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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장 원어 해석
(49:2) 너희는 모여 들으라 (힉카베추 웨쉬므우)
'너희는 모여'에 해당하는 '힉카베추'는 '소집하다'는 뜻의 명령형이다. 뒤에 나오는 '들으라(웨쉬므우)'는 단순히 '듣는'(3:10 ; 신 5:23) 것 뿐 아니라 들은 바를 바로 '깨닫고'(신 28:49), '준행하는' (22:18 ; 렘 35:10) 것까지 가리키는 '솨마'의 명령형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형이 2번 반복될 때 그 강조점은 뒷부분에 있다. 단순히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듣고 순종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소중한 일이나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달아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각자는 과연 무엇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49:2)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뻬네 야아코브...엘 이스라엘 아비켐)
'야곱(야아코브)'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다' (호 12:13), '비방하다' (렘 9:4), '빼앗다' (27:36)라는 뜻을 지닌 '아카브'에서 유래한 것으로 '발꿈치를 잡은 자' (25:26)라는 뜻의 매우 '육적인' 이름이다. 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겨루다' (32:28 ; 호 12:3)라는 뜻을 지닌 '사라'와 '하나님' (14:18 ; 삼하 22:31)을 뜻하는 '엘'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름으로 '하나님과 겨루는 자'라는 뜻으로 매우 영적인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야곱의 열심을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름으로 (32:27,28) 언약의 계승자로서의 자격을 보여 주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야곱'이란 이름과 더불어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 예언을 듣는 자들이 일차적으로는 육적인 야곱의 아들들이지만, 이들은 더 나아가서는 언약의 계승자인 이스라엘의 아들임들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이 예언은 단순히 야곱의 아들들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장래의 각 이스라엘 지파와 더 나아가 미래의 교회를 대표하여 예언을 받고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9:3)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웨레쉬트 오니)
'기력'에 해당하는 '온'은 '힘' (욥 18:12 ; 사 40:29), '권세' (사 40:26)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야곱이 장자 르우벤을 낳음으로써 비로서 남자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신 21:17 ; 욥 40:16 ; 시 78:51). 당시 여자는 물론 남자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대를 이를 남자 후손이 없다는 것은 큰 약점이었는데 르우벤이 이러한 약점을 없애 주었다는 의미이다.
(49:3) 위광이 초등하고 (예테르 세에트)
'위광'에 해당하는 '세에트'는 '위엄' (욥 13:11 ; 31:23)이라는 뜻이고 '초등하고'에 해당하는 '예테르'는 '탁월하다' (49:3), '넘치다' (사 56:12), '남다' (출 10:5)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위엄이 넘치도록 탁월하다'는 뜻으로, 르우벤이 장자로서 탁월한 품위와 인격의 소유자임을 나타낸다.
실제로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으며 (37:21,22) 또한 흉년으로 야곱의 가족 전체가 위기를 맞았을 때 아비 야곱을 설득하기 위하여 자기 희생을 감내하는 제안을 하였다(42:37). 이런 면에서 볼 때에도 르우벤은 장자로서의 의식과 품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49:3)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웨예테르 아즈)
'권능'에 해당하는 '아즈'는 '강함', '힘셈' (잠 30:25)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23회 사용되나 하나님께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으며, 동물들 (잠 30:25 ; 사 56:11), 자연 (출 14:21 ; 느 9:11)이 지니는 힘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는 거의 적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뜻하는 힘은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야곱이 르우벤에게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은 르우벤이 육적인 힘만 탁월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꼬집고 있는 것이다.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파하즈 캄마임)
'끓음'에 해당하는 '파하즈'는 '음탕하다', '경박하다' (삿 9:4), '경솔하다' (습 3:4)라는 뜻을 지닌 동사 '파하즈'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KJV 와 RSV는 '불안정한, 변덕스러운'으로 NIV는 '휘몰아치는, 몹시 거친'으로 LB는 '다루기 어려운, 제멋대로 구는'으로 각각 번역하여 르우벤이 충동적이고 경박하며 음탕한 성격을 가졌음을 나타내었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도 확인된다.
(49:4)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알 토타르)
'탁월치(토타르)'의 원형 '야타르'는 '남다' (출 10:15), '풍부하게 하다' (신 28:11)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정어 '알'이 사용된 본문은 르우벤이 장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남거나, 풍부한 것이 없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 즉 이는 르우벤이 장자로서의 모든 특권과 지위를 잃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장자로서의 그의 모든 권리는 그의 형제 유다(영적, 정치적 권리)와 요셉(경제적 권리)에게로 옮겨졌다(43:8 ; 44:4,18 ; 46:28 ; 48:2).
