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무술인 겸 영화배우, 이소룡의 삶
1973.7 사인에 관한 구구한 추측을 남긴 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다
1973년 7월 20일 밤, 홍콩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 구급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영화배우 이소룡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의료진의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깨어나지 못한 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전설과 의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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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개월 전, 그는 영화 <용쟁호투>의 막바지 작업 도중에 갑작스런 뇌 관련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미 몇 달 동안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종종 돌았고, 일각에서는 이것이 영화사의 홍보 전략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곤 했다. 그나저나 누구보다도 건강해야 마땅했을 직업 무술가가 왜 그렇게 갑작스레 사망했던 것일까?
이소룡의 사망 원인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며, 논란의 대상이며, 종종 음모론으로 해석된다. 삼합회 같은 폭력 조직과 싸우다 죽었다는 설, 가라테를 폄하한 것에 분노한 일본인 무술가들이 죽였다는 설, 쿵푸를 대중화하고 상업화하는 것을 싫어한 고수들이 특수 점혈법으로 자연사처럼 보이게 죽였다는 설, 약물 복용으로 사망했다는 설, 땀샘 제거 수술의 부작용으로 죽었다는 설, 영화계 관계자가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심지어 어려서부터 그를 쫓아다니던 악령, 또는 그림자가 마침내 그를 죽였다는 설까지 있다.
그의 죽음이 석연찮은 느낌을 주는 까닭은 관계자들의 은폐 시도 때문이다. 우선 그는 자택이 아니라 내연녀라는 의혹을 산 여배우 베티 팅 페이의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당황한 베티는 우선 영화사 대표 레이몬드 쵸를 불렀고, 30~40분이 지나 도착한 레이몬드는 비밀 보장을 위해 베티의 주치의를 불렀으며, 그래도 소용이 없자 비로소 구급차를 불렀던 것이다. 애초부터 스캔들을 우려해 쉬쉬하지 말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건 이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심지어 유족들까지도 계속해서 말을 바꾸는 통에 의혹은 커져만 갔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소룡의 사망은 그 직전에 앓았던 뇌 관련 질환과 연관이 있으며, 사망 당일에 복용한 진통제 에콰제직에 대한 과민반응이 직접적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무엇이라 단언하지는 못한다. 이소룡의 전설이 계속되는 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억측과 논란도 계속되지 않을까. 전기 작가 브루스 토마스는 이소룡이 어느 친구에게 한 의미심장한 말을 인용하며, 항상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고 갔던 그의 승부욕이 간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세상에는 한계라는 게 없어요. 꼭대기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고 꼭대기에 머물라는 말은 아니에요. 분명히 그것을 넘어서서 나가야죠. 그게 혹여 당신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테고요.”
길거리의 싸움꾼에서 진지한 무술가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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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룡과강>촬영 당시(왼쪽),<그린호넷>에 출연했을 때의 이소룡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홍콩에 살던 전통극 배우인 그의 아버지가 부부동반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본명은 이진번(李振藩)이고, 이소룡(李小龍)이란 예명은 누이동생이, 브루스 리(Bruce Lee)라는 영어명은 출생 당시 미국인 간호사가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어려서는 병약하고 왜소했던 이 꼬마는 나이가 들면서 장난기가 심한 악동으로 변했다. 이소룡은 생후 3개월 만에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느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고, 이후 1958년까지 23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자연스레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중학생 때부터 싸움을 좋아해서 퇴학과 전학을 반복하던 이소룡은 머지않아 길거리 싸움이 아닌 진지한 무술로서의 쿵푸를 접하게 된다. 당대의 고수 엽문(葉問)과 그 직계 제자들에게 배운 영춘권은 이소룡 무술의 근간이 되었다.
