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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본 비즈니스와 선교
저자 : 윌암 뎅크
근대 개신교 선교부들은 경제활동을 통한 선교활동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즈니스와 선교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단의 연합이라고 불리 워 지는 이 선교단체는 경제적 측면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또한 복음 전도를 동시에 수행하고자하는 선교의 의지가 있었고 서양식 문화와경제가 현지와 다르다 할 찌라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개신교 선교의초기 역사를 보면 몇몇 경제활동을 통한 사역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개신교측의 선교에 대한 관점은 보다 진보적이어서 복음 전파와 함께 현지인들의 생계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필요를 도와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행해진 경제활동들은 실제 선교의 주된 후원통로였고, 오래 전 과거 역사 속에만 기록되어진 어쩌다 가끔씩 있는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이 세대를 거듭하여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기업들이 2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힘 있게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1732년 색슨니의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Ludwig Von Zinzendorf)백작의 사유지에서 출발한 조그마한 모라비안 난민교회의 독특한 선교사역을 살펴봄으로써 선교 확장과 동시에 나타난 경제 활동의 구체적 형태와 그 역할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모라비안 교회의 시작
덴마크 할레 개척자들이 인도에 도착한지 26년 후인 1732년에 모라비안 교회로 잘알려진 형제들의 연합은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케리보다 60년 앞서 광범위하면서도 총체적인 선교 초기 개신교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모라비안들은 이교도들을 향한 전도가 교회의 의무라는 생각을 실천에 그대로 옮긴 최초의 개신교도들이었다.
그들은 평신도 사역의 비중이 개신교 선교사들과 교회 성도들과의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1:5,000이었던 반면 모라비안들은 1:60의 비율, 즉 60명의 교인 중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교사들의 필요가 강조되면서 1:400이 되었다.
1) 모라비안 교회의 기원
모라비안의 선교출발점은 베르델도르프의 주민600명이 살던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인데, 1722년 한 그룹의 기독교 피난 자들이 진젠도르프의 영지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백작은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삶의 기회를 잡게 된다. ‘헤른훗 Herrnhut (주님의 보호 처)’란 이름으로 명명된 그의 영지에 종교적 피난 자들이 몰려들었다.
진젠도르프의 영지로 피난을 오게 된 그들에게 그의 할머니 헨리테 카테린 폰 게르도르프가 그가 없는 사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유지의 관리인을 통해서 정착할 땅까지 내주었던 것이다.
첫 번째 피난 자가 온 지 5년이 지난 1727년, 성령께서 헤른훗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 영적 부흥으로 진젠도르프와 공동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교와 헌신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모라비안은 동방교회에 어느 정도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주핍박을 당했는데 특히 30년 전쟁과 종교 개혁 기간에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고 그중일부가 삭스니로 도망하여 진젠도릎 백작의 사유지에 피난처를 마련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신앙과 경제활동을 하나로 결합시킨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들의 출신지역 때문에 모라비안이라 불려졌다.
2) 해외 선교의 시작
개신교 해외 선교는 덴마크 국왕으로부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젠도르프는 선교와 접할 결정적인 기회를 가지게 된다.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왕의 결혼으로 인해 왕과 사촌이 된 그는 1731년 5월12일에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크리스틴 6세의 왕위 즉위식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서반구에서 온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이교도를 향한 선교의 꿈을 실현 할 수 잇도록 직접적인 자극을 받고 이 일로 인해 백작은 강한 책임감과 긴박감을 가지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할레는 그에게 비전을 심어주었고 헤른훗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된 사람들을 만나게 했으며한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의 희생적인 사역은 그로 하여금 열정을 갖게 만들었고 이것이 코펜하겐에서 시작의 통로르 열게 되었다.
이후 20여 년 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 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2. 유럽 형제단의 경제 활동
이들은 강한 영적인 연합을 통해 여러 종류의 공동 경제 기업을 낳았다.
헤른훗에서는 초기 몇 해동안 선교사들의 영적,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도록 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된 영성은 많은 것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느 희생의 정신은 계속지켜졌는데 이 희생적 영성이 흐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이룩한 놀라운 선교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현실적인 필요들 앞에서 형제단은 경제적 어려움을 격어야만 했다.
