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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젖은 윤호의 옷에서는 짙은 향수냄새가 풍겼다. 무대의 배우처럼 알록달록한 의상을 걸치고 건장한 체격에 영화배우 장동건을 닮은 말쑥한 모습이 여느 부잣집 도령님 같았다. 조카가 원하면 뭐든 다해 주고 싶었지만 윤호의 뜻은, 그 꿈은 자꾸만 조 사장의 곁을 떠나려고만 했다.
돈이 필요해서 또 찾아왔겠지. 돈이 궁하면 찾아왔다가 받을 것만 받아 가지고 바람처럼 휭 사라지는 조카였다. 붙잡을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인간같이, 윤호는 멀고 먼 거리에서 조 사장을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마음으로는 자식 그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데.
한번도 윤호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주지 못했다. 사랑을 주려고 해도 싫다고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고만 했다. 구 사장과 헤어질 연구만 하는 아이였다. 헤어졌다 싶으면 또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속을 울거놓고 휙 떠나가고. 오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왔냐?"
삼촌(칠촌을 그렇게 부른다)이 인사해도 윤호는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고 시선을 어디다 맞추지 못하다가 구 사장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꿈에서 깬 듯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밥은 먹었어?"
구 사장이 모니터의 수많은 노래 목록에서 화살표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거리면서 아들, 아니 조카에게 물었다. 커서의 움직임이 불안했다.
"밥 안 먹은 사람 있나요? 지금이 몇 신데."
"밥 안 먹었으면 네가 좋아하는 짬뽕 시킬까 하고 그랬다. 나도 점심을 안 먹었거든. 점심때 손님들이 몰려와서……장사가 잘 된단 뜻이 아니고 돈도 안 되는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부탁하는 친구들이 꼭 밥때 맞춰 오거든. 수고한다고 밥 한 끼 안 사 주면서……"
조카는 구 사장의 푸념에 흥미없는 듯, 잘 닦아서 반들거리는 갈색 오디오 세트를 장갑 낀 손으로 어루만졌다. 옛날에 꼬마였을 땐 내가 켜 둔 음악을 따라 몸을 흔들고 클래식도 귀기울여 들었었지. 그 음악이 오디오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디오 기기에 친근감을 갖는 것이다.
"나 내일 완도에 가요."
"완도엔 왜?"
"내 돈 떼어먹은 놈한테 돈 받으려고요."
"아직도 그 돈을 못 받았냐? 동학이는 네 단짝친구고 착실한 놈인데. 그런데 왜 완도에 갔대?"
"완도로 줄행랑쳐서 그곳에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지 뭐예요? 천금 같은 내 돈을 밑천 삼아서 고기잡이배를 한 척 사 가지고 부자가 됐대요."
"설마 그렇기야. 뜬소문일 거다. 어려운 친구에게 크게 선심썼다 치고 그 돈 포기해라. 포기하는 게 좋아."
"삼 년 간 목숨 걸고 한밤중에 퀵서비스 해서 모은 돈이예요. 그 돈으로 장사를 할 계획까지 세웠단 말예요. 삼촌(구 사장) 말씀대로 노점상이라도 해서 자립할 생각이었는데, 그놈한테 날렸어요."
"날린 게 아니고 보관한 거다. 동학이가 잘 되면 널 도와 줄지 누가 알아?"
"배신자는 은혜를 몰라요. 절대로."
조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단 걸 잘 알면서도 조 사장은 완도에 가지 마라고 말렸다. 가서 꼭 무슨 사고를 낼 것만 같아 불안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조카는 금전적으로 조 사장에게 그렇게 큰 손해를 끼치거나 큰짐이 된 적이 없으면서 조 사장에겐 근심덩어리, 골치덩어리처럼 느껴쪘다. 차라리 금전적으로 고통을 줬으면, 그러면서 조 사장의 곁에 있어 줬더라면 그 고통이 쾌감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가진 부모의 고통으로 달게 감내했을 테니까. 아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면서 그 단절의 고통이 두 배, 세 배로 무겁게 짓눌려 오는 것은 혈육이란 책임감 때문.
그렇게 기계적으로 생각해 본다.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라고. 혈육도 칠촌간의 먼 친척이다. 하지만 젖아기 때 부모를 잃고 의탁할 데 없는 너를 내 손으로 기저귀 채우고 우유 먹여 키울 때는 부모와 다름없는 정이 너와 내 사이에 형성됐으리라고 추측해 본다. 추측인 것이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고 네가 타인이라고 돌아서면 난 이웃집 아저씨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아비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한번도 내 권리를 주장한 적도 없고 너에게 큰소리, 군소리 한번 한 적 없이 네 주위에서 맴돌며 엑스트라처럼 고민하고 슬퍼했지. 단역 배우였단 말이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도 모른 채.
