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춘양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어떤 글을 읽다가 '억지춘양'을 떠올린다. 이 말의 용법은 누가 무엇을 마지못해 하거나 그 행동이 탐탁찮아 보일 때 주로 쓴다. 행위를 하는 자신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마뜩치 않아서 억지로 하는 것임으로 성의가 있어 보일 턱이 없다.
한데 이 말은 시중에서 두 가지의 버전으로 쓰이지 않는가 한다. 즉, '억지춘향'과 '억지춘양'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사전에는 억지춘향이 표준말로 나온다. 그렇지만 출처를 더듬어 보면 꼭 그것 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억지춘향'은 원님이 춘향이를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한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억지 춘양'도 근거는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보국대를 동원하여 영동선을 개설하면서 충양목을 실어내기 위해 억지로 철도를 춘양까지 닿도록 한 것도 한 근거라고 한다. 그럼으로 이 두가지는 분명한 어원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한다.
하지만 둘다 결과적으로는 억지로 한 것을 뜻하는 점에서는 유사점이 없다고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나 그 행위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수반할 때는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다. 왜냐하면 건강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억지로 웃으면 정신건강에 좋고 그것은 공짜로 건강을 챙기는 일도 되기 때문이다.
웃음 효과는 증명이 되고 있다. 한데 웃음의 반응은 한가지 맹점이 있다고 한다. 우리 대뇌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웃음과 억지로 웃는 웃음을 잘 구분 짓지를 못하여 그 효과도 자연스런 웃음과 억지로 웃는 웃음과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서는 억지로 웃음을 웃고 살아갈 일이다.
동물 중에서 소리 내어 웃는 건 사람이 유일하다고 한다. 원숭이나 소등 다른 짐승들도 노여움이나 슬픔, 기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하하호호 웃지는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웃을 때는 안면에 분포된 수만 개 신경과 근육이 함께 움직이는데 반해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점에서 보면 사람은 두뇌의 명민함 못지않게 신체의 우월성도 갖춘 셈이 아닌가 한다. 웃음의 운동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다. 암의 예방과 맥박조정, 스트레스 해소와 수명연장에 도움을 준다. 그밖에도 밝은 첫인상의 효과와 비만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작위적이긴 해도 억지 춘양으로라도 웃는 일을 실천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한다.
나는 웃음을 생각하면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백제와당 생각이 많이 난다. 이것은 기와지붕 끝을 막는 막새로서 경주 흥륜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신라와당이라고도 하나 실은 백제와당이라고 한다. 신라에 끌려온 도공이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단다.
이 웃음 웃는 막새는 얼굴 왼편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러나 두 눈과 한쪽 볼, 남은 입모양이 포근한 미소를 담고 있다. 아마도 한국인의 미소 중 어떤 형태로든 남은 것 중에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웃음을 웃게 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내가 혼자서 무얼 생각하며 기뻐서 웃거나 억지로 웃는 경우와 다른 것을 보고 나도 몰래 웃게 되는 경우이다.
40여 년 전 흑백TV가 나오던 시절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너가 있었다. 그것을 시청하면서 지금도 잊지 못한 웃음장면이 생각난다. 하루는 바보 어머니가 이웃집에 가서 지금 시간이 몇 시 인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이웃 아저씨는 금방 잊어버릴 것이 뻔해서 손동작으로 아홉시를 표시하여 주었다. 짧은 시침은 팔을 짧게 분침은 팔을 길게 뻗어 보이며 마주보고 손동작을 맞추어 가라 했다. 바보는 알려준 대로 손동작을 하고서 집에 들어갔다.
“아니 밤 아홉시란 말이야!” 그 말에 포복절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잘 웃지 않는다. 딴에는 늘 웃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평가는 인색하다. 아마도 그것은 사람을 접촉하는 직업이긴 하나, 법집행에 늘 매달리다 보니 생겨난 버릇이 아닌가 한다. 그 점에서 반성이 필요하지 않는가 한다.
억지 춘양, 억지웃음을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한데 정작 하고 싶은 억지춘양이야기가 있다. 어디서 읽은 건데, 옛날 어느 고을에 시어머니와 불화를 겪는 며느리가 있었다. 두 고부간에는 금이 갈 때로 가서 증오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편은 그런 두 고부 사이에 끼어 좌불안석이었다. 하루는 그가 제안을 했다.
“여보 둘이 앙숙으로 살 바에는 어머니를 산속에 버립시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되오. 산 속에 어머니를 버리면 외삼촌이 당장 발고를 할 것 아니요. 당신과 어머니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데 당신을 의심할까봐 그게 걱정이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합니다. 당신이 얼마동안이라도 어머니께 잘 해드리시오. 동네사람들이 사이좋은 고부로 소문이 나게 한 다음 모두가 믿게 되면 그때 실천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억지로 효성을 다하였다. 어느 집 잔치에서 맛있는 것이 생기면 갖다드리고 알뜰하게 잠자리를 돌봐 좋은 소문이 퍼졌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이젠 됐소. 어머니를 버려도 누가 당신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요”
그 말에 며느리는 크게 뉘우치고 효부로 살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억지춘양의 효과를 본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한다. 결과가 좋은 것으로 예견된다면 그렇게 억지로라도 해 볼 일이다. (2015)
첫댓글 억지로라도 웃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함게 사는 남편을 위하여 시부모에게 잘 공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억지춘양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좋은 일이라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억지춘양과 관련한 고부에 얽힌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사실 건강을 지키며 바른 인격을 형성하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들은
거의 모두 실천하기 어렵거나 하기 싫은 것들이지요.
세상은 악하여 악의 길로 가는 길은 넓고도 편하나 선으로 가는 길은 좁고도 험하니 삼가고 삼가며
비록 억지춘양일지언정 힘겨운 연단을 마다하지 않는 자세를 갖추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효를 다하는데 있어서는 비록 억지춘양이하고 해도 그리 실천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억지춘양이란 말도 있었군요. 아무리 힘들어도 일부러라도 웃어볼 일이네요. 과학적으로 웃을 때, 엔돌핀이 감동할 때 엔돌핀의 4천배인 다이돌핀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옛부터 전해오는 말이 빈말은 아닌듯 합니다. 소문만복래라고 웃으면 복이온다고 했으니까요. 사람의 뇌는 억지웃음이나 그냥 웃는거나 구분을 못하고 효과는 똑같이 낸다고 하니 힘든 세상에 억지로라도 웃고 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