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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1 - 수나라 멸망후 당나라가 군웅들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통일 하다!
중국인들은 스스로 화하족(華夏族) 이라고 하니 기원전 2070년경에 세워진 우임금의 하(夏)나라를
시조로 생각하는데, 이집트는 기원전 3100년에 세워졌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4000년
경에 시작됐지만 키시와 우루크등 수메르 도시 국가는 기원전 2,900년 경에 출현했으니.....
중국은 1천년 정도가 늦고, 한국은 중국 보다 1천년이 늦으며, 일본은 또 1천년이 더 늦은가 합니다.
고조선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스스로 기록한 문헌은 없으며 기원전 90년경 완성된 사마천의 사기
에 조선열전이 나오는데, 그 보다 앞선 중국 기록은 기원전 7세기《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사서에 처음 등장하지만 현재는《관자》 가 기원전 4세기 경에 직하학궁의
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니.... 고조선이 중국에 알려진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 입니다.
단군 왕검이라고 할 때 "단군은 무당(신관)" 을 뜻하며 3세기 일본의 히미코여왕 역시 무당이고,
무당은 몽골 징기스칸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로마는 전쟁에 나갈 때 반드시 신관이
점을 쳤는데..... 중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나라와 상나라는 전쟁을 할 때 점을 쳐서 하늘의
뜻을 물었으니 거북이나 소뼈를 불에 태워 신관이 해석해 길(吉) 과 불길(不吉) 을 가렸습니다.
고조선이나 삼국 초기에 문자를 만들지 못한건 강역이 작고 인구가 적으며 지방은 부족장들이 다스리는
연맹왕국체제에 관료가 없었으니 통치구조가 간단해 말로 해도 충분했기 때문으로 보는데... 중국인
들은 주변 나라들에 대해 열심히 기록했으니, 중국인들도 한자가 필요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불탄
뼈를 신관들이 해석하다 보니, 이게 갑골문자로 발전하고 한자가 완성되는 데는 천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400년경에 성립된 《산해경》에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 북쪽에 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기원전 9세기경 요서 조양의 십이대영자문화 또는 기원전 6세기 요동 선양(심양)의 정가와자
유형이 발전해 고조선의 원형이 된게 아닐까 추측하는데, 비파형 동검문화와 다뉴기하학문경 청동거울을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집단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봅니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전국책》 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되니...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연나라를 따라 ‘왕’ 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국가가 성립해도 자체 문자가 없어 기록이 없다면 이웃나라 기록에 등장하는걸 보는데, 고조선은 기원전
320년경 왕을 칭하면서 국가가 세워졌으니 2,340년 역사인데.... 한국인인지라 우리나라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건국 연대를 대폭 올려서 청동기 문화가 태동한 이후인 기원전 1천년경 (정확히는 기원전 9세기)
비파형동검이 만들어졌다는 요서지방 조양으로 잡으면 우리 역사는 2,300여년이 아닌 3천년인가 합니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중국 전국시대 7웅의 하나인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남쪽으로
제나라를 누르고...... 북쪽으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위축되었으니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리의 땅을 빼앗겼습니다.
이때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으로 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
이 설치되고 장성도 쌓았다니, 고조선이 상실했다는 지역은 요서와 요동의 랴오닝성 일대로 봅니다.
화하족인 중화 민족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사방의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불렀으니
북적, 서융, 남만에 동이인데, 우린 동이족에 속한다고 보지만 당시 지리
개념으로 동이는 중국의 동부인 하북성과 산동성에다가 저장성이라 여겨집니다.
심지어 하(夏) 나라는 현재로 보면 같은 하남성으로 자기들 나라 보다 조금 동쪽인
상나라(商, 은나라) 조차도 자기들과 다르다며 오랑캐 동이(東夷) 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오랑캐 동이의 땅이라고 여겼던 하북성과 산동성등 중국 동부지방이 점차 하나라
와 상나라 및 주나라에 이르러 점차 중화 민족에게 점령당해서 중국으로 동화되니....