1959년에 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쿵푸를 배우면서 싸움과 말썽이 더 잦아지자, 그의 부모는 시민권이 상실되기 전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고 아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소룡은 1961년에 워싱턴 대학에 입학한다. 처음에는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쿵푸 교습이 본격적인 직업으로 발전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이소룡은 전통적인 쿵푸가 지나치게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단점이라고 생각했고, 그보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기 위해 여러 다른 무술을 비교 검토한 다음 장점만을 골라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1963년에 최초의 쿵푸 도장을 차린 그는 이듬해에 대학을 중퇴한다. 1964년에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 초청된 이소룡은 유명한 ‘1인치 펀치’를 비롯해 자신이 개발한 신기술을 선보여 관심을 모은다. 곧이어 그는 린다 에머리와 결혼했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브랜든(1965~1993)과 딸 섀넌(1969년생)이 태어난다.
할리우드를 떠나 홍콩으로, 그리고 다시 할리우드로
이소룡의 뛰어난 쿵푸 실력은 금세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ABC의 액션 드라마 <그린 호넷>(1966~67)에서 이소룡은 동명의 주인공을 돕는 일본인 조수 카토로 출연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다. 1967년에는 LA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도장을 열었으며, 이때부터 영화배우와 극작가 등의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는다. 1969년에는 갑작스러운 허리 부상을 입고 1년 가까이 활동 불능 상태에 놓이지만,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무술 철학에 관해 서술한 원고는 그의 사후에 <절권도>라는 제목으로 간행된다.
ABC의 액션 드라마 <롱스트리트>(1971~72)에서 이소룡은 동명의 주인공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중국인 골동품 상인으로 등장해 자신의 무술 철학을 짧게나마 서술하는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고향인 홍콩으로 향해 있었다. 쇼 브라더스라는 대형 영화사가 장악하던 홍콩 영화계에 맞수로 떠오른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의 대표 레이몬드 쵸(1929년생)가 그에게 처음으로 쿵푸 영화의 주연을 맡겼던 것이다. 이전까지의 쿵푸 영화에 비해 훨씬 사실적인 액션 장면이 돋보인 이소룡의 첫 주연작 <당산대형>(1971)은 이전까지의 기록을 깨트리며 홍콩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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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출연작 <정무문>의 포스터와 영화 속 장면(위)
<맹룡과강>의 포스터와 영화 속 척 노리스와 이소룡의 대결 장면(아래)
두 번째 주연작인 <정무문>(1972)은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을 중요한 소재로 삼아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이소룡은 호쾌한 액션뿐만 아니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울음소리 같은 기합, 복잡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 그리고 쌍절곤 액션을 처음 선보였다. 그의 첫 각본 및 감독 작품인 <맹룡과강>(1972)은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며, 가라테 고수 척 노리스(1940년생)가 등장해 이소룡과 대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홍콩에서 이소룡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이 소식에 할리우드도 쿵푸 영화의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쿵푸 고수가 미국 서부를 떠돌며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줄거리의 TV 시리즈를 만들자는 이소룡의 오랜 제안이 드디어 실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방송사 측에서는 중국인 주인공을 원치 않았다. 결국 1972년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쿵푸>의 주인공으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쿵푸란 말을 거의 들어 본 적도 없다던 백인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1936~2009)이 낙점되었다. 낙심했던 이소룡은 할리우드와의 최초 합작 영화인 <용쟁호투>의 제작으로 또 다른 기회를 잡았지만, 영화를 다 찍어 놓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다.
이소룡은 무술가인가, 아니면 영화배우인가?
“이소룡과 성룡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질문은 “태권브이와 마징가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질문과 함께 아마도 영원불멸의 논란거리가 아닐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를 의도한 영화 속의 몸놀림만 갖고 우열을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흔히 성룡은 진지한 무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곡예에 가까운 쿵푸 액션을 보여주는 영화배우로 평가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소룡이 보여준 액션 역시 과장이 있긴 마찬가지였다. 반면 실제 대련에 임했을 때에는 이소룡도 특유의 괴성이나 요란한 몸짓 없이 최소한 신속하고 간결하게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지인들은 증언한다.