진젠도르프가 영국에 머물던 1753년에는 재정적인 적자가 너무 악화되어 런던의 채무자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도주하기도 했으며, 상황이 이라하자 소득을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이 자연스럽게 제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봉건주의적 사고로 인한 무조건적인 호의와 관대함은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공동체소유에 대한 진젠도르프의 생각에는 애매모한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업에서 나온 이윤들을 선교비로 충당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것들 때문에 선교사들의 사역 활동의 독립성과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했던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예나에서 수학한 할레의 교수 아우구스트 고트리브 스판겐베르그 같은 회심 자들에 의해서 더 심하였다.(그들은 무역이 노예 소유만큼이나 사람의 영혼에 해롭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박한 선교 후원의 필요성은 무역에 대한 전통적인 편견을 재고하도록 모라비안들을 강하게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1747년 모라비안 경제활동은 상업의 천재였던 아브라함 뒤르닝어(Abraham Durninger)를 통해 번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잡화점을 인수받을 때 재고량은 2,856탈러였고 총651탈러의 부채가 있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277,000탈러의 자산과 총39,000탈러의 건물들을 소유했으며, 회사의 이익은 연간 약15%를 유지하면서 1800년까지 연간순수익은 설립자가 가장 많은 수익을 얻은 해보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100,000탈러에 육박했다.
뒤르닝어가 혼신을 다한 이 기업은 이후2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으며 유지되었다.
진젠도르프의 경영현실성의 결여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재정적자를 격고 있는 형제단의 사업과 구별되게 했다. 뒤르닝어 조직을 분리 경영 하고 사업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이러한 결과로 형제단가지도 기존의 신용평가를 뛰어넘어 좋은 평가를 받도록 하였다.
뒤르닝어 경영방식은 형제단이 시행하는 제비뽑기방식을 사용 하지 않았다.
영국 헤른훗의 모라비안들은 개인의 사업들을 소유하거나 다른 직업들을 가졌고, 형제단은 그것을 편하게 여기고 친밀하고 깊은 교제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적인 삶을 제공하는 공동체에서 사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겼다.
모라비안은 사업에 게으르지 않으며 자신이 먹을 빵을 얻기 위해 노동한다.
3. 미국 펜실베니아 형제단의 경제 활동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경제 공동체는 풍성하게 발전 하였는데 이공동체는 물질공동체가 아니라 노동공동체였는데 사유재산을 가진 자들에 의해 유지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거나 개인의 사업을 운영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시간과 노동을 교회에 바쳤으며 그대가로 교회로부터 생필품을 공급받고 펜실베니아의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모라비안 들은 경제특구(General Economic)를 조직하여 베들레헴에 잇는 형제 들 뿐만 아니라 모든 무역과 산업을 포함하며 다수의 이웃 농업 정착민들, 중에서도 나자렛, 나덴탈, 크리스천 브룬, 프린덴스탈을 포함했다.
1741~1749년 사이에 매입한 약6,000 에이크의 땅이 경제특구의 기반이고 주요 활동 장소가 되었으며, 독립전쟁 이전의 펜실베니아에서 무시 할 수 없는 중요한 기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린넨의 종류는 11가지 이상이었다.
베들레헴이 헤른훗 보다 더 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농업 기반에 있었고, 또 다른 한 요인은 행정 인원에 대한 베들레헴의 낮은 경비 지출과 1742~1762년까지 잘 훈련된 숙련공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형제단은 공동체 기업들은 어떤 사회 적인 혁명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공동체 기업들은 경영적인 목적, 특별히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를 수행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것을 이용하여 모라비안 형제단의 경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를 20년간 고수하다가 러시아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로 후퇴했고 결국에는 주변의 자본주의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경제특구가 공동체주의를 택한 동기는 상호 경제 후원이나 인디언 또는 백인들의 핍박을 막기 위한 상호 보호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경제특구를 해산한 후에도 선교를 위해 희생적으로 수고했다. 선교에 대한 헌신은 암만 파(Amish)의 신도들이나 현대의 훗터교(Hutterites)도들의 이주민들로부터 모라비안 이주민들을 구별해주었다.
기능공들은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길 원했으며, 제정적인 후원에만 의지하지 않고 그들의 기능을 계속사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759년까지 전체 남자 노동력의 36%가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특이한 점은 경제특구가 사회주의와 배타주의를 절충하여 1762년에 생겨서80년간 활동해 나왓지만 여러 문제들의 적체로 인해 결국 정장이 저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정인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으로 인해서 없어 지게 된 점이 유념할만하다.
