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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사화, 갑술사화, 신임사화
유사(遺事)가 많아 1, 2, 3번으로 나누었다.
1번, (8택으로 불리우는 8형제분.)
김춘택, 32세. 김보택, 32세 김운택, 32세. 김민택, 32세.
김조택, 32세. 김복택, 32세. 김정택, 32세. 김연택, 32세.
김진구, 31세 . 김진화, 31세. 김진일, 31세.
2번. 김만연, 28세. 김응희, 30세. 김위재, 33세.
김선재, 33세. 김상헌, 28세. 김익상, 30세. 김성택, 32세. 김영택, 32세.
김경택, 32세. 김용택, 32세. 김광택, 32세. 김경택, 32세.
김성재, 33세. 김준재, 33세 . 김후재, 33세. 김대재, 33세. 김양재, 33세.
김득재, 33세. 김낙재, 33세. 김명재, 33세. 김종백, 31세. 김일관, 30세.
김 근, 28세. 김재정, 27세. 김 오, 30세. 김계환, 29세. 일경, 31세.
김만균, 30세. 김만중, 30세. 김만길, 30세. 김만재, 30세. 김만채, 30세.
3번. 김광수, 31세. 김팔화, 31세. 김낙룡, 32세. 김진옥, 31세. 김신망, 31세.
김요경, 31 김천여, 30세. 김천록, 30세. 김천상, 30세 . 김진용, 25세.
김귀천, 21세. 김계륭, 26세. 김계창, 26세. 김계중, 26세. 김계무, 26세
김계홍,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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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초기부터 경종 말기까지 약 70년간 당쟁이 극심해 정권이 자주 바뀌었다.
처참한 보복과 희생의 연속이었다.
당쟁이란 이념은 친족이나 혈족을 초월하여 사생결단을 내는 슬픈 역사다.
기사환국(사화):
숙종 15년(1689) 소의 장씨(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반대하는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제지하다가 남인에게 축출 당하였다.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사건으로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갑술옥사(환국):
숙종 20년(1694) 소론의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숙종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에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 일파의 민암 등은 이를 계기로,
김춘택 등 수 십명을 체포하여 놓고
그 법위를 확대시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 하였다.
숙종은 오히려 민비를 생각한 나머지 남인의 행동을 미워하여 민암을 사사하고,
권대문,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을 유배시켰다.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이 등용되고 기사환국 때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는 한편
그때 화를 당하여 죽은 송시열, 김수황 등에게 작위를 주었다.
신임사화(임인옥):
경종 1년(1721)부터 경종 2년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신축‧임인 양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 또는 임인옥이라 한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성격이 온유하고 무자다병(無子多病)하여
왕세자를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노론 사대신(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 1년 8월에 왕제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책봉하자,
소론파의 조태구, 유봉희 등이 시기상조론의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나 허사였다.
김창집의 건의에 따라 연잉군이 정무를 대리하게 됨으로 소론은
승지 김일경(아계)으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공격하는 한편, 목호룡으로 하여금
4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노론 일파를 처형하여 실각시켰다.
경종이 죽자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올라
다시 소론일파를 몰아내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그 자신이 왕세자로 있을 때
신임사화의 참담함을 몸소 겪으면서 비롯되었으나
붕당은 근절치 못하였다.(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
31세 광은군 휘 진구 (양간공파‧의정공파)
1651(효종3)-1704(숙종3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수보.
호는 만구. 시호는 경헌공.
아버지는 문충공 만기이며 어머니는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이다.
1673(현종15)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숙종7년 별시 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
덕량과 재주로 좌우부군(左右府君)을 도와 역난을 제압하였다.
(호조,‧병조, 예조‧형조,‧공조,)‧오조 판서를 지내고
어영대장 수어사를 겸직하였다.
숭정대부에 승진되고
광은군(光恩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경헌공이다.
유고가 전하며 가장 되어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정헌대부 호조판서 시 경헌공 진구 신도비명
상고해 보건대, 우리 숙종 대왕 재위 46년에 인재를 양육해서
오래 동안 교화가 이루어졌다.
덕망과 재력의 신하가
조정에 많이 나열하여 좌우로 도와, 국가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옛 판서 광은군 김공이 그중에 하나이다.
공의 사람됨이 풍만한 체구와
넓은 이목으로 풍채가 점잖고 성품이 치밀하며 엄숙하고
공손해서 사람을 대함에 관후하면서는 친압 하지 않았다.
