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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본 침략
김포공항. 수속을 마치고 찻집으로 올라갔다. 조그만가방 한 개와 여권, 외환은행에서 바꾼 몇푼의 엔화와 여행자 수표 그리고 춘삼이 형이만들어 준 크레디트 카드 한장이 내전재산이었다. 표창을 숨겨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게신경쓰이는 일이었다. 대신 옷 안에 플라스틱단추를 여러 개 달아두었고 라이터를 개조해만든 응급무기와 손톱깎이를 개조한 무기정도는 휴대하고 있었다. "마음 놓으세요. 우리 일본 야쿠자는 결코비겁하지 않습니다. 비겁하느니 차라리할복자살 하는 게 우리의 신념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죠. 비겁한 꼴은 나도 못보는 놈 올시다. 당신 모가지를 걸 수있겠소?" "걸겠소." 사사키 목소리는 침착했다. 보통 사내는아닌 것 같았다. 우리 애들이 좌악 깔려있는데도 눈빛에 기 죽는 기색이 없었다.여차하면 뼈가 으스러질 신세인데도당당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야쿠자의근성을 지키려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나도 목을 걸겠소." 그동안 사사키와 나는 여러 차례정정당당한 자리를 만들어 왔지만 막상비행기에 오르려니 다시 한번 확인해 두고싶었다. 사사키는 악수를 하고 사라졌다. 한 녀석이 사사키 뒤통수를 가리키며물었다. "놔둬라. 절대 건들지 마라. 우린 비겁할수 없다.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애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애들의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신변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란것도 애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은 내마음 속에 언제나 적지(敵地)였다. 굳이역사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는 혼자라도일본을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였었다. 더구나 한국의 처녀들이 몸을 뜯어먹히는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나님. 갑니다. 만약 내가 죽거든 당신도무엇인지 이번에 보여 주십쇼. 하나님. 난 살아남아야 할 놈입니다.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물어 뜯어야 합니다.살아 있어야 하고말고요.
안내 방송을 듣고 짐을 챙겨 일어섰다.계단 아래에 넙치 형이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가죽 반코트에 깊숙이 손을 찔러넣은채 빙긋이 웃었다. "형, 웬일유?" "그냥 왔다." "끝까지 고집 부려서 미안해요." "정말 몸조심 해라. 이건 급할 때 써라.도움이 필요할 때 뒤에 전화번호도 있다." "고마울 때도 다 있수, 형이." "비행기 안에서부터 신경 좀 써라. 옷 "겁 주는 거요?" "좀 주면 안 되겠냐?" "명심할 테니 염려 마요. 장총찬이가시체로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 쪽발이한테죽느니 차라리 자살하고 말지요." 나는 후쿠오카행 아홉 시 사십 분발비행기를 타기 위해 넓은 복도를 걸어나갔다.바로 얼마 전에 이 자리에 서서 다혜와뜨거운 입맞춤을 했고 사랑한다고 악을쓰기도 했었다. 악수를 나누었다. 새벽부터 나를 배웅하기위해 나온 애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긴장되어있었다. "이 새끼들아 힘 내. 살아올 테니까."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안으로 들어섰다.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외국행 비행기였다.벌어질 상황이 불안하기도 했다. 보안검사대 앞에 섰다. 자꾸 손톱깎이가마음에 걸렸다. "이게 뭣니까?" 보안검사하던 남자가 손톱깎이를집어들었다. "외국 간다고 손톱 길지 말란 법없잖아요?" "발톱도 물론 길겠죠." 검사요원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보통 손톱깎이 보다 크지만 그 안에 무기로사용할 만한 것이 들어 있으리라곤 생각지못할 것 같았다. "이건 좀 곤란합니다." 감쪽 같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검사요원은정확하게 칼 끝이 들어 있는 부분을 손으로 "손톱 다듬는 겁니다." 내가 얘기해 놓고 보아도 좀 옹색하고궁상맞아 보였다. "좋습니다. 열심히 다듬으십쇼." 검사요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기분이나쁘지 않았다. 딱딱한 일을 하는사람들이어서 농담 같은 걸 하리라곤 생각지않은 것이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이 늘어선 상점을주욱 훑어보았다.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더구나 내게 필요한물건은 담배뿐이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눈을 흡뜨고 찾아도 없었다. 거북선 열 갑을사넣고 넓은 대기실 한쪽 구석에 앉았다.누군가 내 행동을 관찰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들자 괜히 온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감시받는출발지점에서부터 따라붙을 거란 넙치 형말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판이었다. 담배를꼬나물고 눈치를 채지 않게 주위를훑어보았다. 모두 감시자 같기도 했고 모두방관자 같기도 했다. 일본 사람은 쉽게 구분이 되었다. 머리가짧았고 아무래도 하중이 빠른 듯한 느낌을받게 마련이었다. 게이트 넘버 3. 사람들이 우르르몰려들었다. 나는 맨 뒤쪽에 처졌다.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 잠깐이라도감시받기 싫었다. 이제 일본 땅에 도착하면숨 한번 크게 쉬기도 어려울지 모르기때문이기도 했다.
비행기는 땅을 차고 올라섰다. 내가 살던서울은 건물이 다닥다닥 영글어 붙은 것같았다. 남쪽으로 갈수록 아직도 산은 헐벗은채였고 사람 살 곳은 무한하게 많아 보였다.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신호가 떨어졌다.나는 오래 참았다는 듯이 담배를 피워물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어서 편했다. DC10기의 가운데 자리는 다섯 명이 붙어앉는자리였다. 건너편 좌석에서 신바람나게떠드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앉은늙은이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 일본을 한두 번드나들었던 사내 같았다. "일제 시대에 겪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정말일본 사람들 잘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비행기 소음 속으로 또렷하게 들여오는목소리였다. 늙은이가 사내 녀석에게신바람이 나는 것 같았다. "우리 나라 사람들 정신부터 확 뜯어고쳐야 돼요. 제가 서너 번 들랑거렸지만근면하고 친절한 건 언제 봐도 변함이없었어요. 그러니 자연 자주 가게 되고 그쪽물건 사들고 올 수밖에 없죠. 물건 한 개라도보시면 알잖아요. 가보지도 않고 욕만 하는친구들 보면 한심해요. 이번에 들어오실 때보면 알지만 우리 공항 얼마나 빡빡한지아세요? 여건이 안돼서 그렇지 일본서 살수만 있다면 거기서 살고 싶어요." 사내 녀석은 점점 꼴을 볼 수 없게 말을 해나갔다. "이봐, 대한민국 친구!"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눈을치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을 가리켰다. "...... ." "너, 한번 더 그 따위 아가리 놀리면비행기에서 내던져 버릴 테니까 지금부터숨도 쉬지 말고 가라." "당신 누구야?" 삼십대 중반쯤 돼보이는 사내가 반쯤일어서며 물었다. 나는 후다닥 벧트를 열고일어나 녀석의 뒷목을 한 대 갈겼다.앞좌석으로 대가리를 푹 파묻었다. 옆에 있던늙은이가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올려보았다. "아저씨. 저런 새끼가 헛소리 하거든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여야 할 거 아닙니까." "...... ." 늙은이가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내렸다.나라 괜찮은 나라라는 거 알아?" 사내는 아픈 목을 쥔 채 허리를 세웠다.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런 게 아닙니다." 워낙 다급했는지 사내가 내 손을 잡았다. "잔소리 말고 일어나서 큰 소리로 노래한마디 불러라. 