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도록 술 마시지 않기(불음주), 조계종의 동타지옥(同墮地獄) 켐페인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강조되는 덕목이다. 여기에 믿음까지 더하면 불교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31개의 세계가 있는데
불교에 세계관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경전을 보면 어떤 책이든지 말미 부록에 불교세계관이 도표로 표현되어 있다. 믿음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면 어떤 천상에 태어날까? 불교세계관에 따르면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불교세계관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형성조건에 따른 31개의 세상
불교세계관을 보면 모두 31개이다. 아래로부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까지 5개의 세계가 있다. 욕계천상은 6천, 색계천상은 16천, 무색계천상은 4천이다. 대승에서는 색계사선천에서 복생천과 무운천 두 개가 합해져서 모두 33천이라 한다.
형성조건을 보면
형성조건을 보면 지옥의 경우 잔인과 살생이다. 아수라는 인색과 집착, 축생은 우치와 탐욕, 아수라는 성냄이 형성조건이다. 인간은 오계를 지켜야 한다. 욕계천상은 믿음과 보시와 지계임을 알 수 있다.
세상도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경전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미소짓는 마음’이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만들어진 원리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이 한번이라도 언급한 것을 근거로 불교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의심을 한다. 힌두교적 세계관이라 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힌두교가 성립되기 이전 브라만교에서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은 육도윤회에 대하여 의문한다. 성법스님은 육도윤회에 대하여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라고 의문하는가 하면 동물이 인간이 되고,인간이 동물이 되는 윤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과학을 신봉하는 자들 역시 육도윤회에 대하여 회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육도윤회에 대하여 사성계급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통속적인 것이라고 폄하한다.
도표에서 보는 불교적 세계관은 모두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어느 것 하나 경전적 근거없이 작성된 것이 없다.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보시와 지계가 형성조건인 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하다. 이웃에 대한 봉사를 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자가 받게 되는 과보로서 타당한 것이다.
지계에 대하여
도이법사의 법문을 들었다. 매주 화요일 종로오피스텔 10층 미붓아카데미에서 열리는 모임에서이다. 이날 네 명이 모였다. 도이법사는 미리 준비한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다. 지난주 보시에 이어 이번주에는 지계에 대해 말했다.
지난주 보시에 대한 법문을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이를 다시 정리하여 미디어붓다에 기고했다. 미디어붓다에서는 “보시공덕 만큼 든든한 재산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대문에 올려 놓았다. 도이법사도 이를 보고서 격려 해 주었다.
일부러 시간내서 멀리 찾아 갔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릴 수 없다. 법문을 들었으면 이를 메모하고 되새겨야 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글로 남기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글을 쓰면 최소한 다섯 번 이상 새길 수 있다.
지계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실라(s?la)라 한다. 영어로 ‘morality’, ‘virtue’의 뜻이다. 우리말로 도덕적 삶이라 볼 수 있다. 지계와 관련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 ‘오계’이다. 이는 한자어로 ‘살도음망주(殺盜婬妄酒)’라 하여 앞에 ‘아니 불(不)’자를 넣으면 성립된다. 그래서 오계는 우리말로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사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마시지 말라’가 된다.
불자들치고 오계를 모르는 자가 없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일부 단체에서는 오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취하지 않게 마시기?
법보신문에서는 ‘불자답게 삽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종단 기득권층에서도 적극지원하고 있는 이 캠페인에서 불음주에 대한 것을 보면 매우 놀랍다. 그것은 ‘취하도록 술 마시지 않기’이다. 사실상 음주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법보신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얼마 전부터 이른바 ‘주폭(酒暴)’이라는 용어가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폭력이나 협박을 행사하는 주폭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지목됨에 따라 곳곳에서 ‘주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정도다. 실제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살인 40%, 폭행 36%, 강간·성추행 30%, 강도 13%, 절도 9%가 음주상태에서 발생했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통계청과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160만명이 알코올중독환자며 음주로 인한 경제·사회적 비용은 연간 20조원에 육박한다고 추정했다. 주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언을 하거나 소지품을 분실하는 등 음주상태에서 빚어지든 과실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은 고질적 음주문화가 만연한 대한민국의 암울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불교에서 술 마시지 말라는 불음주계(不飮酒戒)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음주계는 불자들이 지켜야 하는 오계 가운데 하나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불살생(不殺生戒),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불투도계(不偸盜戒), 성폭력·성추행하지 않는 불사음계(不邪淫戒), 욕설이나 거짓말하지 않는 불망어계(不妄語戒)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앞의 네 가지는 그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금한 것으로 성계(性戒)라고도 불린다. 불음주계에 있어서는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를 죄악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죄악을 저지를 개연성이 다분하기에, 이를 미연에 차단하자는 의미에서 차계(遮戒)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언제부턴가 수계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가 아닌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다’고 발원하는 불자들이 많아졌다. 시대상에 따른 변화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술을 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계를 수지해 부처님 진리를 좇겠다는 불자라면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다’는 말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깊이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7. 취하도록 술 마시지 않기(불음주), 법보신문 2016-02-11)
법보신문에서 주도하는 ‘불자답게 삽시다’캠페인은 모두 37개 항목에 이른다. 친여성향의 이 매체는 종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종단 지도부에서는 이 켐페인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이 37개 항목에 대하여 지난 봄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선포한 바 있다.
