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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2장 1-12절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앞서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고자 하여 손과 몸을 씻는 행위는 있었습니다. 그런 행위로 정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마음의 정결함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전혀 무관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40절에 보시면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즉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겉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드실 때 그것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보면 무엇을 만들 때 지식을 가지고 만듭니다. 아무런 지식 없이, 아무런 이해 없이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때로는 지식이 아니라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라고 할 때는 사람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본래 이런 지식이 있는데 그 지식을 따라 무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사람에 대한 지식이 지식으로 있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려울 수 있지만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사람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지식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입니다. 본래 있는 지식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지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 안에서 지식이 나올 뿐입니다. 즉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외부로부터 어떤 지식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만들면 되겠다고 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정보가 외부에는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따라 만드신 대상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모를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지식을 갖춰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쪽 벽을 보고 있다면 벽 뒤편은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가시광선 영역만 볼 뿐이지 눈앞에서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시라는 것은 모든 것을 통째로 보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계시지만 시간 밖에 계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만 공간 밖에 계시기도 하십니다. 시간에 매이지 않으며, 공간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를 한꺼번에 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 분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그것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만드셨다면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모르실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상 16장 7절에 의하면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은 외적인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의 결과이지만 내적인 것을 숨기고 외적인 것을 치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정결한 것처럼, 성결한 것처럼 씻습니다. 더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더럽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온갖 탐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라는 반복되는 말씀을 본문에 앞서 하셨던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에 대한 주의를 교훈하시는데,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수만 명이 모일 정도로 많은 자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말씀하시느냐 하면 제자들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것, 다시 말해 그들의 위선을 염두 해 두시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행위적인 면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까지 염두 해 두고 있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6장 11절과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지금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것은 가장 먼저 그들의 위선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에는 그런 위선이 나오게 만드는 그들의 가르침까지 주의하라고 알리는 내용입니다.
사실 선하다고 여기는 어떤 일을 행할 때는 선행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가르침이 분명 있습니다.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자살테러를 벌이고 있는 일이 많은데,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이런 일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의 구원관에 대한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Koran)에 의하면 4가지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도 있고, 나아가 선행을 많이 하는 것, 그리고 성지순례의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알라를 위한 전쟁에 참여하여 순교하는 것입니다. 저들도 자살은 죄라고 말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러 테러들을 알라를 위한 전쟁으로 말하면서 거기서 죽는 것은 결코 자살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들의 외식적인 행동만 주의해야 할 것으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정당한 가르침 외에 모든 다른 교훈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헛되고 잘못된 것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의 결과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가장 위에 계시고, 그 다음이 사람, 그리고 사람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 순입니다. 그러나 타락이 가지고 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순서를 역순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만큼 헛되고 잘못된 것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정당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순결로부터 낙오되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부패된 본성은 참된 가르침 속에서도 변화되기가 어려운데, 거짓된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물론 현상적으로 보면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욱 뚜렷한 변화를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지는 말씀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위선,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누룩’이라는 말을 사용하시는데, 누가복음 13장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누룩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이때 누룩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시면서 작은 씨 하나가 나중에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누룩은 부풀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 비유로 누룩을 말씀하실 때는 지금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는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누룩을 바리새인의 위선과 교훈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위선과 가르침 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작은 누룩이 들어갈 때 크게 부풀려지는 것처럼 거짓된 가르침 역시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큰 심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잘 드러낸 것이 누가복음 11장 5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지식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든지 잠겨져 있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을 닫는 자로 있었습니다. 참된 가르침이라면 문을 열 수 있었지만 참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이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없었던 겁니다. 그 결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천국 문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가르침은 거짓된 가르침으로만 남는 게 아니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거짓된 가르침이 방해를 놓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동산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8:44)인 사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그러나 사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물론 이렇게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흐리도록 하는 유혹이 분명 있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여기에 대해 여자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 그러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말했던 겁니다. 즉 거짓된 가르침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흐리게 만들고, 그리고는 부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전략입니다.
구약에 보면 많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의 일관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화가 아니라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평안을 말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즉 전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한 면에 대한 이해만으로 다른 부분을 빼 버린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결국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북이스라엘도 그렇고, 남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들이 있던 초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인데, 구원을 은혜와 더불어 율법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인간의 공로는 1퍼센트도 들어가지 않는 것, 오직 하나님께만 그 원인을 두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거저 베푸시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니다. 인간의 노력도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명령이 있을지라도 명령하신 주체가 그 명령을 이루시겠다고 까지 말씀하시는 게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성화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역사 속에 있었던 수많은 이단들 그리고 오늘 날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거나 심지어 그러한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다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성경의 주체가 하나님인데도 끊임없이 인간론 중심으로 보는 시각,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요15:5)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가르침이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만들며, 그저 인간의 열심만 자아내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것으로 올려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한 번 진리에서 벗어나 거짓된 교훈 아래 빠지게 되면 다시금 진리로 올라오게 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람이란 존재는 헛되고 잘못된 것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자기가 증명되고 그 안에 터를 잡고 안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교회 앞에 가르쳐야 할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의하면 주의 몸 된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그만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다고 해서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거짓된 가르침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지만, 다시 말해 진리만을 기록하게 하실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얼마나 더 주의를 해야 하겠습니까?
