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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학살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 일본의 중심지 도쿄와 간토(관동關東) 일대를 강타했다. 대지진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민심은 흉흉해지는 등 사회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923년 당시의 일본 경제는 불황에 시달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국가전복의 위기 상황이라 지진으로 인한 폭동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는 9월 1일부터 나돌기 시작하였고, 9월 2일에는 ‘조선인 폭동설’이 더욱 확대되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신문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마치 사실인 양 보도했다. 현지의 조선인들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보다 더 끔찍한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 날부터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들이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 때문에 도쿄는 저주받은 세계”와 같다는 제목의 기사들이 일본 민중을 자극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직접 유포하기도 하였고,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내려보낸 지침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 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학살의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학살은 도쿄와 가나가와현에서는 군과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현,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自警團)에 의해서 행해졌다. 자경단은 죽창, 일본도, 도끼, 곤봉 등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일본 관헌은 이를 방조하였다. 자경단에 학살당한 상당수의 희생자들은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하천, 스미다가와(隅田川)와 아라카와(荒川)가 떠내려오는 시체 때문에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2013년에 발굴된 독일 외무성이 1924년 3월 작성한 영문 사료(MASSACRE OF KOREANS IN JAPAN )에 따르면 기존에 알려진 것의 3~4배에 해당하는 총 2만3천58명이었다. [관련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30821154700005
희생자가 6천이든 2만이든 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 농정으로 땅을 잃고 생존을 위해 일본과 만주로 이동해야 했던 조선의 농민들이었다. 1920년대 초반 당시 일본에서는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 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제국의 위기로 판단한 당국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대지진을 계기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을 미화하거나 누락해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 것은 2013년이다. 출처: [이 풍진 세상에:티스토리] 요약
그들은 악마였다"···일본 '731부대'의 끔찍한 만행 / YTN
https://www.youtube.com/watch?v=yIPmA6XDias
간도 대학살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지청천 장군의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1933)와 함께 한국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된다. 청산리의 승리는 한국 독립군은 물론, 임시정부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사기를 드높였고 중국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지만, 독립군 부대와 만주 한인들의 앞날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이 조선인 박멸을 목표로 경신대토벌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의 광기어린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역사에서 간도학살(경신참변)이라 부르는 조선인 학살은 1920년 10월부터 무려 8개월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만여 명이 죽고 민가 2500여채, 학교 30여채가 불탔다.
북간도 지역의 네 개 마을에서는 3,664명이 무참히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1만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부대는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 간도토벌대와 조우하여 10월 21~ 26일까지 10여 차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런 와중에 1920년 8월 15일 오동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중국 관전현에 설립한 민족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도 수난을 당했다. 밀정 감영극(甘永極) 무리들이 배달의숙을 습격하여 수 천권의 책을 불살랐다.
또한 홍범도장군과 오동진장군의 자금 지원으로 발행한 환단고기의 편저자 운초 계연수 선생은 팔다리가 잘려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1920년 11월 3일 중국 길림성 통화현 반라배촌의 배달학교에도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 이 학교의 교장과 임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배달학교는 이시영, 이회영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의 지원으로 설립된 민족 교육의 본산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강제징용,위안부,독도문제 등, 신친일파의 득세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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