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은지가 참 오래되었다. 아니 어쩌면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어본지도 오래되었다. 아니다. 어쩌면 대본을 정말 열심히 읽었을지도...연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실 연기를 한지도 오래되었다.
근 20여년 만에 우연히 결합하게 된 대학로의 워크샵 공연에서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의 라네프스카야가 되어 두 달 정도 몰입하고 난 후, 공연 후 또 절벽처럼 닥칠 헛헛함을 대비해 보험 삼아 소설책을 대출해두었다.
김훈의 <하얼삔>과 서이제의 <0%를 향하여>. 우리 문학의 노장과 신인의 배열.
김훈의 소설은 묵직하게 두고두고 곱씹게 하지만 그 뒤끝은 의외로 산뜻하다. 서이제의 이 소설은 곱씹을 은유에 대한 내 기대를 쌀쌀맞게 외면해버렸다. 두고두고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순간적인 충격으로 끝장내버렸다. 의미보다는 형식이 도드라지는... 낯선 소설 읽기 체험.
어제 반납일에 쫒겨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고 밤 늦은 시간 책을 덮으면서 나는 새삼 해묵은 질문을 떠올렸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왜 예술이 필요한가?"
낯선 신인이 쓴 낯선 형식의 소설과의 조우는 이 막연한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들이밀며 나를 뒤흔들었다.
견고한 개념과 논리적 설명을 곱씹어도 잡히지 않는 '사태'들.
20,30 세대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들의 세계 경험의 양상은 어떠한가. 공감하고자 주목한 논문들, 기사들, 전문가의 의견들...그 사이를 헤매도 잡히지 않는 안개 같던 저 너머 세계. 이 소설은 그 너머 세계 경험을 감각적으로 만지게 해준다.그 경험의 양상이 나와 몸을 포갠다.
견고한 문장은 없다. 유려한 문체도 없다. 특별한 주제의식도, 이념도, 이상도, 계몽적 의도도 없다. 낭만적 사랑 타령 따위도 없다. 그저 단발마적 단문의 나열과 반복. 일상적 언어로 웅얼, 웅얼 거리는 활자들. 시,청각 감각의 경계도 흐릿하게 뒤섞이고, 나와 너의 경계도 그렇고, 물성과 디지털 매체의 경계도 그렇다. 시, 공간도 뒤죽박죽, 성적 정체성도 뒤죽박죽,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은 반복... 벽돌쌓기 같은 체계적 구성도 없어 보인다. 아니다. 다른 방식의 구성이다.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개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의 구성도 없다.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계속. 아리스토텔레스가 혀를 내두르리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화한 형식을 이 소설은 가볍게 무시한다.
이 소설의 매력은 서사의 힘이나 문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과감히 던져 버리는 용기. 작가의 세계 경험을 담아내는데 걸맞지 않는 전통적, 권위적 문학의 틀을 거절하고 용감하게 형식을 고안한다는 데 있다. 형식 자체가 텍스트다. 매체가 메시지... 그렇다.
전통이, 권위가 권유하는 세계 경험에 대한 인식 방식... 그게 아닌데... 라는 흐릿한 감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다른 그릇을 빚어낼 수 있는 이가 천재다. 고유한 세계 경험을 담는 낯선 형식의 창조는 이 작가가 독립영화인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영화적 시퀀스...시퀀스가 흐트러진 필름 같은 형식. 논리적이지도 서사적이지도, 순차적이지도, 질서정연하지도 않은 흐트러진 필름을 그저 되는대로 붙여서 돌려대는 영사기. 우리 삶도 참으로 그럴지도...
문제는 그래서 내가 어제 악몽을 꾸었다는 거다. 연기와 함께 잠잠해진 체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왜 나는 불편한가 ... 불편해서 다행이다. 끄덕끄덕.
어쩌면 이 소설의 형식은 저편 세계, 20,30의 세계 경험이 아니라 나의 세계 경험 그 사태 자체가 아닌가? 보편적인 경험의 양상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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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작가의 말'이 나를 건드렸다, 아니 격려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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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 그것은 서사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으며, 나의 영혼과 몸의 서사를 전재하는 중이다. 조금씩 길어지는 머리카락, 늘어나는 점의 개수, 흐려지는 시력. 나는 변하고 있고, 생각은 사방으로 흐르고 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기에 내 생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흐르는 구름, 물들어가거나 피어나는 잎, 산산조각 난 유리, 깊어지는 균열과 짙어지는 얼룩, 부식되고 퇴색되는 것들, 풍경과 함께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들,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사람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사람들의 얼굴들. 매일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되는 그 얼굴들. 결정적인 사건 없이도 서사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매 순간 우연과 협력하여 움직이고 있다. 생각의 움직임, 말의 흐름. 그 운동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때 나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원했다. 내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것도 모자라, 내 삶에 영원히 새길 수 있는 견고한 문장을 찾아 헤맸다.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그 부동의 언어를. 마치 어떤 결론에 이르려는 사람처럼, 끝장을 보려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건 내가 시작과 끝이 있는 일직선의 시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 책과 문학이 내게 알려준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다.
...