이어 2절과 3절을 보시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간단히 말하면 아무리 거짓된 가르침이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혹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이 진리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그것을 능가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완전히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을 깨닫는 자는 극히 적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자들도 깨닫지 못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은 결국 진리 자체를 죽인 것이요, 진리를 배척했다는 결과 외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으며, 사도들을 세워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라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6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산당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분향제단들이 찍히며 너희가 만든 것이 폐하여지며” 즉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은 모든 것이 다 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관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진리는 무엇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일이 있는데(요18:38), 형식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음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라고 하시는데, 이후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사도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10장에서 잘 말해 주고 있는데, 거기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 그래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23).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누군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입니다.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을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박해 속에서도 말씀의 빛은 숨길 수 없습니다. 어두운 데서 말하고 골방에서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숨겨져 있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데서 말하지만 그 말씀이 광명한 데서 들릴 것이고, 골방에서 귀에 대하 말하지만 그 말씀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는 역사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결코 감춰져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박해하는 일이 있어도, 거짓된 가르침이 진리를 덮는 것처럼 있어도, 그래서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너무나도 적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가르침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폐할 것이고 진리만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 4절과 5절의 권면이 있는 겁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선 본문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데, 그들에 대하여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지만 동시에 동역자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지만, 그 가르침과 동일한 가르침을 가르친다는 전제 아래 그들을 친구로, 동역자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진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가르친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동역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치는데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셨던 바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행함만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박해를 있을 것이고, 박해를 통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박해는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더 이상 무엇 하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리시는데,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5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인 후에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죽인 후’라는 말은 삶과 죽음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누가 죽이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4절에서 박해하는 자가 몸은 죽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 이어 나오는 참새 다섯 마리에 대한 내용인데, 같은 의미를 전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데 참새 두 마리가 잡히는 일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이 사람을 해하고 죽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자들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보다 월등해서 주의 백성을 죽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셔서 박해자들이 몸을 죽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몸은 죽이지만 영혼을 어떻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몸을 죽일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지옥에 던져 넣는 것입니다.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 분!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만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두려워해야 할 일은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땅에서 잘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고,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실패한 인생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3:11).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종교가 있는 것이고, 건전한 종교의 경우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영원의 사모함을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가? 너무나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로지 지상의 삶에만 집착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무엇을 소망하느냐?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 사고하고, 그래서 지상의 삶에 매여 있는 것처럼 생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는 것은 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육신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할 뿐,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밖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몸만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몸과 함께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가치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다는 것이고, 영혼이 지옥에 멸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로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영혼이 지옥에 멸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17장 3절로 말씀드리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배우는 일이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6일 동안 힘써 일하도록 하신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6일 동안 일하여 얻게 하심으로 우리 육체를 보존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 일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살후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안식일, 다시 말해 오늘날 주일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6일 동안 하던 일을 멈추게 하시는 겁니다. 오락도 멈추게 하시는 것이고, 심지어 사사로운 말도 금하는 것입니다(사58:13-14 참조).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두려움의 대상이요, 세상이나 세상이 있는 어떤 것도 두려움이 대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마태복음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는 혹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일어날 뿐만 아니라, 허락하시는 그 일 속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면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 있는가? 세상 모든 만물을 다 아시지만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한 자는 너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6장 26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지금도 공중의 새들이 날아다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르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귀한 우리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표현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 매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섭리를 안다면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줄 압니다. 그 말은 그렇게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겠느냐고 만물을 통해 항상 우리에게 반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28-3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드러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8절과 9절을 보시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고, 또 부인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고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협박을 하고 실제로 박해를 하지만 너희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는 분으로서 지금 저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 10절에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까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말로는 부인하는 일이 있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로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함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을 참고해서 말씀드리면 복음의 말씀이 증거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일들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오늘날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가 할 때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시의 완성과 함께 계시를 위한 기적의 역사와 같은 능력은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증거 될 때 그 증거를 끝까지 부인한다면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계속해서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들 앞에 끌려 갈 것도 아셨는데, 그들 앞에서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행1:8).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사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며 인도할 것이고,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양육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런 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앞에서 세상에 있는 것으로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세상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자로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자로 계시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건전한 종교들처럼 선을 행하면 영생을, 악을 행하면 영벌을 내리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외형을 갖춘다고 말씀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선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을 때 그 앎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 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받은 자들로서 세상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로서 세상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