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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자본,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의 칼날을 예리하게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국가와 자본, 권력에 속박되어 불모의 대지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 위에
다양한 차이들을 가로질러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이 책의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
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
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이 책의 특징 1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이 책의 특징 2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첫댓글 어찌보면 정말 중요한 내용인데 사람들의 관심이 소홀한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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