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무술년 1월5일 (금) 오후 1시 점심 겸 시각장애용산지회 정기총회에
초대 받은바 있어 궁굼증도 있고해 점심시간을 활용해 2시반 까지 참석을
전제하에 참석했었다. (구) 용산구청 앞에 있는 "마루 한정식"에 도착해보니
일부 회원들이 와있었다. 17년을 용산 지체장애인 편의시설에서 모니터링하며
장애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장애인 행사에도 참석해 많은 지체 및 뇌병변
장애인을 봐왔던터라 어느정도 익숙해 졌지만, 시각장애인 모임은 처음이라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녹내장으로 인해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후천성 시각장애를 얻으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그나마 깨트린 편인데도..꺼림찍한 생각이 왜 드는지 모르겠다?
지회장인 또래 최여사도 목소리가 아닌 얼굴은 첨 봤는데 활기차게 움직였다.
활동보조인의 보조를 받으며 인사를 나눴는데 잘 안보이는 듯 했다.
통화상으론 나와 같은 녹내장에 의한 후천성 시각장애5급에 10년 됐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주위에 알아보니 어느정도 보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잘 안보인다 한단다.
총회에 참석한 많은 회원들은 활동보조인을 동반했고, 일부는 혼자 왔지만 희미한 형체만 보인다고..
마침 서울지회장 선거가 코앞이라 후보 5인 중 4명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하며
인사를 다녔는데 저마다 활력이 넘쳤다.
사실상 장애인모임에서 나는 정상인이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들었었는데...눈만 빼면은...
순간 내 마음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왜냐면 실명의 공포가 내습했던 몇년전 잠을 못이루고
죽음을 생각하며 주위를 대충 정리했었기 때문에...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생각하며...
선후천적인 실명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는 많은 이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평소에 장애를 극복하는 것을 영화나 뉴스를 통해 접하며 그런 도전정신을
당연하지않겠나 간단히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나에게 닥치니 암울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중이 제 머리 못깍고, 구두장수가 구두 못 신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내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심란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것인지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하는 하루였기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 했다.
그 말을 떠올리며 지난 연말연시에 속초해변을 거닐며..또 해돋이를 보며..
절망보다는 희망적인 길을 찾아보자고 다짐을 했었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작년 후반부터 영화 보기도 불편함을 느끼며, 일주일에 1~2편을 봐왔었는데
몇몇 영화는 시간대 맞추기 어려워서 못봤다가 어제 (1/17,수) "원더"를 봤다.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강인한 의지와 가족의 사랑을
지원삼아 집에서 교육받다가, 공교육인 학교에 진학하며 사회에 적응해가는 감동영화였다.
남들이 보면 쉬어보일지 모르겠지만 본인과 가족들에겐 뼈저린 아픔을
수없이 겪고 넘어가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요하며, 환경이 바뀌면 또다시 반복되는
적응의 아픈 시간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이 나빠지며 기억력도 쇠퇴해 금방 보고도 금새 까먹는다.
고객이 몇년전에 왔던 걸 기억했었는데...
이젠 새로운 입력이 잘 안돼며, 머리에 남아있는 것 마저 자꾸 깜빡 거리며, 글쓰기도 힘들다.
노트북을 안쓴지 오래고, 증시시세도 본지 오래...컴 접속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이 글을 정리하는데도 1달여의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컴 접속에 부담감을 느낀다.
이제는 용어도 아리까리해 엊저녁엔(1/31 수) 댄스의 일종인 "살사"가 순간적으로 잊혀졌었다.
이렇듯 순간순간 기억속에 있었던 것이 순간적으로 잊혀져 답답할 때가 제법 생긴다.
어제는(1/31, 수) 시간상 "커뮤터"를 보았는데, 이젠 화면과 자막을 동시에 보기에 엄청난 부담을
느껴서 눈건강을 위해서라도 한달에 관심작 2편 내외로 자제하기로 맘 먹었다.
오토바이(운전)..자전거..바둑..장기..체스..배드민턴..테니스..탁구..등산 등을 눈 때문에 포기했고..