윤호는 한동안 소식을 뚝 끊었다가 마음 내키면 불쑥 찾아와서 이삼만원의 조그만 용돈을 요구했다. 그리고 신변에 변화가 감지되면 구 사장을 찾아왔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손을 써 달라고 미리 예고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직 큰 사고는 없었고 남을 헤치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우범자의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구 사장이 마음 조이듯 그렇게 못된 놈은 아니었다.
윤호가 심야에 패거리들과 오토바이로 거리를 질주하여 소음과 교통 방해죄로 교도소에 간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재판을 받고 형사처벌 받은 것은 경찰서 출입 회수보다 많은 회수가 아니다. 그들은 몇 개월 복역하고 금방 풀려났다. 조 사장이 손을 쓰지도 않았다. 두 사건 모두 윤호가 교도소에 간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소소한 폭력, 기물 파손 등 경범죄로 경찰서엔 여러 번 불려갔지만 대부분 조 사장이 손을 써서 훈방 조치되었다. 윤호는 경찰이 지목한 범죄자는 아니었다. 그러면 경찰이 골치 아파하는 오토바이 폭주족은 범죄자가 아닌가? 시민에게 공포와 불안감을 안겨 주는 범죄자임에 틀림없지만 큰 사고나 범행 없이는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법의 조항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폭주족의 뿌리를 뽑을 수 없는 것이다.
윤호는 법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머리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호와 그의 패거리들은 공포의 폭주를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 법의 철퇴를 맞고 일망타진될 것이다. 시민들은 모두 폭주족을 싫어하고 저주하니까.
구 사장은 윤호가 몇 년 간 감옥에 살더라도 폭주족의 꼬리표를 떼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도했다. 윤호도 그러길 원하는지 모른다. 노점상이라도 해서 자립하겠단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인간답게 살고픈 의지가 있는 놈이다. 그가 구 사장의 가게에 나타나서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건 꼭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키워 주신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구 사장은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도리어 요구한 액수보다 훨씬 많은 용돈을 찔러주고 밥 굶지 말고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등을 두들길 때는 부자지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구 사장은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 윤호가 남이라면 구 사장에게 손 벌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비호해 본다.
폭주족이 조카놈이기에 그를 범죄자가 아니라고 비호하듯 윤호의 장래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보는 것이다. 그 기대는 '희망' 두 글자였다.
이번 완도행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윤호가 꼭 무슨 사단을 낼 것만 같이 불안하다. 그럴 땐 희망이 절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렇다고 가지 마라고 붙잡을 권리도 없었다. 윤호의 고집이 그 누구의 충고도 접수하지 않을뿐더러 삼촌도 그 아이의 행동을 막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구 사장이 키보드 위에 엎드려 소리없이 눈물을 짜고 있을 때 구둣발소리가 귓결에서 멀어지고 실내엔 정적이 흘렀다. 내가 너에게 용돈 주는 걸 잊었구나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윤호가 가게에서 떠나고 없었다. 정말 바람 같은 아이였다.
눈앞에 신문지에 싼 물체가 있어 펼쳐보니 새파란 만원권 신권이 한 다발 들어 있지 않은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쪽지도 들어 있었다.
<제가 심부름센터에서 번 돈이니 맛있는 것 사 잡수세요.>라고.
6
오백만원짜라 항아리를 깨뜨린 죄로 혜선은 술집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몸을 결박하고 감금한 게 아니고 밤 열 두 시 폐점 시간까지 항아리 값을 변상하라고 주인이 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혜선은 술에 만취해 있었다.
배신한 애인을 칼로 찌르고 살인 미수죄로 삼 년 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 지 한 달 만에 또 사고를 냈다. 과거의 잘못을 씻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술로 마음을 달랬다. 술은 술을 부르고 술에서 깨면 허무한 공허가 혜선을 나락으로 밀어냈다.
혜선이 혼자 독한 위스키를 두 병째 마시고 있을 때 네 여자가 맞은편 좌석에서 혜선의 드러난 팬티를 보고 흉을 보았다. 혜선은 가려워서 그곳을 자꾸 긁었다.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찾는데 네 여자 중 두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혜선을 보고 낄낄 웃어댔다.
