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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orthern Royal Albatross
길모퉁이에 늘 서있던 튀밥장수의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소양 강 토마토>, <폭탄세일 >, <오늘 단 하루>...... 튀밥장수는 정말 자신의 자리를 오늘 단 하루 토마토 장수에게 양보한 것일까. 트럭의 차양에 매달린 채 세일을 알리는 광고지는 셀로판 테이프로 어설프게 코팅되어 있었다. 토마토 장수가 단 하루의 세일을 위해 오늘 아침 써놓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때가 묻었고 지나치게 낡았다......
너무나 투명한 거짓,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고, 다라서 누구도 속일 수 없는 거짓, 진실로 가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게으른 거짓 옆에서 토마토 장수는 태평스레 졸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거짓이 7월의 긱가에서 한가로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은호는 약속장소로 그녀를 데려다 줄 버스에 올랐다.
우리 둘 다 장난은 아니야......., 좋은 사람이야......., 난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어........ 진땀을 흘리며 수줍게 고백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여자, 사랑과 책임의 동거를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는 여자, 무거움이 곧 싸구려라는 증거가 되는 모피처럼, 수영은 값비싼 가벼움으로 자신의 사랑을 치장한 채 앉아 있었다. - 속은 좀 어때? - 뭐, 별로 안 좋아. - 독한 약 먹어야 하는데 위가 그 모양이면 안 되잖아.
은호는 가지고 간 알로에 한 통과 그것의 샘플이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너편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봉투를 잡아당겨 그 안에서 샘플 두 봉지를 꺼내 컵에 따랐다. 바둑돌을 쥔 손, 반드시 그것이 놓여져야 할 자리를 찾는 신중한 손처럼 은호의 손은 수영의 앞에 조용히 컵을 내려놓았다.
- 마셔. 생일 선물이야. 수영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은호는 수영의 얼굴에 번진 웃음과 컵을 쥐는 그녀의 손을 확인한 뒤, 가위, 빨대, 휴지 따위가 어지러운 탁자 위로 눈길을 떨구고 그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영은 은호의 어수선한 심중을 금새 눈치챘다. - 정신없어 보인다.
- 정신 놓고 살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됐어. 사흘을 앓으며 결심한 일이었잖아......, 숨을 고르고, 은호는 입을 열었다. - 그래.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좋은 사람일 것 같다. 한 번 보고 싶어.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은호는 남자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자를 친구의 연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수영과 통화를 한 후 사흘 동안 은호는 남자와 수영에 대해서,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시간 --- 설거지를 하면서, 13kg 용량의 세탁기가 빨아대는 옷가지들을 널면서, 아이를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은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낯설고 서늘한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는 수영을 만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영은 어떠한 개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들이 만나기로 한 날보다 하루 앞서 그녀가 결행하고자 한 일을 결행해버렸다.
나한테 어떤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문정은 그것을 권리의 문제로 생각했지만 은호는 그것을 의무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문정은 침묵을 택했고 은호는 <간섭>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흘을 온전히 바친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간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거짓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 난 네가 정말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내가 키워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 다섯 번째 아이를 기를 수 있었던 기회를 빼앗아서 미안해. - 농담할 기분 아니야. - 농담 아니야. -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인생에 다른 계획은 용납되지 않는 걸까? 내년쯤엔 막내 어린이집 보내고 대학원 준비하려고 했거든. 그래도 니 애를 키워야 한다면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었었어. 이 얘기는 네 임신을 내 삶과 연관지어서 생각했다는 뜻이야. 수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넌 결코 그 아이를 낳을 수 없었을 거야. 이건 널 탓하려는 말이 아니야. 그건 사실 용기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어. 용기란 행동하는 자에게 필요한 미덕이니까. 수영은 줄곧 침묵을 이어갔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희 두 사람이 아무 것도 선택하거나 책임질 수 없고,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으리라는 거야. 간단히 말해서 너희 두 사람의 관계는 허구(虛構)라는 거지. 이런 저주를 하게 되서 나도 많이 속상해. 그래, 니 말대로 장난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장난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진실은 아니야. 어쩌면 너는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못한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건.......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서로의 육체 이외에는 나눌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이게 바로 그 증거야. 너희는 너희들 사랑의 가장 소중한 결실인 아이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런데 수영아, 아이란 건 말이다........ 은호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전에 물어봤었지? 내게 아이는 어느 정도의 의미냐구. 그날 내가 대답했던 거, 혹시 기억해? 여자에게 있어서 아이의 존재란 건 의미의 크고 작음을 계량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그 아이를 네가 낳았다면, 그 아이가 네 앞에 서서 너를 엄마라고 부르고, 너를 웃게 하고, 너를 울리는 네 딸이나 아들이었다면, 넌 그 아이를 위해 기꺼이 네 목숨도 바쳤을 거야. 아이란 건, 자식이란 건 그런 거야......... 그런데 넌 그 아일 포기했어.
