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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評論>
객관적 상관물, 그 생명의 역동
--꽃들의 안부(자유문학회 사화집)에서
李 晩 宰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
모든 예술품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장인(匠人)의 땀에 젖은 혼(魂)에서, 그 위대함이 비롯된다.
시작(詩作)도 다를 바가 없다.
시를 쓰면서 이성적 사고의 산물인, 시에 관한 이론을 전혀 무시해 버린다면 심상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오직 이론에만 집착한다면 상상력은 소멸 내지 감소될 것이다.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원동력이지만, 그 이론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必要惡)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론과 상상력은, 그 대립적 양상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물아 일치(物我一致), 즉 공통분모인 동일성(同一性)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상실했던, 외면했던 것을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개념이자, 자아인 것이다. 동일성, 그 감각이 시적 세계관의 핵심이며, 작품의 구성원리, 창작과정, 작품평가[鑑賞] 등은 이 공통원리에서 일관되어진다. 변화와 갈등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체험양상이다. 자신과 세계와의 격심한 변화를 체험하는 동시에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 더 나아가 자신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까지 소외와 갈등을 체험한다. 공시적이든 통시적이든 동일성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질서와 안전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다.
거개가 평자들은 일정한 자기관점에 의하여 일관된 시론을 개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 작품에서 나타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문제, 아니면 소홀히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점을 들추어, 창작에 도움이 되도록 질정(質正)하고 방향을 조언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튼 우리에게 불변적인 것은 본질이며 가식적이고 가변적인 것은 여벌일 뿐이다. 그 변화와 다양성과 차이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오직 창작의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화집<들꽃의 안부>에 든 53명의 시인 모두의 심상을 들쳐 보겠다.
������서병성-<을왕리 앞바다에서>
대개 문학작품 속에서 작자가 묘사한 심상들과 그 진리 주장들에 관련된 논제는 그 작품을 접하는 독자의 믿음(belief)과 일맥상통한다. 작자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자의 눈높이와 독자의 눈높이, 그것은 어느 정도로 독자의 선험적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신념들을 깔고서 작품을 대하려고 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작품 속에 명시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 묘사한 것들과 일치(一致)하거나 상치(相馳)하게 되는, 독자는 나름대로 그 작품의 해석 또는 상상적 수용성 그리고 평가를 결정해 주느냐는, 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독자의 몫이며 믿음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바다는 아버지를 감싸고 있다/바람 불어도 몸 한 번/철썩이는 것으로 끝내고/아버지가 거리의 바람을 등에 지고/어깨를 추스르듯/아버지가 내 生을 감싸듯/바다는 아버지의 生前을 감싸고 있다/바다는 눈감은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서병성에게 있어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다. 언제나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근원이면서 아버지의 땀방울이 출렁이는 현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공을 벗어나 영원한 진리의 삶터이며 이따금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바다와 아버지, 그 운명에 맞물려 역전(reversal)과 발견(discovery)이 반복되었듯이, 그에게 있어서도 바다의 역동은 침전된 내면세계로 하여금 향수(nostalgia)와 근면(勤勉)을 일깨우게 하면서 아련한 추억 속에 자신의 유년을 점철케 한다. 그래서 그의 가슴에는 바다가 항시 출렁인다.
������韓聖山-<그리운 날들>
중산층의 주동 인물들의 삶을 다루어 침울한, 흔히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pathos)이 있는 플롯을 지닌 희곡들을 부르즈와 비극(bourgeois tragedy)이라고 하며, 이는 곧 가정 비극(domestic tragedy)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현실에서 그 흔적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대가족제도에 반하여 부부와 그 자녀만으로 구성되는, 소가족인 핵가족(nuclear family)으로 인하여 전통적인 미풍양속이나 효(孝)사상마저 퇴색은 물론 단절의 벽에 갇혀 현대인 스스로 반유토피아(反utopia)의 기수가 되어 가는 듯하다.
저녁연기 볼 수 있다는 게/얼마나 행복하냐/달빛 풀어 논 냇물에/손발을 씻고/흩어졌던 식솔들 모여/다함께 숟가락을/들 수 있다는 것이……
韓聖山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선호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은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자유스럽게 살았던 아주 먼 과거에 있으며 역사의 과정은 그 행복했던 단계에서 점차로 타락하여 날로 더해 가는 인위성 복합성 억제 및 금지로 떨어져 왔다고 여기고 있을까. 좀더 인간적인 것, 토양에 가까운 삶을 이상으로 일가친척들과 대가족이 더불어 살았던 시절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리운 추억이 되었지만……
������김호숙-<그 여름 감나무>
시인은 신이 아니므로 시인이 나타낼 수 있는 묘사는 진리에의 도달이라기보다 진리에의 접근이나 방향성의 제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시인은 시작(詩作)을 위한 주제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고 기교를 활용하여 자연스러움과 균형 있는 조화를 위한 시어의 조탁에 기대어야 한다. 하지만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차원에서 심충을 거듭하며 시인이 좋은 시를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 하는 고심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종교적 발상이나 철학적 발상 또는 윤리적 발상이나 역사적 발상에서 그 열쇠를 발견하곤 한다.
가슴 패이며 생이별하지 않아도/익을 대로 익은 인연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을/웬일로 이 여름/너희들은 서두르며 살고 있구나
감꽃이 피고 진 그 자리에 결과(結果)된, 채 익지 않은 땡감의 낙명(落命)을 통해 윤회에 대한 갈증과 생명존엄의 모순을 생동감 있는 언어로 빚은 서정시이다. 시어에 있어 명료성과 모호성[神秘性]은 이론과 인식을 초월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靈妙)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예술성의 본질 요소를 의미하기에 김호숙은 그 본질에 근접하려고 함인가.