여자들이 옆으로 지나갈 때 한 여자가 일부러 혜선의 어깨를 부딪쳤다. 혜선이 욕을 하자 여자가 혜선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찰싹 갈겼다. 혜선도 지지 않고 그 여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세 여자가 말렸지만 그녀들은 친구의 편이었다.
싸움은 사 대 일로 커졌고 술집 안은 격투기장으로 변했다. 술에 취했지만 격투기를 배운 혜선의 실력은 네 여자를 능가했다. 혜선은 네 여자를 녹다운시켰지만 깨뜨린 항아리 값을 물어줘야 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대신 혜선이 항아리 값을 변상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혜선은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주인은 벽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내엔 혜선과 늙은 손님 한 분이 남아 있었는데 그 남자도 취해 있었다. 조미라 씨한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주인은 열 두 시가 지나도 혜선의 가족이 오지 않으면 그녀를 경찰에 넘길 생각이었다. 열 두 시, 십 분 전이었다.
남자 손님이 코트와 머플러를 집어들고 술값을 계산하려고 일어섰다.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혜선을 보더니 파란색 머플러를 목에 걸치며 빙그레 웃었다. 코트를 단정히 입고 카운터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항아리 값이 오백만원이라고 했소?"
"예, 작년에 이태리에서 들여온 겁니다."
"절반값만 물어주면 되겠군. 고의성이 없었으니까. 장사하면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지 않겠소?"
늙은 남자는 지갑에서 오십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꺼내어 주인 앞에 내밀었다. 남자 주인은 안 된다고 하고 여자 주인은 그거라도 받으라고 남편을 힐책했다. 결국 계산, 거래 다 끝났다. 혜선의 술값도 남자가 냈다.
혜선은 잠에서 깨어 있었다.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아버지 같은 남자를 끌어안고 키스라도 해 주고 싶었다. 아니 그리 비쌀 것도 없는 육체라도 바치려고 남자의 팔을 붙잡고 해해거리며 따라가려고 했다.
남자는 혜선의 육체에는 관심이 없는 듯 이 손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 드리라고 택시비까지 주인에게 주었다. 혜선은 그 택시비를 가로채어 그 남자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어 주고는 남자와 함께 술집에서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늙은 남자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혜선을 승차시키려 하자 혜선은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택시는 가 버리고 비 오는 거리에 늙은 남자와 혜선만 남았다.
빗줄기가 세어졌다. 남자는 자기 코트를 벗어 혜선의 머리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모텔의 휘황한 네온사인들이 사면팔방에서 남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모텔 유흥가였다.
사랑한 그 남자와 헤어졌던 곳. 상대방이 다르면 어떤가? 남자는 다 똑같은 것을. 늙고 젊음이 사랑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혜선은 늙은 취객과 한몸 되어 바로 눈앞의 모텔로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빗물처럼 흐느껴울고 있었다. 늙은 남자가 속도 모르고 울지 마라고 위로했다.
어둠을 찢는 폭음과 함께 십여 대의 오토바이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두 남녀를 에워쌌다. 폭주족의 우두머리는 윤호였다. 폭주족들은 오토바이를 길가에 멈춰 놓고 두 연인 아닌 연인에게 포위망을 좁혀 왔다. 주위에 경찰도 시민도 없고 아무도 폭주족의 행동을 막을 자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폭주족들의 긴 그림자만 불빛 속에 너울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유령처럼 접근해 오고 있었다. 늙은 남자의 입에서 짙은 술냄새와 함께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택시 한 대가 달려왔다. 늙은 남자는 여자를 남겨두고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폭주족들은 그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늙은 남자를 태운 택시는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빗줄기 속으로 미련 없이 사라졌다.
혜선의 머리 위엔 그 남자의 검은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윤호는 시니컬하게 씩 웃고 그 코트를 홱 젖히고는 혜선의 턱을 잡고 불빛으로 향해 쳐들었다.
"인물 값을 해야지, 여자가. 그렇게 남자에 굶주렸어? 진짜 남자 맛을 보여 줄까?"
"귀쌈에 피도 안 마른 게 누나를 몰라보고!"
혜선은 남자의 뺨을 힘껏 갈겼다. 사내들이 놀랄 만큼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윤호는 아프지 않는지 허허 웃으며 반대편 뺨도 때리라고 대밀었다. 혜선은 또 한 대 갈겼다. 윤호는 꺼떡도 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맞아 보긴 처음이군. 나도 맞고만 있을 순 없지."