은호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은호는 울고 있었다.
- 이 일로 마음이 무척 아팠다. 니가 그 아이에게 한 마디라도 말을 건네 봤다면 과연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이제 곧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너에게로부터 말하는 법을 배워서 너와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 그 아이는 아주 잠시, 단지 몇 달 동안 침묵하고 있는 것뿐인데....... 만약 니가 그 사람의 아이나 아내를 한 번이라도 만나봤다면, 그 사람들을 분명한 실체로 확인했다면 지금의 관계가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은호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그 사람이랑 그 사람 아내 얘기, 아이 얘기 안 한다고 했지? 그런데 그게 현실이야. 너희 두 사람이 언급을 회피하는 그 사람의 아내, 아이들, 그게 실체고 현실인 거야. 진짜 실체는 너희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네가 포기한 바로 그 아이야. 너희 두 사람의 관계, 내가 그걸 간섭하거나 단죄할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 그거 이해 못해. 내가 이해하는 건 너희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 그게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완전한 허상이라는 거야.
은호가 신탁을 전하는 무녀처럼 그 저주를 다시 되뇌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수영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 약 잘 챙겨 먹어. 옷 그렇게 입으면 안 돼. 몸 상해.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일어서면서 다시 한 마디를 건넸다. - 갈께. 그리고 나, 이제 너 수영이라고 안 부를 거야. 니 원래 이름이 더 좋아.
은호의 눈물, 수영은 그것을 노트 위의 오류처럼, 실수처럼, 틀린 답처럼 지워진 자신의 아이, 그리고 은호의 네 아이와 연관지었다. 은호의 눈물이 단지 그녀 앞에서 뛰노는 네 명의 실체, 은호와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 네 명의 실체를 통해 바라본 하나의 실체, 곧 자신의 태 속에서 지워진 그 실체를 위한 조사(弔詞)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수영은 그것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수영 자신이 흘리게 될 눈물에 대한 슬픈 예측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수영은 자신이 혼동한 실체, 아니면 선택할 수 없었던 실체로 인해 언젠가, 반드시 요구될 대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실체와 허상을 혼동한 대가가 요구된다면, 그녀가 그 대가를 지불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녀의 인생에 허락되는 특별한 은총일 것이다. 그러면 수영은 그때가 되어서야 모든 은총이 기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생명이라는 실체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참회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 무력과 슬픔만이 수영이 깨닫게 될 은총이었다. <후략> . . . .
아이는 코팅이 된 A4 용지 크기의 네모난 <날개>를 달고 소파에서 뛰어내립니다. 젖지 않고 깃털이 빠지지 않는 아이의 영구한 날개가 순간 파닥입니다. 멋지게 바닥으로 착지한 아이는 엄마에게로 달려와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나 이만큼은 날았는데 말이야...... 아이의 말투 속에는 다음 번엔 더 멀리, 더 오래 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긴 것도 같고 반대로, 자신이 꿈꾼 비상(飛翔)에 별반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날개에 대한, 또는 너무나 짧았던 비상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것도 같습니다.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저는 웃으며 잠시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지만 마음 속에서는 상념의 실타래가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날개를 달고 새가 되기를 꿈꾸는 그 놀이, 제게 그것은 술래를 완전히 물먹인, 성공한 숨바꼭질이라든가 허황되고 속된 공주놀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놀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전화국의 게시판은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시멘트 구조물이었습니다. 게시판의 양 옆에는 시멘트로 야트막한 벽을 만들고 그 안에 흙을 돋우어 넣은 화단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저는 도로보다 높은 그 화단을 밟고 올라서서 게시판의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곤 했었죠. 게시판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제 키를 훌쩍 넘기는, 지금 어림잡아 보면 180cm 가량의 높이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까지 올라가 <날으는 새>가 아닌 <추락하는 새>를 연기하는 것은 꽤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었었죠. 그곳을 <접수>하고 나서 친구들과 저는 학교 앞 등교길 옆의 축대를 목표물로 정했습니다. 택지로 조성되었던 그 축대 위의 땅에 커다란 저택이 들어서기 전까지, 친구들과 저는 그 공터에 아지트를 만듭답시고 땅을 파대다가 손목이 아파질 때쯤이면 땅을 파던 나무막대를 집어던지고 축대의 가장자리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축대의 높이는 경사가 진 도로 탓에 한쪽으로 갈수록 높이가 높았었는데 친구들과 저는 일단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 낙하지점에 도착한 전투기에서 뛰어내리는 군인 모양으로 아래쪽의 길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조금씩 조금씩 축대의 높은 쪽으로 옮아갔지요. 그 놀이를 즐길 무렵에는 이미 같은 놀이를 즐겼으되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심사가 같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놀이는 이제 더이상 <비상>의 쾌감을 느끼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고 <용기>와 <도전> 내지 <무모함>의 겨루기로 변질되어 있었으니까요. 그 겨루기에서 누가 가장 용기있는 자로 등극했었는지, 누가 가장 도전적이고 가장 무모했었는지 저는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습니다. 제게 있어서 그 놀이는 언제나 <날으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축대의 보다 높은 곳으로 옮아가 뛰어내릴 때마다 착지의 순간에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통증이 점점 더 커져갔다는 것, 발바닥의 피부가 파열하는 듯한 그 생생한 통증뿐입니다. 그리고 더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서도, 더이상 무모해질 수 없는 지점까지 올라가 가슴 속으로 공기를 한껏 부풀려 넣고 가벼웁게 뛰어내려도, 아니 솟구쳐오른다고 상상을 해도 비상의 순간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추락으로 이어졌다는 것뿐입니다.
