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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권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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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여 점, 역대 최대 규모의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이 12일 막을 내린다. 전시작 ‘나무’(1986)를 관람객이 휴대폰에 담고 있다. 뉴시스
23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개막한 지 140일이 넘어서 볼 사람은 다 봤겠다 싶은데, 또 보고 싶어 온답니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얘기입니다. 폐막을 나흘 앞둔 지금도 하루 평균 1900명 가까이 찾아와 전시장은 늘 북적입니다.
‘공기놀이’ ‘소녀’ 등 전시장 들머리의 초기작은 2021년 이건희 삼성 회장 사후 기증품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1488점 중 작가별로는 장욱진의 그림이 69점으로 유영국·이중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증작 중 26점, 리움미술관과 이 회장 유족들이 빌려준 10여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덕수궁의 장욱진 회고전을 얘기할 때 이건희 컬렉션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마스터피스’는 설을 맞아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기사에 댓글을 달아 주시는 독자 다섯 분께 최근 출간된 책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사진)을 보내드립니다. 장욱진 그림과 함께 행복한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장욱진,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채, 65x80.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어린 시절 아들 방에 오래 걸어뒀던 그림이에요.
이건희 컬렉션의 첫 전시 ‘한국미술명작’을 보러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은 이 그림 앞에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한다. ‘공기놀이’ 얘기다. 다가가 화가의 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장욱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평생 까치와 나무와 가족을 공책만 한 화폭에 담으며 “작은 것들을 친절하게 봐주라”던 장욱진이다. 언제 이런 낯선 그림을 그린 걸까?
지금 5학년인데 졸업을 하고는 미술학교로 가겠다고 하니, 앞으로 기대할 바가 있을 줄 압니다.
1938년 장욱진(1917~90)이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 중등부에서 특선, 그중에서도 최고상에 꼽혔을 때 양정중 미술부 지도교사가 신문에 한 인터뷰다. 86년 뒤, 제자가 이렇게 사랑받는 화가가 될 줄 스승은 짐작이나 했을까. ‘공기놀이’는 이때의 수상작이다.
‘공기놀이’가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권근영 기자
흰 저고리와 행주치마에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하늘색·분홍색 치맛자락을 추스른 채 쪼그려 앉은 몸의 덩어리 감은 살렸고, 소녀들의 표정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다. 서울 내수동 집 한옥 안채 앞에서 하녀들이 공기놀이하는 정경을 학생 장욱진은 인상파 화가처럼 포착했다.
그림은 동료 화가 박상옥(1915~68)이 간직하다가 그의 사후 삼성가로 들어갔다. 장욱진의 장녀인 장경수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명예관장은 “1970년경 박상옥 선생님의 아드님이 ‘사 주실 수 있겠냐’며 가져왔다. 아버지는 ‘하도 이 그림을 좋아해서 줬는데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네’ 하고 반기며 흐려진 인장 대신 새로 서명을 해주셨다”고 돌아봤다.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삼성을 연결해 드렸다”고 덧붙였다.
김영희 디자이너
장욱진을 화가로 만들어 준 ‘공기놀이’
장욱진은 107년 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를 집안 어른처럼 모셨다. 열여섯에 고모에게 빗자루가 부러져 나가도록 맞으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데, ‘공기놀이’가 특선을 차지하고 상금 100원도 받으면서 가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39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 미대)로 유학을 떠난다.
장욱진, ‘소녀’, 1939, 캔버스에 유채, 29x13.7㎝.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장욱진 세계의 태동을 보여주는 그림은 ‘소녀’(1939)다. 고향 선산 산지기 딸의 옆모습이다. 어두운 부뚜막을 배경으로 선 맨발의 소녀가 투박하지만 믿음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소녀는 3등신으로, 화면에 꽉 채워 그렸다. 22세 장욱진은 신체 비례도, 화면 비율도 부러 무시했다. 그릴 줄 몰라서가 아니다. 직전에 특선을 받은 ‘공기놀이’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스스로 중요하다 여기는 것을 강조하며 감성적으로 치고 들어갔다. A4 용지의 절반 남짓한 크기의 캔버스를 꽉 채워 그린 그림은 작지만 작아 보이지 않는다.
