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생존권 투쟁이었다
증 언 자 : 장선호(남)
생년월일 : 1957. 11. 11(당시 나이 23세)
직 업 : 재봉사(현재 전자오락실 경영)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당시 재봉사였던 장선호 씨는 호기심에 시위대열에 끼었다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총상을 입었다.
가톨릭센터 앞 시위 목격
내 나이 12세 때 특수농작물을 재배, 판매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버렸다. 그 때문에 생활 형편이 극도로 곤란해져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부터 충장로 2가 남성의상실 등지에서 재봉사 기능을 배웠다.
그 당시 나는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물러가라던 신현확과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5월 18일 낮 12시에 광주예식장에서 형님(장상호)의 결혼식이 있었다. 학동 집에서 예식장까지 걸어오는데 광주우체국 앞에서 학생 수십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님의 결혼식이 시작되었을 때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 결혼식장 안이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하객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예식을 마쳤다.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들은 모두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10시쯤에야 형님 부부가 집에 들어왔다. 형님은 친구들과 결혼 축하를 위해 시내로 나갔다가 공수부대원들이 무조건 달려들어 친구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바람에 친구들과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형님부부만 무등산장으로 돌아 온 것이다.
5월 19일 오후 3시쯤, 나는 시내상황이 궁금해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다시 공사중이던 지하상가 앞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시민들이 군데군데 모여 학생들이 피해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충장로 5가에 있는 친구(김해성)에게 맡기고 다시 지하상가 앞으로 나왔다. 그때까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도청 쪽에서 군용트럭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 유동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시민들은 점차 도청 쪽으로 몰려나갔다. 그러자 가톨릭센터 앞에 서서 왔다갔다하고 있던 1개 소대 정도의 계엄군들이 도청 쪽으로 물러갔고, 2명만이 가톨릭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본 시민 20여 명이 따라 올라가 군인들의 총을 뺏어 7층 창문을 통해 아래에 있던 시민들에게 총과 방독면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 총에 착검을 한 공수부대원들이 도청 쪽에서 밀려내려왔다. 그들을 본 시민들이 바리케이드용으로 놓아둔 돌 화분대를 넘어뜨리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명의 사람들이 돌 화분대에 걸려 넘어지면서 나도 밑에 깔려버렸다. 신발이 걸려 신발을 벗은 채로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급히 충장로 5가 쪽으로 도망쳤다. 그때 충장로파출소, 한일은행 앞 등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엉겁결에 현 아카데미극장 앞골목의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여인숙에서 검사 나올지 모르니 가정집으로 피하라 해서 바로 앞의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가정부로 보이는 아가씨에게 돈을 주면서 신발을 사다주라고 부탁해서 신발을 사 신고 집에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트레이닝 차림이라서 다른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오셔서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가톨릭센터에서 공수부대원을 쫓아 올라간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혔고, 가톨릭센터에서 몇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계엄군과 시민
그 뒤 하루 동안 집에 감금되어 있다가 5월 21일 오전 9시쯤 동네 사람들의 함성소리를 듣고 궁금해서 밖으로 나갔다. 학동 파출소가 시민들에 의해 불타 검은 연기를 내고 있었다. 경찰서가 불태워 진 이유는 광주시민들이 위기에 처했는데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경찰이 계엄군 편이라는 데 대한 울분으로 보복한 것이라고들 했다. 곧이어 그곳에 모인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몰려갔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갔다. 도청 앞에는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시민 쪽에 서는,
"당신네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존재하는 군인인데 제 나라 국민인 학생, 시민들을 죽일 수 있느냐."
그러자 군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18일의 공수부대가 아니라 2진으로 온 군인들이다. 나도 전라도 사람이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오전 11시쯤, 3, 4명의 시민이 계엄군에게 맞아서 온몸이 까맣게 멍든 시체 1구를 태극기로 덮어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계엄군들이 죽였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 시체를 어디서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시체를 보자 계엄군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중앙교회에서는 학생들이 계속 마이크로 투쟁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시위대들이 소방차를 타고 돌며 방림동, 학동, 도청 쪽으로 왔다갔다했다. 시내 분위기는 시민들 분위기로 돌아서는 것을 느끼며 시위대 차량(군용트럭)을 탔다. 그런데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자 구시청 사거리에서 내려 다시 도청 부근으로 갔다. 그때가 오후 2시쯤이었다.