효도에 돈독해서 장사에 거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몸을 단속하기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며
임금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였다.
인경왕후의 오라버니로서 더욱 겸손과 근신을 스스로 지켜서
벼슬에는 반드시 요직을 피하고, 또한 진취함을 기뻐하지 않았다.
시비사정의 분간과 사문 홍페의 관련과 화기 순역의 변명에는
반드시 곧은 입으로 분명히 말해서 처지로서 핑계를 말하지 않았다.
훌륭한 전통을 이어 받은 것도 그러했다.
수찬의 직위로써 박성의를 논박하고, 이율곡과 성우계
두 선생을 모욕했으니,
마땅히 먼 지방으로 물리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예조판서 재직 시에는
박세당이 주자와 우암의 학설을 비방 한 것을 변명해서,
유신으로 하여금 조목에 따라 공척당판하게 하였으니,
이상의 몇 가지 일로서 더욱 시정 시배들의 노여움을 자아냈다.
공이 계획과 염려가 심원하여,
서석공이 갑인(1674)년 후에 은퇴해서
한가롭게 거처하는 근심이 있었는데, 공이 은밀히 협찬한 힘이 많았다.
이남과 허견이 처형됨에
서석공(만기)이 원훈에 책록되자 공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우암(송시열)이 칭찬하기를 「장자방도 공만 같지 못하다」했다.
공이 일찍이 꿈에 한귀 한귀 시를 지으니,
시에 이르되
「가을빛이 저문 줄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집나간 개와 닭을 찾누나.」
인하여만구(晩求)로서 집 이름을 짓고 자호 하였으니,
대개 가정문학을 심리하는데 마음이 있었다.
끝내 뜻과 같이 못한 채 다만 위험한 길에 다가서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는 이나, 모르는 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후덕 장자로써 공을 칭찬하고 있다.
취지가 다른 자들까지도 그의 청렴하고 공근함을 칭찬하니
공론의 결정은 백년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르리라.
도곡 이의현 찬
김진화(鎭華, 31세)는 숙종조 진사시 장원급제를 하였고
시로서 세상에 이름을 높였다. 행 충주목사.
김진일(鎭一, 31세) 한성서윤을 지내다가 경종조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낙향 은거하였다.
32세 문충공 휘 춘택(양간공파 ‧의정공파)
670(현종12)-1717(숙종4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우,
호는 북헌. 시호 충문공.
아버지는 경헌공 진구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 이씨이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을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대호군에 제수되고
1689(숙종16)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유배되었다.
숙종 21년, 남인이 실각하자 사면되었으며
인현왕후(민씨) 복위를 은밀히 도운 공이 있다.
그 후 여러 번 무고를 당하여 다섯 번 영해로 유배되고
세 번 감옥에 갇혔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1866(고종24) 이조판서, 성균관 좨주, 광령군에 추증되었고
부조의 은전을 받았으며 시호는 문충공이요
문집 7권이 세상에 알려지고 취필 1책이 가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북헌공 휘 춘택 행장
공의 휘는 춘택이요 호는 북헌이다.
어려서부터 시나 글을 쓰는 재능이 뛰어나서
서포공(만중)이 문장에 능하다고 칭찬하였다.
과장에 나아가자 사람들이 에워싸고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기이한 재주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때 나이가 겨우 15세를 넘었는데
글로서 사람들을 놀라게 함이 이와 같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기되 뜻을 어기지 않고
부모상에 슬퍼함을 다 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1년에 흉당의 무고에 얽히어 체포되었다.
임금이 흉도의 화심을 살펴
귀양 보내고 여러 공수(무고로 피체된 죄수)를 석방했다.
공은 옥문을 나와 궁궐을 향하여 절을 하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되 “다시 살아나니 천도를 볼 수 있고
만 번 죽은들 어떻게 주상의 은혜를 갚을 수 있으리오”하였다.
무릇 5번 영남과 해서로 귀양살이를 옮겼고, 3번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태연하며
단정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다.
의리와 명분에 편안하며 낌새를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제주도에 귀양 갔을 때,
흉도들이 혹독하게 죄수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장차 화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어머니의 언행을 편집하여
여러 아우에게 주니, 이곤, 이명이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는 천고의 효자도 능히 따를 수 없으며, 시와 문장이 모두 공고하여
옛날에도 그러한 사람은 드물다’고 하였다.