������진명화-<저무는 방죽포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I-know-not-what)’, 17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크게 유행되었고 인생과 예술의 모든 국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미(grace)를 지칭하는 문구로 후에 가끔 사용된, 비평용어의 소중한 표본이다. 특별히 분명한 이유 없이 아픈 그 이상한 느낌을 뜻하는 용어로 처음 쓰인 이것은 ‘뛰어난 아름다움(superior beauties)’ 또는 그 속성의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년의 아픈 상흔으로 박혀 있는/깨어진 조가비 하나/어둠속에서 하얗게 눈뜨게 합니다/……/첫사랑의 상흔으로 남은 깨어진 조가비도/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에 밀려/조용히 모래속으로 파묻혀갑니다/……/아쉽던 유년의 아픔도/붐비던 지난 여름의 벌거벗음도/조용히 조용히 잠재우며/방죽의 밤은/그렇게 깊어갑니다
진명화에게 있어 방죽포, 그곳의 대명사는 오직 선험적인 유년의 아픔이다. 수평선에서부터 먹빛으로 물들이는 어둠도 그렇고 바닷물에 허물어지는 모래성, 그리고 깨어진 조가비도 그렇다. 적어도 방죽포 모든 것들이 먼 과거의 풍경으로 열리고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으로 하여금 속병처럼 도질 듯한 아픔이 상상의 세계와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무릇 높은 가치를 지닌 운문(verse)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시(poetry) 또는 한 편의 시(poem)라는 용어를 특별히 사용한다. 분명한 사실은 둘 다 율격(meter)은 있으나 운문은 시보다 급이 낮다. 과연 운문과 시, 그 차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姜信卓-<8월의 新婦>
작품 속에서 어떤 대상이 구체적 보편(concrete universal)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부분들의 다양성, 부분들의 상호관계, 완전성, 통일성, 독립성 그리고 자기 유기성을 들 수 있다. 이 기준들에 의하면, 진정한 구체적 보편은 ‘절대자’ 또는 ‘세계 전체(world whole)'밖에 없다. 이는 이차적 의미로 이 대우주 안에 있는 소우주를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한 인간이나 하나의 예술작품이나 하나의 통합된 사회는 유일한 구체적 보편에 속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에 나타난 인물들, 행위들, 운율적 장치들, 단어들 및 은유들이 결합하여 이 보편을 형상화(形象化)하면 그 시는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가 되는 것이다.
북녘 산천 진달래/그래, ‘피바다’빛으로 피었는가/槿花鄕 향길 묶인 꽃울음/재너머 ‘꽃파는 처녀’의/붉은 눈물살이 눈그늘을 본다//이젠 만나야겠다/눈그늘 밝게 펴고 만나자, 鮮/지뢰와 철조망을 걷어버린 오래뜰/초록숨결 입술맞이 새로이/8월 대문 양지바른 새아침에
강신탁은 시선은 멀리 북녘 재너머를 바라보면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골 깊은 역사의 분단을 되새김하듯, 갈 수 없는 고향, 오매불망 대상인 ‘선(鮮)’을 부르짖는다. 분류하자면 일종의 서사시(epic)이다. 대개 서사시는 위대하고 진지한 주체를 지니며, 고양된 문체로 읊조리어지고 행동 여하로 한 종족이나 국가나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영웅적 또는 준신적(準神的)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인용된 시에서는……동대문운동장 백색 인파와/남산숲 적색 인사태/남대문으로 소용돌이쳤던/대례청 용마루 갈라진 그때/……재넘잇바람 따라 간 선(鮮)과의 재회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이미 설정된 기다림의 한계선까지 옴으로써 더는 시간이 없음인지……이제 만나야겠다……단호하면서 역동적인 분화구가 되어 전율한다.
������송세희-<그림자․1>
작품의 문학성은 표현행위, 언어행위 자체에 있다. 언어의 지시적인 면과 논리적인 관계를 ‘뒤로 물러나게 함(背景化 : back-grounding)’으로써 시는 말 자체를 음성기호로서 ‘감촉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 매체를 앞에 내세우는 문학의 일차적 목표는 슈클로프스키에 따르면, ‘멀어지게 하는(estrangement)' 또는 낯설게 하는(defamiliarization)' 데 있다. 말과 글의 일상 양식들을 붕괴시킴으로써, 문학은 일상 지각의 세계를, ’낯설게 하여‘ 독자가 상실한 신선한 감각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다.
어느 날/月山이가/月山아, 月山아, 부르며/땅바닥에 누웠다//가슴속에 산 하나/품고 살던 이가/日日, 月月을 염하며/月月, 山山을 염장친다
인용한 시의 부제가 ‘달그림자’이다.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 유머(humour)라면, 지적인 것은 위트(wit)라 할 수 있다. 유머는 주로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나 위트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송세희는 위트[낯설기 포함]에 뛰어난 듯하다. 뿐만 아니라, 작품이 구성되는 중심적 또는 지배적인 비유(figure), 즉 근본적 이미지는 묘사와 사물의 중요한 일면이나 특징을 보아 단순하게 통합원리로 환원시켜서 집약되고 명료하게 주제를 드러나고 있다. 월산은 사람이 아닌 달그림자, 자기가 자신을 부르면서 땅에 누웠다거나 날이면 날마다 죽은 달(?)을 씻은 다음,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묶는다거나 그 달이 산의 시체를 염습하여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상당한 정신세계의 교감이 아니고선 표출되기 어렵다. 마치 선미(禪味)를 대하는 듯한……
������옥경운-<눈 꽃>
예술 작품은 내용과 형식의 효과적인 합일(合一)로 이루어진다.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역시 좋은 소재와 세련된 기술과 열정이 아우러져 구성의 균형 있는 조화로 일정한 수준의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격조(格調)라거나 운치(韻致)라고 부른다. I. A. 리처즈는 의사 전달, 특히 시의 의미를 논하면서 네 가지 다른 의미를 약술했다. (1)뜻(sense) : 말해진 것, 즉 시인에 의해 지시된 ‘사물들(items)’. (2)감정(feeling) : 시인이 사물들에 대해 지닌 정서적 태도들. (3)어조(tone) : 대중에 대한 시인의 태도. (4)의도(intention) :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시인의 목적--등은 통찰력이 있는 독자라면, 이 네 가지 의미의 상호작용을 파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린 가슴끼리 서로/기대고 살고 싶었다/고운 햇살 안고/눈물나도록/사랑하며 살다가/그대 가슴에 별처럼 스러지는 날/비로소 한몸되고 싶었다/한 방울 피가 되고 싶었다
언어는 상징적 질서에 속한다. 자아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이며, 또한 자아가 재현되거나 구성되는 역시 상징적 질서, 곧 언어를 통해서이다. 이렇듯 옥경운은 언어를 통해서 차디찬 눈꽃에 생명을 부여하여 뜨겁게 흐르는 피로 승화시킨다. 때로는 언어는 자아를 생산한다기보다는 자아를 죽인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사회생활, 이른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일은 끊임없는 자아 소멸과 욕망의 늪을 헤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최정남-<팬터마임>
무언극(無言劇)은 자세, 제스처(gesture), 몸동작 그리고 과장된 얼굴 표정만을 사용하여 어떤 인물의 행동을 흉내내고(mime), 어떤 인물의 감성을 표현하는 말없는 연극이다. 드라마와 무용 중간에 위치한 정교한 팬터마임(pantomime)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상연되었는데, 그 형식은 보통 희극적 목적으로 르네상스 유럽에서 다시 부활되었다.
