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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재 들꽃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마삭
1. 투후 김일제, 성한왕, 그리고 김알지...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문무왕비문에 '투후'라는 글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투후'라고 하는 것은,
'흉노족의 태자였던 김일제를 위해 만든 한나라의 제후 관직'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투후 김일제'는 중국에서 최초로 김씨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는
신라 김씨 왕족의 뿌리를 밝히는 대목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또 한 명의 낯선 인물, 성한왕(星漢王).
이 성한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헌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일까요?
지금부터 문무왕비문에 암호처럼 적혀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대릉원.
우리는 모든 비밀의 출발점,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부터 찾았다.
2008년 9월23일 미추왕릉 추향제.
때마침 김씨 왕족의 무덤에서는 추향대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 후손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첫번째 올리는 추향대제.
그 첫번째 대상은 신라 미추왕이다.
미추왕은 신라 김씨 왕족의 역사에서 분기점을 마련한 특별한 존재다.
김씨계에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미추왕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을 시작으로 김씨왕을 열어간 신라 김씨 왕조.
그 뿌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문문왕비문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분명히 비문에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김씨 왕조의 후손들은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계림세묘.
김씨 왕조의 시조를 모셔둔 사당에는
계림숲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계림대보공(鷄林大輔公) 김알지'의 위패만 있었다.
경주 계림.
김알지(金閼智)는 우리 역사에 나오는 낯익은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계림숲 높은 나무위에 황금 궤짝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 밑에서 흰닭이 울고 있어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렇게 돌연 탄생한 인물이 김알지다.
서기 65년, 계림숲에서 홀연히 등장한 김알지의 금궤는 어디서 온걸까?
신라 김씨 족보에 첫머리에 올라있는 김알지.
알지의 이름위에는 아무도 없다.
"성한왕이라고 하는 (표현이)
문헌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어떤 학자든 함부로 이걸 말해서는
박씨네 숭덕전에서도 엄청난 문제가 되고 파장이 될 수 있는 거지.."
- 김병호 숭혜전 참봉
"거, 아까 김누구라 했지요?
(김자 일자 제자입니다)
김일제가 문무왕의 비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날까지 배운 것도 그렇고,
기록을 봐도 그렇고 처음 듣는 소리예요.
그것을 우리가 맞다고 인정해 버린다면,
경주 김씨 내에 큰 혼란이 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어요."
- 김하규, 미추왕릉 참봉
그 뿌리를 밝힌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이 나온다고 하자
김씨 왕조의 후손들은 더욱 당혹스러워 했다.
2. '투후제천지윤 전칠엽(투후祭天之胤傳七葉)'
문무왕 위패.
누구보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김씨 왕조의 후손들조차
받아드리기 꺼리는 문무왕비문의 진실은 무엇일까?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
그는 왜 후손들마저 당혹케하는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이란 낯선 인물을 기록해 둔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의혹이 시작된 문무왕비문에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비문을 살피던 중 다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투후와 연이어 등장하는 '제천지윤 전칠엽'이었다.
'투후제천지윤 전칠엽(투후祭天之胤傳七葉)'
제천지윤(祭天之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전칠엽(傳七葉), '칠대를 전하였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걸까?
"'투후'는 김일제 밖에 받은 적 없습니다.
그후에 아무도 '투후'를 받은 적 없죠.
한 무제가 창안한 새로운 관직입니다.
그 식읍의 이름이죠, 오늘날 산둥성이구요.
'투후'와 '제천지윤'은 같은 뜻이거든요.
'제천한 사람의 후손'이란 말이죠.
이것은 글자 그대로 뚜렷하게
'우리는 투후의 후손이다, 즉 제천지윤이다', 이 뜻입니다."
- 김병모 원장, 고려문화재연구원 인류학 박사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전하여 이어졌다는 것일까?
"투후제천지윤(투후祭天之胤),
투후의,
하늘에 제사 지내는,
그 다음에 전칠엽(傳七葉),
'엽(葉)'은 '잎'이란 뜻도 있지만,
여기선 '세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해 왔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우리는 비로소 투후와 성한왕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후가 나오는 글자와 성한왕 사이에는
판독이 불가능한 두세글자 밖에 없다.