수틀리게 나오면 정말 그냥안 둘 테니까." 나는 혈을 지그시 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제발 놔 주세요. 할게요. 한다니까요." 다급했던 사내는 두손을 싹싹 비볐다. "일어나!" 사내는 일어섰다. "태극기 불러." "태극기요?"있잖아." 사람들이 키들키들 웃는 소리가 들렸다.우리 나라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어서 말을알아들은 것 같았다. "잘했소, 젊은 양반." 중년신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말했다. 사내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더 다부지게 다루쇼. 젊은 녀석이 저모양이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소." 중년 신사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도 이렇게말했다. 사내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일어나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앉아!" 사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쪽발이들만 없으면 노래를 시키겠다만,참는 거다. 정신 바짝 차리고 네 혼이나 "네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가슴 한쪽이아팠다. 내 동족을 쪽발이들 앞에서창피스럽게 만들긴 싫었다. 일본이 잘 사는나라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빼앗기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사내는 고개를 돌린 채 창 밖만 쳐다보고있었다. 내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체가 착륙준비를 하기 위해 하강하기시작했다. 귀가 멍멍하기 시작했다. 기압의변화가 몹시 기분 나쁘게 얽혀오기 시작했다. 바다를 끼고 비행기는 내리꽂히고 있었다.후쿠오카공항의 모습이 보였다. 해변으로줄지어 펼쳐진 시가지 모습은 사람 사는 땅이어디든 그렇듯 잘 정리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빈한한 마을 같았다.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침아홉 시 사십분발 후쿠오카행 비행기를탔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일본 땅을밟은 것이다. 혼자라도 쳐들어오고 싶었던나라 일본. 역사적으로 수없는 찬탈과 욕된과거를 얽어놓은 일본 땅.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하는 창구 앞에섰다. 외국인 대열에 끼여 있는 내 모습을생각해 보았다. 내가 일본 땅에 온 이유도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악착같이 달려들 수밖에 없는 내 신세를 또 생각해 보았다. 매섭게 생긴 출입국 관리가 나를훑어보았다. 앞머리를 퍼머넌트해서 얼굴이더 길쭉해 보였고 하관이 빨라 만화책에서보던 얼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물었다. 일본 말이라 단 한마디를 나는 그의 눈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또뭐라고 물었다. 이번엔 영어였다. "한국말로 말해!" 나는 소리를 뻑 질렀다. 뒤에 섰던한국인들이 웃었다. 관리는 또 뭐라고물었다. "이봐 쪽발이, 한국 말 안 배웠냐?" 일본 관리는 투덜거리며 표정 없이 도장을찍었다. "고맙다." 밖으로 빠져나가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뒤통수에 남아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섰다. 장총찬 선생 환영. 한글로 또박또박 쓴 푯말이 눈에 띄었다.푯말을 들고 있었다. 그 옆엔 콧수염 기른가죽점퍼의 사내들과 한눈에도 신사다워보이는 복장의 사내들이 주욱 서 있다. 나는 말 없이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대합실의 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물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내들은 사람들이빠져나오는 곳에 시선을 준 채 좌우를훑어보곤 했다. 한눈에도 썩 세련되어 보이는중년 사내가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으로 미루어공항에 환영나온 패들 가운데 두목급처럼느켜졌다. 계집애들도 여러 명이었다. 두목처럼느켜지는 사내는 다른 사내들에게 푯말을 더높이 들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같았다. 계집애가 더 높이 들었다. 사람들은거의 다 빠져나온 것 같았다. 두목인 사내가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스쳐 지나면서 한방 갈겼다. 사내가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장총찬이다."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쓰러졌던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장총찬 선생이십니까?" 앞으로 썩 나서는 사내의 목소리는유창했다. "그렇다." "언제 나오셨습니까?" "환영을 이 따위로밖에 못하겠어? 나오는것도 모르고 말야. 임마, 푯말이 뭐야?플래카드, 대형 플래카드 하나 쯤은내걸어야잖겠어?" "죄송합니다." "저 친구가 왕초냐?" "그렇습니다." "넌 우리말 꽤 잘하는데 일본놈이냐?" "아닙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그런데 얘들 밑 닦아 주는 거냐?" "아닙니다. 특별히 통역해 달라고 해서나왔습니다." "재일교포냐?" "그렇습니다." "그럼 인사 시켜라." 일본 말로 뭐라고 한참 설명하던 녀석이내게 말했다. "환영식을 크게 하겠답니다. 인사하시죠.이쪽은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郞) 입니다.하카다(博多)의 지도자입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시하라가 손을잡았다. 그 순간 이시하라가 왼쪽 주먹을위로 걸어 내던졌다. 비행장 대합실 바닥으로나뒹굴었다. "임마, 그게 일본식 환영이냐?" 둘러섰던 사내들이 일제히 공격자세를취했다. 이시하라가 손을 내저으며 뭐라고지껄였다. "미안하답니다. 실력을 테스트해 보고싶었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거랍니다. 나가시죠." "그런 식으로 까불면 목을 비틀어 버린다고해라. 분명히 그렇게 전해라." "예" 나를 앞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대합실에서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바람이 불어 오고있었다. "네 이름이 뭐냐?" "황병규입니다." "쟤들 한국 말 알아듣냐?" "몇 마디는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며칠전부터 저한테 배웠으니까요." "준비 단단히 했구나. 어떤 상황이든 넌 내옆에 붙어 있으라. 너만은 탈없이 해 둘테니." "알았습니다." 까만 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벤츠,캐딜락. 우선 눈에 뜨인 것이 그랬다. 문이 열렸다. "타시죠." 내 옆엔 이시하라가 앉았고 그 앞엔황병규가 앉았다. "여긴 야쿠자들이 최고급 승용차를 탑니다.그래서 택시 같은 것들이 고급 승용차가지나가면 눈치 보며 피합니다. 골치 "훌륭한 나라다." "호텔은 뉴오타니 호텔이랍니다." "부하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어봐라." "정식으로 결단식을 치른 부하가 이백여 명되고 기타 다른 부하도 많답니다." "뭐해서 먹고 사느냐고 물어 봐라." "그냥 그렇답니다. 이곳도 요즘은 경기가안 좋아서 벌이가 다른 때 같지 않답니다." "나를 이제 어쩔 작정이냐?" "아름다운 관광이 되도록 최선을다하겠답니다." 자동차는 뉴오타니 호텔 앞에 멎었다.이시하라가 문을 열고 깍듯하게 손을내밀었다. 심호흡을 하며 내렸다. 이시하라가 미리 예약한 방으로 들어섰다.풀 짐도 없었고 피곤해서 쉬어야 할 이유도곳이지만 긴장이 풀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이시하라 일당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고할 수 있는 적지에 왔다는 생각때문에 마음이편치 않았다. "샤워하시고 식사하러 가시잡니다. 아래층로비에서 기다린답니다." 이시하라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인사성은 꽤 밝은 애들인 것 같았다.일본인들의 비굴하리만큼 철저한 인사성은쉽게 외국인들에게 우월감 같은 걸 주어일본의 상품을 사게 하거나 일본인의 친절을기억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이시하라를 따라왔던 기모노 입은 계집애가무릎을 꿇은 채 엽차를 따랐다. 