(49:4)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키 알리타 미쉬케베 아비카 아즈 힐랄르타)
서두에 나오는 '키'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즉 본문은 르우벤이 장자권을 상실하고 탁월치 못하게 된 '이유'는 그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르우벤이 그의 서모 빌하와 통간한 사건을 가리킨다. 원어의 용례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르우벤의 이러한 범죄는 단순히 그의 아버지 야곱에 대한 모독과 배신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종교적인 신성 모독 행위였다 (레 20:11 ; 신 27:20).
우리는 흔히 어떤 범죄든 그 범죄가 범죄하는 당사자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모든 범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인간에 대한 범죄이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범죄인 것이다(20:6 ; 시 51:4).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사에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죄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39:9).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쉬므온 웨레위 아힘)
'형제'에 해당하는 '아흐'는 혈통적인 형제 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행동이 유사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욥 30:29). 시므온과 레위는 모두 레아에게서 난 친형제(29:33,34)이기도 했지만 기질과 성격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도 '형제'였다. 야곱은 그들이 누이 디나가 강간당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몰살시켰던 일의 공범자였음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34:25). 그때 이미 야곱은 저들의 행위를 엄하게 꾸짖었으나(34:30) 이제 또다시 그들의 잔혹함을 지적하고 있다.
(49:5)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켈레 하마쓰 메케로테헴)
세겜사건(34:25-29)을 염두에 두고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성 및 호전성 그리고 폭력성을 지적한 말이다.
야곱이 이 일을 범죄로 규정짓고 그들을 책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당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정정당당한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 거짓말로 속였으며 전쟁할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한 일은 실로 정당한 전쟁이 아닌 야비한 살인 행위였다. 지나친 혈기와 분노는 그리스도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악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심리적 태도이다.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먼저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49:6) 내 혼아...내 영광아 (나프쉬...케보디)
'내 영혼아(my soul)'에 해당하는 '혼(나프쉬)' 과 '영광(카보드)' 은 생명 혹은 영혼을 기리키는 이중적 표현으로서(시 16:9) 한 인간의 전인격적 실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을 환언하면 '나 야곱아'란 뜻이다.
(49:6)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뻬쏘담 알 타보...삐크할람 알 테하드)
야곱은 레위와 시므온이 비록 자신이 낳은 아들이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게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악한 세력과 결코 제휴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경은 악한 자와 연합하지 말 것을 거듭 교훈하고 있다(출 23:2 ; 시 1:1 ; 고후 34:28,29).
(49:6) 그 분노대로...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으로다 (키 메랍팜...우비르초남 익케루 쇼르)
본문 서두에 나오는 '키'는 뒷문장이 앞문장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즉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고 그들과 결별까지 선언하게 된 것은 그들이 '분노'와 '혈기'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혈기'에 해당하는 '라촌'은 '뜻'(대하 15:6 ; 시 103:21), '마음'(에 1:8 ; 9:5), '소원' (시 145:16,19)이라는 의미로 시므온과 레위가 자신의 '뜻'대로 욕망에 따라 행하였다는 의미이다.
한편 '발목 힘줄을 끊어'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뿌리를 뽑다' (전 3:2), '황폐화되다' (습 2:4)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특히 강의형으로 사용되어 철저한 섬멸의 뜻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4:28, 29에 나와 있는 세겜의 약탈 사건의 묘사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당시 시므온과 레위는 철저하게 세겜을 약탈하고도 부족하여 남겨진 가축들의 힘줄을 잘라내는 등 세겜족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황폐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죄로 오염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인간은 자신의 오염된 의지와 감정을 따라 살 때 반드시 큰 죄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만다(롬 3:23 ; 8:13 ; 엠 2:1-7).