복원한 비문을 다시 확인해보자.
"투후祭天之胤 傳七葉以( )
( )( )焉 十五代祖星漢王"
:투후제천지윤 전칠엽이( )
( )( )언 제15대성한왕
비문의 흐름으로는
성한왕을 투후의 7대손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문무왕릉비에 보면
분명히 신라 김씨들이
흉노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겼던
그런 조상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그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죠"
- 최병현 교수, 숭실대 사학과
우리보다 200년이나 앞서 이를 고민한 유득공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투후제천지윤 전칠엽 운운하는데...
그 아래 위 문장의 뜻을 보면 세대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김씨가 아니겠는가?"
놀랍게도 문무왕비는
신라 김씨 왕조의 뿌리가
'흉노 김일제'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흉노! 흉악한 북방의 오랑캐?
"투후 김일제(金日제),
이것은 비문에 사용하는 단순한 수식 용어는 아닐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당혹스런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는 것은
적어도 '통일신라 사람들은 당시에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흉노족이라고 하면,
'한족에 의해 몰락 당한 북방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흉노(凶奴)'라는 글자는
'오랑캐 흉'에 '노예노'자까지 써서,
'흉악한 북방 오랑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문무왕비문은 이러한 흉노족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아 중국의 최북단 내몽골자치구로 찾아갔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바야노얼시 남서쪽 110킬로 지점.
흉노의 활동 무대로 알려져 있는 음산산맥 협곡.
우린 이곳에서 양떼를 먹일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던 흉노족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깍아지른 암벽에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다.
내몽고 음산암각화 지구.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을 무대로 살아온 흉노족이 남긴 바위그림이다.
이 지역 암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말을 타고 달리는 흉노인의 모습'이었다.
바위그림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흉노족은
말위에서 태어나 말위에서 생활하며 달렸던 북방 유목민족이다.
변방의 유목민에 불과했던 흉노족이
중국 본토를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산서성 대동시 북쪽 30킬로 지점
산서성 대동시 외곽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나라때 쌓은 만리장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제때부터 쌓은 만리장성도
흉노를 막지는 못하였다.
중국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입구 백등산 자락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중국 역사상 가장 쓰라린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기원전 200년,
흉노의 위협에 시달리던 한나라 고조유방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40만 기병을 앞세우고 만리장성을 넘어온
묵돌 선우의 흉노족에게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백등산 전유지
백등산 정산으로 밀려난 유방은
결국 흉노 선우에게 화친을 애걸한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북방 오랑캐라 부르던 흉노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우리는 사마천이 쓴 '흉노열전'에서
유방이 맺은 화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흉노 선우에게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조공을 바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공주를 (흉노) 선우의 왕비로 삼다."
왕소군 묘 - 내몽골자치주 호화호특시
내몽골자치주 왕소군 무덤도
흉노가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4대 미인 중에 한 명인 왕소군은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한나라 황실 여자다.
왕소군의 빼어난 미소에 반한 흉노 선우는
한나라와의 싸움을 멈췄다고 한다.
내몽골자치구 박물관 - 호화호특시
그런데 내몽골자치구 박물관을 둘러보던 우리는
예상치못한 낯익은 유물을 만났다.
단숨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청동솥.
흉노 오르도스형 동복.
내몽골 흉노 오르도스족이
말을 타고 싣고 다니던 사용했던 동복이다.
순간 한반도에서 출토된 동복이 떠올랐다.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출토된 동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머나먼 흉노 오르도스족이 사용한 동복이 어떻게 한반도 남단까지 온 것일까?
우리는 몽골공화국 국립박물관에서도
김해 대성동고분과 같은 동복을 다시 만났다.
몽골 노인울라의 흉노 지배층 두덤에서 발굴된 동복이다.