윤호는 여자를 자신이 때리지 않고 패거리들에게 인계했다. 두 사내가 혜선을 보도 위에 눕히고 벌거벗겼다. 그것은 구타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두 사내가 옷을 벗기고 혜선은 반항하고. 폭주족들은 옷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았다.
"안 돼!"
한 여인이 외치며 어둠 속에서 달려나왔다. 조미라 씨였다. 처절한 외침에 폭주족들은 멈칫했다. 윤호는 조미라 씨를 보고 외면했고 다른 친구들은 조미라 씨를 폭행하려고 했다.
"놔둬라. 내가 아는 분의 따님이셨군."
윤호의 한마디에 폭주족들은 모두 오토바이로 돌아갔고, 그들은 폭음을 내지르며 썰물처럼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
7
오전에는 전자상가 매장들이 한가하다. 비가 그친 뒤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날씨는 한겨울보다 더 추웠다. 절기상으로 입춘이 지나 봄이 오는가 했다가 동장군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사람들은 두터운 옷으로 무장하고 겨울 속으로 귀환했다. 봄은 아직도 먼 곳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구영필 씨의 봄은 언제 올까? 계절 감각을 잊어 버린 사람에게 봄이 무슨 소용 있으랴만 구 사장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린다. 아마 그 기다림은 그가 숨을 거두고 관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구 사장의 목표는 돈벌이가 아니다. 지금 하는 장사는 생계 유지를 위한 재기의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기실은 먹고 사는 데 그리 아등바등하지 않는 성격 탓에 장사가 안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그렇게 태평하게 살아왔다.
돈방석에 앉아 호화생활도 해 봤고 전재산을 털어 소원하던 시디음반 제작 사업도 해 봤다. 그는 그 실패의 경험을 거울 삼아 돈에 집착하지 않고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답게 산다는 건 사람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사회인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떳떳이 의무를 수행할 때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남에게 못할 일 하지 않고, 남의 가슴에 못박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 주는 게 그가 추구해 온 삶의 방식이었다면 구 사장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는 돈 벌어서 못된 곳에 쓰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아래 사람들 마음 아프게 하지 않고 방앗간의 저울처럼 곧이 곧대로 올곧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는 딸린 가족도 없다. 기저귀 찰 때부터 키운 조카놈이 있긴 하지만 과연 내 가족인가 의심될 때가 있다. 이것이 가정인가 내가 가장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살아왔다. 그에겐 가정도 가족도 없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 같다. 그는 황야의 들개처럼 고독하다. 그는 그 고독을, 없는 가정에 쏟아붓지 않고 사업에다 털어 바쳤다. 사업이 낙이요 행복이었다.
이제 그 사업마저 그의 곁을 떠난 지금 그에게 남은 건 공허한 황혼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신체는 그런대로 건강하지만 고혈압과 당뇨로 약 없으면 못 살고, 젊은 시절에 술을 너무 좋아하여 술병의 후유증으로 음식을 배부르게 먹지 못한다. 조금만 과식하면 죽음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그런 질병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아파도 그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쓰러지면 수발해 줄 사람도 없다.
그는 조카를 사랑해 주고 싶지만 항상 먼 곳에서, 지남철처럼 끌여당겨도 오지 않는 조카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아마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였을 게다. 윤호가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공부와 담을 쌓고 외박한 날이 많아졌을 때부터 손을 썼어야 했다. 왜 매를 때려서 붙잡지 않고 그대로 방임했는지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조카를 속박하기 싫어서 제 하는 대로 내버려둔 게 화근이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조카를 그렇게 만든 건 구 사장 자신이었다.
구 사장은 윤호가 언젠가 정신차리고 사회인으로서 제 위치를 찾을 줄 알았다. 그렇게 머리가 나쁘지도 않고(초등학교 땐 반에서 일등이었다) 성격도 못된 놈이 아닌데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자신을 조종할 줄 모르는 일탈아,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폭주족이 사회의 암적 존재가 아니고 뭔가?
폭주족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그런 혈육을 가진 사람으로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윤호는 일정한 직업 없이 지금도 어딘가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패거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몰고 차들의 홍수 사이를 폭주하고.