이제 중화민족이 말하는 동이(東夷) 는 그보다 더 동쪽인 만주와 한반도 및 일본을
가르키는 것으로 용어에서 말하는 지역이 확대된 것으로 보는데......
다르게는 중국 동북쪽 민족들을 동쪽 오랑캐, 동호(東胡)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인더스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이고 한자와 태극
에 음양오행설 그리고 종이와 비단에 화약과 나침판과 차등 찬란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중국은 나라도 커서 동아시아의 맹주로..... 중국 임금은 스스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
를 자칭하며 주변 나라들에서 조공을 받았으나, 5번이나 나라가 멸망했으니 자기들이
그간 천시했던 오랑캐인 흉노와 돌궐, 거란에 조공하고 심지어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중화민족의 중심지는 화북 지방이라 불리는 황하 주변에 하남성의 은허와 낙양에 시안성(섬서성)
의 장안인데.... 첫 번째는 진(晉)나라가 흉노족에 망해 5호 16국 시대가 있었으며, 두 번째는
카이펑의 송나라가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등 여진족 금나라에 망해 남쪽으로 달아나니 남송입니다!
세 번째는 몽골족이 남송을 멸마시키는등 아예 중국 전체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세웠으며....
네번째는 만주족(여진족) 이 또 장성을 넘어 중국 전체를 점령해서는 청나라를 세웠고
19세기에는 아편전쟁등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패해 중국은 서양의 반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동아시아의 중심이고 강대국에 최초로 문명과 문화가 발전한 나라인 중국은 하늘의 자손이라며 천명으로
세계(동아시아) 를 다스리며, 주변국에서 조공을 받는 상국이었지만...... 유사 이래 5번이나 중국이라는
나라가 망했으니 동방의 조선(한국)이 몇번 망했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니네는 5번이나 망했잖아?
모택동과 시진핑을 거쳐 중국 주석에 오른 시진핑은 2013년 들어 도광양회 (韜光養晦) 를 벗어
던지고 “中國夢(중국몽)” 이란 구호를 들고 나왔으니.... 중국이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는
한(漢) 나라 시대이고, 문화적으로 융성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했던 때는 육상실크로드를 통해
로마제국까지 교역을 한 당(唐)나라 시대이며 바다를 제패한 것은 명나라 영락제 시대라 봅니다.
시진핑 주석이 야심차게 국가비전으로 내세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은 그런 한나라 시대,
당나라 시대 그리고 명나라 영락제 시대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인데.... 하지만 “위대한
부흥” 은 대륙의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이끌어 가는 슬로건으로써는 아무래도 약한 면이
있는지라 대신 나온 것이 "중국몽(中國夢)" 이니 참으로 함축미 있는 절묘한 표현이라 봅니다!
중국몽을 실현하는 국가 경영전략을 일대일로 (一带一路) 라고 하는데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
로드를 통해서 최강대국 중국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이니.... 중앙아시아와 중동 서아시아 유럽
쪽으로 물밀듯이 진출하고 있으며, 대양을 통해서 동남아 서남아 중동 아프리카 쪽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데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 도 중국몽과 일대일로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국의 고대사를 그동안 20편까지 서술했으니 이번에 쓴 21편 당나라는 중세사에 넣는데,
저 시진핑이 중국몽에서 말하는 세 나라 중에 당나라를 서술하렵니다만, 중국인들은
수나라와 당나라 지배층을 당연히 한족(漢族)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배층의 고향인 무천진
(武川鎭)은 저들이 동호(東胡) 오랑캐라고 했던 선비족 탁발씨의 후예인게 아이러니 합니다.