물과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흉노족은
말등에 항상 동복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동복은 중앙아시아를 누비던 대제국 흉노의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동복이 출토된 지역은 김해 대성동고분만이 아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
신라인들이 빚은 신라 무사의 말등에 실린 것도
흉노족의 동복과 비슷하다.
"이제까지는 간과해왔던 인물의 말등의 그것,
물을 따르거나 담는 단지 같은 그것이,
미세한 장식이 좀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그것이 바로 동북아시아 유목민족의 필수품인 동복으로 해석하면,
이것이 스키토 시베리아문화의 일환으로써
우리나라에 흘려 들어온 문화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 민병훈 박사,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 부장
그렇다면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의 핏줄에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동복이 흉노 추장에서 흉노 추장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동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수장이 살았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신라 김씨가 흉노와 직접 연결되었다'고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 김병모 원장, 고려문화재연구원, 인류학 박사
4. 투후의 땅 '금성'!~
신라의 수도 '금성'!~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이 기마인물형토기를 보면
말잔등에 동복, 청동으로 만든 솥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 동복은 세계 고고학계에서 흉노족의 상징으로 통하는 것인데요,
한때 흉노족은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며
중국 한나라로부터 조공까지 받았던
대제국을 형성했던 민족입니다.
어쩌면 이 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기마인물형토기'는,
신라 김씨 왕족이
한나라로부터 조공까지 받았던
대제국 흉노족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건너오게 된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로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땅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김일제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우리는 뜻밖의 정보를 입수하고 산동성으로 향했다.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에
투후 김일제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국의 여느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원래는 김일제가 한 무제로부터 하사받은 투후땅이다.
고투성유적지(古투城遺跡址)
성무현 입구에 세워진 투성유적지 비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곳이 투후 김일제의 땅이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김일제의 유적으로 남아있는 투성유적이
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줄지도 모른다.
하택시 고대문명연구회장이 우릴 어느 숲으로 인도했다.
성무현을 에워싸고 있는 숲이었다.
숲 바닥에는 곳곳에 벽돌과 기와편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 파놓은 구덩이마다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이 나왔다.
"풀을 섞어서 저으면 이런 모양의 벽돌이 됩니다.
이것은 한대의 특징입니다.
(당시에 투후국은 다 지하에 묻혀 있습니까?)
이 지역 유적지들을 봤을 때는
지하 3미터에서 4미터에 있어요.
여기 지대가 비교적 높기 때문에
보통 3미터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럼 다 지하에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탟 고대문명연구회
황하강의 범람으로 투후족의 유적은 다 지하에 매몰되었지만
그들은 지금도 이곳에서 김일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건 매년 여기 백성들이
김일제를 기념하여 만든 것입니다.
여기 백성들은 '투성(투국의 성)'이라 하지 않고
'금성(金城)', 김일제의 김을 따서 '금성'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금성'이라 하고
우리 관리부에서는 '투성'이라고 말하지요."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탟 고대문명연구회
금성(金城).
김일제의 성을 따서 지금도 금성이라고 부른다는 놀라운 증언.
우리는 순간적으로 신라의 수도도 '금성'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국의 금성'과 '신라의 왕도, 금성'.
수천 킬로나 떨어진 두 지역의 이름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걸까?
"원래 이곳에 휴도성(김일제의 고향인)에서 살던 흉노인 5만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사기>에는 5만 명이라고 적혀 있고,
<한서(漢書)>에는 3만 명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최소 2~3만 명이
김일제를 따라서 이 지역에 왔을 겁니다.
2~3만 명의 흉노족이
이곳 투후의 땅에 와서
현지의 한족들과 어우러져 함께 '투국'을 세웠습니다."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탟 고대문명연구회
현재는 숲으로 바뀐 이곳에
김일제의 금성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86년.
3만여 명의 흉노족이 뿌리를 내리면서 이곳은
김일제의 흉노족이 생활문화를 정착 시킨 그들의 왕국이었다고 한다.
5. 왕망의 신(新) 패망!~
"김일제 후손들은 떠나야 했다!~"
만약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이주했다면 왜 그들은 투국을 떠난 것일까?
<한서>에는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까지 투후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전한과 후한을 가르는 대격변이 일어났던 시기.