조카가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근심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사업에선 근심 걱정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었지만 조카의 방황은 돈이나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었다. 해결의 열쇠는 본인이 쥐고 있었다. 끝없는 기다림. 희망이 있다면 제 스스로 정신 차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 구 사장은 그날을 기다린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풀리고 구 사장의 가슴에 꽃 피고 새 우는 새봄이 찾아올 그날을……
오전엔 어제 손보다 둔 카세트데크를 붙잡고 씨름했다. 카세트데크는 오디오 기기 중에서 시디 플레이어와 함께 가장 고장이 많고 수리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카세트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적지만 음악 애호가 중에, 많은 테입을 보관하고 있어서 그걸 들으려고 데크를 수리하거나 중고품을 사 가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가는 부분이 두 개인 더블 카세트데크엔 모터에 연결된 고부벨트가 두 개 있어서 고무가 삭거나 노후되면 재생과 녹음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자상가 내엔 다행히 고무벨트를 파는 곳이 있어서 맞는 벨트를 사서 새로 교체했더니 테입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오래된 재고라 양쪽 벨트의 길이가 정교하게 맞지 않아서 양쪽 데크의 회전속도가 조금 달랐다. 한쪽은 빠르고 한쪽은 느렸다. 아무리 조정해도 말을 듣지 않고 애를 먹였다.
오전에 옛날 장사할 때 알았던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들의 허물없는 잡담을 듣느라 심심하지 않았다. 점심때까지 찾아온 손님은 딱 한 사람. 같은 아파트의 깡마른 친구가 또 와서 2만원짜리 정품 음악을 녹음해 갔다. 일 주일 사이에 세 번째. 음악광이었다. 아니면 녹음해 준 게 취향에 안 맞았는지.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중고 오디오 가게엔 여자 손님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여성들은 중고품에 취미가 없고 디브이디 영상 음악에 대해서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안 찾지.
점심때가 거의 다 되어 여자 손님이 한 분 찾아왔는데 레코드점의 조미라 씨였다. 며칠 전 한밤중에 유흥가에서 윤호의 패거리들이 자기 딸을 추행했단 말을 구 사장에게 했을 법도 한데 그녀는 지금껏 숨겼다. 조미라 씨는 그걸 추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조 사장의 몸에서 오징어 냄새가 고소하게 풍겼다. 그녀는 치마 엉덩이를 고이 감싸고 의자에 앉더니 구 사장이 수리하고 있는 탁자 위에다 비닐봉지에 싼 것들을 꺼내 놓았다. 소주 두 병과 맥주 한 병, 군 갑오징어 한 마리가 봉지에서 나왔다. 오징어 냄새는 거기서 나는 냄새였다.
"기분도 그렇고 오라버니하고 한 잔 합시다."
조 사장은 소줏병을 터서 종이컵에 삼분지 일쯤 따랐다. 다음엔 맥주를 따서 소주 위에 가득 붓고 구 사장에게 권했다. 자기도 똑같이 다른 컵에 따라 단숨에 먼저 마시고는 또 한 잔을 따르면서,
"혼자 살면서 늘은 게 술밖에 없다니까."
"전에 조 여사가 술 마신 걸 보지 못했는데."
"여자가 드러내놓고 술을 마시나요? 남 모르게 혼자 마시지."
구 사장은 내키지 않은 술을 억지로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딱 한 잔만 하겠다고 하고 마셨다. 조 사장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혼자서 자작 폭탄주를 세 잔이나 거푸 마셨다.
조미라 씨는 전작이 있었는지 벌써 동공이 풀려 있었다. 장사 중에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그 금기를 깬 조미라 씨였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우아한 파마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섹시하게 찰랑거릴 때 구 사장의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올랐다. 남자는 늙으면 볼품이 없지만 여자는 늙어도 아름다웠다. 구 사장이 색을 밝히는 사내였다면 그 보드라운 손목이라도 잡고 수작을 걸겠지만 여자엔 흥미가 없었다. 뜨거운 감정은 동물적 생리 현상이 아니고 그 여자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었다. 조미라를 보면 여성적 그리움보다 인간적 연민이 앞섰다. 그녀는 성실히 열심히 살고 있었다.
"천하에 못된 내 딸과 당신의 잘난 아들인가 조카가 한번 친해 보도록 노력해 보지 않을래요?"
난데없는 조 사장의 제안에 구영필 사장은 손에 주물럭거리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멍청히 그 늙은 여사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그렇게 늙어 보인 적이 없었다.
8
"별 뚱딴지 같은 소릴 다 하는군!"
조 사장은 펑크난 튜브의 바람소리같이 야멸차게 퉁기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조 사장이 아주 절박한 표정으로 그 고운 머리를 찰랑이면서 쭈글쭈글한 사내의 손을 살며시 붙자는 게 아닌가. 그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너무 사탕처럼 감미로워서 움켜쥐면 부서질 것 같았다.