자태가 퍽고와 보였다. 공항에서부터 쭈욱 눈여겨보았지만 일본 계집애들의 미모는 형편이없었다. 괜찮은 생김새라고 생각해 줄 만한애들은 이시하라가 데리고 온 애들뿐이었다.차라리 사내애들이 나아 보였다. 골격생김새로 보아 일본 애들은 못생긴 민족인 것같았다. "얘는 뭐냐?" "계시는 동안 특별히 모시기 위해 데려온애라고 합니다." "우리말 할 줄 아냐?" "전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모시겠다는 거냐?" "전 잘 모릅니다." "그럼 물어봐라." 병규가 무릎 꿇고 얌전히 앉아 있는계집애에게 뭐라고 물었다. 계집애는 조아린채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태가빼어나 보였다.이시하라 두목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천황처럼 모시라고 일렀답니다. 모시는 게섭섭하거나 불편하다면 당장 바다 위에시체로 떠오를지 모른답니다. 부족한 게있으면 물리치지 마시고 하명을 해 달랍니다.아마 잘못 모시게 되면 저 여자가 죽게될지도 모릅니다. 두렵답니다." 병규도 이렇게 말하며 두려운 표정을감추지 못했다. "너는 어떤 임무냐?" "비슷한 소릴 들었습니다. 통역이 잘못되거나 장총찬 선생님을 부담스럽게 해드리면 병.신이 될 정도로 녹초가 될 걸로압니다." "이 자식아, 선생이 뭐냐?" "그렇게 부르라고 했습니다." "스물두어 살 됐지." "스물둘입니다." "그럼 형이라고 불러라. 너까지 나를선생이라고 부르는 건 간지러워서 못듣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두 마디 이상 하기 싫은 놈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녀석은 붙임성이 있었다. 생기기도귀여워서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다. "넌 얘들하고 어떤 관계냐?" "이시하라 두목의 부하는 아닙니다만 우리대화단(大和團)의 식구이기 때문에 파견나온겁니다." "그럼 너도 야쿠자냐?" "그렇습니다." "한 가지 묻자. 여기 도청장치했냐?"결코 하지 않습니다." "좋다. 그럼 얘기 나온 김에 묻자. 왜야쿠자가 됐냐? 넌 아까도 자랑스럽게한국인라고 했다. 쪽발이 밑에서 빌붙어 사는게 자랑이냐?" "언젠가는 그 말씀 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일본엔 한국계 야쿠자가 많습니다. 그건얼마나 뼈저린 서러움과 핍박을 받았는지를보여 주는 겁니다. 취직도 안 되고 먹고살기도 힘들며 무엇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되는 게 없습니다. 저처럼 한국인 학교를철저하게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한 놈들의말로는 빤합니다. 일본인들에게 증오가 생길수밖에 없습니다." "야쿠자들이 그걸 노리겠군. 일꾼으로선제일 적격일 테니까."않고 한번 시키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되니까요." "대화단은 크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단쳅니다."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제가 알기론 협상을 할 것 같습니다.형님이 한국에서 제일 센 분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아까 공항에서 보고 놀랐습니다.도쿄의 우리 본부에서 온 분도 혀를 차며갔습니다." "내가 협상에서 응하지 않을 걸 알 텐데.한국의 처녀들 속여서 팔아먹는 꼴을 나보고묵인하라고 한다면 너까지도 박살을 내고말겠다." "...... ." 병규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담배를 피워 "샤워하시죠." 병규가 눈짓하며 일어나자 기모노 입은계집애가 무릎으로 기어와 두 손을 받쳐들었다. "얘 이름 뭐냐?" "다나카 미사코(田中美佐子)라고 꽤 유명한탤런트입니다. 현재 NHK 텔리비전 연속극에도나오고 CF 모델도 합니다." 나는 미사코란 풋내나는 계집애를 찬찬히뜯어보았다. 탤런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정도의 미모인 건 확실했지만 아무리 턱이높은 야쿠자하고 해도 현재 활동중인탤런트를 내 몸종으로 보내 주진 않았을 것같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병규 녀석이 나를속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입니다 형님. 저도 놀랄 정도의대우입니다. 이시하라 두목이 그런 꼴을당하고도 참는 거나 이런 유명한 탤런트를보내 모시게 하는 걸 보면 형님이 얼마나대단한 분인지 짐작이 갈 정돕니다." "정말 그렇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 네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형님, 좋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전화를 들어 프런트에 뭐라고말을 전했다. "뭐야?" "이번 주 잡지 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믿질 않으시니까요." "이 애가 나왔단 말이냐?" "보시면 압니다. 전 거짓말을 못합니다." 병규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굉장한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터였다.그렇다면 나를 불러들인 뒷면에는 신판정신대에 대한 흥정 말고 다른 음모가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이 한국의 제일인자인가요?" 병규가 물었다. "난 조직도 족보도 없는 떠돌이다.한국에선 가는 곳마다 깨지는 형편없는실력이지." "그럴 리가...... ." "한국의 일인자 앞에 서면 눈빛만으로도 나같은 건 쓰러진다." "믿어지지 않아요. 정말...... ." "네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면 너도 이땅에서 살고 싶진 않을 거다." 바로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병규가 문을들어오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병규가 이 책 저 책 열심히 뒤적거렸다. "이걸 보세요." 녀석이 펴 준 주간지와 여성지엔 미사코의선명한 컬러사진이 돋보이게 드러나 있었다.어떤 사진은 젖가슴까지 완전하게 드러낸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완전 나체로 옆모습을보인 것도 있었다. 사진 설명에서도 현재NHK의 연속극의 주인공이란 한자 설명을주섬주섬 읽을 수 있었다. "알았다. 치워라." "형님, 이렇게 대접하는 건 한국인으로선사상 처음일 겁니다. 이런 대접이 더러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보기는 첨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가능하면 살아서 돌아가셔야 할 거돌아가는 최선의 길을 선택한 뒤 돌아가서포기하는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일본야쿠자 단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피를타고 난 놈의 부탁입니다." 피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짧은 시간이었지만 병규에게서 진한동족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죽진 않겠다. 그리고 살려고 발버둥치진않겠다. 다만 내 피를 나눈 처녀들이팔려와서 치욕의 나날을 보내는 꼴만은 더보지 않겠다. 네가 도와 주고 싶을 때 나를도와 주길 바랄 뿐이다. 난 말도 통하지않는다. 더구나 이곳 지리는 깜깜하다.그리고 저들의 음모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전 어딜 가도떳떳하게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는 놈입니다.한일합작회사의 준비요원으로 파견 근무하러온 사람처럼 되어 있으니 여기에 충분히머무를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러갔다. 미사코가 우리 두사람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었지만알아들을 수 없어서인지 눈만 깜박거리고있었다. "형님, 삼일간은 이 여자가 형님 겁니다." "난 사나워." "압니다." "일본 계집이라면 짓뭉개 버리고 싶어." "알아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부질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했었구나." "그렇습니다. 비록 부모가 나를조센징이라고 거절했고 계집애도 결국은 "자아식." 나는 병규 녀석의 어깨를 쳐 주었다.병규는 씨익 웃었다. "형님, 샤워나 하십쇼. 일본 계집이어떤지도 알아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녀석의 말을 새겨듣고 싶었다.