갑자기 투후 김일제가(家)가 중국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일제 가문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왕망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웠다가 패망한 직후다.
우리는 <한서>에서 놀라운 기록을 찾았다.
"김당(김일제 증손자)의 어머니는
왕망(王莽)의 어머니와 친자매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왕망이
김당과 이종사촌지간이었던 것이다.
"왕망이 패망하고 난 뒤 투후도 끊겼다"
(王莽敗 絶- 왕망패 절)
- <한서 공신표> '투후 조'
'왕망이 패하고 투후도 끊겼다'는 것을 볼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엄청난 회오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망이 패한 뒤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의 숙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로 피신한걸까?
김씨조당
우리는 최근에야 다시 세웠다는 김씨사당을 찾았다.
왕망의 난 실패 이후
뿔뿔히 흩어졌던 김씨 자손들은 자신들의 성까지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김씨종보(金氏宗譜)
몇 년전부터 뿌리를 찾기 위해
뜻있는 김씨의 후손들이 모여 다시 작성한 흉노족 김씨족보.
이들의 족보에도 왕망의 쿠데타 사건이 잘 나타나 있다.
"왕망의 왕위찬탈로 인하여 산동으로 거처를 옮김"
왕망의 난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김일제의 후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격변의 시기, 그들의 최종 은신처는 어디였을까?
"왕망의 편에 섰던 김씨 후손들은 유수(후한 황제)의 복수를 두려워 했습니다.
특히 왕망과 김당은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김씨 후손들 일부가 조선 반도로 도피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 위에칭핑 교수, 북경대 역사학과
왕망의 패망과 함께
산둥성의 투국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흉노 일족의 안전을 위해
또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 발기는 서기 65년입니다.
가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수로, 발기는 서기 42년입니다.
그런데 김일제의 마지막 후손, 7대손이 중국에서 사라진 때는
왕망이 죽은 해인 서기 23년입니다."
- 김병모 원장
6. '화천(貨泉)' 의 발굴!
- 김일제 후손들, 해상교역로 따라 김해, 경주로!~
요녕성박물관
우리는 중국의 화폐를 전시하는 요녕성박물관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화천'이라는 동전이었다.
몸통에 화천(貨泉)이라고 찍힌 동전.
이는 왕망시대, 21년 동안만 만들어진 화폐다.
그래서 화천은 출토 유물의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도 바로 그 화천이 출토되었다.
전남문화재연구원.
우리가 전남문화재연구원 수장고에서 확인한 것은
분명히 왕망의 화천이다.
뚜렷하게 남아있는 '화천'이라는 글자,
영산강 유역 나주 낭동지역에서 발굴 유물이다.
김해 봉황동 패총.
왕망시대의 화천은
고대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도 발견되었다.
가야왕국의 조개무지 유적에서도 화천이 발견된 것이다.
나주, 해남, 제주, 김해에서 화천 발견.
짧은 시기 사용한 화천이 발견된 것은
그 시기 사람들이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우린 중국의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당시 중국은
김해를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일컫는데,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 항로상에
'구야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일본을 오가는 해상항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그 중간 기착지가 경주와 가까운 김해(구야한국)였다는 것이다.
"가락국은 해상왕국이었다.
중국과 물물교환의 단계를 넘어 화폐경제 단계로 들어갔어요.
즉, 중국에서 사라진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쪽에 당시 자기들의 무역 거점이었던 김해,
옛날 이름 가락국에 충분히 와서 살았을 수 있죠."
- 김병모 원장
만약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건너왔다면
김해를 거쳐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해 가락국도
역시 김수로왕이 세운 김씨 왕조였다.
그렇다면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김알지 세력은
김해를 거쳐 신라에 정착한 이주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왕망시대 제조된 돈, 화천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나주, 제주, 김해 등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를 오가는 주요 기착지입니다.
왕망의 패망과 함께 김일제의 후손들이
아마도 이 해로상의 지역을 통해 신라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동안 신라에서 나온 유물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나온 유물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나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라가 이주세력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7. 이주민이 세운 나라 신라!~
금, 적석목곽분, 언어, 하늘, 알...
