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수락산 둘레길에서 /전성훈
모처럼 미세먼지 없는 맑은 5월 어느 토요일, 1호선 도봉산역에 내려 가벼운 기분으로 길을 걷는다. 중랑천을 사이에 둔 도봉구에서 노원구로 넘어가려고 상도교 다리를 건넌다. 다리 밑에는 팔뚝만한 크기의 물고기들이 느긋하게 아침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다말고 잠시 동안 서서 물고기들의 유연한 동작을 구경한다. 수락산역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큰길에 있는 수락리버시티 아파트앞 구름다리를 건넌다. 개울에는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제법 물이 많이 흐른다.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정겨운 징검다리를 지나서 근린공원 쉼터에 이르자 벤치 위에 누런색과 검정색 길고양이 네 마리가 오순도순 사이좋게 쉬고 있다. 지나던 사람이 사진을 찍는데도 고양이들은 나몰라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연신 하품을 한다.
본격적으로 서울 둘레길의 일부인 수락산 둘레길로 들어서자 향긋한 냄새가 난다. 무성한 소나무들이 있는 솔밭이라서 솔잎 향내가 진동하며 코끝을 자극한다. 얼른 마스크를 벗어들고 코를 벌렁벌렁하면서 진하디 진한 솔잎 향내를 맡는다. 가슴 속 깊숙이 들어 마시고 코로 내뱉자 콧속에서 평온하고 따뜻한 느낌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바깥 세계의 자동차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름 모르는 온갖 새소리만 들려오는 숲속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무심한 마음을 가져보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다. 그런 내 모습을 반기는 듯 검은 색 나비 한 마리가 내 앞에서 나풀나풀 날개를 저의며 유유히 날아간다. 나비를 바라보다 세상을 달관한 신선의 경지에 올라선 장자의 호접몽이 떠오른다. 호접몽(胡蝶夢)은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저 멀리 날아간 나비 생각을 지워버리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다시 한 걸음씩 숲길을 걷는다. 숲의 향기에 취하여 나 홀로 걷는 숲길은 어느 구간에서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돈다.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발걸음에서 힘찬 기운을 느낄 것 같은 경쾌한 소리가 난다. 짧은 반바지에 소매 없는 티셔츠를 입고 가로매는 배낭을 짊어진 젊은 여성이 내 앞을 성큼성큼 지나 앞서간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싱싱한 젊음이 약동하는 것 같다. 갑자기 여름철 잘 익은 탱탱한 자두 생각이 난다. 한 입 배어 물으면 시큼한 맛이 나오는 자두를 떠올리니 저절로 군침이 돈다. 숲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주황색 깃발의 이정표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수락산 둘레길을 처음 찾는 초행길의 사람에게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수락골 유원지 지나서 숲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어느 초로의 신사가 멋진 포즈를 지으며 트럼펫을 불고 있다. 주변에는 구경꾼 같아 보이는 중년 여성 두 분과 남성 몇 사람이 조용히 감상하고 있고 사진 찍는 분도 보인다. 트럼펫 소리가 귀에 익은 케니.G의 곡인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숲속의 향연을 듣는듯하여 상쾌한 마음이 들자 발걸음도 가볍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한 참 걸어가자 반대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내려온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거의 30명은 될 것 같다. 인솔하는 여성분이 소형 메가폰으로 뒤에 처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걸어오라고 한다. 일행은 나이가 꽤 든 사람도 젊은이들도 보인다. 무슨 단체나 모임인지 언뜻 짐작이 안 된다.
숲길을 걸으며 청아하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상스럽거나 속된 기색이 없이 맑고 고아한 상태를 청아(淸雅)하다고 표현한다. 내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다면 청아한 자연 속에서나마 잠시 동안 지내고 싶다. 그러한 날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꿈이라도 꾸어보면 어떨까. (202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