결국 경제특구는 세속화가 헤른훗 보다 빠르게 가속화되었는데 그것은 선교를 목적으로 행했던 경제활동이었다.
그러나 모라비안 들은 다른 선교단체들 속에서 세속화되는 과정이 다른 개신교도들에게 비하면 빠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개신교도들은 경제적인 문제들을 포함하는 밀접하고 상호의존적인 종교 공동체의 보호막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의 세속화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4. 모라비안의 선교원리 : 자비량 선교와 주님을 위한 이윤창출
1732년, 데이비드 니취만(David Nitschmann)과 레오나르드 도버(Leonhard Dober)는 첫 모라비안 선교사가 되어 세인트 토마스(St. Thomas)섬에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향한 선교의 기초를 놓았고, 두 사람은 니취만의 목수 일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그들의 선교를 어렵게 또는 실패로 돌아가게 한 적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전준비 부족으로서 전문인 선교사역 자체를 부정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다만 해외선교에 대한 열악한 조건들에 대한 사전 조사와 대안의 부재, 준비부족 및 비현실적인 의욕이 빛은 결과로 보아야한다.
또 다른 실패로서는 진젠도르프가 정착을 통한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지 않은데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선교지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직접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렇게 공동체 중에서 기능공들이 많이 있었지만 선교사로 지망하는 기능공들이 너무 많아서 선교사 선발을 위한 예비모임을 가지면서 자비량 선교사를 확산하는 동기가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사람들이 교회와 선교에 헌신하도록 강조했지만, 교회와 선교 후원을 위한 정기적인 헌금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에는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업적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에 대한 것도 질색을 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모금을 반대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건이나 헌금을 한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세속적인 고용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금은 선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데 이해가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형제단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여겼다.
성(性)과 결혼은 영적인 전쟁사역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진젠도르프는 ‘용사의 영예’라는 이상을 모라비아인 들에게 심었다.
사실 형제단은 지위와 정통성에서 변두리의 소그룹이었기 때문에 “어린양을 위한 영혼 구원” 사역을 위해서 노예 소유주들을 무시 한 채, 노예들을 직접 가르치며 그들의 교육 수준을 향상 시키는 것과 같은 일을 위험에 무릅쓰고 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거의 반세기 후에 스판겐베르크 주교는 유럽의 이주자들과 무역업자들이 자신들의 사업과 생계를 위해서 노예들이 교육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와 동일한 정서를 확인해 준다.
“세인트 토마스 지역의 흑인들의 수가 100대 1로 백인을 앞서 있는 상황에서 흑인들이 교육을 받는다면 어떻게 백인들이 반역에서 안전할 수 있겠는가?”
스판겐베르크 주교는 “ 이 진술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판겐베르크는 개인적으로 노예 제도를 “ 인간의 탈을 쓰고 도저히 할 수 없는 비열한 것” 이라고 여겼지만, 여럿 곳에서의 문제 발생으로 인해 선교 분야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곧 노예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이 모호하고 모순된 상황으로 자신들을 몰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5. 인디언 선교
모라비안 인디언 선교의 위대한 선교사는 데이비드 자이스베르거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전인적 선교방식을 보여 준다.
모라비아 인들과 인디언들 이교도들은 백인들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다. 왜냐하면 모라비안 들과 마찬가지로 인디언들의 문화 속에서도 ‘삶이란 살아 있는 전체’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라비안 들은 인디언들에게 정착민의 생계 수단인 농업과 예술과 기술들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오랜 경험과 실패를 통해서 인디언들이 백인들과 오랫동안 교류하게 되면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역업자들과의 접촉을 줄였어도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났다. 무역업자들은 인디언들에게 술을 팔고 속이는 것 이외에도 그들을 부추겨서 자이스베르크와 모든 백인들에게 등을 돌리게끔 유도했다.
인디언들은 토마스 제퍼스 대통령이 인디언 추장 그룹과 가진 인터뷰에서 선교사들이 가르친 교리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고 모라비안 선교사들에게 보고했다.
존 엘리오트가 이끌던 메사추세츠 형제단이 피의 희생이 되었던 것처럼, 자이스베르거의 모라비안 마을들의 인디언들도 약탈을 자행하는 백인들의 희생이 되었다.