신라의 독특한 문화는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973년 황남대총의 지하세계가 열렸을 때
발굴단은 큰충격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없던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곡옥이 달린 화려한 금관이 수습되는 순간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신라 금관 중에서도 가장 장식이 많은 화려한 금관이었던 것이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발굴단이 손길이 닿는 곳마다 금제품이 수습되는 그야말로 '황금무덤'이었다.
화려한 황금 못지않게 발굴단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구조다.
무덤안 바닥부터 벽까지 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덤 구덩이를 판 다음 목곽을 설치하고,
그 아래 돌을 깐 뒤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궤짝을 놓고,
그 위로 다시 돌을 쌓고,
그 위로 다시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사실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은
경주 일대만 존재합니다.
유사한 무덤은 경상북도, 원신라에서 약간씩 보이지만
아주 똑같은 적석목곽분은 경주에서만 보이죠."
- 최병현 교수
쏟아져나온 화려한 황금 유물과 무덤 양식까지
흉노 지배층의 무덤과 유사하다.
신라 무덤 중에서도 황금 유물이 나온 것은 김씨 왕족의 무덤뿐이다.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은 황금으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신라 김씨 왕족의 황금 문화는 인접한 백제나 고구려와 너무도 다르다.
"유목민족은 재산을 전부 금으로 합니다.
이동하기때문에 전부 말에 싣고 다닙니다.
따라서 금을 숭상하는 민족은 전부 유목민족입니다.
농경민족은 금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정착해서 살기때문에.
중국은 농경민족이거든요, 그래서 황실에선 옥을 숭상했고,
백제도 금을 숭상하지 않았어요.
신라만 그랬거든요."
- 문경현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
그렇다면 신라의 황금문화는 신라로 이동해온 흉노의 흔적이 아닐까?
서기 200년대 씌여진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여기엔 신라의 노인들이 스스로 중국에서 이주해 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한반도로 와서,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떼어줘서 살게 하였다고 했어요.
마한은 지금 충청도, 전라도 일대 아닙니까?
그 동쪽 땅이니까 경상도 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 당시 기록에 써 있으니 가장 신빙성 있는 내용입니다."
- 김병모 원장
더 놀라운 기록도 있다.
신라 땅에 사람들은
심지어 마한, 즉 백제 사람들과는 언어까지 달랐다고 한다.
"그 언어가 마한과 달랐다."
신라가 이주 세력이 세운 나라임을 말해주는 단서는
그 뿐만이 아니다.
경주 나정.
역사 기록엔 고구려와 백제는 그 뿌리가 분명히 밝혀져 있지만
신라의 시조는 어디서 왔는지 모호하게 남겨두고 있다.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세력들,
특히 초기에 왕을 배출했던 세력들은
박혁거세 후손하고, 석탈해 후손, 그리고 김알지의 후손 등 이 세 세력인데,
그 중에 탈해의 경우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중국 배들이 오가는 물길, 수로를 따라서 경주까지 온 걸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이주민이었죠.
그 다음에 혁거세나 알지는 이주민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라든지,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라든지,
하늘이라는 곳,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신라로 이주해 온 이주민'이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죠.
그 이주민들이 세력을 키워
신라의 왕이 되고,
또 세 세력이 동맹을 맺어
왕위를 장악했던 걸로 볼 수 있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흉노의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던 것이다.
8. 문무왕 15대조 세한 = 성한왕 = 김알지?
"신라의 문화와 풍속은 북방 기마민족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렀다고 하는데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황금을 흉노족의 상징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라가 있었던 진한 지역은
이웃한 마한의 백제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달랐다고 합니다.
바로 이주한 세력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를 세운 이주민의 대표였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문무왕비문의 성한왕이 이주세력의 대표는 아니었을까요?
우린 과연 성한왕이 누구인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경주 숭혜전.
먼저 문무왕의 15대조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1대, 2대, 3대...15대 세한, 세자 한자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족보상으로
문무왕의 15대조에 나오는 인물은 '세한'이다.
