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에 들어와서 요즘 복음들은 자선이나 기도, 단식 등 여러 실천 덕목들이 제시됩니다. 오늘은 원수 사랑, 용서를 얘기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주 고민하는 화두가 원수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루 종일 용서하려고 했는데도 쉽게 용서가 안 돼요.” 이렇게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분들은 마치 밤에 잠이 안 올 때 ‘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서가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용서가 안 되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서 상대방을 용서 못 하는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자책의 마음이 용서를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은 무엇일까요? 상대방 생각을 멈추고(생각의 고삐를 놓아주고), 또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행위를 그만하는 것입니다. 옛날 중세 시대의 방식처럼 식사도 걸러가면서 자기 자신을 때리는 듯한 이런 행위는 자신을 학대하는 병적인 행위일 뿐, 오히려 자칫 신경과민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세상에 벌어지는 일 중에 내가 내 맘대로 콘트롤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의 계획과 내 의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일은 벌어지고 있고, 그럴 때 ‘왜 나는 번번히 내 의지대로 일이 되지 않지?’라고 안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살면서 느끼겠지만) 나는 그저 거기에 ‘적응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안 된다고 개탄하거나, 내 계획대로 조정하려고 억지 부리지 말고, 지금 벌어지는 상활 그대로 이것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는 마음이 조금은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예가, 살면서 내가 남들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들, 또 이런 ‘내가 받은 상처’뿐 아니라, 또 내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과 같은, 이런 ‘상처를 주고받음’도 필요 이상 너무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자책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삶이란 건 완벽한 정사각이나 완벽한 원이 아니기 때문에, 늘 어느 부분에서는 아귀가 틀어지기도 하고,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그러진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즉 이 말은 삶이란 건 자로 재듯이 나의 의지로, 내 생각대로 모든 것이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어설픈 면이 있고, 실수가 있고, 상처가 있고, 도저히 내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신앙이 조금은 좀 무심한 듯, 좀 단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음식 맛으로 비유한다면 너무 향기가 심하거나, 양념이 짙은 강렬한 음식보다는 좀 단순하고 담백하고 수더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호들갑을 떠는 건 결코 열심한 것도 아닌데, 자책하고 눈물 흘리며 광분하고.... 이런 것들은 좀 사양했으면 싶습니다.
나쁜 표현으로는 적당히 무심한 듯 좀 뻔뻔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