"뚱딴지는 국화과의 다년생 화초 이름이예요. 제가 그 꽃을 무지 좋아해요. 향기도 곱고 모양도 예쁘구. 지금 그 얘기가 아니고 우리 딸과 당신 조카의 인생 이야길 하고 있어요. 얼마나 보기 좋은 꽃들이예요? 겉은 보기 좋지만 속이 썩고 있으니 아깝지 않수?"
"나 일해야 돼요. 우리 가게에 오셔서 술 마시는 건 좋으나 내 조카 얘긴 하지 마쇼. 당신 딸 얘기도 듣고 싶지 않구만."
구 사장은 눈앞에 놓인 여자의 하얀 손을 보면서 점잖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호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놈은 내 자식이 아니지만 내 자식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만약에 누가 내 조카를 욕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조 여사가 조카 문제로 구 사장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을 했더라면 아예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극과 극이 만나면 뜨거운 전류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제 인생에 그런 전류가 생겼더라면 이를 악물고 끊어 버렸겠지만 제 인생이 아니고 자식의 인생 문제예요. 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이 우습단 걸 알아요. 혹시 알아요? 두 아이가 사랑에 빠져서 새로운 인생을 터득할지도 모르잖아요?"
"난 그런 코미디 같은 상상 하기 싫소. 그것보다 조 여사의 귀한 딸을 내 못된 조카놈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지도 않소. 아예 얘기도 꺼내지 마시오. 내 조카는 살붙이이면서 타지부지 남만도 못한 사회의 기생충이오."
"당신 조카는 기생충이 아니예요. 그 애는 나를 보면 꼭 인사했어요. 기생충이 인사를 그렇게 극진히 하나요? 그리고 내 딸이 술집의 도자기를 깨뜨려서 할아버지 같은 남자가 대신 변상해 줬는데 그 영감과 모텔로 잠자리 가는 걸 말렸어요. 사내놈에게 배신당하고 정조관념을 잃을 내 딸을 혼내키려고 그랬겠죠. 그러면 좋은 아이잖아요? 내 딸은 살인미수죄로 교도소에서 삼 년 간을 살고 나온 전과자예요. 난 전과자 에미구요. 잘날 것도 없고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 에미와 딸이예요."
"안 돼요. 그럴 수 없소. 남자는 많을 거요. 내 조카는 인간이 아니오. 난 그놈한테서 희망을 접은 지 오래됐소."
"왜 그렇게 조카를 미워하세요? 이제 좀 사랑해 주세요. 자유 방임은 사랑이 아니예요. 목장에서 방목하는 송아지는 임자라도 있지만 끄나풀 떨린 인간은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폭주족이 된 거예요. 발산할 데가 없으니까. 그렇게 내버려두시면 안 돼요. 희망을 만들어야지요."
그녀가 붙잡은 손이 축축하게 땀으로 질척거려서 살며시 자기 손을 빼어 점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천장의 형광등을 쳐다보았다. 형광등에 불나방이 한 마리 붙어 죽어 있었다. 오래전에 죽었겠지만 갑자기 불나방이 불쌍해졌다. 윤호가 걱정되었다.
윤호에겐 그를 얽어맬 단단한 제어장치가 없었다. 그것이 방황의 원인이었다. 삼촌이 원인 제공자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윤호에게 미안했다. 무관심과 방임이 만든 결과였다. 사업에만 미쳐 가정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원인 분석을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윤호는 구 사장이 젖먹이 때부터 키운 자식이었으니까. 그는 윤호의 아버지다.
조미라 씨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구 사장이 그렇게 매정하게 나올 줄 몰랐다면서 혼자서 술만 거푸 들이켰다. 구 사장이 볼 때 여자로서 과음이었다. 저러다 인사불성이 되면 어쩌지 하고 구 사장은 속으로 걱정했다.
"조카가 완도에 친구 만나러 간다고 비 오는 날 여길 찾아왔었는데 그뒤로 소식이 끊겼소. 혹시 사고라도 내지 않았는지 잠이 오지 않아요. 경찰서를 제 집처럼 드나들고 교도소에도 두 번이나 살고 나온 놈이니까요. 내 조카는 그런 놈이오. 평생 근심덩어리지. 그게 내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소. 내 조카 때문에 또 한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아요."
"누가 불행해진다고 그러세요?"
"당신 따님이지 누구겠소?"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현명해요. 둘이 마음만 통하면 잘 살 거예요. 완도엔 왜 갔대요? 그 먼 전라도 완도엘?"