(49:7)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아할레켐 뻬야아코브 와아피쳄 뻬 이스라엘)
잔인한 복수극을 위해 모의와 집회를 주동했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 야곱은 그 대가로 분리와 흩어짐을 선포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시므온 지파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행한 제 2차 인구 조사에서 유다 지파의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22,000명에 불과했으며(민 26:14), 모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제외되었을 쁜 아니라 가나안 땅 분할 때에도 다른 지파들처럼 독자적인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 중에서 몇몇 성읍만을 할당받게 되었다 (수 19:1-9). 레위 지파 역시 일정한 기업이 없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야만 했다 (수 21:1).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예후다 앗타 요두카 아헤카)
'유다'에 해당하는 '예후다'는 '찬송하다' (29:35 ; 대하 7:6), '감사하다' (시 75:1 ; 대상 16:4), '칭찬을 받다' (시 49:18)라는 뜻을 가진 '야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그 이름 자체가 '찬송'이다(29:35). 그는 레아의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 허물이나 죄가 없어서가(38:26)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하자 그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의 생명을 건져냈었다(37:26 이하). 또 기근으로 인하여 가족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자신이 베냐민의 담보가 되겠다고 하여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갔다(44:16-34). 뿐만아니라 애굽에 내려가서도 요셉 앞에서 진실한 우애와 효성을 드러내는 말로 요셉을 설득함으로써 요셉이 형들 앞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게 하였다(44:16-45:8). 이처럼 진실로 가족들을 사랑하고 희생적으로 그들을 섬겼던 유다는 그의 이름처럼 형제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완전함이 아니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결코 어떤 면에서도 완전할 수 없다(롬 7:18-25 ; 요일 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정직한 양심과 진실한 마음이다(시 51:6 ; 고전 5:8).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자의 허물과 죄는 사하시고 깨끗케 하시지만(요일 1:9) 거짓된 마음과 위선은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잠 12:23 ; 눅 11:37-54 ; 계 21:8).
(49:8)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야데카 뻬오레프 오예베카)
'목을 잡을 것이요'에 해당하는 '뻬오레프'는 '목' (레 5:8 ; 느 9:16), '등' (삼하 22:41 ; 시 18:40)을 뜻하는 '오레프'에 '~안에', '함께'를 뜻하는 전치사 '뻬'가 붙어서 이루어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직역하면 '네 손이 네 원수의 목 안에 있게 될 것이다'이다. 그러나 본문은 '네 손이 네 원수의 등을 잡게 될 것이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는 유다가 도망치는 원수를 추격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예언은 유다의 후손인 다윗과 솔로몬이 주변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삼하 5:1,2).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혈통을 타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사단의 세력을 진멸하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다(요 16:33 ; 고전 15:57 ; 계 5:5).
(49:8)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쉬타하우우 레카 뻬네 아비카)
'절하리로다'에 해당하는 '솨하'라는 단어는 상대에게 극도의 경의와 복종을 표시하기 위해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유다 지파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 예언은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왕으로 즉위하였고 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는 유다의 혈통을 받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28:18 ; 빌 2:9-11).
(49:10) 홀이...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로 야쑤르 쉐베트...우메호케크 밉벤 라글라이우)
'홀'에 해당하는 '쉐베트'는 일차적으로 '막대기' (레 27:33 ; 대상 11:23), '지팡이' (삿 5:14)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권세' (시 125:3)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왕권 혹은 통치권을 상징하는 작은 지팡이를 가리키는데, 왕들은 공중 집회할 때 항상 이 홀을 휴대하였다. 그러므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은 유다 지파가 계속적으로 왕권을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 유다의 후손들이 통치권을 이어감으로 성취되었다(삼하 5:3 ; 대하 36:11).
(49:10)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아드 키 야보 쉴로)
'실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첫째, '실로'를 예루살렘 북쪽 약 50km 지점의 에브라임 경내에 위치한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성읍으로 보는 것이다(수 18:1,8-10). 이 견해에 의하면 본문은 '그(유다/다윗)가 실로에 올 때까지'로 번역되며, 이스라엘에 대한 유다 후손의 통치권이 실로에 와서야 비로서 끝나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역사적인 상황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둘째, '평화(안식)의 시기' 를 의미하는 추상 명사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실로'를 안전하게 됨' (욥 3:21)을 뜻하는 '솰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유다가 그들의 적들을 정복하여 '안전하게 될 때'까지 유다 후손의 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이다.