내 눈을 버린 주범인 "브릿지"도(?) 진작 포기했었다. 감정에(배신감) 의한 불면증상으로 밤새
브릿지를 pc방에서 컴으로 즐겼는데, 무지해서 화면크기조정을 못해 눈에 부담을 많이 입혔었다.
만약 밤새 술먹고 춤추고 노래하며 외로움을 달랬었다면 눈은 나빠지지 않았겠지만...
간 이상으로 아마도 저세상에 먼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전화위복이라 생각하며 위로해 본다.
소위 "팔자소관"이라 생각해야 그나마 맘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제는 평생 꿈꾸며 생활화해온 춤도 나혼자만의 영역에 가둬둬야 할 듯 하다.
1월초에 동아문화센터 댄스모임으로 우리나라 댄스모임의 롤모델이었던 "삐에스타 클럽"의
초대회장이었던 허회장의 전화를 받았었는데, 같이 댄스를 즐겼던 일본인 아내가 돌아가신 후
재혼을 했으며 현재는 댄스를 접었고...섹스폰, 서화, 민요 등을 즐긴다고 했다.
나의 강직함을 알아보고 동아에 합류한지 얼마안되는 나를 초대 감사에 선임하면서...
"모두와 친하면 내 친구가 아니며, 적이 없다는 것은 할 말을 못하는 사람" 이라며, 나의 바른말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임원 일부의 반대를 잠재운 말 한마디를 전해 주었었다.
국가나 사회의 모든 조직과 모임에서 바른말이 줄어들거나 패거리로 옳음을 매도한다면
서지현 검사의 예 처럼 뒤늦게 곪아 터져 환부를 어떻게 도려낼지 모를 지경이 된다.
그때 옳바른 사고를 갖고 행동에 나선 인사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슬퍼런 권력 앞에 힘없이 주저않고 매도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8년이란 세월이 흘렀겠지요..
정권이 바뀌어 법무장관이 바꼈음에도 성추행 진정이 제대로 처리되지않는 그런 검찰조직이다.
지금도 조직 내외부에서 뒷말이 나오는 등 반성하지 못하고 아직도 구태에 젖은 사람들이 있다.
슬픈현실이지만 과감하게 이들을 색출해서 추려내어 검찰조직에서 쫒아내는게 검찰을 새롭게
탄생시켜 국민의 검찰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권력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법적으로 해결이 안돼고, 불이익을 받을 상황인데 친고죄 공소시효가
6개월이 지나 성추행 행위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소급적용을 해야 한다.
상부에서 알고도 성추행 피해자가 고발하면 거꾸로 피해를 본다며 피해자에게 어떻할건지를
물어봤다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이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사건이 "미투" 운동의 확산으로 번져 우리사회가 깨끗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방산비리를 다룬 "1급 기밀"이란 고발성 영화를 봐도 군수물품 비리에 저항한 사람이 있었다는
대사가 나온다. "너 혼자만 깨끗하고, 너 혼자만 이렇게 따진줄 아냐? " 란 대사에서 국방부에서
청와대 까지 혼탁하고 부패한 보수를 위장한 인사들이 장벽을 이뤄...내부고발을 한 인사가
거꾸로 감옥에 가는 등 어려운 현실인 것 같다. (구체적인 내용과 대사는 영화를 참고하세요! )
춤 세계도 많이 바뀌었다. 물론 모든 분야가 거의 그렇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오히려 제대로 배운 사람이 현장적응을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것은 스포츠 세계도 비슷하다. 오직 승부에만 집착해 "목소리 큰 사람이 왕" 우기면 끝이다.
테니스 코치가 풋폴트를 반복적으로 하고, 심판은 지적 안하고...지적하면 싸움나니까...ㅋ
춤에선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일자, 난(짝난, 쿵난), 리듬짝, 삼삼박 등이 성행하다가
언제부턴가 잔발, 246, 2456 등등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동호회를 총해 전파된 춤이 내용도
모르는 사람들이 따라 배워 추는 현실이 되었다. (스포츠댄스도 비슷하게 노인대학 등에서 전파됨)
이런 현상이니 스포츠맨쉽을 배운 각 스포츠 동호인이나 정통 댄스를 배우신 분들은 자연히
현장에서 멀어지는 실태가 벌어진다.