"친구에게 돈을 좀 빌려줬는데 오랫동안 갚지 않으니까 받으러 간 것 같소."
"왜 못 가게 붙잡지 가라고 놔뒀어요? 친부모라면 그랬겠어요? 모두가 오라버니 잘못이예요."
"말리고 붙잡는다고 내 말을 들을 놈이 아니오. 그래도 내 잘못이오. 여자 없이 나 혼자 키우니까 잘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친부모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게요. 내 성격이 세심하지 못해서……"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오디오를 다루었을까? 오디오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고친다고 소문났던데. 오디오와 인간 속은 다른가 보죠?"
조 사장은 눈물을 닦고 씁쓰레히 웃었다. 소주와 맥주 한 병이 다 비워졌다. 한 시간이 지나도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가게엔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항상 켜놓던 디브이디 영상도 꺼져 있었다.
조 사장은 남은 소줏병을 트지 않고 빈병들과 함께 비닐봉지에 담았다. 오징어는 발목만 몇 개 먹고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구 사장더러 심심할 때 먹으라고 오징어를 비닐봉지에 담지 않았다.
9
윤호는 완도에 가서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수중에 있는 돈만 날리고 돌아왔다. 정도리가 고향인 그 친구는 아내와 자그만 식당업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선주가 되어 부자 됐단 소리는 풍문이었다. 누군가 과장해서 퍼뜨린 헛소문이었다.
해수욕장 식당들은 여름 한 철만 반짝 장사가 잘 되고는 가을 겨울엔 불경기였다. 봄에는 관광객이 좀 찾아오지만 그 수입으로 세 식구가 살아가기에 넉넉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는 마음 잡고 불경기 땐 남의 배를 타고 품팔이 조업을 하며 즐겁게 살고 있었다. 윤호를 보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두 살짜리 딸을 보자 눈물이 치밀었다. 윤호는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 친구 아내에게 주고 화장실에 간 것처럼 소리없이 친구 집을 떠나 왔다.
정도리 구계등 해수욕장은 그림처럼 드넓고 아름다웠다. 친구는 아름다운 고향을 가지고 있단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윤호가 완도에 가서 얻은 것은 드넓은 갯돌 백사장에 부서지는 눈처럼 하얀 파도, 마셔도 마셔도 싫증 안 나는 전라도 남쪽 바다의 짭짤한 소금내였다.
그 소금내는 어머니의 젖가슴 냄새처럼 포근한 자연의 향기였다. 사진에서만 보았던 어머니. 상상의 어머니를 찾아 길고 긴 항해를 했었다. 세상에 어머니처럼 생긴 여자만 있다면 그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망망대해의 항해를 종결하고 싶었다. 그런 어머니가 없었다. 그런 항구도 없었다. 그가 만난 여자들은 모두 독종이었고 돈만 밝히는 거짓말쟁이.
그런데 딱 한 여자, 비 내리던 밤 유흥가에서 만난 그 여자는 어머니와 모습이 흡사했다. 내 뺨을 두 대나 때리고 쌍말로 욕을 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아프지 않고 따뜻했다. 그 여자에게 얻어맞은 자리에 두텁게 반창고를 붙이고 오랫동안 그 열기를 음미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알았다. 이름은 진혜선. 한번만 더 술집에 드나들면 죽어 버리겠다고 어머니가 농약병을 화장대에 놔두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제일 쉬운 방법으로 '아르바이트생 구함'이라고 써진 곳을 찾아가서 취업했다. 혜선이 서른 나이에 아르바이트생이 됐다. 24시간 근무하는 동네 편의점 마트였다. 24시간 근무하고 24간은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로 쉬었다. 보수는 하룻밤 술값이었다. 그래도 딸 하나 키우며 딸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살아온 어머니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그 직업에 충실했다.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트 주인은 여자였고 고생을 많이 해 본 사람이었다. 혜선의 미모와 야무진 성격에 흡족해하며 자기도 식료품 가게 종업원부터 시작해서 이런 편의점을 다섯 개나 가진 갑부가 됐다고 자랑했다. 인내하라. 인내하라. 그리고 노력하라. 여사장이 가르쳐 준 좌우명이었다.
인내란 참 어려운 단어였다. 죽음 같은 절망을 딛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선, 예수처럼 부활하기 위해선 마시고 싶은 술부터 참아야 한다. 밤 늦은 시간에 거리에 인적이 끊어지고 값싼 라면 국물을 찾던 가난한 아베크족들도 떠나가면 졸음과 공복이 밀려왔다. 졸음은 참을 수 있지만 술에 대한 갈증을 인내하기가 어려웠다.