일상의식의 차원에서, 즉 실제의 현실에서 자아와 세계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자아는 타인과 분명히 다르며 자아 아닌 모든 사물과도 엄연히 분리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내면화(自我化 또는 人間化)한다. 대개 서정시에서 자아와 세계는 동일성 내지 일체감의 상상적 공간 속에 놓인다.
한 편의 詩를 쓰면 술 한 잔을 마시고/술잔속을 떠다니는 도시/후미진 창가에 등불밝히는/소읍의 빈곤이 어깨를 짓누른다//……//어느 차창에 非命橫死 했을까/깃털만큼 가벼워진 작은 새의 시신위에/못다 한 事緣 두고 言語들이/떠다닌다/나도 저 주검처럼 구겨지면 어쩌나/산까치둥지처럼 버려지면 어쩌나/가쁜숨 몰아쉬면 무너져내리는 저녁/찬바람이 폐부속으로 파고든다
시인이란 누구인가. 그 마음은 남 모르는 고뇌에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탄식과 비명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꾸도록 된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이다(kierkegaard). 이는 마치 최정남을 일컬어 하는 말인 듯 싶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인이 직면한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아는, 그 진실의 접근은 고뇌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小邑의 빈곤이 어깨를 짓누른다/……/어느 차창에 비명횡사 했을까/……에서는, 절망감에 무너져내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유사성이나 동일성은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적 시인이나 그 대응관계에 있는 대상적 사물 사이에 내재하는 상사성(相似性)을 전제로 한다.
������文峯仙-<만년필 씨 귀하>
무생물이나 추상적 개념이 마치 생명이나 인간의 속성이나 감정이 부여된 듯한 비유를 의인화(personification)라고 한다. 이렇듯이 자연물에 사람의 능력과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하여 존 러스킨(John Ruskin)이 1856년에 만들어 낸 문구가 ‘감상적 오류(感傷的 誤謬, pathetic fallacy)인 것이다. 또한 수사학(修辭學)에서 비유의 감각적 쾌감을 강조하는 반면,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겠다.
붉은 핏방울이 흰살결위에서 다 타들어가도록/늘 나를 허기지게 하는 배불뚝이바보/죽지 말아라, 죽지 말아라/어느날 네 맘대로 날 가지고 놀리기도 하는 마술대롱/내가 날 평생 문지르고 찔러 닳아빠지게 해도/내 몸과 마음은 언제나 하프를 켤 수 있어 기쁘다
토테미즘(totemism)이나 애니미즘(animism)의 영향을 받은 문학 작품에 나타난 그 대상에는 꽃이나 나무 등 식물로부터 호랑이, 여우, 거북 등의 동물, 지팡이, 빗자루, 종이, 바늘 등의 사물, 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추상적 관념 등이 주로 의인화되어 있다. 文峯仙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는 의태법(mimesis)으로써 만년필의 실제 모양이나 움직임, 성질이나 감각 등을 느낌이나 특징에 따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선명감을 주는 장식,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 새로운 말의 창조, 지적 자극 등등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정작 시적 비유를 가지고 논할 때, 피상적임을 알게 된다.
������������김 민-<으능나무그늘에 앉아>
시적(詩的)인 성질을 지녔다고 상정(想定)되는 말을 통틀어 시어(詩語)라고 한다. 그러므로 시어는 저급하거나 전문적이거나 범속한 용어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우회적이고 고상한 용어의 사용을 추구해 왔다. 시인들은 산문의 언어와 운문의 언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타당성 있는 시어의 판단 기준은 그것이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유출이냐 아니냐에 있다고 보았다. 즉 시에 쓰이는 용어와 일반 문장에 쓰이는 용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의미론적(意味論的) 측면에서 시적 언어는 함축적 의미로 사용되고 과학적 언어는 지시적 의미로 사용된다.
너는/남지나(南支那)가 고향인 갈잎 큰키나무/5월 연초록의 꽃이 바람에 날고/9월 한때 절제하여 사랑을 하는 너는/남녀가 유별한 정갈한 사람이고나/……/하마하마/애달픈 고름같은 얘기를/서리서리 묵히며/썩어문드러진 외피로/고약한 냄새 풍겨대는 너는/영사(靈蛇)를 네 몸속에 키우기도 하는/독한 데가 있는 한 마리 영생하는 짐승이고나
으능나무는 곧 은행(銀杏)나무이며, 중국 원산(原産)으로 한국․일본에 분포되어 있으며 주로 풍치목, 가로수, 정자목(亭子木)으로 심으며 조각, 가구용제, 특히 상재(床材)에 적당하다. 김 민은 은행나무를 의인화하여 그 한해의 변모하는 모습을 읊는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시에 있어서의 재료는 언어이며 언어는 일상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나 시의 창작의 경우에는 일상적 어법이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그러한 변형 내지 파괴는 현실[事實] 이상의 것[世界]을 추구하는 행위에 허용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늘어뜨리는 것이 낯설게하기 위함이라도 미적(美的)인 기쁨을 얼마나 누릴 수 있을까.