왜냐면 기분풀러 갔다가 오히려 기분상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캬바레가 점점 없어진 이유도 그렇다. 예전엔 주부들이 곗날이면 1차 끝나면 끼리끼리 캬바레로
향했던 시절이 있었다. 재미있게 춤추고 술마시며 스트레스 풀고 들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엉터리가 판을 치며 분위기를 망쳐서 점차 발길을 끊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즐길수있는 많은 레져활동에 동호회가 생겨 사진촬영, 자전거 등도 일조했다.
모든 것이 수준이 높아질수록 같이 즐길 상대가 적어진다. 산도,,자전거도,,운동도,,도보도..
마땅한 짝을 찾지 못하면 혼자 나서야 하는데...요즘 유행하는 혼밥, 혼술 처럼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혼자 못하는 것이 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혼밥 혼술을 즐겼었다. 물론 여럿이 어울려 밤샘도 많이 즐겼었지만...
왠만한 산은 혼자 갈수있지만 높은 산은 혼자 못간다. 도보여행도 그런 곳이 있을테고...
특히 댄스는 일부 빼고는 혼자 할 수 없는 짝이 있어야 출수있는데...배움이 문제가 된다.
미국의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면 필수적인게 "아서머레이 댄스스쿨"의 브론즈 메달 획득이다.
수강료가 비싸고 기간이 길지만 10가지 춤을 익혀야 브론즈 메달을 따서 파티에 참석할 수있다.
요즘 치매에 고생한다는 유명 코미디언 "쟈니윤"님이 미국에 가서 맨 처음 한 것이
"아서머레이 댄스스쿨" 등록이었다고, 어느 자리에서 밝힌적이 있었다.
눈이 나빠지며 시간에 쫒겨 제자 키우기도 힘들고, 상대를 찾아 배워주기도 더더욱 어려워졌다.
똥인지 된장인지 가릴수있는 사람도 예전보다 찾기가 쉽지않는 현실이다 보니...
놀러가도 나 혼자 음악들으며 제자리에서 기본스탭으로 몸을 푸는게 일과로 전락한 형편이다.
기계는 돌아가야 녹이 안쓸고, 말은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데...말띠인 내가 맘대로 못달리니 갑갑..
예전에 나를 얘껴주셨던 플레이보이 선배님의 말이 불쑥 생각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힘 떨어지면 발 끊어야지~" 형수님이 춤을 안배우고 싫어한다며...씁씁하게..
고시공부를 했고, 정치깡패 이정재 별동대에서 활동했으며, 춤도 정통을 배워 교습소를 운영해
외국나가는 아나운서 들은 배워준 실력파로 당시 지리박의 "남버 원"이라 불렸던 분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인 정인숙씨와의 일화도 전해들었었다. (사촌동생 건이지만...)
이제 나도 눈 때문에 서서히 진행되는 모든 신체변화를 느끼면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세상으로 진입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 몰라도...
점차적으로 다가오는 어둠의 공포를 마음 한켠에 숨겨두고서, 내일을 기약 못하는 나약함을
스스로에게 탓하며 독려해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써봤습니다.
* 글쓰기가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추후 추가 및 정리함... (2/1 목, 정리함.)
* 공룡능선 타기 전날 가볍게 선자령을...
* 2017년 동창회에서...다 늙었는데 그래도 나는 생생한 편...눈 빼고~ㅋ
* 백두대간 종주 중...14~15년 쯤..
* 2017년 엄홍길 대장과 청계산에서...
*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던 2000년 중반 무렵으로 딸과 하늘공원에서...
* 공룡능선에서...작은 형과 새벽에 설악동을 출발해 10~12시간 걸린 듯...엄청 힘들었음.
* 2017년 정조 능차행렬에 참가해 한강대교까지 행군.
* 2017년 용산 지체장애인들과 전곡 선사박물관에서...
* 16~17년 인가...청남대에서...
* 2015년? 설악산 대청봉을 혼자가기 위한 전초전으로...
* 드디어 대청봉에...
* 2015년 한라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