오하이오의 투스카라와스 강가에서 있는 세 번째 나덴휘텐은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대량 학살 중에 하나가 일어났던 곳이다.
어떤 인디언들은 유창한 독일어와 영어로 살려줄 것을 호소했지만 무자비한 정착민들은 한사람도 살려 두지 않았다. 한 현대 역사가는 “델라웨어 국가의 가장 신실한 회심자들 중에 몇 명이 그날 죽었다” 며 애도했다.
그럼 당시의 북미 앵글로색슨 정착민들은 인디언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남미의 이베리안 백인들과 달리 인디언 노예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가득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디언 노예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6. 라브라도에서의 경제 활동
헤른훗의 요한 크리스천 에르하르트는 라브라도 무역여행을 계획하였고, 세 명의 영국 모라비안들의 후원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첫 시도는 에스키모의 무역 약탈과 에르하르트를 비롯한 여섯 명의 동행자들이 살해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세인트 크룩스에서 처럼 라브라도에서도 실패의 실제 원인은 충분한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다. 에스키모들과 능숙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그린란드의 마티아스 스타프는 어쩌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인데 진젤도르프의 동의가 없었던 탓에 동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뒤이은 선교여행에서는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모라비안 들은 북미의 인디언 사역을 통해서 당국의 이해와 지원의 중요성을 배웠다. 또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기존의 생활양식에서 살아남고 선교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거대한 땅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04년에 모라비안 들은 운가바 베이에 새로운 선교 기지를 세웠다. 그러나 1906년에는 무역과 선교의 분리가 더 분명해졌다.
1777년에 그 선박회사는 두 명의 무역 중개인을 라브라도에 보냈다. 반면에 선교사들은 중개인들이 제공하는 무역 물품 중 일부는 선교에 해롭다고 생각했다. 모라비안 선교의 보조 단체인 복음촉진협회(SFG)의 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무역회사의 많은 지도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그 협회 는 1741년에 조직 되었다가 1750년에 한 번 해체 된 후 1768년에 다시 일어났다. 주된 활동은 영국을 거쳐서 여행하는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모든 편의와 필요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무역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선교사역에 이로운 점도 많았다. 특히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검약과 질서의 습관을 가지게 한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원리 원칙이 없는 백인 무역업자들이 원주민들을 착취하려고 했을 때 모라비안들은 그들에게 정직한 사업 방법과 모범적인 경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공정한 사업 운영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형제단의 무역활동은 수많은 유혹들로부터 현지인들을 보호해주었으며 교회 가까운 곳에 큰 상점과 도매점이 지어지는 것이 일반화 되었고 원주민들 여인들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오두막이 함께 설치되었다. 라브라도에서는 달력의 해가 아닌 ‘선박의 해’ 가 실제적인 시간 구분이었다.
에스키모들은 점점 상점 관리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도움은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기근의 위협이 찾아왔을 때는 무조건 선교사들의 무역 상점에 구조 물자를 요구했으나 무역업자들에게 가지고 가서 러주를 사고 부도덕한 행위를 즐겼다. 빚을 갚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물품이 있어도 에스키모들은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편, 선교 행정에 대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무역 상점들은 새로운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선교사들과 선교 행정부는 좋은 화합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1926년에 서명 날인했던 20년간의 이대차 계약을 계약이 만기되기 전인 1942년에 포기해야 했다.
오늘날 에스키모인 들은 무역 상점의 외상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캐나다 정부가 지원하는 많은 유형의 사회 복지에 의존하고 있다. 술과 담배 이둘 은 계속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라브라도에 닥쳐오는 새 시대와 기회들은 또한 새로운 간섭주의와 새로운 유혹들과 새로운 문제들을 초래했다.
7. 수리남에서의 경제 활동
모라비안 들은 남미의 북쪽 해안에 있는 수리남(네덜란드어로는 기아나)에서 장기간 큰 상법활동을 수행했다. 진젠도르프가 수리남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수리남은 남미 대륙에서 로마 가톨릭의 지배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단사가 의자에 앉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1776년에 첫 흑인 자유민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1778년에 몇 사람의 노예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해에 형제단은 회심 자들을 위해서 조 그 만 한 예배당을 지었고 흑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모라비안 재단사들과 빵을 굽는 자들, 시계 제조 공 들을 통해 지역 재정이 좋아지고 있다고 확신한 주지사가 그들을 호의적으로 대우하며 후원했다. 예상과는 달리 전통적인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은 점점 감소한 반면 파라마리보의 재단사들, 빵 굽는 자들, 시계 제조 공 들은 흑인 선교는 날로 확장 되었다. 그 결과 1926년까지 그 교회는 일곱 교회 건물에 만 삼천 명이 예배를 드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라비안 교회가 되었다.
