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11:17
요한복음의 특징은 한 사건을 <길게> 그리고 <깊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이적도 그랬고,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38년된 병자, 그리고 날 때부터 맹인의 이야기도 그렇게 전개가 길고 대화가 깊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개의 표적도 표면만 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공주야! 환절기가 되면 부고가 많다. 도리를 한다고 찾아간다. 호상도 있지만 안타까운 때 이른 이별도 있다. 무슨 말로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손만 잡고 온다.
The characteristic of John is that it deals with an event "long" and "deeply". The stories of Nigodemo and the Samaritan woman, the 38-year old sick, and the blind from birth are so long and conversational that the same was the case with the transfer of Obi-Yeo, which we know well. This is why the seven targets in John should not only look at the surface. Princess! In-between seasons, there are many obituaries. I go to do my duty. There are pros and cons, but there are also early farewells. I don't know how to convey comfort, so I just come holding hands.
-
믿는 자의 장례식이라도 슬픔은 여전하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당장의 슬픔을 거두지는 못한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된 시점이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근처 베다니까지 많이 찾아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 하였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어떤 위로가 진정한 위로가 되겠는가.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산 자들의 말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줄 알면서도 할 게 그것밖에 없으니 위로 같지 않은 위로라도 나누는 것이다.
Even though it is a funeral of a believer, sadness still lingers. It is not hopeless, but it does not bring about immediate sorrow. When Jesus arrived in Bethany, it had already been four days since Nasarro died. A lot of Jerusalemites came to Bethany nearby to console Marda and Mary. But what comfort would be real comfort in the face of death? How many words of the living can comfort death? Even though they know that, that is all they can do, so they are sharing even consolation that is not comforting.
-
그 위로가 나사로의 집에 가득 내려앉은 슬픔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일어나 마중하러 나간 이는 마르다 이었다. 그는 예수의 출현이 반가웠겠지만, 때늦은 출현이 아쉽기도 했을 것이다. 예수라면 죽어가는 오라비의 병을 족히 고칠 수 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오라버니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오라비와 자신들을 사랑한 예수의 출현이 그나마 인간적인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The comfort would not have been able to collect the sadness that had fallen on Nasarro's house. When he heard that Jesus was coming to Bethany, he got up first and went out to meet him. He would have been happy to see Jesus, but he would have been sad to see him late. Because Jesus seemed to have been able to cure the dying Orabi's disease. Although he could not reverse his death, the appearance of Orabi and Jesus, who loved them, would have been a human comfort.
-
하지만 예수가 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적인 위로가 전부가 아니었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예수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가 오라비의 소생에 대한 기대를 조금이라도 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의 기대가 문자 그대로 실현될 거라는 암시를 주신다.더군다나 메시아가 오시는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메시아 안에서 곧 일어날 일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다. 살아서 믿는 자의 죽음은 아예 죽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But it wasn't all human comfort that Jesus wanted to give. Marda says that even now, God will do what Jesus seeks from God. He didn't have any expectations for Orabi's resuscitation. Jesus literally hints that his expectations will come true. Furthermore, it means that it will not happen on the last day of the Messiah's arrival, but that it will happen soon in the Messiah who has already come. Because he said that the death of those who believe in life will not be death at all.
-
물론 마르다가 알아들었을 리 없다. 이 말 뜻을 알았다면, 마르다는 진정한 위로를 받앗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진정한 위로는 죽음을 잠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 밖에 없다. 내게 닥친 신앙의 한계와 내 반응은 무엇인가? 예수 자신이 선포하신 예수는 누구인가? 엄연한 죽음의 현실 앞에서 예수만이 부활임을 믿는가? 참된 위로와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Of course, Marda couldn't have understood. If you had known this, Marda would receive true comfort. The only real comfort in the face of death is Jesus, who makes death sleep. What are the limits of faith that are facing me and my reaction? Who is Jesus himself proclaimed? Do you believe that only Jesus is the resurrection in the face of the reality of death? Where can you find true comfort and hope?
