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임청에 서문경과 반금련
<초한지> <임꺽정> <짱구박사> <수호전> <가루지기> <일지매> 등 고우영의 주요 만화에 등장한 각종 캐릭터들 모음. 70~80년대 성인과 청소년, 어린이 등 여러 계층의 독자들에게 사랑 받았던 당대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었다.
3월8일 노교역을 지나며 그간 궁금했던 것을 최부는 물었다. 그들은 웬만하면 대당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시대가 언제인데 왜 그러냐는 것이다. 또 하나 더 물었다. 최부를 부를 때 ‘오야지’ 하는 데 요즘 우리는 대뜸 일본말인 것을 대뜸 알아차리지만 당시 최부는 생소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한 부영의 답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당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까닭에 습관적으로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우리 쪽의 대인을 호칭하는 뜻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아마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을 것이라고 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부영은 대당이 습성 적으로 밴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우리가 일제를 잘 거론하지 않으려 하듯 만약 대당이 치욕의 역사라 할 것이면 입에 결코 담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당나라 때가 살기 좋고 화평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양제가 하늘에서 통곡 할 일인데 그는 운하 때문 몰매 맞아 죽은 거나 진배없는데 운하를 판 덕을 고스란히 당나라가 누리고 태평연대를 구가하니. 중국인들은 지금도 ‘정관의 치’라 하여 그 뜻을 헤아린다.
‘정관(貞觀)’이란 당나라 태종의 연호로, 태평성대를 누린 그의 치세를 높이 평가해 ‘정관의 치(治)’라 했다. ‘정관정요’란 ‘정관의 치’를 가져온 정치의 요체라는 뜻으로 태종의 말을 받들어 오긍이 지었는데 「군도편(君道篇)」 이하 「신종편(愼終篇)」까지 10장 4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세들은 특히 황제들은 이를 학습서로 썼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정관 10년에 태종이 신하들에게 물었다.“제왕의 사업인 창업과 수성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당나라의 3성6부에서 3성의 하나인 상서성의 차관) 방현령이 말했다.“천하가 혼란스러울 때는 영웅들이 다투어 일어납니다.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런 군웅들을 쳐부수어야 합니다. 그걸 생각하면 창업이 더 어렵다 할 것입니다.”
측근인 위징이 반론을 펼쳤다. “새로운 제왕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면 반드시 전대의 혼란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세상을 평정하고 민심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새로운 제왕을 환영하고, 다투어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원래 창업이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지 백성들이 주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이 그리 어렵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천하를 손에 넣은 뒤에는 교만에 빠져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내달리고 맙니다. 백성이 평온한 생활을 원해도, 각종 부역은 끝이 없어 백성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배가 고파 야단인데 제왕의 사치를 위한 노역이 끊이지 않으니, 국가가 피폐해지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 할 것입니다.
”태종이 말했다. “방현령은 예부터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고 수없는 난관을 겪으며 구사일생으로 오늘날을 맞이했다. 그대 입장에서는 창업이야말로 지난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한편, 위징은 나와 함께 천하의 안정을 꾀했고, 지금도 혹시나 이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수성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생각건대 창업의 어려움은 벌써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구나. 앞으로는 그대들과 함께 힘껏 수성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생각이다.” 「군도편」>
이하 좋은 말들이 참 많다.
<군주는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굽은 나무도 먹줄을 따라 자르면 곧아진다.
포상과 징벌은 신중하게 행하라
선한 자는 영원하고, 악한 자는 망한다.>
명문장을 소개하면
<林深則鳥棲 水廣則魚遊 / 임심즉조서 수광즉어유
‘숲이 깊으면 새들이 깃들고, 물이 넓으면 물고기가 노닌다.’
