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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위한 학습법 강연자로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박철범 변호사란 분입니다. 이분이 쓴 책 가운데 ‘공부는 예배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공부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니, 그 제목이 매우 신선하고도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 책 첫머리에 이분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종교적인 문제, 성격의 차이,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아버지와 헤어져, 어린 남매를 양육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어머니의 삶의 목표는 단 하나, 두 명의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아이의 성적이 아무리 떨어져도 어머니는 한 번도 성적 때문에 야단을 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매일 내어주는 성경공부 숙제를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절대로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과제로 내어주는 책은 어린이 성경 동화같은 쉬운 책이 아니라, 두꺼운 성경연구서였습니다. 어머니의 그와 같은 스파르타식 훈련에 의하여 저자는 성경 인물의 삶을 알게 되고,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고, 목사님도 감탄할 정도로 신학적인 지식도 쌓아갔습니다. 그렇게 2년 후 그는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해서 제법 돈을 많이 버신 분인데, 시주를 한 금액을 합친다면 족히 절 하나를 세울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사업이 망하고 외할머니는 단칸방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아들도 먼저 죽고, 희망을 걸었던 똑똑한 딸마저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부처님에 대한 배신감을 지울 길이 없어서 외할머니는 불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불경대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좋아하던 술 담배 대신 성경 읽기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참으로 순진한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은 외할머니가 드리는 순진한 기도를 너무나 잘 들어주셨습니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바나나도 한번 사주지 못하는 형편이 안타까워, ‘하나님. 바나나가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우리에게 바나나를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어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의 손에는 바나나가 들려있었습니다.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하나님. 피자가 먹고 싶어요. 피자를 먹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저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하나님은 할머니 기도만 잘 들어주시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때 외할머니는 머물 곳이 없어서 어린 두 외손주와 함께 교회 부엌에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집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나나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기도 한다고 없던 집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지난 후, 이 할머니의 가족을 안타깝게 여긴 어떤 분이 2층 짜리 집을 내어주며 거기서 살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소년에게는 자신만의 방까지 생겼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험은 그의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훈도로, 말씀을 암송하고 성경지식과 신학적인 지식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관한 그의 지식이 저절로 그를 믿음의 길로 이끈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박한 할머니의 기도와 신앙을 통하여 소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머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고, 경험을 통하여 느끼고 깨닫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정성과 물질을 바쳐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정성을 보고 신은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잘 벌고, 건강하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성공하기 위해서, 물질과 시간을 바치며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 신앙을 우리는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기복(祈福)은 한자어로 빌 기, 복 복자입니다. 복 받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라는 의미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간절하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기복신앙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잘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부자 되고 성공하고 모든 것이 형통한다고 믿고, 바로 그것이 예수를 열심히 섬기는 목적이 되어버렸다면,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처럼,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물질과 시간, 정성을 바침으로 자기가 얻고자 하는 세상의 부와 권력과 건강과 행운을 얻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고 기도의 목표가 된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신앙은 세상의 종교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생애 중요한 순간마다, 어려운 결단과 선택의 순간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심신이 지칠 때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열 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 예수님은 산에 오르셔서 밤 새워 기도하신 후 제자를 선택하였습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병자들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시기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지만, 예수님은 그래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때때로 밤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잔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개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 중에서도 마지막 숨을 모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그 벅찬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마침내 기도 가운데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바로 대답하신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이 기도는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깊이 생각하여 새롭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늘 기도하셨던 바로 그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 기도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하나님 앞에 구할 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의 기도문과 마태복음의 기도문이 대체로 비슷하지만,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훨씬 더 간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였지만, 누가는 그냥 ‘아버지여!’입니다. “아버지여!”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구약시대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부르시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주로 ‘창조주와 피조물’, 혹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로서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마음대로 그릇을 빚으실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한 마음대로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다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경배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원문으로는 ‘아빠’(abba)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이렇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대화하고, 아버지께 상담하고, 도움을 간구하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시는 것처럼,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한 형제라고 하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우리 모두는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제의식입니다. 교회 안에는 신분의 귀천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특권을 가진 부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한 형제일 뿐입니다. 교역자도,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형제입니다. 인종이나 국가, 민족을 넘어서 우리는 모두는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편협한 이기주의나 우월감에 빠져 있고, 편협한 인종주의나 민족주의에 갇혀있다면 그는 진정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도문에는 간구하는 내용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간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동양 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고, 아들로서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곧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라고 의역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 째 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을 수도 있고,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구별된 삶을 통하여, 윤리적이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로 인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힘써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바로 이것을 삶의 첫 번째 목표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당신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한 메세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통치’를 의미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나라, 그래서 하나님의 뜻인 공의와 사랑, 평화가 이루어진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 안에서 진정한 사랑과 평화를 맛보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들 마음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 점점 더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헌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입니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하며 그것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 두가지 기도는 ‘당신 간구문’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나라’를 위한 간구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자신의 최고의 사명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공부 잘하려 합니까?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얻고 자아를 성취하며,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며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의 꿈을 발견하고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그 기도는 주님의 기도의 정신에 합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예배라면, 공부도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인간의 삶에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광야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하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것을 거두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생존할 수 있었고 마침내 광야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은 아침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거두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백성들은 하루 먹을 양만큼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욕심을 내어서 내일의 양식, 그 다음 날의 양식까지 거두어들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욕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 누군가는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일의 양식까지 거두어 보관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만나에서 벌레가 나고, 상한 냄새가 그 장막에 진동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필요한 양식만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만큼만으로 감사하며,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 째 간구의 의미입니다.
넷째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이 무슨 공로나 업적이 되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죄사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며 살아갈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신으로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때때로 죄를 범하며 살아갑니다. 이웃이나 하나님 앞에서 품지 말아야할 생각, 하지 말아야할 행동으로 죄를 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이와 같은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평화는 깨어지고 증오와 미움과 복수심만 남게 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관계에서도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우리는 때대로 실족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지만 여전히 성품과 행실이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온갖 시험에 맞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완전과 성화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며,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더욱 확장되기를, 매일의 일용할 양식으로도 만족하며 이웃과 더불어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이웃과 더불어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며,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온전한 성화를 이루어가기를, 날마다 기도하며 나가야 한다고 주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