-
많은 유대인들의 위문(17-18)
a.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도착하신 예수님:17
b.베다니에 위문하러 온 유대인들:18-19
마르다의 하소연(20-22)
a,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다:20
b.예수님께 하소연하는 마르다:21-22
예수님의 계시(23-27)
a.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23-26
b.믿음을 고백하는 마르다:27
-
예수께서 와서(17a)
보시니(17b)
나사로가(17c)
무덤에 있은 지(17d)
이미 나흘이라(17e)
-
베다니는(18a)
예루살렘에서(18b)
가깝기가(18c)
한 오리쯤 되매(18d)
-
많은 유대인이(19a)
마르다와 마리아에게(19b)
그 오라비의 일로(19c)
위문하러 왔더니(19d)
-
마르다는(20a)
예수 오신다는(20b)
말을 듣고(20c)
곧 나가 맞되(20d)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20e)
-
마르다가(21a)
예수께 여짜오되(21b)
주께서 여기(21c)
계셨더라면(21d)
내 오라비가 죽지(21e)
아니하겠나이다(21f)
-
그러나 나는(22a)
이제라도(22b)
주께서 무엇이든지(22c)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22d)
하나님이 주실 줄을(22e)
아나이다(22f)
-
예수께서 가라사대(23a)
네 오라비가(23b)
다시 살리라(2c)
-
마르다가 가로되(24a)
마지막 날 부활에는(24b)
다시 살줄을(24c)
내가 아나이다(24d)
-
예수께서 가라사대(25a)
나는 부활이요(25b)
생명이니(25c)
나를 믿는 자는(25d)
죽어도 살겠고(25e0
-
무릇 살아서(26a)
나를 믿는 자는(26b)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6c)
이것을 네가 믿느냐(26d)
-
가로되 주여(27a)
그러하외다(27b)
주는 그리스도시오(27c)
세상에 오시는(27d)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27e)
내가 믿나이다(27f)
-
나사로의 죽음을 위로하다_
console NASA's death.
예수의 늦은 출현을 아쉬워하다_
feel sorry for Jesus' late appearance.
죽음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다_
promise victory over death.
-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성실하게 가시는 주님,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아픔을 들었지만 이틀을 더 지체하시는 그 맘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 내 지체들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사오니 부디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 주옵소서. 참 위로는 예수님께서 나오나이다. 주님의 그 빛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의 그 빛이 거두어졌을 때, 실족케 됨을 깨닫고 참 빛을 붙잡게 하옵소서. 죽음이 공포를 과시하며 우리를 윽박지르지만,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하신 그 분께서 능력과 권세로 다시 우리들을 살릴 것을 믿겠습니다.
The Lord who continues to work hard on his path, May you look into the pain of your beloved NASA, but delay for another two days. Lord, please shine the light on your face as the lives of my dead are dying. The true comfort is that Jesus comes out. When the light of the Lord is lost, when the light of the Lord is lost, realize that it will be lost and let it hold true light. Death shows off its fear and screams us, but I believe that the person who said NASA is sleeping will save us again with his ability and power.
2026.3.7.sat.Clay
신학 비평//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요한복음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공관복음은 사건을 많이기록하지만 요한복음은 사건을 <깊게*>기록합니다. 예를 들면 a. 오병이어-기적 중심, 생명의 떡 담론 b. 맹인 치유-영적 눈뜸 논쟁 c. 사마리아 여인-구원 신학 요한복음은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의 목적은 기적 자체가 아니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 사건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 계시>입니다.
1) 나흘이라는 시간 — 죽음의 완전성
본문에서 중요한 표현은 이것입니다. “이미 나흘이라” 유대 전통에서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은 영혼이 몸 근처에 머물 수 있지만 4일이 지나면 완전히 떠난다 즉 나흘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일부러 기다립니다. 이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계시를 위한 시간입니다. 만약 나사로가 막 죽었거나 하루 정도 지났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 아닐까?” 그러나 나흘은 완전한 죽음입니다.
2) 위로의 한계 — 인간의 언어
본문은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유대인이 위문하러 왔다” 장례식에는 늘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사람의 말은 언제나 무력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글에서 말한 장면이 매우 현실적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만 잡고 온다.” 이것이 인간 위로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는 공감-침묵-동행 정도입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마르다는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 말에는 두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믿음과 아쉬움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는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는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대부분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어디까지 믿을지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3) 예수의 계시 — “나는 부활이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활을 준다-내가 생명을 준다 예수는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다" 이 말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적 자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사건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입니다.
4) 미래 부활 vs 현재 부활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압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 믿음입니다. 종말-부활-심판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부활은 먼 미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합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 말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힘내세요! 좋은 곳 갔을 거예요...시간이 해결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다.”
-
참된 위로는 철학-위로의 말-심리적 안정이 아닙니다. 참된 위로는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사로가 잠들었다” 이것은 죽음을 가볍게 보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권의 언어**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는 끝이지만 예수에게는 깨울 수 있는 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죽음은 더 이상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위로하신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믿음은 더 급진적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입니다.
5) 결론 — 죽음을 넘어서는 위로
요한복음 11장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슬픔-신앙의 한계-예수의 계시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슬픔을 잠시 덮지만 예수의 위로는 죽음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죽음의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 죽음은 끝이 아니다
✔ 슬픔은 영원하지 않다
✔ 부활은 먼 미래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