������������박두순-<상 처>
정서(情緖)는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다. 시인은 객관적 상관물[事物]을 특수한 관점으로 보고 있으며, 그것에 시인의 주관적 감정이 착색되어진다. 그러므로 시의 이미지(image)는 실제의 대상과는 다른 것이며 시인의 주관적 감정에 따라 선택된 것이다. 이미지의 선택은 자의적이 아니라 시인이 묘사하고자 한 주관적 정서에 좌우된다. 정서는 한 편의 시 속에 선택된 여러 이미지들을 동일화하고 통일시킨다.
흔들린 만큼/시달린 만큼/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상처를 믿고/맘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상처를 믿고/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큰 상처일수록/큰 안식처가 된다
……당신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고 있는 일들은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하라. 쇠는 달구어야 굳어진다. 당신도 지금의 그 시련을 통하여 더욱 굳건한 정신을 얻게 될 것(Augustinus)이고……실패하여 넘어지는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항복해 버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런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지혜나 돈이나 재능이 아니고 뼈다. 흐느적거리는 몸에 뼈를 넣어 주고 싶다(J. Ford)고……한 것처럼 박두순의 삶의 공식 또한 그런 맥락이다. 상처가 깊고 클수록 그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朴山梅-<한 잔은 비워두고>
주관주의(subjectivism). 문학의 주관적․내면적 체험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의미한자.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는 개관 세계를 거부하고, 자기의 주관 즉 내면 세계에 들어 있는 현실과 격리된 상상의 세계나 심리 세계를 이끌어 내는 데에 주력한다. 작가가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 기질, 판단, 가치 기술, 감정 등을 작품에 넣어 구체화시킨 작품을 일컬어 주관적 작품(主觀的 作品)이라고 한다.
눈물은 강물에 뿌리고/맹물은 마시고/한 잔은 비워두고//눈썹그렁지/해질녘 꿈을 씻어//바람결에 걸어놓았다
사상이나 예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제재나 시상 또는 근본적인 의도가 주제(theme)이며 문학 작품에서는 작품의 제재(subject-matter)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을 가리킨다. 인용된 작품 전문에서는 그것이 없다. 주제는 제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작품이 의도하는 내용 자체를 포괄하는 성질을 가진다. 朴山梅는 의도론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를 실험하는 것일까. 대개 문학 작품의 의미에는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와 작가가 작품에서 표현하려고 의도한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선 이 둘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시인 자신의 설명이 없으면 난삽 난해하여 실제의 의미나 의도로서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주제가 선명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을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申在善-<맨발아기․1>
시는 동기를 통해서 중심사상이 유발되어 구체적인 형상화로 나타내야 한다. 시적 모티프(motif)도 시적 착상이 떠올랐을 때, 포착해야만 창작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시적 동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시에 있어서 모티프 자체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되고 있느냐에 따라 시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막연한 관념만으로는 감동을 공유할 수 없다. 추상적 개념이나 그러한 관념만으로 구체성을 띌 수가 있을까.
더운 여름날 맨발로 다니더니/찬가을엔 꽃 신었다/학이 몸을 스치듯 지나가니/우리도 금방 지워져버린다/언젠가는 너도 나도/맨발아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논리와 비논리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논리란 보편성을 뜻하고 비논리란 특수성을 뜻한다. 이렇듯이 모든 사물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성상적(性相的)인 면과 보이는 형상적(形狀的)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두 요소를 합쳐서 형상이라고 일컫는다. 申在善의 형상은 명료하다기보다 오히려 막연하고 중심사상은 불투명하다. 그리고 그 주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난해하다. 모든 예술에서 문학에서 시에서 내적인 무형의 내용과 외적인 유형의 형식을 균형 있게 조화시킨다면 그 무게와 깊이에 대한 높은 수준을 평자는 물론 독자들이 가름할 수 있지 않을까.
������������유회숙-<풍 경․2>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poetica)에서, ‘연민과 공포에 의하여 비극은 그 감정들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이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정화(淨化, purificat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배설(排泄, purgation)의 의미이다. 정화는 종교상의 의식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고 심신(心身)을 깨끗이 한다는 뜻에서 전용되어 감정의 불순한 부분을 씻어 없앤다는 뜻이며 배설은 의학상의 배설이라는 의미의 은유로 해석된다.
그늘에 두 여자가 앉아있다/미루나무가 아니라고 우기는 여자와/그렇다고 우기는 여자/두 여자는 미루나무를 잘 안다//딱, 딱 소리를 가리키며 딱따구리라고/한 여자가 말한다, 새가/열매씨를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아니다, 발톱으로 누르고 부리로 쪼고 있다.
언어가 기호에 의하여 뜻을 가지며 예술이 의장(design)에 의하여 뜻을 나타내는 반면, 문학 작품은 미적 표면이란 기호가 의장 속에서 새로이 구체화된다. 시인은 창조과정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일차적으로 재료의 선택이며 이차적으로 미적 효과를 위한 문체론적 선택, 곧 예술적 의장의 선택이다. 유회숙의 시에 나타난 시어들은 산문적 요소로 인해 의장과는 등한한 결과가 아닐까.
������������문상일-<약 속>
좋은 시가 되려면 적합한 언어를 찾아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언어에 대해 민감한 감식능력이 있어야 하고 적합한 자리에 끼워 넣기 위해서는 문장의 조립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부분은 전체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듯이 행과 행, 연과 연은 전체적인 시작품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제가 명확치 않거나 문장이 너무 길게 늘어지거나 아주 평범한 산문이거나 의식이 과잉되어 있는 시(?)는 독자들로부터 우롱 당하게 될 것이다.