태종이 측근에게 위정자의 마음가짐을 비유하여 한 말로, ‘인의를 쌓으면 천하 만물이 귀의한다(仁義積則物自歸之)’라는 말이 뒤를 잇는다. 위정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자세를 올바르게 해야 하고, 그것만 잘 지키면 백성들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疾風知勁草 板蕩知誠臣 / 질풍지경초 판탕지성신
태종이 신하 소우(蕭瑀)의 충절을 칭찬한 말로, ‘판탕’은 난세라는 뜻이다. 억센 풀이 세찬 바람(질풍)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듯, 충신은 난세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
3월9일 제녕주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 물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갑을 지나 제녕주 성에 이르니, 곧 동북쪽의 사하(泗河)는 곡부현 방향으로부터 광하(洸河)는 조래산(徂徠山) 방향에서 흘러 와서 노성(魯城) 동쪽에서 합하여 조하(漕河)로 들어가 회수에 도달하여 바다로 들어갑니다. 회수를 넘으면 남경입니다. 서북쪽에는 거호(鉅湖)가 있어 동쪽으로 갈라져 조하로 들어가고 북쪽으로는 임청(臨淸)에서 갈라져 위하(衛河)를 나와 바다에 도달하니 바다를 지나가면 북경입니다. 양경(兩京, 북경과 남경) 사이 거리는 3000여리 밖이나 됩니다. 물은 모두 제녕으로 부터 갈라지는데 성의 동쪽에는 광하가 서쪽은 제하(濟河)가 있는데 두 하가 성을 둘러싸 흐르고 있고, 성의 남쪽에서 합쳐 흐릅니다.>
물길 따라 돌지 않고 남경에서 곧장 오르면 북경이라는 것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3천 리길이라고 했다. 수호지의 역사적인 배경이 바로 산동성이고 태안시 동평현의 동평호, 제녕시 양산현동남부의 수박 양산, 하택시의 수호문화 박물관 등등 수호지의 스토리를 알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다. 산동성은 왜 그다지 반란이 끊이지 않은 것인지 나는 그게 늘 의문이다.
3월 10일 문상현 지방에 이르러 용왕 묘를 마주 했다. 호송관은 관례대로 용왕묘에서 참배하고 최부에게 절하도록 했다. 최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참배 거부 이유는 예론이다. 조선조 예법은 개인은 주자가례(朱子家禮), 국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른다. 제후는 산천에 제사하지만 보통사람은 조상에 제사한다. 보통사람이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월권행위이다. "조선에서 산천참배를 못했는데 어찌 외국의 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당연한 반론이다.
호송관이 다시 참배하면 운하통행이 무사하다고 영험론을 들고 나오자 최부는 미신배격의 차원에서 "내 이미 수만리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겪고 살아 나왔는데 중국의 강물쯤이야 무엇이 두렵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조선 선비의 냉철한 합리주의 정신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초자연적인 미신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는데 500년 전 최부 같은 추상같은 합리주의자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실로 조선의 유학자답다.
3월11일 동평주라는 곳을 지나 밤에 안산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3월 12일 동창부를 지났다. 동창부에서 임청까지를 회동하라 한다. 임청이 가까워진 것이다. 곳에서 최부는 말 잘하는 앵무새를 본다. 눈은 노랗고 등은 푸른색이었으며, 머리와 가슴은 검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 말소리가 청아하고 둥글림이나 곡절이 분명하였다.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 말에 일일이 대답하고 있었다. 최부가 그 새를 보며 잠시 넋두리를 했다. 집 떠나 제주에서 상을 당하고 또 표류를 해서 생면부지 땅에서 앵무새를 보니 우울했던 모양이다.
<이 새는 농서(隴西, 감숙성)에서 왔고, 나는 해동인(海東人)이다. 농서와 해동은 서로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다행한 일이 아닌가? 단지 나와 이 새는 객지 타향에 와 있는 것도 같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같으며, 행색이 초췌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새를 보니 더욱 슬퍼지는 것 같습니다.”>
그를 본 앵무새 또한 말을 하였으니, 마치 그렇다고 하는 듯 했다고 최부는 글에 적고 있다. 3월13일 청양역을 지나 3월14일 임청주(臨淸州)의 관음사(觀音寺) 앞에 이르렀다. 최부는 임청에 대한 첫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절은 두 강이 만나 돌출된 곳에 위치하였고, 동서 양쪽에 갑을 네 개 설치하여 물을 모아두었습니다. 절 동쪽에는 배로 부교를 만들어 현과 통하게 하였다. 현성은 하의 동쪽 언덕 반 리쯤에 있었으며, 현치와 임청위치(臨淸衛治)는 모두 성안에 있었는데, 북경과 남경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며 상여(商旅, 상인)가 모여드는 지역이었습니다. (임청현) 그 성 안과 밖 수십 리 사이에 루대(樓臺)가 밀집하고 시가지가 번성하며, 재화가 풍족하고, 선박이 모여드는 것이 비록 소주·항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산동에서는 으뜸이고, 천하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임청은 지금도 큰 도시에 속하지만 그 시대에는 엄청 큰 도시였다. 최부는 이를 말하고 있다. 지금 중국은 동네마다 옛날 유명세를 탔던 기억을 되살리려 안간힘이다. 제녕(지닝 중국말)은 공자 고향이 가깝고 그들의 후손이 제녕에 모여 산다는 특성을 살리려고 엄청 신경을 쓴다. 제녕은 춘추시대에는 노나라 등의 나라가 번창해 공자, 맹자 등 뛰어난 문인을 배출했다. 또 교통의 요지로서 예부터 중원 물자의 중심 집산지로 문화가 교류되는 지역이었다. 수나라 이후 대운하가 시내 중심을 통과하고, 명, 청 시대에는 산동성에서 가장 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도시가 되어, 그 번영은 쑤저우와도 비견할 수 있는 〈강북의 작은 쑤저우〉라고 불렸다. 그런 제녕인데 아주 색다를 홍보 전략을 들고 이번에 나왔다.