공은 각각 그 장점을 전행하여 훌륭하게 대가가 되었다.
체포되어 심문에 답하는 말은
극히 짧은 시간에 입으로 간략하게 대략을 외쳤다.
안색은 조금도 변치 않으니
흉도의 구두심문으로 집필하여 바치는 자가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이것이 비록 정대한 기질이 하늘에서 나왔다 하나,
학문의 공고함에서 얻은 것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흉도들이 국모를 모해 하려면 반드시 모함했으며, 그 도당들을
비호하려면 반드시 공을 모함해야 했다.
자기의 몸을 용납하고 직위를 보전하려면
헐뜯어야 해를 면하고,
또한 이익을 구하려면
헐뜯어 공이 한 조대(청빈한 서생)의 몸으로
온 세상에서 사생과 화복을 다루는 기구가 되었다.
그들의 시기와 의심과 흘겨봄을 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의 잡은바 군신 모자의 대륜 대의는 천지가 다 하여도 어둡지 않았다.
고금을 통하여 민몰되지 않은 것인즉 저들이
공에 대해 많은 말썽을 부린 것은 과연 무엇을 손상 시켰는가…….
그 시비의 공정한 것은 장차 백년이 못되어 정해질 것이다.
죽헌 민택 찬
※시와 글씨에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다.
증조부 서포가 지은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고종 24년(1887)에 충효의 절개를 지킨 공로가 인정되어
이조판서(정2품)와 광녕군으로 추증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받아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약사.
32세 관찰사 휘 보택(양간공파‧ 의정공파)
1672년(현종14)-1717(숙종1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시. 호는 척재.
아버지 경헌공 진구, 어머니 정경부인 한산 이씨.
1695년(숙종22) 별시 문과 병과 11인으로 급제하여 감사를 지냈다.
1703년 남구만, 최석정 등이 윤강을 무너뜨리고 오역을 두둔한
죄를 상소 논박하였다.
1717년(숙종44) 윤선거, 윤증이 어진 이를 모욕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박하여 간악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1722년 화를 입어 벼슬을 박탈당하였다가 영조2년에 복관 되었다.
1887년(고종5)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익헌공이다.
관찰사 척재 보택 행장
공의 휘는 보택이니 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다섯 살에 과거보는 곳에 나가 지은 글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니 판서 이공 사명이 보고 기특히 여겨 사위를 삼았다.
1695년(숙종22) 문과 별시에 뽑히니, 공의 나이 겨우
20이 넘었는데 훌륭한 성명이 나돌자 흉당이 그의 청환을 저지시켰다.
사서에 선임되어 동궁에서 시강할 때 세자가 성정각에 앉아서 청강하는데
성의 정심에 대한 의의를 부연해서 기문을 지어 올렸다.
매양 서연에 나가서 반드시 경의를 인용하여
사리에 맞도록 간함이 많아 보는 이들이 참다운 학사라 칭찬했다.
전라 감사로 부임하였는데 때 마침 호남 지방에 흉년이 드니,
공이 자신이 비축한 진곡 여러 만 섬을 다 열읍에 분포해서
각자가 넉넉히 살 수 있게 하였다.
공의 성품은 본디 담박해서 살림 살이로써 마음에 두지 않고
의복과 음식을 당하는 데로 편안하게 하였다.
종신토록 전답과 가옥에 더함이 없으니,
비록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들도 청백 간결하다고 지목했다.
조정에서 대직(고관)에 처하여서는일에 따라 할 말은 다하고,
국가사무를 논함에 있어서, 두루 보편적으로 흡족하게 하였다.
감사가 되어서 시행하고 계획함이 더욱 기피에 알맞게 하니,
위‧아래가 능통한 재사가 되는 줄을 알게 되어 경제의 직책을 맞게 될 것인데
급작이 별세하니 어찌 공사간의 통탄이 아니겠는가.
아우 민택 찬략
광산김씨사.
32세 충정공 휘 운택 (양간공파‧의정공파)
1673(현종15)-1722(경종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행.
호는 백운헌. 시호 충정공.
아버지는 경헌공 진구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 이씨이다.
1699(숙종26) 진사시 3등 15인으로 합격하였고 숙종31 춘당대방 문과에
병과 5인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이었고, 1721(경종2)년
영변으로 유배되었다가 가혹한 형별을 받아 옥중에서 돌아가셨다.