어린시절 부모님께 한 약속/형제들과 친구들/아내와 자식에게 이르는/스스로 약속한 말들을 묻을 수 없다//어둠에 둔 약속이/솟아나는 영롱한 아침햇살에 눈부셔/그만 무의식으로 자리에 일어선다/빛의 어둠속에서 나를 찾았다
시적 파격(詩的破格, poetic license). 드라이든(dryden)은 시적 파격을 ‘산문의 엄격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운문으로 말하는, 모든 시대의 시인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허용해 온 자유’라고 정의했다. 문법, 어순, 고어(古語)나 신조어(新造語) 사용의 전통적 사용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시인이 표준 산문에서 이탈하는 것을 정당화시켜 준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시적 파격은 율격(meter)과 운(rhyme)의 이용, 허구와 신화 이용을 포함해서, 언어의 축자적 진실의 일상적 규범들을 시인이 마음대로 깨뜨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방식에 쓰인다. 형식상의 행과 연이 구분되어 있으나 그것은 일반 산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문장이 시로 나타나 있을 때, 우리는 그도 일종의 시적 파격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시현-<빗사이로>
우연히 일어나는 인간의 심리 현상이란 것은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다(Freud, Sigmund). 즉 인간의 행위 그 자체가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그 심증에는 무의식적인 정신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의 기저(基底)에 작용하는 동기(動機)는 무엇이며, 그 심적인 에너지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그 에너지는 다른 심적 에너지로부터 방해받지는 않는지, 그래서 다른 어떤 곳으로 분출하려 하는지 않는지 등 인간의 정신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이 학설을 도입하여 작품의 요소들을 분석하거나 작자가 즐겨 쓰는 ‘개인적 상징’ 따위를 주제에 결부시켜 작품을 해석한다.
빗사이로 머리카락이 흐른다//별 하나에/내 한 올의 머리카락을 심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지구는 잘 잠긴 태엽처럼 돌고 있었다/우주의 별들에 뿌려진 내 머리카락의 씨알들/잘 자라고 있구나/칭칭 휘감은 빗사이로 흐르던 시냇물
인간의 감각기관, 즉 오관(五官)을 통해서 성립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큰 단위, 곧 대심상(大心想, imagery)을 가리키는 말이며 정신적 심상(精神的心想)이다. 부연하면, 독자(또는 聽者)가 어떤 작품을 읽고 독자는 마음 속에 어떤 감각을 재생시킨다.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을 비롯한 여러 감각적 사실을 언어로 재생시켜, 어떤 상(상)을 우리 머리에 떠오르게 하면 그것은 정신적 심상이 재현된 것으로 본다. 이시현은 머리를 빗질하면서 모발의 생태를 우주의 일부로 접목시키려고 한다.
������������정 희-<늙은 시계 수리공>
시는 정서적 사유나 한정된 사건이나 어떠한 동식물 등 사물에 대한 감정적으로 ‘유사한 모습’ 또는 ‘환상’을 창조하기 때문에 시는 경험적 구체적 사건을 제시한다. ‘서정적 특질은 감수성이나 정조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그 정조는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옛 생각, 유년기의 회상, 시인으로 하여금 고대의 숭배자가 되게 한 과거다(G. Leopard)’. ‘시인은 고통의 와중에서 그 고통을 노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시는 한층 온화하고 거리를 둔 기억으로부터 써야 하지 현재의 정서에서 써서는 안 된다(J. C. F. Schiller). 그리고 ’감정의 유로는 고요히 회상된 정서로부터 유래한다(W.W.Worthwords) 등은 감각체험을 시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기억의 초연성의 기능을 나타난 말들이다. 무사무욕의 상태에서 상상력을 작용하게 하는 기억은 단순히 상상력의 보조자가 아니라 상상력의 근본이다.
남대문 시장 시계골목/작은 시계수리점 ‘남일사’//한 평 남짓한 골방에 개구리눈으로 툭 불거져나온 돋보기 시계 수리공 김씨//똑딱거리는 시계소리에 6순을 훌쩍 넘기고/고장난 시계를 오늘도 만진다//낡은 시계들이 꼬리표를 달고/먼지 속에 쌓여있다//시계줄이 그를 꼭 잡고 있다
근본적 이미지(fundament image)란 작품이 구성되는 중심적인 또는 지배적인 비유(figure)이다. 정 희의 시에서 나타난 근본적 이미지는 장인(匠人, 전문적으로 수공에 의하여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는 사람)이며 그 정신이다. 장인의 외곬으로 파고드는 끈질긴 진지한 삶의 자세를 수준 높은 은유로 읊는다. 예술인의 정신, 그것이 바로 창조라는 점에서 장인정신과 일맥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복합적 전체를 하나의 주요 특징이나 통합 원리로 환원시켰으며 그 묘사가 단순하여 집약되어 명료하다.
������������양 선-<새벽달 가르기>
흔히 다듬어지지 않은, 무미하고 일관성이 없는 시나 또는 격을 갖추지 아니하고 속어(俗語)나 비어(卑語) 등을 써서 익살스럽게 쓴 상스러운 시를 일컬어 광시(狂詩, doggerel)라 한다. 대개의 경우, 작자의 무지의 결과라고 하지만 때로는 풍자와 익살 등의 효과를 위하여 고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간결한 시를 들자면 금언시(金言詩, gnomic verse)을 말할 수 있다. ‘gnomic’은 ‘의견’ 또는 ‘판단’이란 뜻을 지닌, 일반적 진리의 짧고 간결한 진술을 뜻하게 된다.