장욱진은 이 유화를 소중히 지니다가 12년 뒤 뒷면에 ‘나룻배’를 그렸다. 1951년, 고향에 피란 와 지낼 때였다. 그림 재료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다. 이고 지고 장에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장욱진, ‘나룻배’, 1951, 캔버스에 유채, 13.7x2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맏딸 이순경(1920~2022)씨와 1941년 결혼한 장욱진은 진지한 화가였지만 생활력 있는 남편은 아니었다. 이 씨는 부산 피란 시절에는 시장에서 국수를 삶아 팔았고, 충남 연동에서는 시어머니가 짜 주는 참기름을 팔았다. 1954년부터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서점(동양서림)을 운영했다. 이 씨는 연동 시절 ‘소녀’와 ‘나룻배’ 양면화를 친구에게 선물했다. 동창들을 모아 참기름 판매를 도와준 게 고마워서다. 아끼던 그림을 남에게 선물했다고 장욱진은 화를 내며 섭섭해했다.
직업은 ‘까치 그리는 사람’… “나는 해를 향해 날아가는 새”
유파의 시대였다. 1960, 70년대는 앵포르멜(비정형 추상화 운동)부터 기하학적 추상, 단색화까지 서구식 추상미술을 실험하는 조류가 전방위로 퍼졌다. 한국청년작가연립전·오리진 등 화가들은 부지런히 뭉쳤다. 그러나 장욱진은 이런 흐름에서 저만치 떨어진 채 개인으로 살았다. 구부려 앉아서 작은 화폭에 까치·개·가족·나무·집을 그렸다. 그림이 작다고, 아이 같다고 쉽게 폄하됐지만 꾸준히 그렸다.
그라고 왜 갈등이 없었을까. 장경수 관장은 “어느 날 문득 추상화를 그려보는 아버지 뒷모습이 쓸쓸하고 안타까웠다”고 돌아봤다. 조류와 유파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에게 맞는 것,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고수한 덕에 오늘날 관객들은 그의 그림을 누릴 수 있게 됐다.
1989년작 ‘노인’, 오른쪽 아래 ‘旭(욱)’이라고 서명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그린 ‘노인’(1989)에선 흰옷 입은 남자가 나무 너머 밤하늘의 초승달을 올려다본다. 유화 물감을 묽게 해 수묵이 번지듯 효과를 냈다. 그리지 않은 여백이 초승달이다. 검은 하늘을 가른 초승달이 노인을 피안으로 안내하는 것 같다.
장욱진, ‘까치’, 1958, 캔버스에 유채, 40x31㎝.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은 까치였다. ‘ucchin. C.’라고 영문 서명을 하던 그는 만년에 한자 ‘旭(욱)’으로 서명을 바꿨다. 해를 뜻하는 ‘日(일)’자 왼쪽에 ‘九(구)’를 날아갈 듯 썼다. 장경수 관장은 “어느 날 제자 한 분이 ‘선생님 그림은 한국적으로 그리시는데 서명은 영문이 그게 뭐예요’ 했다는 거예요. 혼자서 ‘旭’ 자를 이렇게 저렇게 연습해 보시더니, ‘나는 해(日)를 향해 날아가는 새다’ 하셨어요”라고 돌아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인정받은 그림이 눈만 하얗게 남겨둔 새까만 까치, 그때부터 일생 까치와 함께하며 “나는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장욱진이다.
이건희 회장 방에 걸렸던 ‘앞뜰’
장욱진에게 그림은 파는 게 아니라 주는 거였다. 그런 그에게 국내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사 간 상대도 삼성가였다. 장경수 관장은 “호암미술관 개관(1982) 전에 요청이 와서 아버지께서 ‘자동차 있는 풍경’을 비롯한 두 점을 골라드렸다”고 말했다. “경기여고 동기동창인 홍라희 전 관장에게 고마움이 많은데, 후에 ‘앞뜰’도 잘 간직하고 있다고, 남편 방에 걸었다고 들었다”라고도 전했다.
이건희 회장 방에 걸렸던 그림으로 전해지는 ‘앞뜰’(1969)은 十자 구도로, 이건희 컬렉션 ‘마을’(1984)은 王자로 잘 짜인 대칭 구도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은 작은 화폭 속에 큰 세계를 꿈꿨다. 그는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며 손 뻗어 그릴 만큼의 크기를 선호했다. 분신과도 같던 ‘까치’, 그의 세상을 품는 우주였던 ‘나무’, 시공간을 넘어선 영원의 매개체인 ‘해와 달’을 고심한 대칭 구도로 공책 크기 작은 화폭에 담았다. 가장 친숙한 소재를 놓고 가장 까다로운 안목으로 형식을 실험했다.
