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참의 김공 묘갈명(贈參議金公墓碣銘)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 25), 선조께서 의주로 행차하여 글짓는 신하에게 교서를 짓게 하여 팔도의 의병장을 격려하셨다. 그 글에,
“봉산(鳳山)의 김만수(金萬壽) 등은 의병을 모아 적을 몹시 많이 죽였다. 이들의 충성과 의리를 내가 몹시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그 뒤 김만수는 누차 전공을 세웠으며, 세상을 떠나자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우 세 사람은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인데,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으니, 구수가 바로 공의 이름이다.
나는 이미 판서공을 위해 묘갈문을 지었으니 공의 형제의 공로와 용기는 함께 전해질 것이기에 다시 자세히 쓰지는 않는다. 공은 진중에 있으면서 계획한 것이 많았다. 공이 말하기를,
“병법에 ‘무기가 날카롭지 않으면 병사를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의 장기는 조총이니, 우리의 활과 화살로 당할 수 없다. 만약 긴 창과 큰 검으로 밤을 틈타 급습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판서공이 그 계책을 따라 창검을 대거 주조하여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이로 인해 적을 크게 꺾었다. 부거원(富車原) 전투에서 공이 먼저 적진에 올라 함락시키고 적장 한 사람의 목을 베었다. 하루는 거센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공이 말하기를,
“유기(劉錡)는 우레 치고 비 내리는 틈을 타서 순창(順昌)에서 승리하였으니, 오늘밤 적의 병영을 공격할 만하다.”
하였는데, 과연 크게 이겼다.
그의 기발한 책략이 이와 같았다. 난리가 평정되자 조정에서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였다. 장수들 중에는 스스로 제 공을 말하는 자도 있었으나 공은 홀로 그렇게 하려 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 같다. 아들이 위급한 아버지를 구하고서 감히 스스로 말하겠는가.”
하였으니, 자랑하지 않음이 또 이와 같았다.
공의 자는 충로(忠老)이며 광산(光山) 사람으로 신라 왕자 흥광(興光)의 후손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찰방 윤하(潤河), 경원 판관(慶源判官) 국니(國柅), 훈련원 판관 대유(大有)가 공의 3대이다. 외조는 낙안(樂安) 오세훈(吳世勳)으로 감찰을 지냈다.
공은 가정 경신년(庚申年, 1560)에 태어났다. 외모가 씩씩하고 젊어서 병법을 읽어 지략이 있었다.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공의 작은형 백수(百壽)와 조카 광협(光鋏)이 전투에서 죽자 공은 항상 마음속으로 애통해하며 속세에 뜻이 없어 시골로 돌아왔다.
무오년(戊午年,1618, 광해군 10), 요하(遼河)를 건너가 싸울 때 공을 기용하여 종군하게 되었는데, 화살에 맞아 수레에 실려 돌아왔다. 기미년(1619) 9월 18일 세상을 떠나 본군 우기산(禹岐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숙종께서 특별히 공조 참의에 추증하고, 고향 사람들이 또 판서공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공의 배위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언함(彥涵)의 딸이다. 아들 광련(光鍊)은 훈련원 주부를 지냈고, 딸은 윤시우(尹時遇)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으로 광전(光銓)이 있다. 광련은 5남을 두었으니 현(玹), 환(瓛), 숙(琡), 정(珽), 진사 원(瑗)이다.
아, 국가가 난리를 당했을 때 후한 녹봉을 받던 높은 관원들은 제 몸과 처자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공의 형제는 시골의 무인으로 임금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모두 나라를 위해 절개를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니, 김씨 집안에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이 어찌 이리도 많은가.
아, 이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후손 사집(思集)이 가장(家狀)을 가져와 글을 청하기에 내가 그 대략을 엮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왜란이 일어났으니 / 往昔寇亂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이었네 / 龍蛇之中
공은 초야에서 일어났으니 / 公奮草莽
한 집안에 영웅이 많았네 / 一門群雄
상처를 싸매고 피를 삼키며 / 裹瘡飮血
함께 백 번 싸웠네 / 百戰與同
어떤 이는 살고 어떤 이는 죽어 / 或生或死
각기 충성을 다하였네 / 各殫厥忠
그러나 공에게 위대한 점 있어 / 然公有大
대수장군(大樹將軍)의 기풍이 있었네 / 大樹之風
자식이 위급한 아버지에게 가면서 / 子赴父急
감히 스스로 공로를 말하랴 / 敢自言功
이 한마디 말로 / 惟此一言
공을 알 수 있네 / 可以觀公
내가 그 미덕을 밝혀 / 我昭厥美
새겨서 영원히 보이리라 / 刻示無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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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증 …… 묘갈 :
이 글은 김구수(金九壽)의 묘갈명이다. 김구수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충로(忠老)이다. 1560년(명종 15) 태어나 1619년(광해
군 11) 9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나는 …… 지었으니 :
본서 제37권에 실려 있는 김만수(金萬壽)의 묘갈〈증 판서 김공 묘갈(贈判書金公墓碣)〉을 말한다.
[주03] 유기(劉錡)는 …… 승리하였으니 :
유기는 남송(南宋)의 장군이다. 1140년 금(金)나라가 순창을 포위하자 유기는 장사 5백 명을 거느리고 비 내리고 번개 치는 밤을
틈타 적진을 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宋史 卷366 劉錡列傳》
[주04] 무오년 …… 때 :
1618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 등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 정벌에 나선 일을 말한다.
[주05] 대수장군(大樹將軍) :
후한(後漢)의 장군 풍이(馮異)는 전투를 마치고 장수들이 공을 다툴 때 혼자 큰 나무 아래에 피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대수장군이
라고 불렀다.《後漢書 卷17 馮異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