공자(孔子)의 후손들이 개발하고 발전시켜온 조리법과 관련 문화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열린 '아시아 음식 연구 콘퍼런스'에서 '공부(孔府) 조리법 표준화를 위한 위원회'가 발족했다는 것이다. 산동성 지닝(濟寧)시에 있는 '공부'(정식명칭은 연성공부(衍聖公府))는 공자 후손들이 거주하며 공자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곳으로, 이곳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공부' 조리법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찾고 표준화된 음식을 알리기 위한 전문가팀을 꾸릴 것이라며 "등재 신청 준비에는 최소 3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공부' 요리와 관련된 연회, 의식 등의 문화는 중국의 역대 황제 등이 공자 고향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개발되고 계승돼왔다. 가장 복잡한 연회의 경우 모두 196개의 요리가 등장한다. 공부가주 술을 팔더니 이번에는 음식조리 196요리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임청은 또 어떤가. 혹시 금병매라는 소설을 아는지 모르겠다. 반금련의 금자를 뜨고 병"은 이병아(李甁兒)를 가리키며, "매"는 방춘매(龐春梅)를 가리켜 일명 금병매라 하는 소설, 글이 에로틱해서인지 저자는 여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금병매>>의 저자는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의 실명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작자가 산동의 지방에서 벌어진 일과 사람에 대하여 적었고, 저자 이름 중에 "난릉"이라는 글이 있고, 여기에 작품에서 쓴 언어가 기본적으로 북방화라는 점을 고려하여 작자를 산동사람으로 보는 것이 다수이다. 다행히 서문경의 직업이 임청에서 운하를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약을 파는 게 주였기에 임청은 관광 홍보물로 옳다 싶어 바로 금병매를 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리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우리가 잘 먹는 짜장면, 짜장면의 배후에는 루차이(魯菜), 곧 산둥 요리가 버티고 있다.
이 산동(둥) 요리의 기반을 구성하는 기둥으로 일반적으로 둘을 꼽는다. 하나는 옌타이의 푸산(福山) 요리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쿵푸차이(孔府菜 - 공자 집안 요리)이다. 그런데 산둥 요리를 받치는 기둥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나이가 제법 지긋한 50대에게 낯설지 않은 중국의 고전 에로소설 '금병매'(金甁梅)에 나오는 요리이다.
금병매에 등장하는 음식을 정리한 책이 '금병매 음식보(飮食譜)'라는 책인데, 거기 실린 메뉴 가운데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 '금병매'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천하장사 무송의 형이면서 사람 좋은 무대가 파는 떡의 이름이 췌이빙(炊餠)인데, 본디 그 떡의 이름은 쩡빙(蒸餠)이었다. 이름이 바뀐 이유는 송나라 인종의 본명이 쩡(楨)으로 그 임금의 이름자와 발음이 같다고 해서 이른바 피휘(避諱 - 임금의 이름에 포함된 한자 혹은 발음이 같은 한자를 피하도록 하는 관례)를 하느라 췌이빙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금병매 음식보'가 소개하는 음식, 곧 '금병매'에 수록된 메뉴는 100여 종을 넘어 헤아린다. 그 안에는 정식 요리가 40종, 밀가루로 만든 주식 혹은 간식류 32종, 과일류 19종, 술 10종, 차(茶) 7종 등이다. 이들 음식은 당시 주인공 서문경(西門慶) 일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이 평소 즐긴 메뉴다. '금병매'는 비록 서문경의 호사스럽고 황음한 생활을 그렸다고 해서 천박한 '에로소설'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적도 있지만, 소설이 쓰인 명나라 당시 도시 상인의 생활상을 핍진하게 묘사했다고 해서 거꾸로 '리얼리즘의 높은 봉우리'라는 평판도 동시에 얻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인 소소생(笑笑生)이 '금병매'를 세상에 내놓을 무렵인 17세기 초반 무렵의 린칭은 인구가 '근백만'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이른바 메갈로폴리스 수준의 도시였다.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거대한 물길인 경항 대운하의 주요한 중간 경유지로, 경항운하에 설치된 다섯 군데의 차오관(金少關 - 운송되는 물품의 세금을 걷는 관서) 가운데서 조정에 바치는 조세 수입이 제일 많은 곳이었다. 서문경은 그 운하를 통해 전국 각지의 약재와 비단 등을 거래하는 장사꾼이었고 린칭은 경항운하 최대의 물류 중심지였다.