야쿠자의 일원으로 나를 안심시키는 중대한일을 수행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동족을 만난기쁨으로 들떠 있는 것인지 아직 명확하게 알수는 없었다. 어쨌든 기분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그러자. 호랑이 굴 속이 어떤지 알아야하니까." "적선하는 뜻도 됩니다. 미사코가 나중에경을 치지 않으려면 형님이 데리고 있는동안만이라도 사랑해 줘야 합니다. 미사코는위한 제물 아닙니까." "알았다." "전 내려가 있겠습니다." 병규는 미사코에게 뭐라고 일본 말로지껄이고 나갔다. 나는 넙치 형이 준성냥갑만큼 작은 기구를 문고리에붙여두었다. 문을 몰래 열고 들어오거나 하면소리를 낼 수 있는 장치도 들어있는물건이었다. "샤와?" 미사코의 발음은 일본식 영어였지만 애교가뚝뚝 떨어질 것처럼 간드러졌다. 나는 고개를끄덕이며 웃었다. 미사코는 샤워기를내려놓고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물을만져보라는 시늉을 했다. "오케?"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말이달라도 몸 시늉으로 상대의 뜻을 알 수있었다. 미사코는 손가방을 열고 비누와 수건을꺼냈다. 목욕탕 안에 있는 비누와 수건을써도 충분할 텐데 특별히 마련해 온 것같았다. 유리창 바깥으론 학교 운동장이내려다보였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선지소음마저 들리지 않았다. 서울의 호텔에서내려다보이는 시가지에 비하면 형편없이초라한 도시였다. 미사코는 기모노를 모두 벗었다. 고리만벗기면 나신이 될 수 있는 얇은 수영복차림이었다. 젖가슴 끝이 보일 정도로 가슴은풍만했다. 주간지의 나신보다 훨씬 소담한 몸매라는내가 벗어던지는 옷을 차곡차곡 받아옆자리에 개어놓았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허리를 꼿꼿하게세운 채 옷을 벗었다.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여자 앞에선 누구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는것인지도 모른다. 미사코는 내 손을 잡고 욕탕으로 들어갔다.김이 피어오르는 샤워기를 들고 미사코는생긋 웃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입을다물었다. 거울에 부옇게 김이 서렸다. 내 벌거벗은모습을 보지 않는 것만도 위로가 되었다.미사코는 내 몸에 물을 뿌렸다. 처음엔따가운 물줄기였지만 차츰 적당한 느낌이드는 물줄기였다. 그녀는 비누거품을 내어 내 내 몸의 부분부분이 일시에 경직되기시작했다. 태연한 육체이기를 바랐지만그렇게 되질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길이 으슥한 곳을 스칠때마다 가늘게 몸을 떨었다. 팽창하는 내육신은 젊디젊었다. 고리를 풀었다. 두 개째 고리를 풀자그녀는 수줍은 듯 몸을 꼬았다. 말이 통할 수 있었으면...... . 나는 그 생각뿐이었다. 비누거품을 다씻어낸 미사코가 가볍게 수건질을 시작했다.그리고 대형수건으로 내 몸을 감쌌다. 미사코는 물기 젖은 몸으로 따라나왔다.생각 같아서는 그녀의 깊은 곳을 빼앗고싶었다. 욕심껏 미사코를 농락하고 싶었다.그런다고 해서 욕된 생애를 보낸 조선. 이시하라 일당에게 허겁지겁 여자나 탐내는놈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미사코란여자 탤런트를 붙여 준 것은 그런 걸노렸을지 모른다. 옷을 입었다. 미사코는 말 없이 무릎 꿇은채 옷을 받쳐들었다. 이것이 일본의 힘일까?도가 넘을 정도의 친절이랄 수도 있었고계획적인 굴욕성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프로권투 선수의 챔피언 결정전이라고 해도무릎 꿇고 애원의 몸짓을 하는 상대를 칠수는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다가상대가 돌아서면 뒤통수를 갈겨 쓰러뜨리고무자비하게 짓밟는 민족성일지라도 모른다고생각했다. 미사코의 행동은 노예의 자세였다. 그들의모른다. 그들의 근면성은 그래서 생겨난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옷을 다 입고 손가방을 들자 미사코는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나신이 햇살을 받아더욱 팽팽하고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몸의물기를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그녀는 시중을들었다. 문을 닫고 복도를 따라나갔다. 엘리베이터앞에 병규와 또 다른 미니스커트의 계집애가서 있었다. 일본엔 미니스커트의 유행바람이불고 있다는 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볼우물이 깊게 패인 계집애가 허리를깊숙하게 숙였다. 병규도 가볍게 목례하듯인사를 했다. "오래 기다렸지?" "아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가 들어서자병규와 계집애가 따라 들어왔다. "식사를 하시고 구경을 좀 하시죠." "협상인지 흥정인지 그것부터 하자고해라." "형님, 급하게 서두르는 게 안 좋습니다.저족에서 먼저 얘길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게좋아요. 형님이 조급해 보이는 건 제가싫어요."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그렇진 않을 겁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를 가리켰다. 문이열리자 이시하라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나는 웃으며 내려섰다. 까만 승용차 뒷자석에 올라탔다.장식용처럼 생긴 일본도 한 자루가 꽂혀무기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었다. "식사는 이쪽에서 마련한 걸로 하시잡니다.일본식이랍니다." "좋다고 그래라." "피곤하시면 하루 이틀 푹 쉬신 다음에얘길 해도 좋답니다." "난 성질이 급해. 차 치고 포 치는 식으로나를 다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일러라." "결코 그런 생각은 품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신사도를 강조하는 대화단이어째서 외국 처녀들을 속임수로 사들여비참한 생활을 만드는지 물어 봐라. 적어도일본의 야쿠자라면 그런 짓은 하지말아야지." 한동안 이시하라와 말을 주고받던 병규가약간 난처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본래는 여자들을 괴롭힐 생각 없이 저지른일인데 야쿠자 조직과 조직의 갈등 때문에여자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게 변한거랍니다." "그런데도 계속 그 짓을 할 거냐고물어봐라." "포기할 용의가 있답니다. 그래서 형님을특별히 초청했답니다. 도쿄의 본부로 초청할생각이었어나 막판에 바군 것도 사실은 소문나지 않게 얘기를 하고 싶어서랍니다." 자동차가 중심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해변이 보이는 동네로 달리고 있었다. 화식집 이층은 새로 깐 다다미 냄새가 짙게풍겨 나왔다. 나는 역겨운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손님이라고 다다미를 새로 깔아서그렇습니다. 냄새가 싫으시다면 자릴 옮겨 아마 일본인들은 다다미 냄새가 좋은모양이었다. 우리 나라 김치나 청국장내음처럼 기분 좋은 냄새라고 여기는모양이었다. 처음엔 싫다고 말하고 싶었지만옹졸함을 보이기 싫어 괜찮다고 말했다. "이 식당은 이곳 하카다(博多)에서제일입니다." 병규가 너스레를 떨어대고 있었다. 나는무릎 꿇고 시중드는 여자들의 고분고분한친절도 조금은 역겨웠다. 조금 지나치다싶을만큼 잔시중까지 들었다. "점심 먹고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좀들어보자." 이시하라는 별로 말이 없었다. 이시하라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계집애도 미사코못지 않은 미인이었다. 어느 짬에 옷을머리 끝을 매만지며 미사코가 들어왔다. 짧은치마가 허벅지를 반 뼘쯤 보이게 했고,커다란 가슴 한쪽이 보일 것처럼 가슴이 파인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자태가 무척선정적이었다. "식사 후에 이시하라 두목이 관광 안내를하겠답니다." "난 관광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난성질이 급해. 나를 초청한 목적이 있을 거아냐? 후딱후딱 끝내자고 해. 차 치고 포치는 일본 놈들 식으로 끌고 나가는 꼴은못보니까."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한국 여자빼오는 짓은 포기하겠답니다. 이시하라두목은 후쿠오카 총책입니다. 그러나 다른지역 문제는 도쿄 총본부와 협의해야 "그걸 뭘로 믿는가?" "야쿠자는 결코 장난 같은 건 하지않는답니다." 이시하라의 새끼손가락을 유심히쳐다보았다. 새끼손가락 한 개가 뭉툭 나가있었다. 후쿠오카의 두목쯤 되려면새끼손가락 한 개는 의리의 정표로 잘려있어야 했다. 그것은 일생 동안 한번도 배반하지않겠다는 상징이었다. 야쿠자로 입단할 때선서와 동시에 피가름으로 새끼손가락을잘라내는 게 이들 야쿠자의 전통 가운데하나였다. 