무천진(武川鎭)은 관롱집단(關隴集團) 이라고도 하는데...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
를 이은 서위, 북주에서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관중(關中, 산시성) 과 농서(隴西, 간쑤성)에
본적을 둔 문벌 세족을 가리키니 '관중' 의 '관' 과 '농서' 의 '롱' 을 따서 '관롱' 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관롱집단은 호한혼혈(胡漢混血)과 문무합일(文武合一)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지배층을 구성하였으며 황실
또한 관롱집단에서 나왔으니.....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趙翼)은 '북주, 수, 당은 모두 무천(武川)에서
나왔다.' 라 적고 있어 관롱집단이 무천(武川, 내몽골 자치구 우촨현) 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천인커는 "새외(塞外)의 야만적인 날쌔고 용감함의 피를 취하여 중원(中原) 문화의 퇴폐적인
몸에 주입하니 옛 더러움은 제거되었고 새로운 기회가 다시 열려 확장하게 되니 마침내
예기치 못한 세상의 국면을 맞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라고 관롱집단을 묘사하였으며
“유자산집(庾子山集)” 을 인용해 관롱의 사인(士人)과 선비 호성(胡姓) 관계를 증명했습니다.
북위(北魏) 태무제(432년 ~ 435년) 때에 몽골고원의 유연(柔然)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인 평성(平城, 산시성 다퉁시) 이북의 장성연선(長城沿線, 내몽골 자치구 남쪽에서
허베이성 북부)에 여러 진을 설치했으니.... 그 중에 회삭진(懷朔鎭), 무천진(武川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옥야진(沃野鎭), 회망진(懷荒鎭) 육진(六鎭)이라 했습니다.
북위(北魏) 조정은 일부 선비(鮮卑)족 귀족들을 육진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진민(鎭民)
및 무사(武士)가 되도록 하였고, 진민 위에는 진장(鎭將)을 두어 해당 지역의 군사 및
정치를 관할하게 하였으니 당시 육진의 지위는 높아 육진의 진민인 자는 상당한
영예를 누렸으며, 또한 사환(仕宦), 복제(復除, 부역을 면제함) 등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육진의 중요성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으며
변경에 있는 육진의 진민들의 한화(漢化) 는 지체되었고..... 경제나 문화도 약세를
보였으며 개혁정책에 따라 육진의 특권은 취소되었고, 사회적 계급(신분) 또한 하락
하니 도리어 남쪽으로 옮겨가 한화된 선비(鮮卑)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정은 범죄자를 육진의 병사로 배치시켜 유배지처럼 취급하자 한화(漢化) 개혁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북위 선무제 때 육진에 기근이 들자 육진의 난이 일어났으며, 북위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는데 육진의 난에서 이득을 취한 회삭진 출신의 한화(漢化)된 선비인 고환과 무천진 출신
선비(鮮卑)족인 우문태 두 사람은 각자 탁발씨(元)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를 서위와 동위로 분할합니다.
우문태는 같은 무천진 출신을 금군(禁軍)으로 편성하고 부병제를 실시하였으며, 무천진 출신
인물에게 팔위주국대장군(八位柱國大將軍) 과 막하의 십이대장군통령(十二大將軍統領)
의 직위를 부여하니.... 서위 정권은 무천진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고 관중과 농서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태는 관중을 위주로 한 정책을 실시합니다.
서쪽으로 옮긴 선비 귀족과 산동(山東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에 본적을 둔 사족들로
하여금 관롱으로 본적을 고치도록 하니.... 새로운 관중사족(關中士族)을 형성
하였으며 경조(京兆) 위씨(韋氏), 하동(河東) 배씨(裴氏), 하동 류씨(柳氏),
하동 설씨(薛氏), 홍농(弘農) 양씨(楊氏), 경조 두씨(杜氏)를 대성(大姓)으로 하였습니다.