<춤>에 대한 이런 정의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춤이란 수평적 욕구의 수직적 표현이다>. 여기서 수평적 욕구라 함은 성적 욕망을 말하는 것인데요, 이 말에는 인간이 춤이라는 <유희>를 통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분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춤에 대한 독특한 하나의 정의에 불과하지만 이 표현 속에서 보편타당한 진실 하나를 끌어내자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유희가 그의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날기를 소망하여 축대 위에서 추락의 놀이를 즐기던 아이와 탈랑탈랑 소리를 내는 폴리에텔렌의 날개를 달고 소파 위에서 솟구쳐오르는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 모든 인간이 어린 시절 한때 심취하다가 무의식 밑으로 가라앉혀버리는 그 놀이 속에서 드러나는 욕망, 하늘을 날고자 하는, 초월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너무도 집요하고 간절하여서 도대체가 그가 본래부터 땅에 속한 존재였는지에조차 의문이 가게 만들곤 합니다.
비행기가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자동차의 전조등이나 동체가 연상시키는 것이 질주에 능한 네발 짐승이나 매끄럽게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형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제겐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왜 인간은 그토록 날기를 소망하고 그토록 빠르게 질주하기를 소망하여 발명해낸 그 놀랍도록 유능한 <기계> 안에 반드시 생명체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일까, 알바트로스의 날개를 비웃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인간이 중력을 박차고 지구에서 뛰쳐나간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인데, 표범의 질주를 흉내내려는 건각들은 이제 올림픽 경기의 출발선에 선 칼 루이스의 후예들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인간은 이미 새와 표범의 능력을 앞질러 자신의 욕망을 구현해냈고 그 욕망은 무한히 증폭되어 가며 그 증폭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과학 역시 무한히 진보해가는 것 같은데, 비행기와 자동차의 형상은 디자인 차원의 미미한 변화만을 보여줄 뿐 여전히 생명체의 형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만약 자동차의 형태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면 저는 그것에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일말의 인상조차 일체 제게해 버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바부터 그것의 실재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하나의 철저한 <기계>로, 드높이 날으는 새도, 날렵한 들짐승도 구현해내지 못한 성능의 소유자에게 어울리는 전혀 새로운 무엇으로 디자인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제게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자연은 어쨌거나 여전히 모든 창조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기도 하거니와 제게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기에는 독창성이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새로 차를 살 때쯤이면 어떤 천재적 디자이너에 의해 제가 소망하는 전혀 새로운 디자인의 <철저한 기계>가 개발되기를 소망해 볼 뿐입니다,ㅎㅎㅎ.