이시하라의 나이는 사십대 후반처럼보였다. 다른 애들처럼 콧수염을 기르거나가죽점퍼를 입니 않은 신사였다.부하같이 생긴 젊은 애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자들이 분명 후쿠오카의 제왕이냐?아니면 조무래기들이냐?" "이곳에도 여러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우리 대화단 정도면 선두 그룹입니다." "너도 손가락 잘랐냐?" "네." 병규의 새끼손가락도 뭉툭했다. 결코배반할 수 없는 피의 맹세였다. 내 손가락엔그런 피가름의 증거도 없었다. 일부에서 그런것을 한다는 건 알지만 일본의 야쿠자들처럼전통으로 삼진 않았다. 일본 애들은 문신이나 새끼손가락이 피가름따위로 맹세와 배신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퍽중시되고 있는 눈치였다. 이시하라가 식사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않았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장국을손으로 들고 마시기 때문에 수저가 필요치않은 식사법이었다. 주방 쪽에서 훤칠하고 깨끗한 차림의사내가 무를 대팻밥처럼 깎고 있었다. 얇은종잇장처럼 깍아 내려갔지만 한번도 실수하는법이 없었다. "쟤는 어째서 저것만 깍고 있지?" "아, 그건 십수 년 동안 주방 일을 보아서눈을 감고도 저렇게 정교하게 칼을 쓸 수있다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그만큼 음식 솜씨에 자신 있고 그만큼 정성을들인다는 거죠." "저 녀석 이리 오라고 해라." 병구가 일어나서 주방 쪽으로 쫓아갔다.주방장이 허리를 굽힌 채 다가왔다. 나는굵기가 틀리고 종잇장처럼 곱게 깎이지않았다. "됐다." 주방장이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나는병규에게 말했다. "이시하라에게 전해라. 적어도 손님으로모셔왔다면 여기의 제일인자와 한판 겨루는인사쯤은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나는 이들의 기를 꺽어놓고 싶었다.손님대접 치곤 너무 융숭해서 비위에 맞지않았다. 적어도 후쿠오카 제일의 야쿠자라면그 정도 준비는 해 뒀을 것 같았다. 어차피이들은 내 솜씨를 잘 알지 못하고가 있었다.서로 솜씨를 겨룬 뒤에 정당한 대우를 받고싶었다. "우리 나라에선 함부로 친절하게 굴진땐 반드시 흑심이 있는 거다. 그걸 타진해봐라. 넌 어차피 이들과 한패겠지만...... ." "물론 난 이들과 한패입니다. 그러나형님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이시하라 두목얘기론 형님이 온다는 소문이 좌악 퍼져서다른 집단에서 긴장하고 있답니다. 이 지역패권다툼에 형님을 끌어들인게 아니냐 해서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답니다. 우리대화단보다 다른 집단 애들이 한국 여자 빼다파는 장사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답니다.그러니까 본격적인 여자장사꾼들은 긴장할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거다. 난 결코 다른 집단과이시하라 집단의 패권다툼에 말려들고 싶진않다. 내 할 일만 하고 돌아가면 그뿐이다.물론 다른 애들이라도 한국 여자를 팔아먹는 "문제가 복잡한 게 바로 그겁니다. 여기실정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대화단이 손을떼는 건 쉽습니다. 손 떼기로 한 건 본부의결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애들의확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알겠다. 날 속였구나." "그게 아닙니다. 얘길 들어 보세요." 병규의 설명에 의하면 야쿠자의 생존도결국 경제다툼인데 일본 경제의 침체 때문에사업체의 수입이 대폭 줄었고, 마약과여자장사와 이권개입으로 구멍을 메워 나가야하기 때문에 야쿠자들끼리 경쟁이 치열할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여자장사와 마약밀매는 또 상관관계가 있어서 손 떼기 어려운것이며, 여자 값이 비싼 일본에서 다른 나라여자를 끌어들이는 수법을 쓰지 않을 수없다는 것이었다. 누드 쇼나 섹스 쇼에도 헐값에 여자를채우는 일은 큰 이권이라고 했다. 일본여자들은 값도 비싸고 오래 붙어 있지도않지만 외국인을 데려오면 그들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여자 값이 그렇게 싸냐?" "그런 실정입니다." "넌 한국 놈 아니냐?" "...... ." "한국 놈 아니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뿌릴 뽑겠다." "형님...... ." "무모한 짓이란 말이지?" "위험합니다. 여긴 서울이 아닙니다." "알고 왔다." 여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는 경우는여러 갈래였다. 프로덕션 비자라고 해서무용수니 가수니 해서 삼 개월 동안만 머물수 있는 비자를 받는 경우는 그래도 나은편이었다. 초청 비자나 방문 비자 따위로 들어오면겨우 보름 정도의 체류허가를 받게 되어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스스로 야쿠자 조직에게 팔려가서 불법체류나은거 형식의 보호를 받기도 하면, 유쿠자들의주선으로 홍콩이나 필리핀으로 자리를 옮긴뒤에 국적을 사가지고 다시 들어오는수법까지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술집에 팔려가는 여자들은 어떤 대우를받느냐?" "차라리 나은 편입니다. 이곳 술집은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여자 말고." "여러 부류가 있긴 있습니다." "무슨 얘긴가 알겠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대기하고 있는 차에올라탔다. "말을 전해라. 정정당당하게 겨루고싶다고. 지나친 대접도 싫고 서운하게 하는것도 싫다고." "물론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 드릴 게있습니다. 이곳은 각성제가 흔하여 자칫하면이상한 애들과 부딪칠 염려가 있습니다.작년엔가 우메모토(海本)란 은행갱이 은행을털러 들어가서 다섯명이나 죽이고 행원들귀를 자르거나 남녀 행원들을 즉석에서성교도 시키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각성제 문제가 심각합니다. 젊은 애들이사고를 내려면 일부러 각성제를 다량복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경찰에 잡혀가도제정신이 아닐 경우엔 처벌 기준이 아주미약합니다." "쪽발이답다. 일본 놈들이 일제시대에저지른 만행에 비하면 그 정도는 사건도아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도요?" "그래. 공해업체나 그런 공장을 한국에다세워 놓고 쪽발이들만 맑은 공기 마시자는 거아니냐. 그건 무서운 살상행위다. 제 식구편하자고 남의 식구 죽어도 좋다는민족이지." "그건 여기 일본 매스컴에서도 떠들던문제였습니다." "그런 것 같애요." "그게 바로 일본인의 정신인지 모른다.언론이 양심 있는 척 떠들었다는 걸 기록으로남기고 후닥닥 넘어가 버리는 거다." 자동차는 좌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낯이설었지만 건물이나 도로는 낯설지 않았다.생김새가 한국의 중소도시와 별로 다를 게없었다. "저기가 바로 평화대 구장입니다." 왼쪽으로 펼쳐진 프로야구 전용야구장은 꽤정갈스러워 보였다. 일본인들이 미쳐 날뛰는야구 경기장이었다. 건설한 지 꽤 오래된듯했다. "쪽발이들이 어째서 야구에 미치는지아는가?" "운동을 좋아해서가 아닐까요?" "천만에, 응어리가 많아서 그럴 걸세. 뭔가침략하지 않으면 근질근질한 민족이라서딱딱한 공이 장외로 날아가고 방망이로 때려부수는 걸 즐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글쎄요." "둥그스름한 것만 보면 때려 부수고 싶은응어리가 있을 거다. 그게 바로 원자탄이란거다. 그렇게 두 손 바짝 치켜들고 항복한것이 세계사에 길이 남을 거라는 걸 아는거지." 병규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동차는공원처럼 생긴 담장을 끼고 돌았다.한겨울인데도 사철나무처럼 생긴 키작은나무의 꽃은 붉게 피어 만발해 있었다.성벽처럼 쌓아올린 돌더미와 돌계단이보였다.곳입니다." 자동차에서 내려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이시하라가 앞장 서고 그 옆엔 계집애가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미사코도 시종 말없이 내 곁을 따라다녔다. 앞서 걷는계집애의 미니스커트 자락 아래로 날씬한종아리가 보였다. 예쁜 계집애가 드문나라에서 첫날부터 이런 미인과 같이 있다는게 행운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트막한 공원이었다. 옛 성터 같기도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잔디구장은럭비구장 같았다. 