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오학린(吳學麟)은 고려 정종 때 한림학사를 지냈다. 그 뒤 6세손 오계유가 충숙왕 때 찬성사에 올라 모양군에 봉해졌다. 모양은 고창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오학린은 학문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다. "동인문집(東人文集)" "삼한구감(三韓龜鑑)" 등이 전한다. 그의 손자들도 문학으로 유명하다. 시조의 아들 오질(吳質)은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오질의 아들 오세문(吳世文)은 승보시에 장원한 후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렀다. 오세문의 형 오세공(吳世功)과 동생 오세재(吳世才)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다. 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오세재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오세문의 중손인 오계유는 고려 충숙왕 때 좌리공신으로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오계유의 손자 오엄이 조선 태종 때 경기도 수군절도사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오엄의 손자 오원찬은 상장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오운은 정유재란 때도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화오화영이 가문을 빛냈다. 그는 목사로서 신앙부흥 운동과 민족정신 함양에 노력했으며, 조선민족당 당수와 한중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황해도 평산군 용산면 일원,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일원, 경북 월성군 외동면 개곡리, 황해도 벽성군 서석면 연근리 등이 집성촌이다. 2000년 현재 16,716명이 있다. 주요파는 ▲사정공파 ▲의령공파 ▲봉사공장파 ▲봉사공이파 ▲봉사공삼파 ▲봉사공사파 ▲현정공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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