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가구의 정수 화각공예
활짝 핀 꽃으로 모여드는 새들이 정교하게 재현된 조각은 다름 아닌 쇠뿔이다. 화각(華角)이란 쇠뿔을 얇게 펴서 그림을 그린 후, 목물(木物) 위에 붙여 장식하는 각질공예를 말한다. 궁중가구의 정수인 화각공예는 예로부터 귀족이나 왕실의 애장품에 주로 이용됐다.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취를 감췄던 화각공예는 故 음천일 선생의 노력 끝에 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한기덕 전수조교의 선친인 故 한춘섭 화각장은 16세 때 음천일 선생의 공방에 들어가 기능을 전수받았다.
MBC ‘이산’, ‘동이’, ‘해를 품은 달’, KBS ‘대왕세종’, JTBC ‘인수대비’ 등 대하사극 속에 故 한춘섭 화각장이 빚은 왕실가구가 빈번하게 등장했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화각’이라는 용어조차 여전히 생소하다. 한기덕 전수조교는 “서민층이 사용하는 공예품이 아니라, 사대부 계급 이상의 특수층에 애용되어 온 귀족공예인 터라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또, 유기물인 쇠뿔은 땅속에 묻히면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오래된 화각공예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쇠뿔에 혼을 그려 넣다
화각공예의 주재료는 소의 뿔로, 오직 한국 황소로만 제작이 가능하다. 화각공예는 안쪽에 그림을 그려서 바깥에서 비쳐 보이게 하는데, 한국 황소 외의 다른 쇠뿔은 투명도가 떨어져 사용할 수 없다.
“화각의 주재료는 통이 굵고 뿔이 위로 곧게 뻗은 수소의 뿔입니다. 암소 뿔은 휘거나 속이 비어 있고, 젖소 뿔은 투명하지 않거든요. 또, 사료가 아닌 풀을 먹고 자란 소만이 뿔이 투명해요. 그중에서도 맑고 채색이 잘 나타나는 2~3세의 황소 뿔만 사용합니다. 늙은 쇠뿔은 각질 내에 검은 심대가 진하게 박혀 투명도가 떨어지고, 너무 어린 쇠뿔은 흰색의 반점이 있어 화각재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화각공예는 크게 백골(白骨)을 만드는 소목장 일, 쇠뿔을 펴서 얇게 만드는 각질장 일, 뿔편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 일로 나뉜다. 황소의 뿔을 종이처럼 얇게 갈아서 그 뒷면에 그림을 그리고, 단청 물감으로 채색해 함·장·농 등의 나무판 표면에 붙여서 꾸민다. 공예품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웬만한 머릿장 하나를 장식하는 데도 40여 장의 조각을 이어 붙이니, 황소 20마리의 뿔이 동원되는 셈이다.
화각공예는 모두 36단계의 공정이 있을 만큼 복잡하다. 우선 가장 투명한 뿔을 골라 삶아서 속을 뺀 다음, 말려 넓적하게 편 후 갈아서 얇은 종이 두께로 만든다.
“쇠뿔을 8시간 끓이면 쇠뿔 안의 단백질이 쏙 빠져요. 속이 빈 쇠뿔을 20일 정도 그늘에 말린 뒤, 쇠뿔 꼭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반듯하게 펴 투명한 부분을 잘라내죠. 쇠뿔 1개가 뿔판 1장꼴입니다. 0.3~0.4㎜ 두께의 각지에 오방 염료로 그림을 그려요. 안쪽에 그려 붙여야 하니 거꾸로 그려야 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맺고 끊어야 해요.”
먹이 마르면 색을 칠하고 열을 가한 뒤, 기물의 표면에 붙여 옻칠을 한다. 완성 뒤에도 각지의 표면을 갈아 투명하게 매만지는 작업이 이어진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공예품’이라는 한기덕 전수조교의 말이 절로 수긍이 가는 공정이다.
오방색 문양으로 기물을 장식하는 화각은 우리 전통공예 분야 중에서도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한다. 재료도 귀하고 공정도 까다롭지만, 왕족 중심으로 쓰였을 만큼 작품에 그려진 문양과 그림, 색채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화각공예의 문양은 우리 조상의 생활이 담긴 풍속화부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이 주를 이룬다.
“화각공예는 주로 쇠뿔에 잘 받는 적, 청, 황, 백, 흑색을 기본으로 사용합니다. 조선시대의 화각공예품은 적색과 황색 바탕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색으로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적색을 광범위하게 썼는데, 이는 높은 계급을 상징한다고 해요. 또한, 화각지를 통해 볼 때 비치는 효과가 가장 잘 살아나는 색이기도 하고요. 채도 면에서는 중국의 당채보다 밝고, 일본의 색상보다 짙은 중간색이죠. 이러한 색을 ‘진채’라고 하는데 채도와 명도가 다 같이 높은 편입니다. 화각지를 통해 비치는 색채는 직접 칠한 것보다 한층 풍부하고 화사하게 표현됩니다.”
유한하여 더 아름다운 전통
부드러우면서도 화사한 색감의 화각은 예로부터 장롱, 문갑, 경대, 반짇고리, 실패, 빗 등 안방 가구와 기물, 그리고 봉채함(예장함) 등 격식을 요하는 상자에 쓰여 왔다. 왕실이나 귀족들만 쓰던 사치품에서 일상 속 예술로 대중화하기 위해 한기덕 전수조교는 연구를 거듭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오고 있다.
“쇠뿔은 가공하는 시간과 노력도 많이 들지만, 재료의 특성상 습도에 민감하고 보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어요. 가구든 예술품이든 오래 보존하는 게 중요한 문제인데, 쇠뿔은 갈라지고 깨지기 쉬워 보존에 특히 취약하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순리를 인간이 억지로 다스릴 수는 없어요. 물론, 기술을 발전시켜 예전보다 더 오래 보존하고 감상할 수는 있게 되었지요. 저희 아버지도 부단한 연구로 조선시대 당시 40~50%에 지나지 않았던 보존기술을 90%까지 끌어올리셨어요. 그다음은 우리 몫이겠죠. 그래도 자연에서 얻은 쇠뿔인데 천 년은 못 가요. 그 이상 바라는 건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일 테죠.
유한하여 더 아름다운 전통이 다시금 만개할 수 있도록 묵묵히 꽃씨를 심고 거름을 주며 꽃봉오리를 틔우는 장인의 손은 오늘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글‧윤진아 사진‧안지섭(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참고‧한춘섭 화각공예(open.hwag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