셋째, '실로'를 사람의 이름, 그 중에서도 유다 가문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실로'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근거하는데 그 중 일부 학자들은 어근으로 추정되는 '쉴'이 갈대아어나 아랍어의 '후손'을 의미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실로'는 '후손' 곧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 '보낸다' (27:35 ; 삼하 11:6 ; 느 2:5)라는 뜻을 지닌 '솰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 곧 '메시야'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실로'를 '안전하다', '평안하다' (욥 3:26 ; 12:6 ; 시 122:6)를 뜻하는 '솰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중재자', '화평케 하는 자', '침묵을 지키는 자', 곧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성경의 주요 예언이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전히 성취된다는 점과 더불어 제 8절로부터 계속되는 유다에 대한 예언도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볼 때 셋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9:11)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킵베쓰 빠야인 레부쇼)
'빨다(킵베쓰)'의 원형 '카바쓰'가 본문과 같이 강의형으로 쓰일 때 '밟다', '밟아 뭉개다' (출 19:10)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는 한글 개역 성경이 풍기는 뉘앙스와 같이 포도주로 세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은 포도를 수확하면 이를 즙틀에 넣고 발로 밟아 그 즙을 짜냈는데, 본문은 그 즙이 너무 많으므로 옷이 흡뻑 젖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이는 일차적으로는 유다의 후손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향유하게 될 평화와 번영을 가리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도래와 그로 인한 영원한 영적 풍요를 바라보는 예언이다.
(49: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예히 단 나하쉬 알레 데레크 쉐피폰 알레 오라흐)
'독사'로 번역된 (히)'쉐피폰'은 사막 모래 속에 숨어사는 '살무사'를 가리킨다. 낙타처럼 큰 짐승도 이 뱀에 물리면 즉사할 정도로 맹독성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단 지파가 그 대적들에게 뱀과 같이 간교하며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예언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사 삼손이 이스라엘의 막강한 대적 블레셋을 쓰러뜨린 일(삿 15,16장)과 단 지파가 라기스를 정복하기 위해 '뱀처럼' 간교하게 공격을 하였던 경우 (삿 18장)에서 잘 나타났다.
또한 단 지파가 사단을 상징하는 뱀, 독사로 비유된 것은 그들이 사단의 하수인이 될 것이라는 에언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단 지파의 성읍이 우상 숭배의 근원지가 됨으로써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삿 18:1-37). 한편 초대교부들(이레네우스, 어거스틴, 암부로스)은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가 단 지파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지파 중 구원의 인 맞은 자의 수에서 단 지파가 생략되었다는 점(계 7:5-8) 때문이다.
(49: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리슈아테카 키위티 에흐와)
'기다리나이다'에 해당하는 '키위티'는 '사모하다'(욥 6:19), '바라다'(시 25:3 ; 69:7)로 번역되는 '카와'의 강의형으로 '간절한 기다림' (욥 30:26 ; 애 3:25), '절박한 소원' (욥 6:19)을 나타낸다. 그리고 '구원'에 해당하는 '리슈아테카'의 원형 '예슈아'는 구약 인물 '여호수아'나 우리의 구세주 '예수'의 어원을 이루는 말로써 '구원', '도움', '승리'란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당시 야곱이 일시 예언을 중단하고 이렇게도 간절히 기다렸던 '구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자는 야곱이 예언을 하던 중 기력이 갑자기 떨어지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알고 이 축복을 마칠 때까지 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언한 단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자손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주장은 야곱의 기도가 메시야의 소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영광된 메시야 왕국과 관련된 축복을 전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보다 더 큰 구원을 바라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그의 자녀들에게 전한 축복들은 물질적인 것이요 이 큰 구원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참된 구원, 즉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택한 모든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영생의 복을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구원(예슈아)'이 신약 시대에 등장하실 메시야 '예수'를 가리키는 말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49:19) 아셀에게서...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메아쉐르...잇텐 마아단네 멜레크)
가나안 정복 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는데(수 19:24-31) 솔로몬 시대에는 그 땅의 기름진 소산으로 왕의 양식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예언이 성취되었다.
(49: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나프달리 아얄라 쉘루하)
'납달리'에 해당하는 '나프달리'는 '경쟁하다'(30:8), '간교하다'(욥 5:13)라는 뜻을 지닌 '파탈'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다툼', '싸움'이라는 뜻이다. 납달리의 자손들은 이처럼 싸움에 능하고 용맹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게데스의 바락을 좇아 가나안 군사들을 물리쳤으며(삿 4:6,10 ; 5:18), 사사 기드온의 소집에 참가하여 미디안 족속을 축출하기도 하였다(삿 6:35, 7:23). 또한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기 직전에도 다윗에게 삼만 칠천 명의 군사와 천 명의 장교, 그리고 식량을 보내 주기도 했다 (대상 12:3,4,10).