운전을 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느끼시는 바겠지만 운전자는 자신이 운전하는 그 자동차라는 기계와 일체감 내지 일체감까지는 아닐지라도 긴밀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지요. 가속을 하거나 끼어들기를 할 때 운전자의 미세한 조작은 그대로 차의 동체에 전달되고 차는 운전자의 그 명령을 정밀하게 수행해내며 운전자는 다시 그 변화된 차의 속도와 움직임에 반응하게 되니까요. 그 일체감은 물리적인 것에서 심정적인 것으로까지 발전하는데 예를 들자면 오래도록 타던 차를 폐차시킬 때면 무지하게 섭섭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잖아요. 우리는 입는 옷이나 신발과 같은 소소한 것으로부터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그것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시키고 그것들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합니다. 옷이란 내 피부에 직접 닿아서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고 차보다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지만 우리는 차보다 우리 신체에 더 밀착된 옷이나, 차보다 훨씬 비싼 집과도 그런 일체감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일체감의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옷이나 집이 움직여다니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부동산으로 정의되는 반면에 차는 늘 나와 함께 움직여다니는 동산(動産)이라는 데에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의 움직이는 속성, 그것 때문에 그것의 모양새가 생명체를 본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모방, 그 편집증에 가까운 디자이너들의 집착이 실제로 그렇게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상상력이나 독창성의 부재 때문에 더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단지 속성과 외형을 결합시켜야 하는 디자인의 숙제가 찾아낸 해답 차원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외형이 움직이는 생명체의 속성을 구현하고 있는 물체에 움직이는 생명체의 형상을 부여하고자 한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비상과 질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구현해주고 있는 물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것은 연대감과 일체감으로까지 발전된다는 것, 그것이 비행기가 언제나 새를 꿈꾸고 자동차가 말이나 표범을 꿈꾸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새와 표범, 또 그것을 표상하는 기계를 통해 이중으로 표상되는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기계들로부터 결코 생명체의 형상을 박탈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도전이 보다 과감해지고 과격해져서 그가 자신의 인간적 외형조차도 포기하고 스스로 강력한 고성능의 기계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가 온다면 모를까 저는 탱크와 같은 느려터진 전쟁기계가 아니라면 제가 원하는, 놀라운 속도를 자랑하되 생명체를 닮지는 않은 <철저한 기계>를 운전해 볼 기회를 갖지는 못할 듯합니다,ㅎㅎㅎ.
유희의 형태 안에 갇혀있었던 비상과 질주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라이트 형제와 포드의 덕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인간의 그 간절한 욕망은 결국 그의 욕망을 충실히 구현해주고, 그리하여 애정과 일체감마저 느끼게 해주는 멋진 기계의 발명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지요. 인간이 그의 모든 유희에 있어서 창조적일 것을 요구 받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숙제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결실의 때가 아님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그 저주를 사람들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거나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 사화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신앙의 불임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질타로서 성전정화사건의 전주곡으로 배치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허기를 감당하지 못해서 인내심이라는 미덕조차 삼켜버리고 신경질적으로 돌변해버리는 여느 인간 남정네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예수님의 그 완벽한 육화(!)에 감탄(?)하거나 한마디의 저주로 무화과나무를 뿌리채 말려버린 기적, 예수님께서 기적이라는 그 자극적 조미료로 군중의 입맛을 맞추려한 선동가적 기질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는 하지 않게 되겠지요,ㅎㅎㅎ.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임의 세대에 대한 저주는 그것이 비유하고 있는 의미를 떠나서라도 가혹하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열매 맺기를 요구하는 것, 모든 사랑이 허상이 아닌 실체로 뿌리내려 열매 맺는 것, 인간의 모든 유희가 억제된 욕망이나 소모적인 욕망으로 사산되어서는 안 되며, 견실한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가혹하거나 부당하거나 부담스러운 요구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무화과나무와 인간에게 생득적으로 내재된 그들의 성능이고 섭리에 순종하여 수확에 요구되는 적절한 노동을 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열매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의 유희가 나를 매료시킬 때 그것은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그것이 우리의 분별력을 흐리게 했던 어린 시절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숙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로, 어스름이 내려 어머니께서 저녁상을 보아두시고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실 때까지도 술래에게 들킬세라 돌기둥의 발치에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던 열살박이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유희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독소, 바로 즐거움인 것이죠. 마흔 살의 인간이 열살박이 아이와 다른 점은 그 놀이가 자신의 처지에 합당한 것인지, 우리 자신이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위험한 놀이는 아닌지, 그 놀이가 한낱 소모적인 유희로, 불임의 유희로 끝나버리는지는 않을런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빠져들고 있는 그 놀이가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 나를 매료시키는, 내가 즐기는 이 놀이 안에는 나의 어떤 욕망이 숨어있는 것일까, 놀이 안에 숨어있는 그 욕망을 명료하게 파악해보면 놀이가 불임의 저주를 입을 것인지, 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인지도 명료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성서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들 수 있다면>, 이 유희 속의 허상과 실체를 명료히 구분해 낼 수 있다면, 명료히 드러난 그 실체를 외면하지 않고 거기에 투신할 수 있다면, 합당한 열매,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겠지요.
저는 비행기를 발명하는 것까지 바라지 않구요, 그저 비행기표를 끊어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제가 즐기는 유희 속의 욕망은 제게 비행기를 태워줄 수 있는, 저를 날아오르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것>일까요,ㅎㅎㅎ?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욕망을 축복해주시고 그것이 불임의 척박한 사막을 횡단하여 풍요로운 열매가 가득한 오아시스에 안착하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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