물류가 모이는 대도회라면 당연히 음식도 그리로 몰려드는 법. 내륙 수로는 각 지방의 메뉴를 그리로 실어 날라 전파하는 경로였다. 린칭에 자장면의 뿌리를 이루는 단서가 과연 있는 것인가. 마오쩌뚱(毛澤東)도 혀를 내두른 중국의 괴짜 사상가 량수밍(梁漱溟)이 서(序)를 붙일 정도로 평판이 높은 음식 이야기책인 '노자미'(老滋味 - 옛맛을 찾아서)라는 책 가운데 '린칭과 금병매'라는 짤막한 글 속에서 저자인 저우지엔뚜안(周簡段)은 '금병매'의 여러 판본 가운데 '사화본'(詞話本)이라는 판본에 등장하는 면식(국수와 빵) 종류만도 55종으로, 그 중 자장면과 온면이야말로 당시의 린칭 사람들이 즐겨 먹던 면식이었다는 구절이 분명히 있다. 실제 그 동네는 '十香面'. '스시앙티미엔‘이라는 짜장면 사촌 쯤 되는 면이 있다고 전한다.
나는 잘은 몰라도 임청의 음식이 보약일 것이라는 데는 거의 믿는 수준이다. 무송의 호랑이 잡는 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소문난 난봉꾼인 서문경 때문이다. 나는 젊을 적 고우영의 그림을 아주 재밌게 보았었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는 인물의 성격과 주요한 역할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었다. 무대의 뻐드렁니, 부채로 얼굴을 가린 제갈, 털복숭이 장비. 반금련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무대의 모습이 아주 상징적이었다.
서문경이 반금련을 보더니 넋을 절반쯤 잃고 말았다. 서문경은 끙끙 앓다가 뚜쟁이 할멈 왕파를 찾아가서 반금련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우선 황금 10냥부터 내밀었다. 그러나 왕파는 수가 높았다. 돈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5가지 조건을 갖춰야 통할 수 있는 법이라고 했어요. 그것을 '반려등소한(潘驢鄧小閑)'이라고 합니다." 알쏭달쏭했다. 왕파는 '반려등소한'에 관해서 조목조목 알려줬다.
① '반(潘)'은 반안(潘安)처럼 잘생긴 인물이다. 반안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남이다. 본명은 반악(潘岳)이다. 빼어난 '얼짱'인데다 기품도 있어서, 길을 가면 여성들이 손을 흔들며 주위를 맴돌았다. 반안이 타고 있는 '자가용 수레'에 꽃과 과일을 던지며 추파를 보내기도 했다. 그 바람에 수레에 꽃과 과일이 가득 차곤 했다.
여기에서 '척과영거(擲果盈車)'라는 말이 나왔다. ② '려(驢)'는 당나귀다. 당나귀는 힘의 상징이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조건이다.③ '등(鄧)'은 한나라 때의 전설적인 부자 등통(鄧通)이다. 임금 효문제에게 아첨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이다. 임금의 몸에 종기가 생기자 입으로 고름을 빨았을 정도다. 임금은 그런 등통이 마음에 들었다. 관상쟁이를 불러서 관상을 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굶어죽을 상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럴 수는 없다며 돈을 마음대로 제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를테면 '조폐공사 사장'을 시켜준 것이다.
④ '소(小)'는 젊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안처럼 멋지게 생기고 등통처럼 갑부라도 나이가 많으면 쉽지 않을 수 있다. '소'는 인상이 온화한 듯 보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⑤ '한(閑)'은 시간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느긋하게 접근해야지, 서두르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금병매'는 송나라의 부패한 관리 채경(蔡京)이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명나라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돈과 권력, 섹스에 빠진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촉구하고 있었다.
'언론 탄압'이 우려되어서인지, 저자는 본명을 숨기고 썼다. '소소생(笑笑生)'은 누군지 모를 필명이다. 번역하자면, '웃기는 사람'이다. 냉소적인 필명이었다. 소소생은 주인공 서문경의 종말을 비참하게 마무리했다. 반금련이 준 정력제(?)를 과다하게 복용한 끝에 목숨을 놓도록 하고 있었다. 소소생은 그러면서 덧붙이고 있었다."꽃다운 여성의 가슴은 하얗고 부드럽지만, 허리 아래에 칼을 차고 어리석은 남성의 머리를 벤다.… 긴 버선을 신은 활처럼 미끈한 다리와 황금 연꽃 같은 3치의 발(전족)은 남성의 무덤을 파는 삽과 곡괭이다." 몸가짐을 함부로 하다가는 자칫 인생을 그르칠 수 있다는 시대 경고였다. (이글은 ‘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이라는 글로 연세대 중문학과 유중하 교수가 경인일보에 2009년도에 실은 글 중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