브루스 토마스는 오늘날 이소룡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그가 남긴 몇 편의 영화에서의 모습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가 영화배우이기에 앞서 진지한 무술가였음을 환기시킨다. “그의 삶과 정신, 그리고 무술 철학은 할리우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라갈 정도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소룡이 남긴 글을 읽어보아도, 그는 단순히 신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계발하는 훈련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도 자신의 태권도 관련 저술에서 <절권도>의 몇 가지 대목을 인용하며 이소룡을 “퍽 깊이 있는 사상가”라고 평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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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품이 된 <용쟁호투>의 한 장면
이소룡은 흔히 “절권도의 창시자”로 통한다. 여기서 절권(截拳, stop-hitting)이란 상대방의 공격을 간단한 동작으로 미리 저지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개념이며, 쿵푸를 바탕으로 권투, 펜싱, 태극권, 유도, 레슬링, 가라테, 무에타이, 사바트, 태권도 등의 요소를 절충시킨 실전 무술이다. 물론 기존의 쿵푸 유파에서는 이를 가리켜 어설픈 짜깁기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소룡은 자신의 방법을 ‘절권도’란 이름 대신 ‘그것’이라고만 지칭했다. 자신이 전통이나 유파에 구애받지 않고 만든 ‘절권도’가 또다시 하나의 전통이나 유파로 자리 잡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었다. 그는 무술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독단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지적하곤 했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보자. “내 스타일에는 아무런 수수께끼가 없다. 내 움직임은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비고전적이다. (…) 절권도는 그저 최소한의 움직임과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쿵푸의 진정한 길에 더 가까이 갈수록, 표현의 낭비는 더 줄어든다. (…) 절권도를 수행하면서도 절권도만이 유일무이한 무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핵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런 사람은 진리란 모든 형태의 바깥에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권도는 단지 이름에 불과하며, 강을 건너기 위한 배에 불과하니, 일단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지 등에 지고 다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브루스 토마스는 말한다. “이소룡은 뛰어난 무술 배우이자 특출한 무술가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이소룡이 홍콩에서 5년 동안 영춘권을 수련했고, 뒤에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 자신의 무술과 철학을 발전시키고 가르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소룡이 영화에 전력을 쏟은 기간은 죽기 전의 2년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절권도를 가르치는 이소룡의 많은 후계자들은 그가 10년, 12년, 또는 길게는 15년 넘게 고된 훈련을 통해 도달한 지점에서 쉽게 절권도를 시작한다. 어느 누구도 이소룡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절권도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이나 철학적 토대를 밟을 기회는 갖지 못했다. 이소룡의 절권도는 뿌리 깊은 나무에 핀 꽃이었다.”
비극까지도 닮았던 아버지와 아들
1973년 7월 25일에 3만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홍콩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이소룡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미국으로 옮겨진 그의 시신은 7월 31일에 시애틀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몇 년 뒤에는 이소룡의 또 다른 유작 <사망유희>(1979)가 개봉되었다. 이는 그가 생전에 찍어 놓았던 몇몇 장면에 기존의 영화 장면과 대역 출연 장면을 짜깁기해 만든 까닭에 졸작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당시 이소룡에게 무술을 배우던 프로농구 선수 카림 압둘 자바를 비롯해서 여러 고수들과의 대결 장면, 그리고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 운동복이 등장한다는 것만 해도 볼만한 가치는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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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사후에 개봉된 <사망유희>의 한 장면(왼쪽),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묻혀있는 묘지
이소룡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아들 브랜든 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86년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이래 여러 편의 액션 영화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그는 아버지의 사망 20주기인 1993년에 유작 <크로우> 촬영 현장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평소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좀 더 완벽한 세상에서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행운아입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를 두었으니까요.(…)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한, 저 역시 그들을 존경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4월 3일, 28세의 브랜든 리는 시애틀의 공동묘지에서 32세인 그의 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