어림잡아도 이백여 명쯤되어 보이는 젊고 건장한 애들이 잔디구장옆에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가죽점퍼차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시하라 사단이총집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한판 붙게 되는 거냐?" "형님이 원하셨잖아요." "원했지." 이시하라가 계단을 내려서자 애들이 일시에일어섰다. "몇 명이냐?" "다 모였으면 이백 명쯤 됩니다." 이시하라가 진디구장 가운데에 섰다. 일본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아마 나를 소개하는것 같았다. "저 자식 뭐라고 떠드는 거냐?" "귀한 손님을 소개한다는 겁니다. 그리고우릴 도와 주러 오셨다는 겁니다." "난 얘들 도와 주러 오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건 예의입니다. 잠자코계세요." 한참 지껄인 이시하라가 나를 가리켰다. "난 연설하러 온 놈이 아니다." 병규가 씨익 웃었다. 이시하라가 다시목청을 가다듬고 떠들었다. 애들이 손뼉을쳤다. "후쿠오카 대화단의 명예를 걸고 최강자인다나카가 나오겠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다나카는 늘씬하게 빠진 녀석이었다. 흰바지에 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짧은머리를 하고 있어서 한눈에도 날렵해 보였다.손에 꼭 맞는 가죽장갑을 가볍게 치며잔디구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발놀림과어깨의 선이 보통 녀석과 달랐다. 자세로보아 일본식 가라데 정도만으로 몸을 익힌사내는 아닌 듯싶었다. 유연한 자세가 모든운동을 섭렵한 듯했다.고개를 저었다. 쪽발이 한 녀석쯤 해치우는일로 옷을 벗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나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다나카가 고개를숙였다. "이 자가 정말 제일인자냐?" 병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나카는 자세를 취했다. 십.팔기와쿵후까지 겸비한 것 같았다. 나는 오른쪽주먹을 가볍게 들었다. 주먹 한 개로해결하겠다는 신호였다. 어느 권법에도 없는행위였다. 오른쪽 주먹만 보여 주며 서서히앞쪽으로 옮겼다. 미사코가 뒤로 빠졌다. 다나카의 위협적인 발길질이 시작되었다.바람 가르는 발길질이 웬만한 솜씨는 넘어선것 같았다. 잘못 걸리면 뼈가 으스러질 것같았다. 한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물러섰다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주먹 다루는 일로 살아온 솜씨여서 쉽게 무릎꿇을 위인은 아니 듯싶었다. 주먹과 발길이 매서웠지만 마지막 거두어들이는 맥이 절묘하게 단절되는 실력자였다.단절되는 순간에 한대 얻어걸리면 성할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묘하게 주먹과 발길을끊었다. 나는 교묘한 회전법으로 주먹을 피해나갔다. 다나카는 그럴수록 맹렬하게공격했다. 넓은 잔디구장은 좁았다. 그만큼다나카는 바람을 일으키는 권법의소유자였다. 주먹이 맵게 끊어지며 내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순간에 오른쪽 주먹으로다나카의 손목 관절을 끊어 쳤다. 억! 다나카가 나뒹굴었다. 일자로 쭉 뻗어누었다. 애들이 소릴 질렀다. 다나카가꿈틀거렸다. 혈이 집힌 모양이었다. 나는천천히 다가가 다나카의 혈을 풀어 주었다. 이시하라가 손을 내밀었다. 뭐라고떠들었다. "다나카 같은 제일인자를 그렇게 가볍게눕힌 사람은 처음이랍니다." "다음엔 일본도 가진 자를 불러내라고해라." "예?" "어서!" 병규가 이시하라에게 내 뜻을 전했다.이시하라가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일본도와 붙어보는 게 내 소원 중에하나였다." 한 사내가 일본도를 들고 걸어나왔다.다나카보다 눈빛이 살벌해 보였다. "칼 쓰는 친구들은 무섭습니다. 특히일본도는요." 병규가 이렇게 말하고 물러섰다. 미사코가무릎 꿇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숨 죽인애들의 눈빛만이 잔디구장을 메웠다. 일본도를 뽑았다. 햇살이 지독하게 하얗다.일본도는 쇠붙이의 색깔만 보아도 소름이끼칠 정도였다. 칼의 크기가, 손잡이의형태가 동양인의 손에 알맞은 크기였지만날카로움은 일본의 침략성과 교활성을 닮은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몇 번 일본도와 겨룬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처절할 정도로 하얗게빛나는 칼날은 본 적이 없었다. 칼이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숨 가쁜 공격과칼날은 내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내리꽂히기만 했다. 일본도와 빈 주먹은무모한 대결일 수밖에 없었다. 단추 한 개만사용했더라도 일본도는 금방 바닥에 꽂을 수있었다. 칼 끝이 매섭게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공격하면서 보여 주는 짧은 순간의 허점을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리치는 순간에 같이 뛰어 들어갔다.사내가 내리꽂는 칼날과 부딪쳤다. 일본도가 등허리께에 닿는 순간 나는전율하듯 몸을 살렸다. 사내의 정강이에서 뚝소리가 들렸다. 미처 뛰어들 거라고는생각조차 않은 모양이었다. 으아악! 일본도가 땅바닥에 꽂히고 사내는 앞으로만졌다. 손바닥에 날카롭게 찢긴 겉옷이잡혔다. 그 찰나가 조금만 늦었던들 등허리에깊숙이 칼날이 꽂혔을 게 빤했다. 이시하라가 뛰어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병규 녀석이 재빨리 쫓아왔다. "형님, 괜찮습니까?" "난 죽음을 각오하고 온 놈이다." 고꾸라져 있는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걷질못했다. 정강이와 무릎 관절이 꺽인듯싶었다. 다른 애들이 달려와 부축해 갔다. 야쿠자 애들이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다. "한국 여자들이 어디에 몇 명이 있으며어떤 대우를 받는지, 또 정당한 대우인지,속임수인지를 상세히 캐내라고 해라." 내 말뜻을 알아차린 듯 이시하라가 고개를끄덕였다. 병규가 이시하라의 말을 전했다.애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달랍니다." "무슨 마찰?" "대화단은 여자장사가 약한 그룹입니다.그래서 여자장사를 본격적으로 하는 집단에서눈치 채게 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괜히 큰마찰을 빚을 염려가 있으니까요." "누구라도 좋다. 그 문제만은 결딴을내겠다." "이시하라 두목이 최선을 다 한답니다." 저녁 먹을 시간까지 시간이 남으니까가까운 곳에 있는 후쿠오카 미술관을 한번보았으면 좋겠다고 제의했다. 우리 일행이잔디구장을 벗어나자 애들이 흩어졌다.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마 다른 애들이 구경온 모양입니다." "한국에서의 여자 반출문제가 구멍이났다는 걸 아는 애들이겠죠." "왜 다른 나라도 많은데 하필 한국이야?" "아마, 일본 늙은이들의 향수가 아닐까요?몇 푼 모으면 달려가서 쓰고 오는 늙은이들이꽤 많아요. 비행기 값은 물건 두어 개가져가면 해결되고 돌아올 땐 역으로 돈 될만한 걸 가져오곤 하는 사람들이 너무많아요. 그런 관광만 알선하는 단체도 많죠." "빌어먹을 새끼들." "서양 여자들도 많고 필리핀이나 홍콩등지의 동남 아시아 여자들도 꽤 많습니다." "어째서 외국 여자를 사들여 와야 하느냐?" "여긴 공창제도가 없어요. 창녀나 따로 몸파는 여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 여자값이 비싸고 성문제의 사건들이안방까지 들어가는 도색 필름이나 비디오가성행하고 거리마다 섹스 용구를 공공연하게팔며 도색 영화관이 즐비합니다. 다른 건개방시켜 놓고 몸 파는 여자만은 개방시키지않으니까 자연 여자장사가 비밀리에 성행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로고후로란 건 또 뭐냐?" 내가 일본으로 달려오기 전에 알아낸 것은창녀는 없지만 도로고후로라고 해서 목욕시설갖춘 매춘행위장이 즐비하다는 소문을들었다. 이만 엔에서 이만 오천 엔 정도의값이면 특별한 서비스와 육체의 향응까지즐기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시간은 구십 분정도인데 시간이 넘으면 이십 분당 사천 엔씩추가된다는 정도는 알고 왔다.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그게 바로 병규 녀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일본인들은공창제도를 없앤다고 대외적으로 큰소리를치지만 속으로는 더 알량한 여자장사를 하고있는 것이었다. "병규, 너한테 문명히 말하지만 한국은공창제도가 없는 나라다." "...... ." 녀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도로고후로란위장된 창녀촌의 사용료가 이만 오천엔이라면 우리 돈으로 칠만 원이 넘는돈이었다. 