날 갈아/달 갈아/숫돌만 갈아/헐거운 칼첨자 젓가락으로 날자
양 선이 초승에 돋는 눈썹처럼 가는 조각달을 읊은, 4행 24자의 지극히 짧은 서정이다. 이처럼 짧거나 묘사만으로 시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실험적 시도가 아닌가 싶다. 칼날을 숫돌에 갈아 닳도록 가느다랗게 된 조각달이 마치……헐거운 칼첨자 젓가락으로 날다……는 묘사적 심상 기법(描寫的心象技法)으로 표출하고 있다. 어떤 시적 대상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을 묘사하거나 감각적인 수식어를 사용하여 사물의 영상을 직접 드러나게 한 심상인 것이다. 그러나 간결성도 좋으나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권희자-<꿈을 엮으며>
순수시(純粹詩, pure poetry). 작품에서 비시적(非詩的)인 요소들을 전부 제거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차원만을 요구하며 예술성만을 추구한 시이다. 어떤 의미나 내용, 사상, 교훈 같은 것을 전하려고 하지 않으며 언어 자체나 그 음조를 중시한다. 역사, 전설, 도덕, 철학 등의 산문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적 기능만을 활용하여 짓기 때문에 유미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나타낸다.
빈개펄 웅덩이엔/갈매기떼 날며/조개와 새우를 물어올린다/벌거벗은 파도는 엉덩이를 뒤집으며/10리 바위와 5리 바위를 부수고/허리띠를 풀게 한다/남아 있는 소리의 얼룩을 지운다
자연의 풍경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한 시를 일컬어 서경시(敍景詩)라 한다. 표면상으로는 자연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은연중에 시인의 심리 상태나 심정 등이 암시적으로 들어 있다. 권희자는 인용된 시에서 바닷가 풍경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읊는다. 이렇듯이 서경시는 풍경의 묘사라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분위기나 느낌, 감정 등을 표출한다.
������������鄭光燮-<東海 詩篇>
돈호법(頓呼法, apostrophe)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추상적이거나 무생물적인 실체에게 직접 하는 말이다. 흔히 그 효과는 고도의 형식성이나 갑작스러운 정서적 충동이다. 콜리지(coleridge)는 그의 시 ‘사랑의 추억(recollections of love)’에서 자기 애인을 생각하다 말고 갑자기 그레타(greta) 강을 돈호했다……그러나 저 온순한 눈이 처음 내게/말할 듯했을 때, 그대 속에서 사랑이 움직여--/오 그레타, 사랑스런 조국의 강이여……만약 이러한 말을 시인의 창작에 도움을 주는 신이나 시신(詩神, muse)에게 한다면, 그것을 기원(祈願, invocation)이라 부른다.
용솟음치는 生命의 저 푸른 젖꼭지를 빨아보아라/……/바다목장에서 쉼없는 人生을 깊이깊이 경작하고 있지 않느냐/東海의 저 장엄한 신새벽을 만나보았느냐/……/땀흘리는 별들의 찬란한 宮殿이 보이지않느냐
실제 응답을 끌어내려고 묻는 질문은 아니다. 묻는 사람이 분명한 대답이라고 생각되는 대답을 듣는 사람이 스스로 하도록 요청함으로써 직접 진술보다 강한 어조를 얻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수사학적 질문(rhetorical question)인 것이다. 鄭光燮은 동해를 예찬하는 마음을 돈호법에 의존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비유는 설득적인 말이나 글에 가장 많이 쓰이며, 연설에 웅변적 어조를 띠게 하는 경향이 있다.
������������윤순정-<고란사의 새벽>
불타(佛陀)의 입적(入寂, B.C. 480) 후, 그의 교설(敎說)을 편찬한 경전(經典)과 불타의 세계관 및 종교 사상 등을 주제로 한 문예 작품을 통틀어 불교문학(佛敎文學)이라 말한다. 특히 ‘경전’은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기 위하여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 오욕칠정(五慾七情) 등을 엮은 것이어서 문예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문학에서 소설은 이광수(李光洙)가 지은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원효대사(元曉大師)’ 등을 비롯하여 시는 한용운(韓龍雲), 오상순(吳相淳), 서정주(徐廷柱), 조지훈(趙芝薰) 등에 의해서 불교문학의 맥이 이어졌다.
희색장삼은 수직의 파문을 일으키고/흰고무신 갈지자로 붙박고 섰다./피리를 조율하는/하얗고 여린 손가락 마디마디/끊어질 듯 끓어질 듯/들려오는 정한의 소리/내 가슴속 깊이깊이 묻혀버린/한숨까지 끄집어내 가더니
윤순정은 고란사의 피리소리를 통해 잠재된 불심을 재생하고서 석가모니의 무량공덕을 송영(誦詠)하며 불법의 오리(奧理)를 탐미하는 심상에서 표현된 시라고 하겠다. 인용된 시의 피리소리를……정한의 소리……로 , 즉 인간의 근원적 고통의 소리로 환치하여 이미지의 증대를 꾀하면서 깊고 그윽한 불심을 그린다.
������������金顯燮-<베르디에게>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형식을 취하는 수사법 중 변화법의 하나가 돈호법(頓呼法, apostrophe). 즉 평탄한 서술로 나아가던 문장이, 갑자기 가락을 바꾸어 부름말을 써서 읽는 이의 주목을 끈다든지, 새로운 대상으로 급전환하는 화제로 옮겨가는 수법이다. 예를 들면, ‘신이여!’라든가 ‘어머니!’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격한 감정을 드러내어 읽는 이의 주의를 끈다. 신석정(辛夕汀)의 시<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서……/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처럼 대자연의 이상향으로서의 전원을 그리는 마음을 절실하게 나타낸다.
베르디/우기는 아직도 걷히지않았다/……/사랑하는 베르디여/아무리 둘러봐도 그대가 찾던 연인은 보이지 않는다/그대처럼 영원한 안식에 들었을까/……/나는 빗속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베르디여
金顯燮은 비와 음악 그리고 갈대를 연상하면서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의 영혼에게 독백하듯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을 드러낸다. 외계 의식에 대립되는 자아(自我)에 관한 의식으로, 자아에 대한 의식, 즉 외부 세계와 유리(遊離)된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에게 묶여 있는 의식. 사회 의식(social-consciousness)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회적인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에게 중심을 두며, 언어나 행동에서도 자기 우선적이며 자기에게 묶여 있는 의식 상태를 뜻하다.
