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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움직이는’ 교회(3) - 살아 있는 교회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1~6절)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새번역>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는 것과 완전히 대척점, 즉 반대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덕분입니다.
썩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55절, 새번역>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새번역>
그래서 교회를 향한 가장 모욕적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말이 있다면, ‘죽은 교회’라는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교회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단어가 함께 쓰여 지고 있다면 소위, 정말 큰 위기라고 느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데 교회는 사람들도 아닌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진단을 받고 있음에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살아 있다는 이름을 얻고 있었던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는 꽤 오랜 시간 안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한 사람들이 볼 때는 살아있는 교회 같아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죽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척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충격적인 판단을 선고하십니다. 살아 있는 이름만 있을 뿐, 죽은 교회라고 말입니다.
‘Living Dead’
좀비를 나타날 때나 쓰는 이 단어가 교회를 향한 단어라니!
그래서 어찌 보면 먼저 사람들로부터 죽은 교회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서 어떻게 살아있는 교회가 될지 환골탈태의 모습을 보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은 교회’라는 평가를 예수님께 듣게 된다면, 정말 자각하지 못한 채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살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너무도 건강해 보였는데 사실은 온 몸에 병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아직 사데 교회에게는,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회야말로 다시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 위한 아주 좋은 예수님의 조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언을 이렇게 한 마디로 압축하셨습니다!
깨어나라! 깨어 있으라! 일깨라! <요한계시록 3장 2절A, 새번역>
사실 예수님은 이미 꽤 많은 횟수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24~26장에는 수시로 ‘깨어 있으라’ 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입니다. 언제 주가 임할는지 알지 못하기에,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기에, 기도하기 위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등의 많은 이야기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깨어나라’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두 구절을 조금 더 집중해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6장 13절입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새번역>
‘깨어 있는다는 것은 먼저 ‘믿음’을 굳게 지킨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좋은 상황, 축복의 상황,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과 눈물, 고통과 아픔의 시간과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은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용감함이 바로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요셉과 같은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처럼 불구덩이도, 사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한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시험이 찾아오고, 수많은 유혹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을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답게, 이 말씀을 거부하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지켜나갈 거룩하게 구별된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힘을 내야 합니다. 힘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만이 미덕이 아닙니다. 힘을 내야 할 때는 반드시 힘을 내야 합니다.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다만 이 힘을 내는 것에는 함께 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어 나오는 고린도전서 16장 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힘을 내되 사랑을 기반으로, 사랑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툼과 전쟁을 위한 힘이 아닙니다. 섬김과 구제와 봉사와 협력을 위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전혀 쓸데없는 곳에 힘을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 나라가 아닌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쓸데없는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말씀을 먹고 힘을 내야 하는데, 정작 힘을 쓴 곳이 말씀과 상관없는 곳이라면 공급원이 서서히 끊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기는 점점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힘을 내서 기도해야 하고, 힘을 내서 찬양해야 하고, 힘을 내서 예배 드려야 하는데, 다른 곳에 힘을 다 소비해 버리고 나면 도무지 깨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측면으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깨어 있으라’ 와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 새번역>
움직이는 교회는 결코 시대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유행에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교회로 가져와서 원동력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닮아가는 세속화를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잠을 자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처럼’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씀을 떠나도 괜찮고, 하나님의 음성을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처럼’을 따라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말씀과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비유가 등장합니다. 바로, ‘열 처녀 비유’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시작과 동시에 이렇게 사람들을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마태복음 25장 2절, 새번역>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이어서 바로 등장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마태복음 25장 3~4절, 새번역>
등불만 가지고, 여분의 기름이 없는 다섯은 어리석다고 기록 되어 있고,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한 다섯은 슬기롭다는 것입니다. 이 들은 한 무리 안에 섞여 있었습니다. 분명히 여분의 통이 없는 다섯은 그 때라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분의 통이 준비한 이들은 괜히 무거운 것을 준비 했나 그냥 두고 올 걸 괜히 가지고 왔는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이 둘은 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늦어지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졸음이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늦어지면서 10명의 등불 모두 그 수명을 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신랑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와 중에 졸음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마 어리석은 다섯도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이 들어 버립니다. 슬기로운 다섯을 보며 그제서라도 어떻게든 기름 장수들에게 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랑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보다 잠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10명 모두 잠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러자 열 처녀는 모두 일어나서, 자신들의 등불부터 손질하였습니다. 모두 거의 꺼져 가고 있었기에, 슬기로운 다섯은 재빠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비해온 여분의 기름으로 다시 등불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들고 오기를 잘 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준비하지 않은 다섯은 나누어 쓸 수 없음을 알고 기름을 사러 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그 때 신랑이 도착하게 됩니다. 등불을 든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지만, 뒤늦게 기름을 사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처녀 다섯은 차갑게 문전 박대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유를 끝내시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5장 13절A, 새번역>
분명 여분의 기름통을 가지고 왔던 다섯 처녀들도 여분의 통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쁜 옷을 입고 등불을 들고 여분의 통까지 든다는 것은 여간 어렵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견뎌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여분의 통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잠이 들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바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은 모습으로 가려고 합니다. 잠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 후회할 것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같이 신랑을 기다리다가도 문전박대 당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정말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든 인형이나 조각이 있어도 인형은 인형일 뿐이고 조각은 조각일 뿐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는 결국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무덤에 아무리 회칠을 한다고 해도 무덤이 아닌 다른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척’ 해도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둠이 환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움직이는 교회는 반드시 살아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소유한 곳이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의 설립 가치관이자 비전을 알고 계십니까? 홈페이지나 블로그, 다음까페, 유튜브에서 모두 보실 수 있고, 예배당 앞 예배시간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 비전을 새삼스럽게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를 살리셨습니다. 내가 살아나 가족을, 가족이 살아나 이웃을,
이웃이 살아나 교회와 공동체를, 교회와 공동체가 살아나 도시를, 도시가 살아나 민족을,
민족이 살아나 열방을! 살아나서 살리는 그런 교회 되게 하소서! Revive and Save!
이렇게 살리는 교회가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이 먼저 살아나 결국 살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를 닮아 소생시키는 힘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하여 그래서 ‘깨어 있음’을 선택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믿음을 지키는 것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거룩하게 살아갈 용기를 가진 용감함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으로 힘을 내어,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깨어 있음은 세상과 같은 모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를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유행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교회는 이름도, 실상도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살아 있는 척을 경계합니다. 생명력이 넘쳐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처럼, 이스라엘에게, 나오미에게, 보아스에게 봄처럼 찾아온 룻처럼, 희망 없는 이 땅에 오셔서 만물을 회복시키신 예수님처럼, 넘치는 생명력을 소유한 살아 있는 교회, 움직이는 교회! 바로, 우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꽃들도 + 창조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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