37개 항목중에 오계와 관련된 것이 여섯 가지이다. 오계에다 ‘삼귀의 수지’ 항목이 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계에서 유독 불음주계에 대해서만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그래서 “불음주계에 있어서는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를 죄악으로 보지 않는다.”라 했다. 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선언했을까?
개차법이란?
불음주계는 문자 그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취하도록 마셔서는 안된다고 하여 차계(遮戒)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개차법(開遮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차법이란 무엇인가?
개차법이란 경우에 따라 계를 열고 닫을 수 있는 법을 말한다. 연다는 것은 계를 어기는 것을 말하고, 닫는 것은 굳게 계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비유를 들 수 있다. 토끼 한 마리가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달아났다 하자. 잠시 후 사냥꾼이 좇아와서 물었다. “토끼가 어느 쪽으로 도망갔습니까?” 정직하게 왼편으로 달아났다 하면 토끼가 죽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오른편으로 달아났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대승에서 개차법은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하여 또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실천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대승의 계차법에 따르면 “계는 지킴으로서 지키며, 파함으로써 지킨다. 계는 파함으로써 파하며, 지킴으로써 파한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개차법의 논리에 따라 법보신문에서는 불음주계를 적용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도록 마셔서는 안된다’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근거로?
법보신문에 따르면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에 대한 근거로서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을 들고 있다. 검색해 보니 대장일람집은 송나라 진실이 대장경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13세기에 간행한 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부처님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술 마시지 말 것을 당부했다”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초기경전 어느 곳에서도 술을 마시되 취하도록 마셔서는 안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술을 마시면 이런 과보를 받게 된다고 했다.
“장자여, 음주를 조건으로 곡주나 과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한 자는 현세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낳고, 미래에서도 원한을 낳고, 마음속으로도 고통과 근심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곡주나 과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하가는 자는 현세에서도 두려운 원한을 낳지 않고, 미래에서도 원한을 낳지 않고, 마음속으로도 고통과 근심을 체험하지 않습니다.”(A5.174)
술을 마시되 취하게 마셔서는 안된다는 말은 초기경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지만 한잔에 취하는 자가 있고 서 너 잔에 취하는 자가 있다. 허기진 상태와 포만한 상태에서 취하는 것도 다르다.
취하는 것은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술을 입에 대는 그 자체는 사실상 취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느 선까지 한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보시문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문집을 근거로 하여 음주를 정당화 하고 있다.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지 않도록 마신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지옥으로 이끄는 캠페인
부처님은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경계 했다. 술을 마시면 현세도 고통스럽고 미래도 고통스러울 것이라 했다. 이런 논리는 살인, 도둑질, 음행, 거짓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오계를 어긴 자에 대하여 “다섯 가지 원한을 끊지 못해 계행이 악한 자이니 그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지옥에 태어나네”(A5.174) 라 했다.
오계를 어기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 말씀이다. 물론 취하게 마시는 경우에 해당된다. 음식 먹을 때 반주로 마시는 것은 예외가 될 지 모른다. 술을 음식으로 생각해서 마신다면 음식 개념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면 온갖 불선행을 지을 수 있다.
병원에 실려 오는 상당수가 음주와 관련되어 있다.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교통사고 난 것이 대표적이다. 술을 마시고 싸우다 다쳐서 병원에 오기도 할 것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장기가 망가져 오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폭력을 저질러 유치장에 오는 사람들 상당수도 술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음행을 저지르는 것 역시 술과 관련 있다. 오계를 어기는 근본 원인이 알고 보면 술과 관련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십악행을 보면 음주에 대한 것이 빠져 있지만 술로 인하여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불선업을 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요즘 수계식 풍토를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수계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가 아닌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다’고 발원하는 불자들이 많아졌다.”라고 소개 하고 있다. 과연 이런 말이 타당할까?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도록 마시지 말자라는 캠페인은 타당한 것일까? 술을 마시는 것이나 취하지 않게 마시는 것이나 마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술을 허용하는 것이다. 법보신문에서는 스스로 오계를 어기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법보신문에서는 불자들을 모두 지옥으로 이끄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왜 율장인가?