팔주국과 관중사족이 관롱집단의 시초이니 팔주국 가문은 우문씨 일족을 따라 동위(東魏)에
대항하였으며, 마침내 북주(北周)를 건국하여 동위의 후신인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는 큰 전공을 세웠으니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도 "현재 문벌이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팔주국 가문을 받드는구나. 당시의 영광이여, 이와 비교할 수 없으리!"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탁발씨를 이은 북주(우문씨) 무제는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남조를 병탄
하지는 못하고 병사하자 뒤를 이은 선제는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하였고,
7살밖에 안된 아들 정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어 향락을 탐닉하니 정사는
완전히 천원황후(天元皇后) 양려화(楊麗華) 의 부친인 외척 양견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북주 말기에는 선비족이 아닌 많은 한인(漢人)들이 군사와 장수의 직위를 점하고 있었고, 양견은 정권을
찬탈하여 수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양견의 부친 양충은 북주의 28대장군(大將軍) 중 하나였고, 양견의
처 독고가라는 팔주국 중 하나인 독고신(獨孤信)의 일곱째 딸이었으니 관롱집단의 각 가문은 혼인을
통해 연계를 강화했던 것이니 수나라가 북주를 대신한 일은 관롱집단 내부의 일차 권력전이인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명의 팔주국의 후예 즉 이호(李虎)의 손자
이연과 이필(李弼)의 증손자 이밀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연의 모친은
독고신의 넷째 딸이었고, 이연 또한 수 문제의 처조카이자 양제의 이종사촌형
이었으므로 당나라 황실과 관롱집단, 수나라 황실은 매우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연은 이러한 까닭으로 쉽게 수나라의 대흥을 함락할수 있었고, 중국을 재통일하니 관롱집단의 지지
를 쟁취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주는데 천인커는 "이씨 당나라 황실은 당나라 300년 통치의 중심
이니 고조, 태종과 고종의 전기(前期)는 장상 및 문무대신들이 서위, 북주, 수나라 이래 세업(世業)
을 계승한 자들로 곧 우문태가 '관중 위주 정책' 하에 결집한 집단의 후예들이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관롱집단이 핵심이 되어 항상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정치 국면과 방향을 주도하였으므로,
문벌정치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며 국가와 정권을 교체하는 사건은 관롱집단의 정치적
지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으니 수나라 때 이미 과거제가 실시되어 한문(寒門)과 서족사인
(庶族士人) 들이 점점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높은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웠습니다.
남북조시대 이래 문벌(門閥)을 가지고 개인의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일이 유행했으니 당나라 4대 문벌중에 산동사족(山東士族)들은 혼인을 중시
하였고, 강좌사족(江左士族)들은 인물을 중시했으며, 관중사족(關中士族)들은
관면(冠冕)을 중시하였고, 대북사족(代北士族)들은 귀척(貴戚)을 중시하였습니다.
수많은 세족 가문들 중에 산동의 칠성십가(七姓十家), 즉 태원(太原) 왕씨(王氏), 범양
(范陽) 노씨(盧氏), 청하(淸河) 최씨(崔氏), 박릉(博陵) 최씨(崔氏), 농서(隴西)
이씨(李氏), 조군(趙郡) 이씨(李氏), 영양(滎陽) 정씨(鄭氏)를 가장 현귀하다고 여겼
으니 명신인 방현령, 위징, 이방(李昉) 등은 다투어 산동사족들과 혼인할 정도였습니다.
당 태종은 즉위한 뒤“씨족지(氏族志)”를 열람하고 "나는 최(崔), 노(盧), 이(李), 정(鄭)씨에 대해
서는 꺼리는게 없지만 그들 세족의 쇠퇴함을 돌아보면 면관(冠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옛 땅을 믿고 재물을 취하니, 불초자들이 거만스럽게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다.
죽과 송가(松槚)를 팔면 되지, 왜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고사렴(高士廉)에게 “씨족지”의 편집을 명하여 천하의 씨족들을 9등(等)으로 나누어 1등은 이씨
당나라 황족, 2등은 외척으로 함으로써 구 문벌 세력들을 폄하하고 억압하였는데 태종이 죽은뒤
관롱집단의 수장 장손무기는 스스로 당 고종을 옹립한 공을 믿고서 전횡하며 정적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고종의 총애를 얻었으니 고종은 황권의 강화를 위해 황후 왕씨를 폐하고 측천
무후를 세우는등 사건을 일으켜서는 장손무기를 정권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측천무후
는 관롱집단 출신과 관계가 있었지만..... 선조의 본적이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산시성
원수이현)에 있어 관롱집단의 전통적인 지리범위에서 벗어났으므로 가계상으로 소원하였습니다.
측천무후의 모친인 양씨(楊氏)는 수나라 종실이지만 부친 무사확(武士彠)은 상인으로 고조가
당나라를 세우는데 공이 있어 봉작을 받았지 관롱집단의 세족 배경이 없었으니 측천무후
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나라의 핵심이었던 관롱집단을 와해시키는데 착수하였습니다.