물론 상업 활동에 대한 근본 자극제는 사역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일에 있던 본부에서 나온 것 이었다. 1900년에는 다른 제품들 까지 추가되어 하나의 완전한 백화점이 세워졌다. 그 백화점 사업의 발달은 1758년 4월23일, 헤른훗에서 있었던 일종의 선교 위원회 모임인 하이덴디아코니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사역지에 있던 사람들의 정확한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상업 활동을 반대할 이유가 없음을 알고 오히려 사업에 재능 있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바이스는 편지에 그의 사업적인 머리와 선교적인 열정을 모두 드러내었다. 그는 농업이 상업보다 더 거룩하다는 일반적인 개념에 동의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바이스는 자발적인 헌금만으로는 선교를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교도들을 위한 선교는 사역 현지나 정착지에서 후원이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지속적이고 총체적이며 최상의 축복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곧 현대 선교 기지는 사업체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바이스는 사업 속에서 이윤만이 아니라 복음 증거를 위한 많은 기회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헤른훗 이사회의 일원이었던 바이스는 위원회가 직면한 상황을 고통스럽게 주시하며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헤른훗에 있는 아브라함 뒤르닝어의 사업은 계속해서 성장 일로에 있었다. 1753년에는 큰 물량의 린네을 선적하여 카디츠, 베이욘, 리보르노, 바벨, 베른, 우트레흐트에 보냈다. 1754년네는 하렘과 뉴욕에도 수출했다. 바이스는 서신을 통해 농장 운영을 위한 흑인 노예의 매입에 대해서 수리남의 형제단에게 경고를 했다. 그의 서신 전체는 비 교리적 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선교사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취하라고 권했다.
수리남의 형제단은 바이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로 인해 1768년에는 C. Kersten &Co 라는 이름의 사업체가 조직되었는데, 그 회사는 수세대 동안 모라비안 교회의 수리남 선교의 재정적인 기둥이 되었다.
1800년까지 C.K.C는 40명의 노예들을 소유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웃 도시 버비스의 형제단은 원칙적으로 노예 소유를 거부했다. 닐스 오토 댕커는 노예제도 폐지에 손을 들었다. 그는 주교에 임명된 후 수리남으로 와서 선교위원장과 C. Kersten &Co. 의 책임자가 되었다.
C. Kersten &Co. 의 재정적인 후원과 그 곳 노동자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2세기 동안 모라비안 선교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모라비안 역사가들은 지난 2세기 동안에 그 회사가 이룬 성취를 높이 평가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실천해 온 회사라고 칭찬한다.
20세기에 들어와 C. Kersten &Co.는 몇 가지 혹독한 어려움을 만났다. 첫 10년간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은 외상을 낳게 되었다. 이는 모라비안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1930년의 세계 대공황의 물결은 수리남 같은 후미진 식민지역을 더욱 심하게 강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는 C. Kersten &Co.를 수리남 정부가 ‘적군의 재산’ 이란 이유로 몰수했다.
C. Kersten &Co. 는 총 주식이 선교 연구소로 넘어 간 후에도 이전과 다름 없이 번창했고 선교 사역을 도왔다, 그 회사는 여전히 선교와 사업이 구별되어야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원리를 지켰다. 자체적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업은 선교를 더 잘 후원할 수 있었다.
C. Kersten &Co.의 모든 고용인들은, 특별히 이주민들은 그 회사의 선교 목적을 분명히 이해했다. 아침 7시에 갖는 모라비안 기도회가 그들의 헌신을 더욱 강하게 했다. 1912년에 C. Kersten &Co.는 일률적인 선교사 월급 제도를 버리고 책임과 성취도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선교 목적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다.
8. 아프리카에서의 경제활동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전체 회중을 선교의 동력으로 여겼다. 또한 모든 지역에서 농업과 상업에 참여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노예는 그들의 기본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개혁주의 성직자들은 암스텔담에 다음과 갚은 비난의 화살을 보냈다.