마트 한쪽 구석에 혼자 누울 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모포로 몸을 감싸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심야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니 창자에서 술 넣어달라는 소리가 애끓게 들려왔다. 에라 한번만 마시자 하고 진열대의 두 홉짜리 소줏병을 꺼내어 땅콩을 안주 삼아 꿀꺽꿀꺽 마셨다. 창자로 술 내려가는 소리가 계곡물 소리처럼 쪼르르르 시원하게 들렸다. 그 순간의 쾌감. 애주가가 아니면 모르리라.
병째 들이키는 그 술병을 슬며시 나꿔채는 손이 있었다. 사장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돌아보니 폭주족 우두머리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누나에게 이 무슨 행패야? 무례하게?"
"어떻게 내 나이는 알아 가지고 나이 먹은 유세를 하는군. 겨우 두 살 더 먹은 게 그리 장하냐?"
"장하냐? 몇 번 만났다고 반말이야? 이게 또 얻어맞고 싶어 어디가 근질근질해?"
"남자 뺨 때리는 데 취미를 붙이셨나 보군. 사장한테 이르지 않을 테니까 이 술병은 고이 감춰라 응."
윤호는 술이 담긴 술병을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고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걸타앉았다. 엉덩이가 시렸지만 곧 따뜻해졌다.
"어묵 하나 끓여 주라. 김밥도 있으면 주고."
혜선은 모포 속에서 기어나와 진열대로 가더니 은박지에 싼 김밥 두 줄을 꺼내 왔다. 뜨거운 물도 갖다 주었다. 윤호가 김밥을 먹는 동안 어묵을 가스렌지에 끓여서 금방 가져왔다.
"빈 속에 소주가 들어가서 안 좋을 텐데 국물 좀 마시지."
"먹기 싫어."
"나 같은 놈하고는 함께 먹지 않겠다 그 말이군."
"곧 날이 샐 거야. 집에 가서 밥 먹을래."
"엄마가 해 준 밥."
"응."
"밥해서 바치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밥은 항상 내가 지어 바쳐. 엄마와 함께 있는 동안엔 그랬어. 따로 있을 땐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했지만. 엄마도 가게에 나가야 하니까 아침이 그리 한가하시지 않아. 완도에 간 일은 어떻게 됐어? 아저씨가 걱정하시더라고 엄마가 그러더라."
"완도엔 당일치기로 다녀왔어. 돈도 못 받고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됐지. 친구가 조업하다 다쳐서 치료비 하라고 지갑에 있는 돈 다 털어줬지 뭐야. 삼촌한테는 염치가 없어 보고를 못 드렸지만……"
"그래도 다녀왔으면 잘 다녀왔다고 전화라도 해야지. 삼촌이 아니고 아버지야 아버지. 훈계가 아니고 충고하는데 그분 속 좀 그만 태워라. 일하고 싶으면 나처럼 편의점에 취직하란 말이야. 여기저기 남자가 일할 자리는 많아."
"나도 알고 있다. 남의 걱정 말고 네 앞이나 잘 가려라. 훈계가 아니고 충고하는데 어머니한테 효도는 못하더라도 오래 살게 해 드려야지."
"고마워."
전조등 밝힌 차들이 좁은 길로 쓱쓱 지나갔다. 새벽 거리는 더 춥고 싸늘한 촉감으로 다가왔다. 겨울은 빠른 속도로 밀려가고 봄은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게 거리의 명암으로 감지되었다. 더 밝고, 아픔보다 통렬하지 않는 온기 같은 것, 이 두 젊은이의 겨울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모두가 기다렸던 봄이 아침 종소리와 함께 소리없는 울림으로 열리고 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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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구영필(67)……전자상가 중고 오디오가게 사장
조미라(59)……전자상가 레코드점 여사장
윤호(28)……구영필의 조카, 폭주족 우두머리
혜선(30)……조미라의 딸, 살인미수 전과자
폭주족들
늙은 남자
오디오가게 손님들
첫댓글 오디오제품에대한 용어가 생소한데 많은 공부를 하시고 계시군요
건강하시기만 기원하겠습니다
안천순 시인님, 올해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졸작을 읽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해서 오디오와 레코드를 가까이 하다 보니
옛것에 대한 향수로 이런 소설을 쓰게 됐어요.
부족한 점 많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