측천무후는 대대로 내려온 권력인 관롱집단을 없애는 그 일환으로 혹리(酷吏)를 채용했고
진사(進士), 문사(文詞), 시부(詩賦)의 과(科)를 숭상하였으며, 문무(文武) 를 분류
(分流) 하였으며..... 관롱집단이 정권을 장악한데 불만을 품은 사인(士人)들을 등용했습니다.
과거제는 시행됐지만 향시(鄕試)에 급제한 자로 고위직에 오른 자가 적었고, 주요 권직은
여전히 관롱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측천무후는 적극적으로 향시 및 진사에 급제한
자를 임용함으로써 국면을 타파하였고 이후 측천무후가 중병에 걸리자 장간지(張柬之)
등은 당 중종을 복위시켜서는 무주를 폐지하였고 당나라 황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합니다.
개원 연간(713년 ~ 741년)에 당 현종은 무주때 승진한 향시 합격자를 계속 임용하였지만 천보 연간
(742년 ~ 756년)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이림보(李林甫) 등의 세족들을 고위직에 발탁하여 어느
정도 관롱집단의 통치가 회복되었으며 안사의 난, 우이당쟁(牛李黨爭)을 거치면서 관롱집단의
우월적 지위는 급속히 하락했고, 과거 출신자가 조정 요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갈수록 보편화 됩니다.
당나라 후기에 환관들이 정치에 간섭하였고 심지어 병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립하는 등의 일은
모두 관롱집단의 영향력을 더욱 쇠약해지게 했으니.... 황소의난 이후 수백년을 이어온
사회계급이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무너지자 전통적인 사족들은 거의 붕괴하였고, 지방의
번진 세력들이 굴기하니 문벌정치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관롱집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한 무제때 유학을 높인 이래로 한나라 조정에는 경학으로 재능을 감별하였고, 경학자들이 조정에
들어와 관료가 되어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함으로써 계속 관리가 되었으니 이러한 방식은
가족 대대로 전해져 왔으며, 경학을 익힌 자만이 공경(公卿)이 되었으므로 후한 사회에는
대대로 관리가 된 명문 귀족이 출현하여 사족(士族), 또는 세족(世族) 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조위와 진나라에 이르러 구품중정제가 실행되자 출신과 성씨가 인재등용의 중요한 요건이 됐으며
사족들의 관직 독점과 세습이 강화되어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는
세족이 없다' 는 현상이 나타났고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각 왕조는 문벌들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가문 중시의 사회환경이 관롱집단 굴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서위 우문태는 정권을 공고히하고 국력이 강한 동위에 대항하기 위해 관롱 위주의 정책을 실시
하였는데, '산동(山東)과 강좌(江左)를 다시는 한화(漢化)의 중심으로 만들지 않겠다' 는
의도였으니 관중 지역이 주나라 이래로 문화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선전하였고, 효문제의 한화
정책을 대거 답습하였으며 관중사족을 중용해 동위가 한화를 배척한 것과는 다르게 되었습니다.
호한융합의 결과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들어간 선비인과 선비화된 한인이 최종적으로 한화
되었고, 민첩하고 용맹하며 상무적인 민간 풍조가 관중 사족에게도 스며들어 문무 합류
(文武合流)와 사인(士人)들이 문과 무에 동시에 능한 기풍이 관롱집단의 큰 특징이 되었으니
북주, 수나라, 당나라가 강대한 정치적 역량을 펼치게 했으니 무인정치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후한말 이래 오랫동안 분열했던 중국을 430년 만인 618년에 수의 당국공이자 관롱
집단 출신인 이연이 통일해 건국했으며 907년 애종때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
까지 289년간 20대의 황제가 다스렸던 국가였으니 수나라의 정치 체제와 문화를 계승
했으며 수도는 장안으로 인구 100만이고 고대, 중세 중국 제2의 도시 낙양이 부수도였습니다.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이민족의 문화와
그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다민족적이고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
받으니 북쪽으로는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그리고 남방으론느 베트남과도 교류를 하였습니다.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일본은 견수사에 이어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등, 동아시아 여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도 당나라는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의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으나 안록산의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해 쇠퇴합니다.
