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 키루스 왕의 유대인 해방
이 시기는 강대국의 흥망성쇠가 이어진 역사의 격변기였다. 오리엔트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며 한 세기를 풍미한 아시리아 제국은 인도 아리아계 어족의 메디아 왕국에 의해 기원전 612년 멸망한다. 메디아 왕국은 이란 서부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을 중심으로 이란 고원지대부터 아나톨리아 일대까지 진출,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에 대항할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아나톨리아는 현 튀르키예 공화국의 아시아 쪽 지역을 가리키지만 어원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 ‘동방의 땅’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나톨레’다. 또 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소아시아라는 단어가 쓰인다. 이는 아시아라는 단어가 역사학자 헤로도토스 시대 때 페르시아(이란)까지를 가리키는 말로 정착했고, 아나톨리아 지방만을 한정해 ‘소아시아’라고 부른 것이 발단이 됐다.
하지만 메디아 왕국은 파르사 지방 출신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530)에 의 의해 기원전 553년에 멸망한다. 곧이어 키루스는 리디아 왕국 크로이소스 왕을 무찌르고 기원전 547년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까지 장악, 아나톨리아 서안 이오니아 일대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하게 됐다.
키루스는 또 기원전 540년 이전에 동방으로 진출, 동북쪽으로는 지금의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사마르칸트),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 지역 박트리아,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부근까지 정복했다. 그리고 기원전 539년 키루스는 오리엔트 최대 국가 신바빌로니아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렸다. 이로서 신바빌로니아는 불과 90년 만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키루스 2세(대왕)는 결국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전역, 중앙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우게 됐다.
이란을 중심으로 서아시아 전역을 통일한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이렇게 탄생했다.
키루스는 놀라운 통치정책을 펼쳤다. 그는 기원전 538년 칙령을 통해 포로 신분이었던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 키루스는 예루살렘의 신전 재건축을 허가한 것은 물론,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몰수한 신전의 기물들까지 모두 반환토록 했다. 또 신전 재건축 비용을 페르시아 국고에서 충당했다.
이런 키루스의 관대한 통치정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크게 다음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시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자라투스트라(기원전 630-553)가 계시를 받았다는 유일신교,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천지의 창조자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신으로 숭배한다. 또 불을 아후라 마즈다의 아들, 신의 완전한 상징으로 여겨 일명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불린다. 키루스도 조로아스터교도였다. 키루스는 유대인의 신 야훼와 자신이 믿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가 야훼 신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느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에스라 1:2-3)는 키루스의 칙령은 이런 배경 없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이 에스라를 지은 작자는 ‘하늘을 내신 하느님(아푸라 마즈다)’과 ‘이스라엘의 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둘째 이유는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키루스 시절 이집트는 오리엔트 세계에서 아케메니아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대국이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재위 기원전 530-522)에 이르러 이집트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집트가 변방의 대국이었음은 틀림없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특히 남부 옛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의 사이에 중요한 완충지대였다. 이때문에 팔레스타인 남부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 후 아케메니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 200년간, 반란다운 반란을 단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케메니아 제국의 정책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유는 페르시아인의 관용에서 찾을 수 있다. 키루스가 유대인들에게만 관용정책을 편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따르면 키루스는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 왕이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을 죽이지 않았음은 물론, 체포한 뒤에도 정중히 대접했다. 또 키루스의 원통형 비문에는 그가 추진한 신전 재건이나 약탈한 신전의 기물과 신상 반환 등이 유대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피정복민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대한 정책은 키루스의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체계적인 관료정치, 강력한 군대, 효과적인 교통망 등을 통해 속국들을 철저히 지배했지만, 엄격한 지배구조는 아니었다. 브라이트의 <이스라엘사>에 따르면 지배의 틀 속에서 각 피정복민의 종교적, 문화적 자주성은 존중됐다. 이것이 또한 페르시아인의 통치가 성공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기도 하다.
기원전 538년 유대인들의 1차 귀환이 이뤄졌다. 최초의 ‘바빌론 유수’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였다. 포로생활을 체험한 세대는 거의 숨졌고, 후손 중에는 바빌론에 생활 기반을 이룬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또 본 적도 없는 ‘새로운 땅’에서의 불안한 생활보다는 당시의 안정적인 생활을 선택한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얼마나 고향에 돌아갔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빌론 유수에서 75년이 지난 기원전 522년에 귀환자를 포함한 유대의 전체 인구는 2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예루살렘 인구가 그만큼 적었다는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목격한 것은 무너진 성벽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었다. 여기에 심한 가뭄과 병충해로 몇 년이나 흉작이 이어져 사람들은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주 총독과, 아시리아에 의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의 방해로 신전 재건축 작업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생활고에 지쳐갔고, 신전 재건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의의 사고로 죽자, 제국은 잠시 반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웑너 522-486)가 제국을 재통일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역시 조로아스터교도였던 다리우스 1세는 유대인들에게 키루스 왕의 신전 허가 칙령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고, 신전 재건축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구약성서> ‘에스라’에 따르면 키루스 왕 원년, 키루스 왕이 칙령을 발표했다. “그 신전을 다시 세우고 거기에서 제물을 잡아 살라 바치도록 하여라. 신전은 높이도 육십 자, 넓이도 육십 자로 하여라. 돌을 세 겹으로 쌓아올리고 나무를 한 겹 대는데, 그 비용은 국고에서 지불하도록 하여라. 그뿐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신전 본관에서 바빌론으로 가져온 신전의 금은 기구들을 되돌려주어라. 모두 예루살렘 신전 본관 제자리에 가져다 두도록 하여라.”(에스라 6:3-5). 키루스의 칙령에는 신전의 재건과 건축 양식, 느부갓네살이 약탈해온 제구류의 반환, 그리고 비용을 국고에서 부담한다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이렇게 신전 재건축 공사가 또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5년 후인 기원전 515년, 신전이 완성됐다. 이것이 제2신전이다. 하지만 재건된 신전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고, 오히려 허름해 보였다. 여기에 오랜 가뭄과 병충해로 국토가 황폐해졌고, 사람들도 차츰 지쳐갔다. 이런 무기력한 시대를 청산하고 사람들을 일으켜세우 ㄴ사람이 바로 느헤미야와 에스라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 아르트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기원전 465-425)의 술 시중을 들던 유대인 관리였다. 그는 왕에게 예루살렘 거리와 성벽의 재건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아내 기원전 445년 ‘유대 땅의 장관’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돼 거리와 성벽 재건 사업을 추진했다. 에스라는 바빌론에 남아 있던 대사제 가문 출신이었으나 기원전 458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느님 율법의 사제’로 임명됐다. 그는 예배와 제의 형태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예루살렘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유대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강력한 비배를 받으면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