역사적으로 볼 때 납달리가 이처럼 강력한 지파이기는 하였으나 야곱이 표현한 것처럼 '놓인 암사슴'과 같지는 못했다. 여기서 '놓인'에 해당하는 '솰라흐'는 '내어 보내다'(신 24:4), '풀어 주다'(사 58:6)라는 뜻으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놓인 암사슴'이란 속박에서 풀려나 한없이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납달리 지파는 가나안 북부지방, 즉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 민족으로부터 많은 침공을 받았고(왕상 15:20), 마침내는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되었다(왕하 15:29). 그러므로 야곱의 이 예언은 물질적인 축복으로 보기보다는 영적인 축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 생활의 어두움에 고통당하고 있던 납달리 지파에게 구원의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9:1,2). 마태는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던 갈릴리에서 사역하심으로 성취되었음을 확인하였다(마 4:12-16). 납달리 지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 족속의 손에서가 아닌 죄와 사망의 권세자 곧 사단의 손에서 놓임을 받은 대표적인 지파가 된 것이다.
(49:21)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한노텐 이므레 솨페르)
'발하는도다'의 어근 '나탄'은 '주다' (1:29 ; 민 18:8), '전하다' (잠 4:2), '진술하다' (신 30:1) 등으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전하다'는 뜻이다. 또 '소리(이므레)'의 원형 '에메르'는 '말씀' (민 24:4 ; 수 24:27), '명령'(욥 20:29)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직역하면 '그가 아름다운 그 말씀을 전한다'이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지가 옛 납달리 지역인 갈릴리였고, 갈릴리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 중 대다수를 형성함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에 의해서 '아름다운 말씀' 곧 '복음' 이 전세계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야곱이 기대하였던 '놓인 암사슴'과 같은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홀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땅, 곧 죄와 사망에 속박되어 있는 한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 땅의 속박, 즉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바로 이런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롬 8:1,2).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이 '아름다운 말씀', 곧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놓임을 받은 암사슴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구원받은 백성이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다(롬 1:16 ; 행 1:8).
(49:22) 요셉은...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요쎄프 뻰 포라트 알레 아인)
'요셉' 즉 '요쎄프'는 '더하다'(레 22:24 ; 27:13), '첨가하다'(민 36:3)라는 뜻을 가진 '야싸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그가 더하실 것이다' 라는 뜻이다. '무성한 가지'란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이며 '번창하는 자손'이란 뜻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다산과 풍요를 축복하였다.
이 예언처럼 요셉의 자손들은 다른 아들들이 한 지파만을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형성하였고, 특히 에브라임은 '무성한'에 해당하는 '파라'에서 유래된 그의 이름 '에프라임'이란 이름처럼 므낫세보다도 더 큰 축복을 받아서 가나안 정복 이후 비옥한 토지를 분배받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파들에게 둘러싸여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연적인 보호를 받는 특혜까지 누리게 되었으며 왕국 분열 이후에는 북왕국에서 확고한 세력을 확보하고 북왕국을 대표하는 지파가 되었다.
(49: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와예마라루후 와로뿌 와이스테무후 빠알레 힛침)
'활쏘는 자'는 요셉 개인의 과거에 닥쳤던 그리고 장차 그의 가문 지파에 닥쳐올 모든 적대 세력들을 지칭하는 말이다(수 11:16-18 ; 삿 12:4-6).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대적을 활쏘는 자로 비유한 것은 훗날 므낫세 지파인 기드온과 활을 잘 쏘는 미디안 족속과의 대접전(삿 6-7장)을 예언한 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군박하다(와이스테무후)'의 우리말 뜻은 '일의 형세가 매우 급하게 되다'이다. 그러나 '와이스테무후'의 원형 '사탐'은 '함정에 빠뜨리다', '악의를 품고 뒤쫓다' 등의 뜻이 있다.
(49:24)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미데 아비르 야아코브)
대적들의 모든 핍박과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승리하게 된 그 능력의 출처와 근원이 오로지 족장 야곱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던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요셉 자손의 모든 승리가 궁극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 때 가능하였고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 중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지파였으나 그들이 북이스라엘에 속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신들을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시고 이방 민족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왕하 17:5-18).
(49:24)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밋솸 로에에벤 이스라엘)
이 말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① '전능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 를 동격으로 보는 해석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다소 모호하다. 왜냐하면 이는 '요셉으로부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나온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어 성경의 뜻은 명확하다. 여기서 '그로부터'에 해당하는 '밋솸' 은 '~로부터' 라는 뜻의 전치사 '미' 와 '거기', '그 때'(2:8 ; 출 20:18) 등 '장소' 나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솸'이 결함된 단어로 '거기서 부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있는 곳으로부터'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이는 앞의 '야곱의 전능자의 손으로 말미암아'와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
②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로서의 역학을 수행할 능력을 받았다는 해석. 즉 이때의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종교 개혁가 칼빈은 '반석'과 '목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야곱은 은연 중에 영적 이스라엘 곧 모든 성도들의 반석과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모든 악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승리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49:25) 위로 하늘의 복과: 아침이슬과 때를따라 내리는 비 그리고 적당한 햇빛 등 자연의 혜택을 말함.