1725(영조2)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정공이다.
1852(철종4)년에 부조(불천위)의 은전을 받았고 유고집이 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호조참판 증 이조판서 충정공 운택 시장(諡狀)
공의 사람됨이 단중하고 온수하여 효도와 우애는 천성이 있었고,
담박함이 차가운 듯 하고 본시 청렴하고 처자(지조가 굳은자)와 같구나.
바른 말 하는 절조와 강직한 풍도는 다만 나라만 있는 줄 알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네. 신축년(1721) 경종 초기에
세자 책봉하는 일을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말씀하되
“임금의 안후가 미령하고 나라 일은 끝이 없는데 세자 책봉하는 일을
어찌 그만 둘 수 있으랴.
또 묻기를 누구를 이을 것인가?” 하니 공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3종(현종, 숙종, 경종)의 혈맥이 스스로 있는데
어찌 다른 논의를 하겠는가 하니 그 사람의 안색이 변하였다.
공이 물러 나와서“ 사모를 땅에 던지며 말씀하되 나라의 일이 이와 같이 걱정되니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어찌 족히 의논하리오”. 하였다.
공은 척완(임금의 친척과 외척이 살던 곳)의 친신으로서 휴척지의 의가
스스로 타인과 다르기 때문에, 대의를 세우고 대책을 세워 충성을 다하고
심려를 다하는 것이 실로 정권을 잡은 대신과 다름이 없었다.
흉당이 마음대로 처리하는 바가 되어
마침내 무고로 화를 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취조한 4사람이 혹독하게 심문하고 난폭한 말로 취조하였으나
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두 말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김씨가 현량 하므로 쓸모 있는
선비를 얻음이 이와 같다 하더라.
영조가 제문을 하사하여 가로되
“홍문관(弘文館)의 장석(長席)이요, 이조의 낭필로서 논사주의
(논하고 생각하고 풀이하고 적용하는 것)가 바라봄에 진실로 빛나도다.
관서(평안남도)의 백성에게 인(仁)을 베풀어 살게 하고 호남(전라도)의 균전
(논밭에 관한 일을 감독 함)에 은혜를 고르게 하였도다.
옛 도읍에 일을 나누어서 다스리니 정치의 공적이 더욱 현저하였다 하니
이를 다 실지를 기록한 것이다.
문장이 원창하고 온려하여 백씨 북헌공(춘택)이 유자라고 하였다.
필법이 정교하여 관서의 관찰사로 있을 때 30여조의 장계를 작성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친서 여부를 물을 정도였다.
전서나 그림은 정교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그 문예의 넉넉함을 볼 수 있다.
임인(경종3)년에 시호를 내렸으니 특별한 은혜이다.
황태사 경원 찬
32세 죽헌공 휘 민택(양간공파‧의정공파)
1678년(숙종5)-1722년(경종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치중. 호는 죽헌.
아버지 경헌공 진구, 어머니 정경부인 한산 이씨
1702년(숙종29) 생원시 동방진사과 3등 31인에 합격.
숙종46년 별시문과 7인으로 급제.
교리로 출사하였으나 간당들의 무고로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서거.
1725년(영조2)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 유고가 있다.
홍문관 교리 증 부제학 죽헌 행장
공의 휘는 민택이요, 호는 죽헌이다.
일찍 학문을 배워 이름이 났고,
성균관에 유학하여 여러 동배들 중 출중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시국 대세의 어려움을 보고 깊은 근심을 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공과 참판공에게 복관이 명이 내려
두 공에게 중직을 내렸다.
공의 8형제가 왕의 체통을 도모하고 국론을 단정할 만한데
공은 또한 소시부터 공보의 물망에 있었다.
목호룡이 무고의 글을 올릴 때 항간에 다 말하기를
“김공이 반드시 묘당에 앉게 되면
이번 옥사는 마땅히 스스로 해결될 것이다.” 하였다.
어찌하여 운이 서로 핍박하고 많은 감정이 아울러 일어나
마침내 단서(죄를 주서한 형서)에 포원하고 뜻을 품은 채
지하에 묻히게 되었으니 하늘 때문인가…….
황문북시(黃門北시 : 황문의 별칭, 북시옥은
동환 때 환관이 세력을 떨치기 위한 감옥)의
백마청류지화(白馬淸流之禍: 당나라 소선재 때 주전충이
조정신하 30여명을
백마역에서 다 죽인 다음 황하수에 던진 고사.