흔히 계율(戒律)이라 말한다. 계(sila)와 율(vinaya)은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르다. 계는 ‘자서(自誓)’의 성격이 있고, 율은 통제의 의미가 있다. 오계는 스스로 서원하여 지키는 것이다. 누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불음주계라 했을 때 스스로 술을 마시지 않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목이다. 율장이 대표적이다. 율을 지키지 않으면 승단추방 등 제재가 가해진다. 구족계를 받은 자가 오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
지계는 모든 수행의 근본이다. 반드시 지계의 바탕위에 선정과 지혜가 생겨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계행이 뒷받침 되지 않는 선정은 삿된 선정이 되기 쉽다. 또한 선정 없는 지혜는 사악한 지혜가 되기 쉽다. 수행자는 반드시 계행을 지켜야하고, 반드시 선정을 닦아야 하고, 반드시 지혜를 증득해야 한다. 모든 근본은 계행에서 비롯된다.
계율이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경장, 율장, 논장이라는 삼장이 있는데 율장이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경, 율, 론 삼장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법구경에 칠불통계게가 있다. 한자어로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이다. 여기서 제악막작은 “모든 악을 짓지 않고”라 하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율장을 대표하는 말로 본다. 중선봉행은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라 되어 있어서 ‘해라’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경장을 대표하는 말이라 한다. 자정기의는 “자신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라 하여 논장을 대표하는 말이라 한다. 이렇게 율장, 경장, 논장을 모두 포함한 가르침에 대하여 ‘시제불교’라 하여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네”라 했다.
칠불통계게에서는 경, 율, 론 삼장이 모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 경장을 중요시 하는 것 같다. 율장의 경우 출가한 수행자들이나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전재성박사는 빠알리율장을 우리말로 모두 번역했다. 율장에서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율장대품 제1장 후렴시)
율장대품 제1장 후렴시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 따르면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라 했다. 승가가 존속해야 함을 말한다. 만일 경전만 전승된다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승가가 있어야 가르침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장보다 율장이다. 왜 빠알리삼장을 언급할 때 율장이 선두에 있는지 말해 주는 것 같다. 빠알리삼장은 대승과 달리 율장, 경장, 순서로 되어 있다. 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담배 끊는 것처럼
모든 것에 근본이 있다.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불자라면 불자답게 사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또 하나는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이다. 봉사하는 삶, 도덕적 삶을 말한다. 특히 지계와 관련하여 불자들은 오계서약을 맹세했다. 한자어로 ‘살, 도, 음, 망, 주’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개차법을 말한다. 때로 계를 파하기도 하고 때로 계를 지키기도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법보신문에서 ‘불자답게 삽시다’ 켐페인이 대표적이다. 불음주에 대하여 취하지 마시지 않기라 했는데 이는 사실상 술을 허용하는 것이다.
오계는 지켜야 한다. 설령 오늘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참회하고 또 다시 지키면 된다.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켜 지게 될 것이다. 마치 담배를 끊는 것과 같다. 십년 담배 피운 사람은 하루 아침에 담배 끊기 힘들다. 수 차례 시행착오 끝에 끊게 된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은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필자는 대학시절부터 10년 동안 담배를 핀 적이 있다. 이제 금연한지 12년 정도 되었다. 담배를 끊는 것이 2년 동안 7번의 시도 끝에 성공을 하였다. 중간에 실패한 여섯 번의 기회는 무의미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실패하더라도 횟수를 더 하다보면 더욱 금연에 노하우가 생기고 끊기 위한 새로운 방법과 담배중독의 원리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반복해서 시도하다 보면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시도하고 실패했던 경험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의지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가능한 것이다.
(배종대님, "스님, 간화선이 왜 대승입니까?", 불교닷컴 2016-10-22)
법우님은 작년 재가단체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다. 요즘은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보고 있다. 법우님에 따르면 담배끊기에 대한 방법을 말하고 있다. 니코틴에 중독되었으나 끊임 없는 노력 끝에 마침내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끊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님이나 불자나 술을
술이나 담배나 중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모두 백해무익한 것들이다. 특히 술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십악행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짓는 악업 열 가지는 술이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계에서 불음주계가 들어가 있지만 십악행에 음주가 들어가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음주가 십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술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라도 마시지 않아야 한다.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오늘 비록 술을 마실지라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불음주계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취하지 않게 마시기’라 하여 켐페인을 벌인다면 사실상 술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비록 지금 술을 마실지라도 언젠가는 끊어야 할 것이다. 담배가 해로운 것을 알아 담배를 끊듯이 술이 십악행의 근원임을 안다면 언젠가는 끊어야 한다. 그럼에도 취하지 않게 마시기식으로 켐페인한다면 술 끊을 기회를 아예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다.
취하지 않게 마시기 켐페인은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난다. 마시다 보면 취하게 되므로 만악의 근원이 된다. 결국 지옥으로 이끌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종단에서는 취하지 마시지 않기 켐페인을 벌이고 있다. 스님이나 불자나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지 않게 마신다면 ‘동타지옥(同墮地獄)’이다. 한국불교 현주소를 보여 주는 것 같다.
2016-10-26 진흙속의연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