발포 소리를 듣고 도망치다가 부상
도청 앞에는 계엄군들이 연좌하여 있었는데 그때 시위대 차량인 군용트럭 한 대가 계엄군 쪽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갔다. 순간적인 일이라 계엄군들이 피한다고 피했으나 그중 2명이 군용트럭에 치여버렸다. 계엄군들이 도청 담을 에워싸면서 총을 발사하자 경찰들이 달려왔다. 그런데 계엄군들이 경찰에게도 총을 쏘아댔다. 경찰도 도망가면서 시민들에게 '계엄군들이 총을 쏜다, 우리도 같은 편이다. 빨리 피하라'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무등극장 앞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왼쪽 흉부 겨드랑이를 관통당했다. 땅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참 후에 내 눈앞에 5, 6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병원, 병원' 하면서 기다시피 3-4미터를 걸어가다가 바로 앞에 반이비인후과가 보여 셔터가 내려진 병원 문을 두드려 열고 옆에 있던 40대 아저씨의 부축으로 병원 안에 들어갔다. 내가 그 병원의 첫번째 환자로 들어가 누워 있으려니 계속 총상 환자들이 들어왔다.
병원 안은 금방 살려달라는 부상자들의 아우성으로 소란스러웠다. 겁이 난 나는 의사에게 내가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의사는 걱정 말라고 했다. 그곳에서 붕대와 솜으로 대강 지혈하고, 수혈을 받은 후 5분 정도 누워 있다가 어떤 젊은 청년의 등에 업혀 기독병원으로 갔다. 기독병원으로 가기 전 의사들이 일반인 복장으로 가면 총을 쏠 줄 모르니까, 의사 가운을 입고 가라고 해서 그 청년과 다른 한 사람이 가운을 입었다. 기독병원에는 굉장히 많은 부상자 와 사상자를 수송하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고, 나는 응급실에서 수혈을 받고 바로 상처를 봉합했다. 5월말-6월 1일 수술을 하여 파편을 제거하고 6월 3일 퇴원했다.
5월 28일로 기억되는데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와 시위참여와 부상과정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 전에 아버지가 나에게 직장에서 퇴근하고 오다가 총에 맞았다고 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 조사 도중 구타는 없었다. 조사자들이 나의 관통상을 당한 상처를 보고 '나쁜 놈의 새끼들'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계엄군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병원은 외부와 차단없이 자유로 출입할 수 있었다. 병원 내에서는 가끔 군인들이 병원을 습격한다는 소문이 있어 소란스러워질 때도 있었다. 부상자들 중에는 팔다리 주위로 총알을 일곱 군데나 맞은 사람도 있었고, 카빈총에 맞아 수술까지 한 김행주(당시 고2) 씨가 치료 후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끌려가기도 했다.
나는 주사를 맞고 옆구리에 호스를 넣어 링겔을 달고 다녔다. 기침을 하면 목에서 각혈이 넘어왔다.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된 다음에 수술을 했으나 다행히 상처가 빨리 아물어 일찍 퇴원할 수 있었다. 작년에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아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았더니 고발을 당했다. 2차례나 불응했더니 형사기동대에 의해 즉심에 회부되어 10만 원 벌금을 내고 경찰기록에 전과범으로 오르게 되었다. 올해부터 훈련을 받았으나 힘이 없고 쉬 피로를 느낀다.
부상자회 활동
5·18이후 나는 학동 파출소에서 신원조회가 나와 1달에 1번씩 통반장들의 감시를 받는가 하면 전화가 갑자기 잡음이 생기고, 테이프 감기는 소리가 나는 등 도청당하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는 형사기동대가 와서 알리바이를 확인했고, 이광영 씨(5·18 부상 동지회원)와의 관계도 유도심문했다. 실지로 나의 전담반이 파출소에 있다고 전화를 해준 때도 있었다.
1984년에 이광영 씨의 소개로 부상자동지회에 가입하여 지금까지 평회원으로 활동중이다. 1988년 5월에는 서울에 부상자동지회 서울지부를 창립했다. 창립대회를 마치고 여의도 KBS 방송국 앞에서 20분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하다가 미문화원으로 갔다. 미문화원에서 경찰이 우리를 강제로 버스에 태워 경기도 남양주까지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반항하다가 가슴을 맞아 15일간 병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문병원(복부총상 2급) 씨는 갈비뼈 2대가 나가버리는 부상을 입었다.
나는 5·18 이후 전자오락실을 경영하고 있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으나 점차 5·18이 우리의 생존권 투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18은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진상이 규명되리라 생각한다.(조사.정리 옥유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좋은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