1) 슈미트는 개혁주의가 아니라 헤른훗의 종파에 속한 자다.
2) 그의 안수는 무효다. 왜냐하면 직접 손으로 안수 받지 않고 서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3) 그의 세례 주는 방법은 비회교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회중 없이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난들은 슈미트가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 후인 1792년에 세 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다시 케이프타운에 왔으며, 의미 있게 선교는 조지 슈미트가 사역했던 동일한 장소에서 부활되었다.
케이프타운에 있던 선교사들은 복음 전도의 노력에 덧붙여 처음부터 무역, 산업, 농업을 육성했다.
남아프리카 모라비안 선교재정에서 지불하는 선교사 사례비와 비용을 제외하고는 지급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 재정은 주로 해외 헌금 및 임대해 준 상점과 양을 치는 목방에서 나오는 수입이었다. “상점과 목장은 유럽인들에 의해 경영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모라비안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돈을 벌 목적보다는 사람들을 훈련하는 목적으로 산업학교 외에도 목공소를 운영했다. 케이프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교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사람들을 섬겼다.
정부가 압박당하고 무시당하고 사는 호텐토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그룹으로서 유일하게 기대한 사람들이 선교사들이기에 정부는 그 문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땅들을 선교회에 헌납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정치가와 동시에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했기에 끊임없는 문제에 시달렸다. 때로는 법과 질서의 관리인으로서 법정투쟁까지 해야 할 때도 있었다.
9. 모라비안의 경제활동 대차 대조표
미국의 모라비안 교회는 풍요로워지자 점차적으로 펜실베니아 베들레헴에서의 경제특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교회는 회중의 헌금과 투자 기금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미국의 일반 교회처럼 운영되었다. 미국 모라비안들은 다른 지역의 상업적 기업을 통한 선교 후원 방법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다.
형제단에게 있어서 모라비안이 된다는 것은 곧 선교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기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뱃삯 대신에 배에서 노동을 했다. ‘여행은 지금, 지불은 나중’ 이 전통적인 모라비안의 절차였다. 1세기가 넘도록 선교비는 현지의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1857년의 전 세계 모라비안 교회의 총회 보고에 따르면 수리남, 남 아프리카, 라브라도의 선교는 온전히 현지에서 후원되었다.
모라비안들의 교회 조직은 역사 변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서 모라비안들은 유럽 정부들에게 다른 선교단체보다 더 좋은 인식과 명성을 심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라비안들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모든 크리스천은 선교사이며, 사업가고 설교자, 교사, 의사와 나란히 세계 선교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었다. 18세기에 기공들은 해외 선교의 주축이었다. 선교전략은 세상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는 것만큼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형제단은 선교전략상 농업보다 기술을 택했으며, 또한 형제단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안락한 선진 문화를 떠나 낙후된 선교지로 들어갔다.
물론 모라비안 들은 성교와 경제 활동이 각각 그 자체의 내적인 역동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의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두 영역이 조화를 이루는 일리 무척 어려운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두 기둥 사이의 연결을 끊어 버리는 방법으로 긴장관계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성숙함은 그 긴장함과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모라비안들은 선교와 경제를 분리하지 않되 그 둘을 구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세계 선교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선교나 사업이 서로 분리된 조직적인 실체 속에서 그것을 하나로 묶는 일들을 하였다. 형제단의 교회 조직은 전반적인 교회 질서 하에서 선교와 경제활동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연합되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형제단은 계속되는 긴장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 단체들이 간과하고 있던 세계 선교의 영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들의 실제적인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0. 결 론
개신교 선교의초기 역사 속에서 경제활동을 통한 사역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 측의 선교에 대한 관점은 보다 진보적이어서 복음 전파와 함께 현지인들의 생계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필요를 도와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행해진 경제활동들은 단지 실제 선교의 주된 후원통로였다.
그러나 모라비안은 동방교회에 어느 정도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주핍박을 당했는데 특히 30년 전쟁과 종교 개혁 기간에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고 그중일부가 삭스니로 도망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에 피난처를 마련한 사람들로서 이들이 신앙과 경제활동을 하나로 결합시킨 공동체를 형성하여 선교활동 했다. 그리고 이들의 출신지역 때문에 모라비안이라 불려졌다.