������������문 숙-<도 마>
서정시는 자아와 세계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존재 양식이라 할 때, 단순한 수동적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세계로 변용 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시의 세계는 환상적 세계요, 가정(假定)의 세계이며 묘사에 있어 기능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칼날을 견딜 때마다/아린 상처가 물로 헹궈지고/갈수록 축축해지던 도마/매운 고춧물을 뒤집어쓰고/붉게 얼룩진 무늬들/이젠 그 흔적마저도 뭉그러진/푸른 날 가슴속에 새기던 나이테//아버지의 꿈이 삭은 자리마다/곰팡이꽃이 핀다
어떠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적 사물이 지니고 있는 소성(素性)이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인 시인에게도 이미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닌 소성이 시인의 관념의 눈에 내재되어 있기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요소로서의 관념의 눈은 유사안식(類似眼識)이라 할 수 있다. 문 숙에게 있어 ‘도마’는 곧 ‘아버지의 꿈이 삭은 자리’로 변용된 것처럼 주체자로서의 관리자와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이의 교감이 잘 이루어진다.
������������이원명-<피 서>
자연을 감상하여 지은 옛 시에서 시인들은 자연을 보이는 그대로 감상하기보다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했다. 이를 가리켜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고 한다. 즉 먼저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에서 자연의 정경을 읊었고 후에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에서는 자연 대상에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읊었다.
산중턱에 걸터앉은//숨이 찬 산이/살며시 물속으로 내려앉아/깊은 禪에 들면//새의 깃털같은 한가로운 그림자//더위를 가르며/아이와 어른이 신선되는/지리산 내대리 계곡//무거운 시름마저 가라앉은 물속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전한 선법(禪法)으로 오도(悟道)를 구하는 선종(禪宗)은 초기 중국 불교에서는 좌선에 전념하는 사람들 계통을 통틀어 선종, 불심종(佛心宗), 달마종(達磨宗)이라고 한다. 이원명은 지리산의 산경에 들어 자연의 신비감에 도취되어 마치 선(禪)을 수행하는 운수(雲水, 승려)가 되듯, 그로 얻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읊는 듯하다. 선미(禪味)를 자아낸다.
������������許 鎭-<눈 물>
사색을 통해서 얻어진 개인의 감정을 리듬이나 선율에 얹어 관조적으로 읊은 시를 일컬어 서정시(抒情詩, lyric)라 한다. 주관적이고 내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서사시(敍事詩)’와 구별된다. 대개 서정시는 대부분 독백형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정련된 언어와 풍부한 운율미에 의존하며 줄거리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 형식이 짧은 것이 통례이다.
내 속엔 벌써 나무가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나무는 그대를 그리워하며 걸어나오고 있었나 봅니다/좁은 문을 막 열고서 어제 본 사랑을 또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그대에게 철없이 다가갈수록 사랑은 자라나고 있었나 봅니다/언제나 비가 오고 있었나 봅니다/그대의 눈물이 매일 그리움만큼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
인용한 시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며 그 그리움을 읊는다. 이는 서정시의 하나인 연애시(戀愛詩)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걸어나오고 있었나 봅니다--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등에서 나타난 ‘--있었나 봅니다’는, 시인의 짐작이나 막연한 자기 의향을 나타내는 용언의 의미인 보조형용사, ‘--나 보다’를 반복법으로 사용하여 시인의 의도를 증폭시키며 대상[그대]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윤선-<담뜰댁>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피할 수 없는 운명 등의 관계에서 생기는 인간의 불행이나 고통을 주제로 하며, 특성은 첨예한 갈등(complic, 감정의 갈등, 사고방식의 갈등, 인간과 인간 또는 환경과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비극(悲劇, tragedy)이라고 한다.
몇 번이고/보성강 살얼음 달리다가/8남매 눈망울에 목 붙잡혀/그 강에 묻어버린 눈물//약초망태기에 담긴/산 무게만큼의 시간 흘러와/틀니마저 지탱할 수 없는/육신속에 갇혀//빈 껍질 유봉리에/나목으로 서계신다
빈궁문학(貧窮文學)은 소재를 빈궁한 사람들에게서 얻어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 빈농가(貧農家), 도시 빈민 등의 인물이 주요 등장 인물이었으며 작품의 결말은 대개 죽음이나 실패인 극한 상황으로 나타난다. 인용한 시는 그야말로 비감(悲感)이다. 무능한 부친에 대한 원망과 가난 속에 발부둥쳤던 모친, 그 안타까움을 읊은 애가(哀歌)이다……빈껍질 유봉리에/나목으로 서계신다……라는 종결부분에서, 모두가 떠나고 없는 빈 고향에 외로이 선 나목(裸木)같은 담뜸댁인 어머니, 노쇠한 그 모습에서 세월의 잔혹함과 허탈감을 더해 준다.
������������김재란-<금낭화>
시작(詩作)에 있어 대상을 묘사(描寫)하는 데는 그 전부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 그리고 부분과 부분의 연관성을 가지고 유기적 통일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묘사는 체제(體制)와 조성(組成)을 헤아려야 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개개의 사물이 이루는 통일감, 전체감, 입체감을 유발시킨다. 묘사에 사용되는 수법은 가장 중요한 인상과 적절한 관점을 선택하고 중심적 인상을 효과적으로 창조할 특징적 부분을 선택하며 독자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인 어떤 사물의 모양, 빛깔, 소리, 맛, 촉감 등의 인상을 자극하는 형식을 갖는다.
