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9:
고려신학교 복교와 그 전후의 사정
1960년 12월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원칙에서 신학교는 한 이사회 아래 두 신학교를 의미하는 '신학교 일원화'로 존재하기로 했지만, 이듬해 합동원칙이 무너져 고려신학교가 총회신학교에 통폐합되었고, 폐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두 해 후 합동측 제47회 총회 후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을 하였고, 그 절차에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고려신학교는 이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다큐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29) 고려신학교 복교와 이후의 사정
글_ 나삼진 목사(미국 Evangelia University 교수, 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합동총회의 처사에 대한 경남(볍통)노회의 항의 책자(1961)
고려신학대학 인가 기념예배(1971)
고려신학교 복교 후 박손혁,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1963)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은 첫해 제46회 총회(1961)에서 이사 동수, 신학교 일원화의 신학교 경영에 대한 합동원칙이 무너지면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 교단이 합동을 논의할 때, 양측에서는 같은 교리, 같은 신조를 가졌기 때문에 합동을 ‘하나님의 뜻’이라 노래했다.
그때는 해방 전까지 하나의 치리회를 유지하던 장로교 총회에서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을 이끌던 고신측이 총회에서 단절된 지 9년이었고, 신학적으로 자유스러웠던 조선신학교계가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리되었으며, WCC를 지지하였던 연동측도 1959년 분리된 후였다.
당시의 교계 상황에서 볼 때 고신측은 박윤선 교장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 신학교육의 공백상태였고, 유학중이던 교수 후보자들은 박사 학위 논문중이라 귀국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합동측이 선교부와 모든 재산을 잃은 난국에서, 박형룡 박사가 자신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합동을 요청했을 때, 너무 쉽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감성이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중도파들이 교권주의자들과 뜻을 같이해 고려파의 축출에 가담했던 것을 쉽게 잊은 것이었다.
이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나 WCC 지지자들과 결별된 상태에서,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출옥성도로서 자신들의 영적인 권위로 총회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신사참배 강요의 위협은 없어지고, 회개운동도 시들었지만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이 교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위험성을 간과한 것이었다.
1960년 12월 13일에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하였고, 합동원칙에 고려신학교도 신학교 통폐합의 ‘단일화’가 아니라, 한 이사회 아래 두 신학교의 개념으로 ‘신학교 일원화’를 원칙으로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제46회 총회에서 호남지방 총대 80명의 연명으로 제출된 긴급동의안의 가결되었다. 이러한 긴급 헌의는 합동원칙이 다수의 물리적인 힘의 행사로 파괴된 것이었고, 장로교 행정원리에 맞지 않은 처사였지만 한상동 목사는 의장으로서 이를 막지 못했다.
이에 경남(법통)노회에서는 항의하여 퇴장하였고, 총회 후 정기노회의 결의를 거쳐 10월 20일에 ‘경남(법통)노회 결의와 해명을 공개함-합동총회에 대한 호소 총회 퇴장은 최종적인 호소’라는 46판 활판 인쇄 세로쓰기 25면으로 된 문서를 발표하였다.
문서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는 미완성된 부분과 여러 시정 대책을 각 7개 항을 열거하였고, 핵심적인 사항으로 고려신학교 폐합은 ‘합동원칙에 위반되는 비위사’가 된다고 하였다.
이 문서가 합동기의 고신측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합동과 고신측 환원에 대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잘 인용하지 않고 있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
제27회 총회가 끝난 후 두 회기를 회장으로 추대받아 한상동 목사가 총회 회무를 이끌었지만, 총회와 신학교 운영은 승동측이 주도하고 있었다. 2년 총회장 봉사 후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가 없어질 위기에서, 총회 후 10월 17일 고려신학교(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의 경건회를 인도한 후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였다.
그는 주남선,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설립자였고, 지금까지 고려신학교는 그의 책임하에 운영되어 왔다. 전임이사장이었던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으로 고려신학교는 완전한 폐쇄를 피할 수 있었고, 이후 고신측 총회도 합동 3만 만에 복구되었다.
그것은 합동 전까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었던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용이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이 절차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한상동 목사는 설립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책무라고 이해했던 것 같다.
고려신학교가 1946년 개교하고, 광복동 교사에서 8년을 지내고 송도 교사를 마련해 온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법원 등기소에 재산이 등기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신학교가 등기를 마친 후에 합동측에서도 등기를 하러 와, 14년 동안 형성했던 자산을 송두리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 당시 송도 교사를 법적으로 확보되지 않았으면 이후 고신교회의 존립에 큰 문제가 되었을 것임이 자명한 일이다.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에 박손혁, 이근삼 교수가 먼저 합류했지만, 고려신학교가 바로 정상화되지는 않았다. 총회신학교 부산분교 간판이 내려지고, 창고에 있던 고려신학교 간판이 다시 걸렸으며, 11월 6일에 복교예배를 드리고 11월 20일부터 수업을 하였다.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는 11월 22일부터 영도로 옮겨가 강의를 했지만, 신학교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서울에서 강의하던 오병세 교수는 학기 수업을 마치고 12월에야 내려와 12월 17일에 박손혁, 이근삼, 오병세 세 교수가 취임했고, 홍반식 교수는 복교 선언의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복교에 합류하지 않았다.
개학 전 송상석 목사와 지득룡 장로가 가덕도 소양보육원에서 홍반식 교수와 사흘을 함께 지내며 설득해, 이른바 ‘동방박사 세 사람’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세 교수는 2월 25일 성명서를 내고 고려신학교로 합류해 구약, 신약, 조직신학 교수 진용이 규모있게 짜여졌다.
제14회 총회(1964) 때에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와 고려고등성경학교 모든 재산을 총회에 헌납해 총회직영 신학교육기관으로 결의하고, 이후 총회유지재단에서 재산을 관리했고, 1967년 학교법인이 설립된 후에는 학교법인이 신학교의 운영 주체가 되었다. 고신교회가 환원한 후 심대한 손실을 극복하기 위해 신학교 당국과 총회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1964년 2월 칼빈학원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워 고려신학교 대학부로 편입하였고, 김진경, 김영재, 홍치모 등이 교수로 합류했다.
고려신학교는 1969년 대학과 동등한 학력을 인정하는 각종학교 인가를 거쳐 1971년 문교부에서 고려신학대학 인가를 받고, 새로운 차원에서 고등교육과 신학교육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사이 1968년 3월에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도 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