소설을 쓰면서 나는 문득 행복해졌다. 나는 여기에 특별한 의미나 이유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그대로 둘 수도 있다. 여기서 멈출 수도 있고 이대로 나아갈 수도 있다. 더 멀리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
때때로 나는 말을 믿거나 믿지 않는다.
나는 계속 변할 것이다.
내게는 그럴 자유가 있다.
나는 이제,
우연과 협력한다.
2021년 여름 서이제
오래전, 박사과정 공부 중에 제출한 기말 소논문... 나름 빛나는 통찰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긴 시간이 흐른 후, 이 논문을 시집 보내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고 나면 결별할 수도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니면 미련 때문에, 과거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과거 내 행보의 그림자에 이끌려... '삶의 방향성'이라는 언술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대학이라는 제도의 권위에 더 단단하게 안착하기 위해서???
논문 투고 마감일이 다가 오고 있으니 다시 열어 손을 보리라 시작했다. 참고서적을 쌓아두고 뒤적이면서...하지만... 논문의 틀을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은 옷에, 혹은 코르셋에 몸을 조이는 것 같은 불편감. 잘라내고 덧붙이며 매끈하게 논리를 쌓고 나아가는 글쓰기에 숨이 막혀 왔다. 박사과정 당시의 안구건조증이 재발했다.
명민함이 떠나 버렸나? 난 무능해져 버렸나? 자책하다가... 난 이제 절박하지 않구나. 배가 부른거지. 이 글쓰기에 미래와 생계를 의탁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유가 나를 둔감하게 하는 건가. 이런 걸 늙어가는 거라고 하는 걸까? 이러다 치매가 오는 건 아닌가?
우울감이 몰려왔다.
..
퇴직 후 나는 서성이고 있다. '삶의 방향성'이라는 나아갈 바, 시간이 흐르는 통로를 상실했다. 그럴 땐 뒤를 돌아본다. 과거의 내 끊긴 행적을 다시 이어가다보면 걸어갈 길이 열릴까? 아니 퇴직 후 깃털처럼 가벼워진 내 자유, 혹은 정처없음에 불안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생산적인 삶'이라는 담론에 사로잡혀 버린 나. '삶의 의미'라는 개념에 또 발목 잡히는 나.
내 변화를 검열하는 나. 내 충동을 의심하는 나. '방향성', '생산성', '의미와 가치'라는 환한 빛에 아직도 눈 멀어 있는 나. 순간순간 어둠 속에서 생의 비의로 명멸하는 작은 깜빡임을 외면하는 나. 젊을 땐 젊음의 권리로 그럴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비겁해진다. 나이듦의 초라함을 발설하게 될까봐... 변화에, 진실에 등을 돌리는 나. 무시하는 나. 관통하는 주제 없이 서성이고, 배회하고, 반복하고, 회의하면서 미지의 어둠 속에서 더듬, 더듬, 웅얼, 웅얼하는 내가 부끄러운 나.
변화할 자유, 결별할 자유, 우연의 손을 잡고 춤출 용기.
무의미의 세계를 종주하며 웅얼거릴 용기.
...
어제 꾼 꿈.
목에서 생기를 빨아가는 도도한 파란머리 늙은 여인과 맞서 싸운 담대한 이가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와 그의 동행인 부드러운 인상의 앳된 청년은 마치 사천왕상처럼 작은 악귀들을 밟고 서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기억하고 외워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낀다. 그들의 존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렇게 어둠 속으로, 유폐 속으로 혹은 죽음으로 망각할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는 마지 못해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말한다. 나는 외우려 애쓴다. 잠이 깬다.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선잠에 든다. 다시 묻는다. 다시 다른 이름을 웅얼거린다. 외운다. 또 잠이 깬다. 또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선잠에 든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지만 나는 그가 웅얼거린 이름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논문 수정을 위해 오랜만에 책장에서 빼어 든 메를로- 뽕띠의 글이 촉촉하게 배어든다. 그래 나는 메를로-뽕띠를 사용하지 않을거야. 그저 숨 쉴거야.
메를로-뽕띠, <의미와 무의미>, 작가의 말 중에서 인용
금세기가 시작된 이래, 수 많은 훌륭한 저서들을 통하여, 이성에 대한 삶의 당면성이라고 하는 반항이 표현되어 오고 있다. 그 저서들은 각기 독자적인 방식으로, 도덕이나 정치 제도 혹은 예술의 체계까지 합리적으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순간적인 백열 상태 즉, 반짝임으로 터질 듯한 순간이나 "미지의 것에 대한 예견"이라고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 인간과 그가 선택하는 힘과의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 단순한 반항 그 자체는 불성실하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이성이 일찌기 포기했던 것과 같은 이성이어서는 안된다. 비이성의 체험이 단지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우리는 새로운 개념의 이성을 찾아야만 한다.
... 표현이란 마치 어느 누구도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내딛는 걸음걸이와 같은 것이다. ... 의미는 결코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즉 최상의 형태의 이성은 비이성과 근접해 있다.
...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이 어디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나, 매순간 정확하게 그 자체로 완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결책도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 이기심이나 관대함에서 벗어나, 좋건 나쁘건간에 타인들과 관계를 맺어주는 자발적인 운동뿐이다.
... 그러나 실패 역시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세잔느는 모험을 무릅쓰고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 역시 위험과 과제를 신중히 측정해 나간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