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臣.]”라는 구
절을 인용한 것으로, 국난을 당하여 뛰어난 장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주06] 저 …… 사람은:
《시경》〈노령(盧令)〉의 “사냥개의 사슬고리가 두 겹이니 그 사람 아름답고 또 수염이 많네.[盧重鋂, 其人美且偲.]”라는 말을 인
용한 것이다.
[주07] 기보(祈父):
군사를 담당하는 고대의 관직으로, 여기서는 병조 판서를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