'세한(勢漢)'은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지만,
<삼국사기>에도 실려있는 '김알지의 아들'이다.
"세한이 성한왕으로 추정이 되거든요.
왜냐면 '세(勢)'란 게 '성'이란 글자하고 같이 쓰이거든요.
'별성', '신성성'자로 쓰이는데,
당시 음이 '세'입니다.
세한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가계도 하고,
문무왕비문의 성한하고 일치가 됩니다.
그래서 세한은 성한왕으로 보고,
알지는 시조로 올리기 위해서 하나 세운 것으로 봅니다."
- 문경현 명예교수
흥덕왕의 비문도 시조를 정확히 적어두고 있다.
태조 성한왕이 24대조로 나온다.
흥덕왕의 24대조에 해당하는 인물 역시 세한이다.
그렇다면 김씨 왕조는 왜 김알지를 신라 시조라고 한 걸까?
우리는 김알지의 신화와 비문에서
성한왕을 분석하던 중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성한왕의 등장이
김알지의 등장과 비슷하다.
문무왕비문 김알지
원궁(圓穹) 하늘 천(天)
상림(祥林) 수풀 시림(始林)
금여(金輿) 출현 금궤(金櫃)
<삼국사기>의 김알지는 시림의 금궤속에서 나온다.
비문에서 성한왕은 상림에서 금여, 즉 금수레를 타고 나온다.
"성한왕이 원궁,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림이라는 성스러운 숲이 나옵니다.
그리고 금여라는 금수레에 좌정했다, 앉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양 설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성한왕이 김알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 이도학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비문의 성한왕은 오히려 김알지에 가깝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가 문무왕비문을 해독해놓은
<해동비고(海東碑攷)>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보다 200년전에 비문을 연구한 추사도
성한왕이 누군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추사선생님은 본인도 경주 김씨로, 사실은 김알지의 후손이잖습니까?
따라서 비문에서 성한왕이 누구냐는 것은 추사선생님께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박철상, 고문헌연구가
그런데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비문속에 성한왕은 김알지라고 결론지었다.
"성한왕은 김씨 시조인 김알지이다."
성한왕이 김알지라면,
돌연 등장한 김알지의 금궤는,
머나먼 중국땅에서 신라로 이주해온 투후 김일제의 후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박혁거세로부터 이어온 신라의 정통성마저 부정하고
어쩌면 김알지일수도 있는 성한왕과 투후 김일제를 내세운 걸까?
혹시 미약한 세력으로 출발한 신라 김씨의 긴 여정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9. 삼국통일, 새로운 역사를 비문에 새기다!
"김씨 왕족의 피속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
신라 김씨는
문무왕때 이르러 비로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660 백제 멸망
668 고구려 멸망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문무왕은 7년 동안 당나라와 싸워야 했다.
대당전쟁은 민족의 생존을 건 치열한 전투였다.
676 대당전쟁 승리
비문이 세워지기 6년전인,
676년에 신라는 당나라 대군 20만을 물리쳤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 왕족이
한반도 중심에 우뚝 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기록이다.
신라 김씨 왕족은
대당전쟁에서 승리한 자부심을 담아
한반도에 건설한 신라 김씨 왕족의 역사를 비문속에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대당전쟁에서 호국의지를 담았던 사천왕사에 문무왕비문을 세우고
신라의 피속에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밝힌 것이 아닐까?
"문무왕비문은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신라 김씨 왕족들의 당대 공식 기록입니다.
아직까지 풀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만 지금까지 추적한 결과를 종합해보면
신라 김씨 왕족은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주세력으로 시작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당나라까지 물리친 신라 왕족의 피속에
흉노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속에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문무왕비문은
우리 역사를 스스로 한반도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는,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1,300년전 문무왕비문은 오늘 우리 앞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린 누구일까?"
- 한상권의 역사추적을 보고(행복하세요 늘!~~~)
첫댓글 역사공부 잘했어요...얼마전에 종영한 김수로 다 뿌리가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