아래로 원천의 복 :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샘들과 물을 가리킴.
적먹이는 복과 태의 복 : 순산과 다산으로 인한 많은 자손의 복을 가리킴.
(49:26) 부여조(호라이) : 나의 조상들.
(49:26)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아드 타아와트 끼보오트 올람)
'없음같이'에 해당하는 '아드'는 '~까지'(신 1:7 ; 민 8:4)라는 뜻이고 '한'에 해당하는 '타아와'는 '경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문자적으로 '영원한 산의 경계까지'이다. 즉 야곱이 요셉에게 내린 축복이 영원한 산의 최극단까지 편만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영원한 산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산(시 3:4 ; 15:1 ; 욥 1:16 ;슥 8:3),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이처럼 야곱의 축복은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 즉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에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 축복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김으로 모든 축복을 상실하고 이방의 포로가 되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사 28:1,2 ; 17:3 ; 왕하 17:5-18).
(49:26) 뛰어난 자 (네지르)
'뛰어난 자'에 해당하는 '네지르'는 '구별하다'(레 22:2 ; 민 6:2,12), 어떤 일로부터 '떠나다'(겔 14:7)라는 뜻을 가진 '나자르'에서 유래한 단어로 '성별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인데,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실인(나지르)' 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민 6:2,20 ; 삿 16:17). 이는 분명히 요셉을 가리킨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보다 더욱 경건한 자였으며(39:9,21,23), 특별히 7년 대기근 가운데서 많은 생명을 구하고,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성별된 자'였다(50:20). 그러나 이는 또한 요셉의 자손들이 다른 지파들과 구별되어 다른 지파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49:27) 물어 뜯는 이리라 (제에브 이트라프)
'물어 뜯는'에 해당하는 '이트라프'의 원형 '타라프'는 '갈기갈기 찢다'(신 33:20 ; 시 50:22), '움키다'(시 17:12 ; 겔 19:3), '삼키다'(겔 22:27)라는 뜻으로 '육식 동물이 먹이를 잡아 그 살을 찢고 먹어 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베냐민이 굶주린 이리처럼 난폭하다는 사실이 매우 회화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예언대로 베냐민 지파는 무척 무례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사 에훗의 모압 정벌(삿 3:15-30)과 레위인 첩에 대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지방 사람들의 극악한 겁탈 사건(삿 19:22-26),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일어난 기브아 전투에서의 완강한 저항(삿 20:19-25) 등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49:28)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쉬브테 이스라엘 쉐넴 아사르)
'지파'에 해당하는 '쉐베트'는 일차적으로 '막대기' (레 27:32 ; 대상 11:23), '지팡이 (삿 5:14), '작대기' (사 28:27)라는 뜻이 있다. 이 단어가 왜 '지파' 혹은 '부족'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오랜 유목 생활에서 목자의 지팡이가 가장의 권위 혹은 통치권을 타나내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듯하다. 어쨌든 이 단어는 기타 다른 국가의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이스라엘의 지파만을 나타내는 고유한 용어가 되었다(출 28:21 ; 삿 20:2 ; 삼상 9:21). 한편 본문은 야곱의 축복 대상이 단지 그의 12명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이스라엘 12지파도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9:28)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이쉬 아쉐르 케비르카토 뻬라크 오탐)
'분량대로' 에 해당하는 '케비르카토'는 '복' (12:12 ; 신 11:26), '축복' (27:41 ; 슥 8:13)이라는 뜻이 있는 '뻬라카' 에 '~에 따라서' 란 뜻이 있는 전치사 '케' 가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들 각인의 축복에 따라 축복하였다' 는 의미이다. 이는 이미 각 지파가 받아야 할 축복은 정해져 있었으며 야곱은 단지 그 축복을 선언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축복은 인간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자에게 원하시는 만큼 주시는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아들들을 위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가감없이 전달했을 뿐이다.
성도들의 기도 또한 자기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조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금 나와라 뚝딱' 하고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런 기도는 결코 응답받지 못한다(약 4:3). 참된 기도는 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요일 5:14). 오직 이 땅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되어지며 그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구하는 것이다(마 6:3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이 의를 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만 기도한다면 우리는 결코 온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