당나라 황실은 수나라 황실처럼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불분명한데 한족 왕조들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조선시대 동몽선습등을 보면 당을 선비족 정권보다는 한족 혹은 한화된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는데,
당나라때 쓰여진“구당서”에는 이씨 황실이 진나라의 명장 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칭한
흥성제 이고의 자손임을 밝혔으나 후대인 송대에 쓰여진 “신당서”에는 이민족 혈통을 강조했습니다.
당나라의 멸망후, 중국의 후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은 당나라를 한족(漢族) 국가로 인식했으니
황족을 포함해 지배층에 선비족 혈통이 많았지만 북위 효문제 이래 선비족을 포함한 5호의
한족화와 한족 사족층의 등용이 진행됐기 때문으로 특히 홍농 양씨, 태원 이씨, 청하 최씨,
박릉 최씨 등 유서깊은 한족 명문가들이 북주 이래 수당 시대의 지배층이 된 관롱 집단
에 포함되었는데..... 요미원은 수나라와 당나라 황족들을 튀르크계 철륵에 기원했다고 봅니다.
일본의 모리야스 다카오는 탁발 국가설을, 중국의 진인각이나 장경, 요미원 등의 학자는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설, 호한혼혈설 등을 제기하고 있으니 이미 선비족 왕조는 북위 효문제 이래 적극적인 한화
(漢化) 정책을 펼쳤기 때문인데 당나라 황실의 계보에는 농서 이씨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노자로 나와있고, 당 태종이 관롱집단 지지를 얻고 장안성에 입성한 직후 노자 사당부터 만들었습니다.
혈통은 민감한 문제였는데, 당태종에게 법림(法琳)이라는 승려가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라 하시는데,
노자의 아버지가 절뚝거리며 귀는 어둡고 눈은 흐리기에 처가 없어, 나이 칠십에 이웃집
노비와 간통해 노자를 얻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리고 폐하가 노자의 후손이 아니며 농서 이씨
출신이 아니라 탁발씨 출신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데 왜 사실을 숨기십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 왕조 수립의 주체는 북주 시대 관중 사족 + 우문씨를 따라 관중으로 이동한 호한 지배층이 융합
해 형성된 군벌인 관롱집단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북주의 우문씨와 수의 양씨, 당의 이씨
모두 당시 실세인 무천진에서 나왔으니 수문제는 북주 때만 해도 보육여견(普六茹堅)이라는
선비족 성명을 갖고 있기도 했고 당 고조 이연의 어머니도 선비족 성씨인 독고씨에서 나왔습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도 “씨족지”라고 해서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며 타지방 출신
들을 차별하던 관롱집단들의 족보를 모아 약화시켜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으니
8주국 가문에서도 한족 여성들은 후궁이 되거나 축첩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8주국의
정식 통혼은 선비족끼리만 이루어졌으니 고조 이연의 친인척이 모두 독고씨인 것처럼 말입니다.
당나라 이씨 황실은 스스로 선비족이라 칭하지 않고 언어나 관습, 문화를 한족의 것을 따랐기 때문에,
당나라를 정복 왕조로 볼수는 없으며.... 수 황실이 자신들을 한족 명문가였던 홍농 양씨, 그중에서도
후한의 태위 양진의 후손을 자처했듯 당 황실 역시 노자의 후손인 농서 이씨를 자처했으니 당나라
는 황실에서 한족과 다른 언어, 관습, 문화를 한족에게 강요한 원나라, 청나라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618년에 고조 이연에 의해 건국된 당나라 시대는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
(晩唐) 으로 4시기로 시대를 구분하는데 당나라의 시를 편년할 때 쓰던 용어가 사학계
에서도 쓰이는데 626년 진왕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와 조카들을 죽이고
고조로 부터 양위받아 황제로 즉위했으니 “627년부터 649년까지를 청관의 치” 라고 부릅니다.