청소년들의 성범죄가 급증할수밖에 없는 사회적 여건을 안고 있는일본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 시립 미술관엔 한일 미술교류전도열리고 있었고, 중국 작가 특별전 같은 것도열리고 있었다. 관광철이 지나서 사람들이 일본인들의 모집벽과 보관술은 일본이지니고 있는 문화보다 발전했다는 생각이들었다. "저건 우리 나라 거 아니냐?" 나는 도자기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이렇게말했다. "네, 고운가쿠(古雲鶴菜碗)라고 합니다.고려청자죠. 설명서엔 일본 강호시대에주문해서 만든 거라고 씌어 있습니다." "웃기고 있다. 그 시절에 왜놈들이 무슨재주로 주문을 해서 고려 청자를 입수했단말이냐?" "말은 그렇게 해얄 거 아니겠습니까.찬탈했다거나 일제시대에 몰래 빼왔다고 할수야 없겠죠." 높이 10.3 센티미터에 주둥이 너미 12.3비뚤어졌지만 영롱한 청자빛은 숨길 수가없었다. "이 유리가 뭘로 된 거냐?" "방탄 유릴 겁니다." "이시하라에게 말해라. 내가 여길 떠나기전에 저 고려청자를 무슨 짓 하더라도빼내라고. 선물로 꼭 받고 싶다고." "형님,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쇼." "전하기나 해." 병규 녀석이 귓속말로 이시하라와 말을주고받았다. "야, 병규야. 이건 이조자기잖아?" 내 소리가 워낙 컸는지 병규가 후닥닥뛰어왔다. "네, 그건아마모리다완(高麗雨漏茶碗)이라고 합니다."일본도도 말이다. 그냥은 안 가겠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일본도는69.1센티미터 길이였고 하얗게 선 날이아직도 아까 마주쳤던 일본도와 다를 바 없이빛나고 있었다. "뭐래?" 나는 다그쳐 물었다. 병규가 꽤 난처한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이시하라 두목은 일본인이랍니다." "할 수 없다는 거냐?" "다른 선물은 다 할 수 있지만 나라 물건과저런 보물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쌔애끼, 일본 놈 치곤 기분 좋다고그래라. 이건 나 혼자 가져가겠다고 전해라." 둘은 속닥거리듯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이시하라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들은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는 나한테 이정도로 고분고분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나를붙잡아 두어서 득이 될 일이 있을지도모른다. 병규 녀석은 단순한 통역의 책임자여서이시하라 일당이 어떤 걸 노리는지 알 수없는 듯싶었다. 나는 떠나면 그만이지만병규는 남아서 야쿠자의 밥을 먹어야 할녀석이었다. 아는 게 있더라도 쉽게 얘기할 녀석은아니었다. 야쿠자의 밥을 먹으려면 그 정도입은 무거워야 할 판이었다. 배반자가 되어새끼 손가락 말고 다른 손가락이 잘린다면일생을 후회하게 될 게 빤했다. 우리는 나카가와(中川) 강을 지나니치렌쇼닌(日蓮上人) 동상이 있는 곳으로동상이라고 했다. 비둘게 떼가 마당 가득히있어서 지저분한 느낌이 있었다. 대나무를이용한 깃발이 수없이 꽂혀서 바람에흔들리고 있었다. 검정색에 찬란한 금색 칠을 한 상여차가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묘한상상력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 이 일본땅에서 죽게 된다면 저런 영구차에 실릴 수나있을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새파란나이에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면. 어머니는 처절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없게 통곡할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지레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혜는? 기부시다(櫛田) 산사에 들어갔다. 병규의 안내였지만 이시하라 미사코가 시종내 곁에 붙어다녔다. 날씨는 겨울 날씨답지예보라 했다. "왼쪽은 바람대신이며 오른쪽은벼락대신이랍니다. 형님 같은 분을 여기선벼락대신이라고 한답니다." 병규가 이시하라의 말을 전했다. "벌써 내 별명이 붙은 거냐?" "그런 셈이죠." "썩 싫진 않다." 하카다 역사관이 바로 기부시다 신사 옆에자리잡고 있었다. 별로 구경거리가 아닌성싶었지만 호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을 어떻게보느냐고 물어 봐라." 나는 갑자기 그들의 역사관 구경을 하면서그런 걸 묻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일본 지도자연하는 자들의 터무니없는세대의 발악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일본인대부분은 아마 그럴 거라고 믿을 거랍니다." "아부하지 말고 까놓고 말하라고 해." "사실이랍니다." "문제는 그런 교과서를 배운 세대가지도자가 되면 마찬가지 발악을 하는 거다." "그럴지 모르죠." 정말 문제는 그런 교과서를 배운 자들이성장해서 머릿속에 박힌 생각들을 풀어 버릴수 없을 때 심각해지는 것이었다. 어느국민이건 자기 나라 문제와 자존심의 문제는편협해지게 마련이었다. 어떤 사례든유리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잠재력을 갖는것이었다. 뉴오타이 호텔 지하 화식집에서 저녁식사를 끝내자 이시하라 일행은 돌아갔다.호텔에 남기로 했다. 내가 머무는 방 바로옆방에 병규가 머물기로 했고, 미사코는 내방으로 들어왔다. 미사코는 감사합니다와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의 서툰 한국말만 할 줄 알았다. 답답한 게 있으면옆방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 보는 수밖에없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나는 영어가 어두운 녀석이었지만미사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건 오기였다.만약 미사코가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하면내 무식함이 탄로날 판이었다. 일본 애들의영어 실력이 짧다는 얘기를 어디선가주워들은 기억이 나서 물은 것이었다. 하긴내가 제법 큰 소리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캔낫 스피크 잉글리시 정도였다. 길거리에서 코낫 스피크 잉글리시 제 발음으로 해대고 벼락밭을 자식아, 한국 말로 물어라 하는 정도의욕지거리나 하고 돌아서는 게 고작이었다. "노." 미사코가 고개를 저으며 생긋 웃었다. 나는옆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 기집애 영어도 못한단다. 얘기 나눌방법 없냐?" "내가 해 드릴까요?" "이 자식아, 발가벗고 자는데 네가 앞에서통역하고 있을 거냐?" "그거야...... ." "한자(漢字)로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느냐고물어봐라." 병규가 미사코가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내게 전화기를 넘겨 주었다. "빌어먹을. 여긴 무식해도 탤런트나 배우질해먹는 나라냐?" "그렇죠 머. 형님, 주무실 건데 적당히넘기죠, 머. 만국공통어 있잖아요." "썅, 옷 벗기는 게 만국공통어냐? 외국갔다오면 태극기 꽂고 왔다고 시시덕거리는새끼들 보면 밸이 뒤틀리더니 내가 그 꼴이되나보다." "형님, 살살 다뤄 주십쇼. 귀한 애니까." "임마, 진짜 애를 구워먹든 삶아먹든 내맘대로 해도 되는 거냐. 유명한탤런트라면서." "이건 보통 대접이 아닙니다, 형님." "알았다, 자거라. 해보다 안 되면 널 밤새들볶는 수밖에 없겠지." "재미 많이 보세요." 나는 일본 여자만 보면 해치우고 싶었다.우리 나라 여자들이 그동안 당한 수모를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해치우고 싶었다.더구나 정신대로 끌려간 우리 처녀들의수기를 읽으면 피가 거꾸로 튀곤 했다. 그참혹한 광경이 내 뇌리에서 씻겨 나갈 수있을까? "샤와?" 낮에처럼 미사코는 생글거리며 물었다.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허벅지는 반쯤나와 있는 차림이었다. 무릎을 꿇고 차를따르거나 담뱃불을 붙여 줄 때면 알맞게 살이오른 가슴이나 허벅지를 순간순간 훔쳐보지않을 수가 없었다. "하자." 내가 일어섰다. 미사코가 무릎을 꿇고 내가개어놓았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더니 샤워기의물줄기를 맞추어 놓고 나왔다. 작은 가방에서화장품 세트 같은 것을 꺼내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힘없이 나신이 되었다. 가벼운 차림이어서 그런 건지, 옷 벗는일에 익숙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낮에느꼈던 몸이 아니었다. 일본의 텔레비전이나영화는 젖가슴을 그대로 내놓는 정도는허용하기 때문에 몸매에 자신이 없으면탤런트나 배우 되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생각도 들었다. "너, 예쁘다." 미사코는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그냥 그래 보는 건지, 내 몸에 얼굴을묻었다. 나는 가볍게 미사코의 등을 토닥거려싶은 감정이 앞섰지만 미사코가 저지른잘못이 아니고 그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이란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엔 원죄라는 게 있어서태초에 조상이 지은 죄를 후손 모두가짊어져야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나는 미사코의 사랑스런 교태와 생글거리는웃음과 더할 수 없는 희생정신 때문에원죄라는 걸 생각했다.
