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둘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3인 공동시집 『청록집』 1946)
[어휘풀이]
-산자락 : 밋밋하게 비탈져 나간 산의 밑 부분.
-사위어지는 : 사위게 되는 ‘사위다’는 불이 사그라져서 재가 된다.
[작품해설]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상황 속에서 목월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었다. 그 곳은 단순히 자연으로의 귀의라는 동양적 자연관으로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빼앗긴 그에게 ‘새로운 고향’의 의미를 갖는 자연이다. 그러므로 목월에 의해 형상화된 자연의 모습은 인간과 자연의 대상들이 아무런 대립이나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다. 다시 말해, 시간 진행을 의미하는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간의 삶이 자연을 해치는 파괴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그 같은 자연 속에 안겨 평범하면서도 풍요로운 삶, 즉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시인의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인간 삶의 근원적인 차원을 인식한 자연이기에 ‘산이 날 에워싸고 / 씨 뿌리며 살아라 한다. /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라는 구문이 정언적 명령법(定言的命令法)이 아닌 흔쾌한 권유로서 주어지는 한편, 화자에 의해 그것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 날 에워싼’ 아늑한 자연 속에서 화자는 그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1연에서는 ‘씨나 뿌리며, 밭이나 갈며 살아라’라는 내용으로, 2연에서는 ‘들찔레처럼, 쑥대밭처럼 살아라’는 것으로, 마지막 3연에서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아라’라는 구절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자연이 직접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그 자연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소박하고 인간다운 삶의 표현이다. 그가 이루고 싶어 하는 삶이란 바로 씨뿌리며 밭 가는, 자연에 토대를 둔 삶이다. 화자의 삶은 들찔레와 쑥대밭, 구름이나 바람 같은 자연과 일체화된 삶으로 확대된다. 이와 같이 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구김살 없이 살고 싶다는 순수한 서정을 토로하며 자연에 대한 뜨거운 향수와 열망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소개]
박목월(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퉁딱딱 퉁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이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시선』(1975), 『백일편의 시』
(1975), 『구름에 달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8),
『박목월-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1983), 『박목월전집』(1984), 『청노루 맑은 눈』(1984),
『나그네』(1987), 『소금이 빛하는 아침에』(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