630년 이정이 10만 대군으로 동돌궐을 멸망시켰고, 634년에는 토욕혼을 정벌하고 속국
으로 삼았으며 640년 후군집은 고창국을 멸망시켜 서역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644년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당태종이 고연수의 15만(?) 고구려
대군을 격파했으나 이후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는 당태종은 굴욕적으로 철수 합니다.
647년 울독군산 북쪽에서 설연타를 격파했고 651년 당나라가 노실필과 연합하자...
서돌궐의 을비돌육가한이 토화라로 도주했으며,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
시키고 의자왕등 1만 3천인을 포로로 잡아 끌고왔으며 663년 나당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1천척의 왜군을 당나라 수군이 화공으로 크게 격파했습니다.
668년 글필하력과 이세적이 신라 김유신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주민
대다수를 포로로 잡아왔으며..... 670년 토번의 가르친링이 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
시키고 안서 4진을 점령했고 이 해에 신라와 나당전쟁이 발발했으며 675년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이 패배해 한반도 전역 점유에 실패합니다.
682년 왕방익이 이려하(일리강)에서 서돌궐의 반군을 섬멸시키고, 열해(이식쿨호)에서 10만여명
을 격파했으며 이 해에 돌궐 제2 제국이 다시 성립됐고 683년 고종이 붕어하자 중종 이현이
즉위했으며..... 684년 측천무후에 의해 중종이 폐위되고 예종 이단이 즉위했지만 690년
예종이 폐위되고 측천무후가 즉위해 국호를 주(周),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무주혁명) 했습니다.
696년 거란족의 수장 이진충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때 혼란을 틈타 고구려 멸망후
잡혀온 대조영 과 걸사비우를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 일파가 탈출해서는
찬문령 전투에서 추격해온 당군을 격파하고 698년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습니다.
결국 발해 건국을 막지못한 측천무후는 705년에 퇴위하고 중종이 복위되어 당나라
부활했으며 710년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가 중종을 독살하니 임치왕
이륭기와 태평공주가 난을 일으켜 위황후 일파를 제거시키고 예종을 복위 시킵니다.
712년 이륭기는 예종에게 선위를 받아 현종으로 즉위했으며 713년 당현종이 태평공주 일파
를 숙청하는데 성공해 연호를 개원으로 바꾸니 713년부터 ~741년까지를 “개원성세” 라고
부르며.... 722년 길기트(소발률)가 내전으로 당에 복속되고 727년 토번(티베트)의 명장
실뤄라를 이간계로 제거했으며..... 732년 발해의 장수 장문휴가 당의 등주를 기습했습니다.
733년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거란-돌궐 연합군이 당군을 격파하니 당은 발해의 위상을 인정햇으며
741년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했고 744년 돌궐 제2제국이 멸망하고 위구르 제국이 성립됐으며
747년 고선지 1만이 서역 원정을 개시해 연운보에서 토번군을 격파하고는 소발률을 점령 했습니다.
750년 고선지가 2차 서역 원정을 개시해 사마르칸트와 타쉬켄트(석국)를 점령했고 751년에
고선지의 당군이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에서 접전햇는데, 카를룩의 반란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755 ~ 763년 안사의난 대란으로 당나라의 쇠락과 번진 할거
가 시작됐으며 756년 마외병변으로 양귀비를 자살시켰고 양국충 등 양씨 일족이 절멸합니다.
756년 태자 이형이 숙종으로 영무에서 즉위했으며 762년 숙종이 붕어하니 장황후 일파를 숙청하고
환관 이보국이 태자 이예를 대종으로 옹립했으며 763년 토번군의 침입으로 장안 함락되는
광덕지변이 일어났고 764년 철륵계 번장 복고회은의 난이 발생했으며 779년 대종이 붕어하고
덕종 이괄이 즉위했으며 780년 양염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용조제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합니다.
781년 토번이 이때부터 농우 지방에 진출하기 시작햇으며 782년 고구려 유민인 이사도 의
제나라가 당의 변주를 공략하고 당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4진의 난이 발발했고
782년 토번과 당이 청수 동맹을 결의했으며 783년 주차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되고 이씨
황족이 학살당했으며 787년 당의 이필의 노력으로 당과 위구르 제국의 관계가 개선됩니다.