이진이 진사시험에 합격치 못하고 많은 선비를 참소한데 기인된 것)에
많은 현인이 다 죽고 나라의 운명이 기울게 된 것이다.
신임사화 때 제현은 비록 몸이 범의 입에 일그러지고
가족을 보전치 못한 채 국통을 세우고
종사를 굳건히 해서 조조와 주온(5대 양 개국조의 본명)과 같은
흉역의 무리로 먹이를 먹으려는 것처럼 배회하였다.
이 무리를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까지 보전되기에는
제현의 힘을 입었다 하겠으니,
이로써 저를 꾸짖었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시대의 변천은 무궁하고 천심을 돌아오지 않는 채,
여섯째 아우 봉사공이 20년 동안 묵을 안건으로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이로 대대로 빛난 충의 가문이 이처럼 쇠잔해졌으니
이는 유식자들이 갚아주는 천리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이 문충공의 가문에서 성장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형제에게 학문을 닦는 것이다.
이는 다 충의에 근본 하였기에 그 글이 성장에 발하고,
의론에서 나타나 기뻐서 웃고 성내어 꾸짖는 것까지
어디에서 든지 도리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릇 윤기와 명의 국가 세도가 흥하고 망할 즈음에 감격하고 분개하고
격앙함이 태현하고 위무가 당당하여 바라봄에 가릴 수가 없다.
칼날이 있어 방책을 세운 재현으로 더불어
마침 생을 버리고 의를 붙들었으니
공이 여기에 과연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담촌 민우수 찬략
김조택(祖澤, 32세)은
민택의 동생으로 경종조에 문과급제, 전라도 관찰사역임.
신임사화로 남해에 유배, 영조조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32세 관찰사 휘 보택(양간공파‧의정공파)
1672년(현종14)-1717(숙종1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시. 호는 척재.
아버지 경헌공 진구, 어머니 정경부인 한산 이씨.
1695년(숙종22) 별시 문과 병과 11인으로 급제하여 감사를 지냈다.
1703년 남구만, 최석정 등이 윤강을 무너뜨리고 오역을 두둔한
죄를 상소 논박하였다.
1717년(숙종44) 윤선거, 윤증이
어진 이를 모욕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박하여
간악한 무리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1722년 화를 입어 벼슬을 박탈당하였다가 영조2년에 복관 되었다.
1887년(고종5)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익헌공이다.
관찰사 척재 보택 행장
공의 휘는 보택이니 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다섯 살에
과거보는 곳에 나가 지은 글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니,
판서 이공 사명이 보고 기특히 여겨 사위를 삼았다.
1695년(숙종22) 문과 별시에 뽑히니
공의 나이 겨우 20이 넘었는데
훌륭한 성명이 나돌자 흉당이 그의 청환을 저지시켰다.
사서에 선임되어 동궁에서 시강할 때
세자가 성정각에 앉아서 청강하는데
성의 정심에 대한 의의를 부연해서 기문을 지어 올렸다.
매양 서연에 나가서 반드시 경의를 인용하여 사리에 맞도록
간함이 많아 보는 이들이 참다운 학사라 칭찬했다.
전라 감사로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호남 지방에 흉년이 드니,
공이 자신이 비축한 진곡
여러 만 섬을 다 열읍에 분포해서
각자가 넉넉히 살 수 있게 하였다.
공의 성품은 본디 담박해서 살림살이로써 마음에 두지 않고
의복과 음식을 당하는 데로 편안하게 하였다.
종신토록 전답과 가옥에 더함이 없으니
비록 원수처럼 미워하는 자들도 청백 간결하다고 지목했다.
조정에서 대직(고관)에 처하여서는 일에 따라 할말은 다 하고
국가 사무를 논함에 있어서 두루 보편적으로 흡족하게 하였다.
감사가 되어서 시행하고 계획함이 더욱 기피에 알맞게 하니,
위‧아래가 능통한 재사가 되는 줄을 알게 되어
경제의 직책을 맞게 될 것인데
급작이 별세하니 어찌 공사간의 통탄이 아니겠는가.
아우 민택 찬략
김정택(廷澤, 32세)은
복택의 아우로 신임사화에 연투되어 위도로 유배되었다.
김연택(延澤, 32세)은
막내로 공이 신임사화 때 무고로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로 모두 신원되는 동일 운명을 겪은 형제들이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6월.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