하나님. 도대체 어찌된 겁니까. 미사코는 하나님논법대로라면 우리 민족에게 원죄가 있는여자겠죠? 그렇다고 가엾은 우리 나라 여인들의수난사를 내가 복수극으로 치장해야 할까요?귀엽고 예쁜 꼬마라면 적대국과 전쟁중이라도아닙니까? 하나님. 난 결코 하나님처럼 소갈머리가 좁아터지긴싫습니다. 일본이 싫고 미운 건 내 감정으로도저히 고칠 재간이 없습니다만 사람 같은사람이 일본에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사람 같은 사람까지 미워해 버리라곤 않겠죠. 하나님. 까놓고 말해서 한국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는민족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역사적으로미워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전세계를미워해도 그만입니다. 미국 아니라 미국할애비라도 미워해야 할 백성이지만 한국은언제나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이 알량한 미사코란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내하겠습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생존하는동물입니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쨌거나 난 이 계집애를 해치울 겁니다. 낄낄대지 마십쇼.
특수한 향료로 몸을 마사지해 준 미사코가젖가슴으로 내 전신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기시작했다. 가끔 한마디씩 일본 말로 물어 보았지만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케" 고작 미사코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런식으로 좋으냐고 물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서로 알아듣거나 말할 재주가 없으면서손짓과 표정과 웃음과 엉터리 영어 한두사람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발가벗고노닥거리면 금방 상대방의 표현이 무엇인지알 수 있는 진한 힘을 지녔는지 모른다. 향료를 씻어낸 미사코가 수건 한 장으로나를 감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목욕탕에들어가 샤워기로 머리를 감겨 주던 그녀의서비스 정신이 새삼 예뻐보였다. 물기를닦아내고 머릿결을 다듬기 시작했다. 머리말리는 기계까지 준비한 걸 보면 꽤 치밀한데가 있는 계집애 같았다.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길게 누웠다. 침대에 눕자마자 미사코가 가슴에 안겼다.따스했다. 향내가 은은하게 풍겨나왔다. 팽팽하게 긴장된 육체였다. 말이 한마디도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오래 사귄사람들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렇게 보드라울 수 있을까. 미사코는 다듬어진 몸매였다. 선천적으로보드라운 살결을 타고 났는지 모르지만정성스럽게 가꾼 걸 느낄 수 있었다. "너 처녀냐?" 나는 너무 간지러워하는 미사코에게 이렇게물었다. 눈을 동그렇게 뜬 채 웃기만 했다.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표정과 웃음과육체의 동작으로 충분한 대화를 하고 있는셈이었다. 일본 년인데도 어째서 밉지 않은지모르겠다. 내 감정 같아서는 일본 제일의 미녀라는사실만 가지고도 무자비하게 다루고싶었었다. 그러나 그건 감정뿐이었다. 나는미사코를 차라리 곱게 다루고 있었다.수줍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보송보송한땀방울이 그랬고 쉽게 습해지는 그녀의 깊은곳이 그랬다. 가빠지는 호흡을 주체하지못하고 매달려 응석부리듯 하는 것이 그랬다. 일본 여인들의 밤의 소리는 확실히신비했다. 굴러다니는 카세트 테이프의 일본계집 숨 넘어가는 소리는 간드러지다 못해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미사코의 숨소리도다를 게 없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젓고 간 자리엔 땀과수액과 목마른 갈증 같은 것들만이 남아있었다. 미사코는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씻을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사코는 웃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어 병규 녀석을 불렀다.잠기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임마, 이 여자더러 행복하냐고 좀물어봐라." "형님두." 병규 녀석은 미사코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내게 전화를 바꾸었다. "뭐라냐?" "진짜 행복하답니다. 아주 좋대요." "이 자식아, 꾸며대지 말고 말한 그대로 해봐." "형님, 내가 이렇게 물었어요. 형님이이렇게 좋은 여자 처음 만났다면서어땠느냐고, 행복하냐고 묻는다고 했어요.그랬더니 미사코가 너무나 행복한 밤이었다고전해 달라잖아요." "속여도 내가 알것냐?" "형님, 나도 좀 잡시다. 나도 젊은데 "임마, 빌려 줄 순 없잖아." "누구 죽이려고 이래요. 몸 생각해서쬐끔만 사랑하고 푹 좀 주무세요." "알았다. 자라." 전화를 끊고 나자 미사코는 대형수건을들고 무릎 꿇은 채 욕실 바닥에서 나를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바닥에 흠씬뿌려 바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미사코는수건을 깔고 나를 눕게 했다. 들고 들어온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 아까처럼 향료 내음짙은 비누거품을 내어 내 몸을 닦기시작했다. 수증기 가득 찬 욕실에서 보는 미사코의몸은 아름답고 더 탄력이 있어 보였다. 건들때마다 습해지는 풋내기였지만 최선을다하려는 육체의 몸부림으로 한 사내를일이 아니었다. 미사코는 찬찬했다. 몸의 구석구석까지놓치지 않고 향내를 담으려 했고 어느한구석이라도 혀 끝을 대지 않고는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열정이었다. 나는 미사코의 가슴을 잡고 웃었다. 어쩔수 없는 일본 년이겠지만 밉지 않은 이유를찾아보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이 계집애의미운 면을 찾아보려고 분석해 보고 있었는지모른다. "오케?" 미사코가 할 수 있는 영어 가운데 비교적발음이 정확한 이 낱말. 혓바닥으로 나를간지럽히며 묻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끄덕였다. 이것이 이시하라 일당의 철저하게계산된 음모라도 좋았다. 나를 기진맥진하게들었다. 따뜻한 샤워기의 물은 계속 바닥으로 흘러욕실을 온통 수증기로 흐릿하게 만들고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떤 놈일까? 어떻게 만들어진녀석이며 어떻게 되려는 사내일까? 척박한시대에 태어나 사람다운 짓보다는 정글의야수처럼 살아가는 내 몸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 걸까?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
하나님. 장총찬이가 일본 땅에 왔습니다. 여유 있는자식들처럼 여행하다가 계집애 배 위에깃발을 꽂는 식의 여행이 아니라 하나님이일본이란 나라를 얼마나 봐 주고 있는지 좀 내 나라 한국 땅에서 속아서 팔려온 숱한여인들의 수난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렇게못 살게 구는 자식들 모가지를 풍뎅이 비틀어놓듯 하고 돌아갈 참입니다. 하나님. 제발 이번만은 내 편 좀 드십쇼. 하늘엔 역사책도 없소? 두렵지도 않단말입니까? 땅의 역사를 보면 하늘의 역사도빤하긴 할 겁니다만 정신 차려서 하늘의역사책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도록노력하십쇼. 하늘엔 판검사도 없소? 혼자 해먹으려면 그런 게 뭐가필요하겠소만 그래도 엉터리더라도 없는것보다는 있는 게 낫습니다. 아무튼 하나님. 올해는 우리 다같이 정신차리는 해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