789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당의 북정도호부에 진출하여 북정도호부가 폐지되고 서역 전역을
상실했으며 793년 남조가 당에 사신을 파견해 속국이 되기를 맹세했고 794년 당과 남조가
연합해 토번을 침략했으며 805년 덕종이 붕어하고 순종이 즉위하나 병환으로 환관
구문진이 퇴위를 강요하니 아들 헌종 이순에게 양위하니 806 ~ 820년을 원화중흥이라 합니다.
808~849년 우승유 일파와 이덕유 일파간 우이당쟁이 환관들의 개입으로 격화됐으며,
당의 쇠락에 영향을 미쳤고 815년 이사도의 제나라가 하음전운원의 200만석을
불태우고 낙양을 습격했으며 816년 오원제의 난이 일어났고 819년 이사도가
유오에게 암살되고...... 운주가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니 제나라는 멸망합니다.
820년 단약에 빠져 포악해진 헌종이 환관에게 시해 당하고 환관 왕수징이 목종 이항을 옹립했으며
목종이 붕어하고 이담이 경종으로 즉위했고 827년 경종이 환관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시해되고
환관 왕수징에 의해 문종 이앙이 즉위했으며 829년 남조가 당의 검남을 공격하고 성도를 점령합니다.
835년 당의 재상 이훈과 문종이 환관들을 말살시켜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훈이 피살당했으며
840년 문종이 붕어하고 환관 구사량에 의해 이염이 무종으로 즉위했으며 840년 키르키즈
가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고 842년 당무종은 회창의 폐불을 단행했으며 846년
무종이 붕어하고 환관 마원지가 선종 이침을 옹립하니 847 ~ 859년을 대중의 치라 부릅니다.
848년 토번과 당이 주전파의 토번군을 협공하여 패배시켰으며 848년 장의조가 군사를 일으켜 농우 일대
토번 세력을 쳐부수었고 859년 강남에서 구보의 난이 일어났으며 859년 '소태종' 선종이 단약 중독
으로 붕어하고 환관 왕종실이 의종 이최를 옹립했으며 863년 안남도호부를 재건했고 868년 방훈의
난에 873년 남조를 침략해 성도를 탈환햇으며 당의종이 붕어하고, 환관 전령자가 당희종을 옹립합니다.
875 ~ 884년 황소의 대란이 일어나 당나라의 몰락이 가속됐으며 888년 희종이 붕어하고
환관 양복공이 소종 이엽을 옹립했으며 900년 황태자 이유가 환관 유계술, 왕중선의
반란으로 즉위하나 다음해 이유가 폐위되고 소종이 다시 복위됐으며 903년 주전충과
최윤이 환관 수백명을 몰살시켰으며 품계낮은 어린 환관 30인만 남겨 청소에 이용합니다.
904년 권신 주온(주전충) 이 소종을 시해하고 이축을 애종으로 옹립했으며 905년
주전충이 당의 충신 38명을 학살한 백마역의 화가 일어났고 907년 주전충이
애종으로 부터 양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하니 당왕조는 289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당나라를 초당 - 중당 - 성당 - 만당으로 나누니 첫 번째가 초당(初唐)인데.... 당국공 이연
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은 수 양제 양광과 이종사촌인 아버지 이연에게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원정 실패로 민심을 크게 잃은 수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 이후
여러 군웅세력들과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당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등 크게 신임하니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과 삼남 이원길이 이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
를 맞게 되었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서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현무문의 변), 직접
황태자에 봉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되니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후대에 정관의 치로 칭송받았는데 외부 확장도
활발해서 수나라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주변 세력을 연달아 격파했지만 고구려와의 대결
에서 연개소문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패배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고종은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 시켰으며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 했으나... 서쪽에서 토번(티베트)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오는
바람에 머나먼 땅 신라는 보급이 너무나도 어려우니, 두 전선에서 전쟁할수는 없으므로 철군
했는데.... 토번의 세력이 워낙 강성하다 보니 당나라는 더 이상의 확장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