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도 지나고 포근한 춘삼월에 별로 알려지지않은 숨은 역사유적을 찾아 마이크로기행을 떠나봅니다^*^
낮엔 슬슬 더운 기운을 느끼지만 밤엔 아직 쌀쌀한 환절기인지라 옷차림이 애매하군요!ㅋ
박제상유적은 울주군 두동면에 있어서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울산역에 내려 318번버스를 타고 40분정도
가니까 박제상유적 바로 앞에 도착하더군요^^
*기 행 지 : 박제상(朴堤上) 유적
*소 재 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68
*기행코스 : 치산서원(鵄山書院)~충렬공 박제상기념관~박제상추모비
(인근 3km지점에 망부석, 4km지점에 은을암유적도 있습니다)
#망부석(望夫石) :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 산156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돌로 변했다는 전설을 가진 바위
#은을암(隱乙岩) :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척과리 산152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의 영혼이 날아와 숨었다는 바위
##박제상 유적(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 1997.10.9)
*신라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입니다.
*박제상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눌지왕(재위 417~458)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싶어해서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왕자를 구출해 냈습니다.
그후 다시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왕자를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으며,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왜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왜왕이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태워 죽이고 말았습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岩)에 숨었다고 전하며,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고 조선시대에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습니다.
*박제상유적내에 치산서원, 충렬공 바제상기념관, 박제상추모비 등이 있습니다.
1)박제상 유적입구
2)치산사(鵄山祠)복원비(1993.2 충렬공유적복원추진위원회)
3)박제상유적 안내도
4)박제상유적 전경
1.치산서원(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30-2)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의 충혼을 기리기위해 세운 조선 영조21년(1745)에 건립된 사당터로, 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서원안에는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 그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가 있었다고 전해져 와서 이를 바탕으로 1990년부터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서원의 건물배치는 강당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형으로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충렬사,신모사,쌍정려 등 3동의 사당을 나란히 배치하여 사당군을 이룬 것은 박제상이야기를 반영한 독특한 구성입니다.
1)치산서원입구(홍살문)
2)삼강문(三綱門) : 치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
3)경의재(景義齎)
4)관운당(觀雲堂)
*정면에서 본 전경
*내부의 모습
5)영휘재(永徽齎)
6)은효문(恩孝門) 부속건물로 들어가는 문
7)부속건물들
8)쌍정려(雙旌閭:박제상의 두 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식 사당)와 성인문(成人門:쌍정려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9)신모사(神母祠:박제상 부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와 망해문(望海門:신모사로 들어가는 문)
10)충렬묘(忠烈廟:박제상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11)전사청(典祀廳:제사를 관할하는 기관)
2.박제상 추모비
1)추모비 전경
2)추모비주위에 세워진 4개의 입석판 내용
*곧은 충절 그 정렬이 고금을 흘리오니 언제나 경주의 그해 무오년을 생각하네
오호라 산빛마저 서늘한 기운 떠엇구나
*높고 높은 님의 기절 보통과 달라와서 목도의 하늘아래 별과 달이 빛겨루네
흘러간 천년전의 님의 자취 생각하니 푸르런 해수마저 시름을 머금었네
*나라위해 바친 충성 붉은 피도 머첫던가 장하신 그 충절 천년세월 뚜렸하네
일본땅 억울한 죽음 끝없이 맺힌 한은 두견새 울음같이 영원한 시름일레
*오랜 세월 맑은 강은 다함없이 흐르는데 다짐하고 홀로 가신지 몇해나 지났는고
충신의 곧은 기상 중음길에 떠나실제 대장부 가슴에는 가족생각 없었다네
3.충렬공 박제상기념관(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박제상로 200)
박제상기념관은 기념관 출입문,영상실,전시실로 이루어져 있고, 전시실은 박제상전시관과 울주문화관으로 구성
#박제상전시관
4~5세기 역사연표/고서로 보는 박제상이야기/박제상과 부인/박제상항해기/매직비전/체험공간
#울주문화관
4~5세기생활상/신라토우/울주문화재/근대생활상/영상실/안내실/사무실
1)기념관 앞마당에 있는 삼모녀상(三母女像)
2)망부석여인 노래비(김영달 작사/한기철 작곡/배주리 노래)
3)박제상기념관 전경
4)영상실 전경
5)전시실 전경
6)전시실 전시자료 이모저모
*4~5세기 생활상
4세기경부터 농기구제작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보다 발전된 농기구로 땅을 깊이 팔수있게 되었고, 또한
나라에서는 우경법을 장려하면서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농산물의 유통에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가
사용되면서 유통량 및 유통속도 또한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고 아울러 수레가 다니기 쉽도록 길을 반듯하게
닦으면서 보다 장비된 초기의 도시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수공업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 돈의 역할을 하는 옷감의 생산 또한 늘면서 물물교환 형태의 초기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신라는 소지마립간 시기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시장이 생겨났는데 지증왕때 시장의 일을 맡아보는
동시(東市)라는 관청을 두어 시장을 관리토록 하였습니다.
*신라토우
*신라토기
*신라목곽묘 제작과정
*고서로 보는 박제상이야기
(신라, 고구려와 왜에 볼모를 보내다)
신라 실성왕은 즉위직후인 402년 왜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데, 왜왕은 그 징표로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청하였고 실성왕11년에는 고구려가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삼고자해서 그를 보냈습니다.
(눌지왕, 박제상에게 두 아우를 구해올 것을 청하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두 아우를 구해올 사람을 찾던 중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들은 제상의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드릴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제상을 불러 앞에
나오게하여 가주기를 청하니 "신이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디 않을수 있겠습니까?"했다.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구하다)
"신이 듣건데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는 신의와 성실뿐이라고 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로이 돌려보내 주신
다면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게 생각함이 한량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점을 유념해 주소서"라고 고구려왕을
설득하자 고구려왕은 복호와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죽기를 맹세하여 처자도 보지않고 왜로 향하다)
눌지왕이 기뻐하고 위로하며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
단지 한쪽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은 비록 열등한 재목이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달리 왜는 입과 혀로 달랠수 없어서
마땅히 거짓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신이 왜에 가거든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박제상의 목을 껴안고 울며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곧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온 자와 같이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지만 신라왕이
박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박제상을 정말 배반한 자로 여기고 감시를 소홀히 하자,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떻게 혼자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니 박제상은 "만약 두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미사흔이 홀로 귀국하였다.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박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으나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멀리 바라볼수가 없었다.
왜왕은 박제상을 목도로 유배보냈다가 곧 사람을 시켜 섶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운 후 목을 베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애통해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증하였으며 그 가족에게 후한 물품을 내렸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박제상의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끔하여 그의 충절에 보답하였다.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날때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뒤쫓아갔으나 끝내 남편 박제상을 따라잡지 못한 채 망덕사
절문 남쪽의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고, 이 모랫벌을 이름하여 장사(長沙)라고 했으며 친척 두사람이 겨우
그녀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썩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린 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치산서원 춘향대제(春香大祭)
신라천년 만고의 충신이었던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의 얼을 추모하고 충,효,열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매년 봄이 되면 치산서원에서 춘향대제를 지내고 있다.
*박제상과 그 부인의 초상
*빅제상이 배를 타고 왜로 떠나는 모습을 나타낸 모형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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