개신교 해외 선교는 덴마크 국왕으로부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날 진젠도르프는 해외선교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헤른훗에서는 초기 몇 해 동안 선교사들의 영적,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도록 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된 영성은 많은 것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희생의 정신은 계속 지켜졌는데 이 희생적 영성이 후에는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이룩한 놀라운 선교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형제단은 공동체 기업들은 어떤 사회 적인 혁명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공동체 기업들은 경영적인 목적, 특별히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를 수행하는 가운데 결국 경제 특구를 만들게 되고 세속화 가되는데 경제특구는 세속화가 헤른훗 보다 빠르게 가속화되었는데 그것은 선교를 목적으로 행했던 경제활동이었다.
그러나 특이 한 것은 모라비안 들은 다른 선교단체들 속에서 세속화되는 과정이 다른 개신교도들에게 비하면 빠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개신교도들은 경제적인 문제들을 포함하는 밀접하고 상호의존적인 종교 공동체의 보호막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의 세속화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교를 어렵게 또는 실패로 돌아가게 한 적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전준비 부족으로서 전문인 선교사역 자체를 부정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해외선교에 대한 열악한 조건들에 대한 사전 조사와 대안의 부재, 준비부족 및 비현실적인 의욕이 가져온 결과로 보아야한다.
실패 원인 중에는 진젠도르프가 정착을 통한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지 않은데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선교비용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선교지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직접 생활비를 충당하게 했다.
모라비안 인들의 영원한 표어는 “어린양을 위한 영혼 구원”을 위해 기능공들을 첫 선교사로 파송한 후 반세기 동안 형제단 소속 선교사들은 노동을 통해 자활해야 했다.
수리남의 형제단은 바이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로 인해 1768년에는 C. Kersten &Co 라는 이름의 사업체가 조직되었는데, 그 회사는 수세대 동안 모라비안 교회의 수리남 선교의 재정적인 기둥이 되었다.
에스키모 선교는 에스키모 인들의 무역 약탈과 에르하르트를 비롯한 여섯 명의 동행자들이 살해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날 에스키모인 들은 무역 상점의 외상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캐나다 정부가 지원하는 많은 유형의 사회 복지에 의존하고 있다. 술과 담배 이둘 은 계속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라브라도에 닥쳐오는 새 시대와 기회들은 또한 새로운 간섭주의와 새로운 유혹들과 새로운 문제들을 초래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전체 회중을 선교의 동력으로 여겼다. 또한 모든 지역에서 농업과 상업에 참여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노예는 그들의 기본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개혁주의 성직자들은 암스텔담에 비난의 화살을 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정치가와 동시에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했기에 끊임없는 문제에 시달렸다. 때로는 법과 질서의 관리인으로서 법정투쟁까지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형제단에게 있어서 모라비안이 된다는 것은 곧 선교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기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뱃삯 대신에 배에서 노동을 했다. ‘여행은 지금, 지불은 나중’ 이 전통적인 모라비안의 절차였다. 1세기가 넘도록 선교 비는 현지의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1857년의 전 세계 모라비안 교회의 총회 보고에 따르면 수리남, 남아프리카, 라브라도의 선교는 온전히 현지에서 후원되었다. 모라비안 들의 교회 조직은 역사 변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서 모라비안 들은 유럽 정부들에게 다른 선교단체보다 더 좋은 인식과 명성을 심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라비안 들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모든 크리스천은 선교사이며, 사업가고 설교자, 교사, 의사와 나란히 세계 선교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었다.
형제단의 교회 조직은 전반적인 교회 질서 하에서 선교와 경제활동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연합되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형제단은 계속되는 긴장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교 단체들이 간과하고 있던 세계 선교의 영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들의 실제적인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모라비안 들은 자신이 전문적인 직업을 통한 선교활동이다. 그러난 선교활동에 있어서 그 목적으로는 선한 직업과 자신들이 선호하는 직업들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비교적 선교의 효율성과 경제적인 자립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선교 형태는 현지인들에게 호응을 받으므로 장기적인 선교활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들이 행한 선교의 업적은 당시와 오늘날에 도 견주어 볼만한 선교단체들이 없다.
그들의 선교 지원 동기는 매우강한 열정과 결단력에서 이미 성령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로 말미암아 자신이 가진 기능을 가지고 지금 현재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 활동을 포기하는 결단력이 그들을 선교지로 향하는 전문인 선교사가 되어서 글들의 기능들을 통한 선교 활동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열쇄라고 보여 진다.
-김종부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