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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근혜팬클럽 목련봉사단 원문보기 글쓴이: 白山
국산차는 짧은 시간에 대단한 발전을 이뤄냈다. 하지만 3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외국 모델을 도입해 생산하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보면 디자인도 허술하고 기술도 대단치 않지만 하나하나가 국산차의 밑거름이 됐다. 이런 자동차들의 광고를 보는 것도 국산차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자 또 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1.2리터 엔진은 65마력의 힘을 발휘해 작은 차체를 가볍게 이끌었다. 최고 속도도 145km/h나 됐다. 1971년 모델 체인지된 124의 최고 속도는 150km/h까지 올라갔다. 피아트 124의 1.2리터 엔진은 페라리의 아우렐리오 람프레디가 설계한 엔진이기도 하다. 124는 1973년까지 6,800대가 팔렸다. 꾸준한 판매를 보였지만 피아트와의 계약이 결렬돼 단종 됐기 때문이다. 아시아자동차는 피아트 124를 끝으로 승용차 사업을 접고 상용차에만 집중했다.
브리사는 62마력의 985cc 엔진을 얹었다. 하루 유지비가 2천원이라는 광고 문구에서 알 수 있듯 경제성을 가장 큰 무기로 내세웠다. 한때는 브리사의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기도 했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브리사가 출시되던 당시는 전 세계가 오일 파동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연비 좋은 차가 각광을 받았었다. 브리사의 연비는 23km/L였다. 연비 좋고 내구성도 좋았던 브리사는 출시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어 1974년부터 81년까지 7만 5,987대가 생산되는 성공을 거뒀다.
로얄 시리즈는 인기만큼이나 다양한 모델이 나왔다. 대우는 80년대 들어 살롱과 프린스, XQ, 살롱 수퍼, 프린스를 내놓았고 이들 모델은 고급차 오너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80년에 나온 로얄 디젤은 경제성을 강조한 모델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큰 차체와 맞지 않는 1.5리터 가솔린 엔진 모델(XQ, 듀크 등)은 힘이 없다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다.
엘프는 2.5톤급 중형 트럭으로 2,775cc 85마력 디젤 엔진을 얹었다. 강력한 엔진과 동급에서 가장 넓은 적재함을 내세워 자영업자에게 어필했다. 광고 모델로는 당시 큰 인기를 누렸던 권투선수 김태식을 내세웠던 게 눈에 띈다. 엘프는 2.5톤 이외에도 1.4톤과 3톤 보디도 나왔다. 새한을 인수한 대우는 1987년 엘프2를 내놨지만 인기는 얻지 못했다.
GM은 월드카를 목표로 유럽의 자회사 오펠에게 카데트를 개발케 했다. 일본의 이스즈는 카데트를 자국 시장에 맞게 개량했고 이를 들여온 것이 새한자동차의 제미니였다. 제미니는 경쟁 모델에 비해 주행 성능이 좋은 것은 물론 트렁크도 넓었다. 1977년 출시돼 4년 동안 2만대 가까이 생산됐다.
65마력의 디젤 엔진은 최고 속도가 100km에 불과했지만 도심 운행에는 충분한 성능이었다. 적재 하중은 1톤이 채 되지 않았다. 차후 하드톱 모델도 출시됐다. 현재는 박물관에 2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아트 132에는 112마력의 힘을 내는 2리터 엔진이 올라갔고 최고 속도는 171km/h에 달했다. 132 사이즈의 소형차에 2리터 배기량은 그야말로 호화 엔진이었고 국내 첫 DOHC 엔진이기도 하다. 변속기도 다른 모델과 달리 5단이었다. 기아산업이 생산한 피아트 132는 부품의 국산화율이 80%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초기 생산분에는 피아트 132 엠블렘이 장착되지 않기도 했다.
기아는 마쓰다의 봉고를 들여와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적 이유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때문이다. 트럭만 만들어서는 수익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기가 좋자 1987년에는 파워 봉고, 89년에는 와이드 모델을 내놓으면서 꾸준한 인기를 살렸다. 봉고는 베스타와 프레지오로 모델 체인지 됐고 지금은 트럭 이름에만 쓰이고 있다.
하이 디럭스 모델의 경우 로얄 살롱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해 최대한의 고급스러움을 노렸다. 엠블렘도 왕관 모양이었고 트렁크도 맵시보다 커졌다. 광고 카피에서도 품위가 안전, 경제성이라는 말 보다 먼저 나온다. 맵시-나에는 85마력의 XQ 엔진이 올라갔고 이는 대우가 처음으로 자체 개발한 엔진이다. 맵시-나는 자동변속기도 고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