철저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철저하게 사물을 보는 눈, 철저한 작업, 철저한 자유. 나는 하루 네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유달리 새벽이 나의 생활세계이고 술이 휴식이고 내 몸을 위해 좋다고 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건만 나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뜻대로 산다는 것은 그대로 하늘의 뜻이기도 하단 말인가. (장욱진, ‘새벽의 세계’, 「샘터」, 1974년 9월)
그와 인연이 있던 이들은 저마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낸다. 서울대 교수 시절 제자들과 오전부터 정문 앞 대폿집에 가서 해 질 녘까지 술을 마셨다든가 하는 얘기다. 그러나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라던 그는 일과 휴식, 즉 그림과 술을 철저히 분리했다. “네 시간 이상의 잠은 낭비”라며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구부려 앉아 그림을 그렸다. 까치·나무·가족, 몇 가지 소재로 하고 싶은 모든 얘기를 하기 위해, 작은 화폭을 요모조모 연구했다. 덜 그린 듯 다 그리는 게 핵심, 어디를 덜어내고 어디서 멈출지가 관건이었다.
고무신 신고 반려견과 함께 한 신갈(용인) 시절의 장욱진. 사진가 강운구가 촬영했다. 사진제공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공기놀이’ ‘소녀’ 같은 초기작부터 만년의 ‘노인’까지, 기증된 장욱진의 그림들은 이건희 컬렉션의 특성을 보여준다. 화려하기보다 푸근하며, 값비싸기보다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그림들이다. 시기별로 차곡차곡 모았고, 기증했다.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군데군데 비어 있던 퍼즐이 맞춰졌다.
RM “욱진 바이브”…‘나’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화가
‘ucchin vibe(장욱진 느낌)’라는 캡션과 함께 떡갈나무 밑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방탄소년단 RM(왼쪽)과 이를 따라한 팬들. 사진 인스타그램
‘ucchin vibe(장욱진 느낌)’.
2021년 말 방탄소년단 RM은 떡갈나무 밑에 편안히 앉은 사진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게시하고 이렇게 적었다. 미국 텍사스의 미술관인 메닐 컬렉션 정원에서다. 장욱진이 즐겨 그린 나무 밑 사람을 흉내 낸 거다. 전 세계 팬들이 RM처럼 나무 밑 사진을 올리며 따라 썼다. ‘ucchin vibe’.
장욱진, ‘나무와 가족’, 1982, 캔버스에 유채, 28x1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66세 되던 1983년 큰딸네 가족이 지내는 파리로 여행 갔을 때 일화에서도 이런 ‘장욱진 느낌’이 묻어난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 관람도 마다한 채 “카페(커피)” “뱅(포도주)” “앙코르(한 잔 더)” 하며 홀로 파리의 카페 문화를 즐겼다고 한다.
1983년 파리에서의 장욱진과 부인 이순경씨. 사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진열과, 서울대 회화과에서 일한 9년을 제외하고는 전업 화가로 지냈다. 서울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덕소로 화실을 옮긴 1963년, 46세 장욱진은 이곳의 흙집 부엌 회벽에 포크와 나이프, 숟가락과 밥그릇, 커피잔, 물잔, 광어와 생선 뼈를 그렸다. 다 그리고는 “됐다. 오늘은 이것으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하자”고 했다.
장욱진, ‘부엌과 방’, 1973, 캔버스에 유채, 22x27.5㎝.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화려한 도시가 싫어 서울 종로구 명륜동 살림집을 떠나 경기도 덕소와 충북 수안보, 경기도 용인에 한옥 시골집을 짓고 살았다. 그 삶의 감각 또한 ‘욱진 바이브’로 예술과 생활의 산뜻한 일치를 보여준다. 그런 검박함과 소탈함으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며 ‘나’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선망하는 장욱진의 심플 미학을 완성했다.
나는 심플하다. 그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 (장욱진, ‘새벽의 세계’, 「샘터」, 1974년 9월)
장욱진의 전작 도록(카탈로그 레조네)을 편찬한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저서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에서 “장욱진의 수공예적 장인정신이야말로 한국적이다. 작은 작품이 지향하는 상상의 공간은 결코 작지 않다”라고 썼다. 작은 그림에서 우주를 보여주고, 몇 가지 소재로 모든 걸 말하는 장욱진에게 어울리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