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믿음이 없는 세대여(14-19절)
1. 14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하십니다.
a. “저희가”가 KJV에는 he라고 되어 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어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이 큰 무리에 둘려 서기관들과 변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러 온 서기관들이 산 밑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를 빌미로 저들을 책잡고 변론을 벌인 것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하십니다.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에 빠져 있을 때, 또는 쓸데 없는 일에 붙들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대적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b.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과 본문의 말씀을 비교해보면 변화산 위에서 펼쳐진 전경과 변화산 아래에서 펼쳐진 전경이 극명하게 비교되고 있는데, 먼저, 변화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랑받는 아들이 계셨다면, 변화산 아래엔 귀신에 붙들려 아비의 근심이 되고 있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변화산 위엔 예수님과 함께 큰 은혜를 경험한 제자들이 있었지만, 변화산 아래엔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시험에 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변화산 위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나고 하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었지만, 변화산 아래는 귀신이 난동을 부리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문제가 기다리는 곳이었지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 위에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데리고 산 밑으로 내려오신 겁니다. 변화산 위에서 은혜 받았다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산 밑으로 내려와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하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주신 이유가 바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명을 외면하고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자, 하나님이 핍박을 보내 저들을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은혜를 경험했으면, 이제는 산 밑으로 내려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2. 15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하십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자 이 모습을 본 무리들이 심히 놀라며(greatly amazed) 예수님 앞에 달려와 문안(saluted)하였다 하십니다. 기다리던 예수님을 보자 달려와 문안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이 무리들이 “예수를 보고 심히 놀랐다(greatly amazed)”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놀랬을까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런 해석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처럼(출 34:29), 그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에 무리들이 심히 놀랐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변화산에 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이 변형되었던 모습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을 보면(9),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아니지만, 평소와 달라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무리가 심히 놀랐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8장에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종들이 잡으러 오자, 예수님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요 18:4) 물으시자 저들이 “나사렛 예수라”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로라(I am He)”고 대답하자 저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요 18:5)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있는 모습을 보고 그 음성을 듣자 저들이 놀라 땅에 엎드러진 것인데, 우리도 천국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모습을 뵙게 되면 놀라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3. 16절,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하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모여든 무리와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는지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말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나선 것인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OMS(동양선교회) 소속인 십자군 전도대에서 일했는데, 이 십자군 전도대를 창설하시고 여기에 필요한 모든 재정을 담당했던 미국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세운 공장이 고속도로 옆에 있었는데, 이 공장에다가 God is the Answer!(하나님이 답을 가지고 계시다!) 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찾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답을 주신다는 겁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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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7, 18절,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하십니다.
a.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16)라고 물어도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비가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와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저희가 능히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신 동안 산 밑에 홀로 남아 있던 제자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처럼 말만 무성하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b.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온 아비가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디다케’인데, 이 단어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존칭입니다.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를 일컫는 ‘랍비’라 칭하지 않고 일반적인 존칭인 ‘디다케’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미 제자들로부터 실망한 아비가 예수님께로부터도 큰 기대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세상에서 본이 되지 못하면, 예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5.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하십니다.
a. 예수님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지만, 이 표현은 예수님 세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책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가신 뒤(33), 갈릴리 동쪽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십자가를 지고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시간적으론 제자들이 예수님과 3년 가까이 지내며 말씀을 듣고, 그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고, 또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을 받아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고친 경험을 쌓은 때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 하나 치료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며 책망하신 겁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믿음도 성장하고, 예수님 없이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예수님이 책망하신 겁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하십니다.
b.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하십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예수님께로 가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자 히스기야 왕이 이 편지를 성전에다 펼쳐놓고 기도했습니다(사 37:14). 그럴 때 하나님이 그날 밤에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 명을 진멸하시고(사 37:37), 산헤립을 죽이신 것입니다(사 37:38).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 하십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이걸 끌어안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II.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20-27절)
1. 20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하십니다.
