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빤지에 올린 가시덤불 십자가이며 또한 가시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 피에타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사실적이다. 그것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아름답다. 그는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성모님을 30대 초반 여인으로 그렸으며, 반면에 죽은 그의 아들은 50살이 훨씬 넘은 남자로 묘사했다. 어머니와 아들의 나이가 뒤바뀐 것은 미켈란젤로가 성모님의 지극한 슬픔을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더 큰 슬픔을 느낀다. 보통의 조각가는 그런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될뿐 아니라 보통의 조각가가 만든 성모님의 슬픔을 보고 같은 슬픔을 느낄 사람도 없을 것이므로, 성모님의 그 슬픈 장면을 자기가 본 듯 묘사하는 일은 미켈란젤로라는 천재 조각가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오래 전 필자가 개보수 설계를 맡았던 서울 상도동성당의 소성당에 걸릴 십자가를 두고 나는 꽤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 고민을 쉽게 풀어준 사람은 조각가인 김겸순(테레시타)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간단한 모양으로, 여유 있는 비례감으로 널찍한 십자 모양의 널빤지를 만들고 그 위에 녹슨 가시철망을 닮은 단순한 가시덤불 한 가닥을 올려놓았다.<사진>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십자가이며 고통의 가시관이며 동시에 영광의 면류관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고통은 상징이며 추상이며 은유이다. 따라서 보는 이들에게 고통에 동참하기를 강요하거나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조각가는 (또는 건축가는)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게 주장하며 공감하기를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고 그 조각가의 태도와 자세를 옹호하는 이유는 이처럼 사람들 각자의 느낌을 존중하고 스스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자유롭게 느끼도록 방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추상화된 강렬한 메시지와 호소력이 내재해 있다.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성미술품이 가져야 할 품위와 격조라고 본다. 성당에서 그림이나 조각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기도가 보는 이들의 기도로 하나의 새로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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