아비가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가자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자 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인데, 빛 되신 주님 앞에 서자 어둠이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2. 21, 22절,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들의 상태를 묻자 아비는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귀신에 붙들렸고, 여러 번 이 귀신이 아들을 죽이기 위해 불과 물에 던졌다고 고백합니다. 귀신이 아이에게 들어가 여러 번 자살을 하도록 충동질을 했다는 것인데, 그때마다 아비가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애를 썼을지 짐작이 갑니다. 성령이 살리는 영이시라면, 악한 영은 죽이고 파괴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세상적인 복을 얻겠다고 귀신을 섬기는 그 끝이 좋지 않은 겁니다. 귀신에게 영혼을 팔아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연예인들도 많고, 손에 왕(王)자를 새겨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 감옥을 오고 가는 자도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하십니다. 귀신은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22, 23절,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하십니다.
a. 귀신들린 아이의 상태를 설명한 아비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라고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에게 한 번 실망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 온전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부탁을 하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인데, 이에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지적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b.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본문의 사건과 달리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수로보니게 여인을 외면하시고, 거절하시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7:27) 하셨지만,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7:28)하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칭찬과 함께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신 겁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믿음을 보이지 못한 아비는 책망을 받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큰 칭찬을 받았다는 겁니다.
4. 24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하십니다.
여기서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이어지는 말씀과 함께 보면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는 싶지만,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땐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서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gift)들 가운데 하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갔지만, 그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마음으론 믿고 싶었지만, 하나님도 , 성경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기 위해 기도원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제가 이번 기회에 하나님을 찾아보고 안 계시면 교회 생활을 청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 맞도록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경험했는데, 이때 방언의 은사를 받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믿어지고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때 비로소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아무리 믿고 싶어도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을 땐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5. 25절,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하십니다.
a. 예수님이 아이에게 들어간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사악하고 더러운 귀신을 대할 때마다 취하던 일관된 태도입니다(마 17:18). 귀신은 결코 타협하거나 대화할 대상이 아니라 꾸짖어 쫓아내야 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b.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 칭하셨는데, 벙어리 되고 귀먹은 사람의 경우 7장에서 살펴본 것처럼(7:31-37)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정확한 치료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c.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 꾸짖어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명하신 것을 보면 귀신이 아이에게 들락날락하며 들어갈 때마다 아이를 물과 불에 던져 죽이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로는 나와서 다시 들어가지 말라 명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4-26) 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냈다면 다시는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할뿐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을 모심으로 다시는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6. 26, 27절,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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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귀신이 쫓겨나는 순간까지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하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도(1:25,26)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지르며 쫓겨났고, 거라사 광인에게서 붙은 군대 귀신들이 쫓겨날 때도(5:13) 2,000마리의 돼지 떼를 몰살시켰습니다. 이처럼 귀신은 쫓겨나는 순간까지 사람들을 해하고 고통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악한 귀신은 처음부터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겁니다.
b.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후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엎드러져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실 때도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시며 저를 일으켜 주셨는데(5:41). 이 두 장면 모두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예표하는 장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성도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실 휴거의 사건을 예표하고 있다는 겁니다.
III. 기도 외에는(28,29)
1. 28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하십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고 예수님과 홀로 되었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파송을 받고 귀신을 내어쫓은 경험이 있었습니다(6:13). 그런데 지난번에는 귀신을 내어쫓았는데, 왜 이번에는 하지 못한 것인지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머리털이 잘리고 나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던 삼손처럼, 이미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나서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인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29절입니다.
2. 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았기에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공생애 기간 중에도 “습관을 좇아”(눅 22:39)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항상 먼저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눅 22:39).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도 사실은 기도하기 위해서였는데(눅 9:28), 이런 지속적인 기도가 능력있는 사역을 가능하게 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처럼 한번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하신 겁니다.
-예레미야-
첫댓글 💖무지개는 잡을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꽃은 피었다 시들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젊음은 붙들수 없기에 더 소중하고 인연은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더 귀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