연분홍빛얼굴/너무나 맑아/하얗게 내비치는 속마음/울없는 시골집/양지바른 토방아래/유순한 기다림 곱기도 했다/……/깊은 골짜기/저녁해 일찍 진다한들/다시 살아 만날 약속/믿지않으랴//굽이마다 연등이구나
금낭화(錦囊花)는 양꽃주머니과에 속하는 다년초이며 일명 ‘며느리주머니’라고 부른다. 전체가 희읍스름하고(60m), 5-6월에 담홍색의 꽃이 핀다. 중국 원산으로 인가 부근에 나는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인용한 김재란의 시는 대체로 구체성과 객관성을 성취한 순수시(純粹詩, pure poetry)다. 금낭화의 꽃대에 총총하게 매달린 꽃들을 연등이 매달린 것으로 형상화한다.
������������진 성-<뒷모습>
시적 언어(poetic language)란 시적인 통사법(統辭法)을 의미하고 리듬, 낱말, 통사 등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어떤 시인이 한 특정한 시어를 즐겨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그 시인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수단이 된다. 연상과 내포는 시적 의미를 암시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시인들이 어떤 시어를 애호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시대의 시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한 송이 화려한 모란꽃으로 기억되길/모란꽃으로 기억되길/모란꽃은 못돼도/한 송이 붉디붉은 백일홍으로 남길/백일홍은 아니라도/시집간 누이얼굴같은/한 송이 찔레꽃으로나 보여지길//바람 불 때/바람앞에 눕는/자신을 일깨워/피워 낸 꽃/풀섶에 적힌 하얀 점같은/한 송이 찔레꽃으로나 보여지길
클레세(cliche)란 일반적인 용법에서 너무 이탈되어 있어서 그 문구 자체에 눈길을 끌며,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면 진부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표현을 뜻한다. 진 성은 멀어져 가는 대상에 대한 미련과 염원을 읊는다. 그 염원의 변용은 모란꽃--백일홍--찔레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미완(未完)의 종결, 각 행 모두 끝이 없는 종결로써 어말 어미인 ‘--ㄹ'를 사용하여 추측, 예정, 의지, 가능성 등의 속뜻을 지니면서 미래 시제(時制)를 나타내고 있으나, 이런 방법이 시적 언어로써 얼마나 효과를 얻을까.
������������고 운-<어느 날 꿈속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하면 문학은 제도화된 허구(虛構, fiction)이며 허구적 제도가 된다.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은 모든 비유를 달리하여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이며 이것들을 형식화함으로써 하나의 총체로 인식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은 금지를 위반하는 일이다. 이 금지 위반을 통하여 문학은 법을 만들 수 있는 법이 된다. 그러므로 문학은 사회의 법을 고양하거나 무시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개념을 통해 법의 본질에 대한 사유가 가능하다. 따지고 보면 문학이라는 제도는 반사회제도로써, 사회제도를 초극하는, 그런 제도를 뛰어넘는 제도, 참으로 이상한 제도인 셈이다. 그래서 문학을 일컬어 허구라고 하는가.
흐드러지게 핀 꽃무리속에서/상처입은 나비 한 마리/서성대다가/소년의 채집망에 걸려/허우적거리고//안개꽃에 둘러싸인 호수에서/물오리 암수 한 쌍/날개 비비며/서로를 향해/구애할 때//물안경 쓴 잠수부/지난 밤 가라앉은 달 주우려/투명한 호수바닥으로 내려가서/보름이 진난 후/사랑이란 두 글자를 건져올릴 때
문학에서는 흔히 화자가 신비로운 장소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의 사건들을 몽상(夢想, dream vision)이라 한다. 고 운의 시도 그러하다. 현실-꿈-현실의 2중 구조를 가지면서 두 공간에 걸쳐 일관된 문제를 다룬다. 이를 환몽구조(幻夢構造)라고 하는데, 대체로 ①초월적 세계(또는 세속의 세계)에서 세속의 삶(또는 초월적인 삶)을 동경하던 화자가, ②꿈을 통해 이 세상에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 파란 많은 영웅적 생애를 누리고, ③다시 꿈을 깨어 세속의 세계(또는 초월적인 세계)를 떠난다는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한다-<평생을 달린다>
시인이 언어예술인 시를 창작하기 위해서 먼저 외계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한다. 한 순간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진 여러 가지 감각적 요소의 종합에서 감흥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감흥을 감정 또는 정서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를 흔히 감정과 사상의 표현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은 감각과 감수성에 의한 감흥의 단계이고 사상은 그러한 단계 다음에 의미와 관념을 부여하는 단계에서 형성되어진다.
하늘 한가운데 실금을 건다/초생달은 저 아래 버려두고/한평생을 허궁에 매달려/가늘디가는 달빛실을 뽑는다/……/달빛 하늘피 뽑아/새끼손톱만한 솜털집을 다시 짓는다/이 가지에서 저 별꽃까지/씨줄을 치고/모난 날줄 끈적한 인연줄을/저승까지 쳐놓고 매달린다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작품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상징의 존재 양식도 양자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에 있어서 개념(元槪念)과 이미지(補助槪念)는 동시적이고 공존적이어서 두 요소가 분리될 수 없이 일체가 되어 있다. 이것이 시에서 나타난 상징의 본질적 성격으로써의 동일성[一體性]이다. 이한다의 시에서 나타난 암거미는 상징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이미지는 고단한 삶과 피할 수 없는 인연이라는 관념과 밀착되어 있다.
������������이아영-<지리산행>
시는 그 내용을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전달되는 글이 아니다. 오직 간접적이거나 우회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에 시의 언어는 함축성(含蓄性)을 가진다. 언어의 함축성 혹은 극대화될 때, 비로소 깊이와 넓이를 가진 시의 언어로써 공유하게 된다.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언어의 외연(外延, denotation)은 단순한 사전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시의 언어는 대개 일반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라기보다 입체적 내지 고차원적인 언어가 요구된다. 문학작품으로써 예술성은 외연과 무관한, 새로움을 지향하는 내연(內延, connotation)에서만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저 멀리, 남해의 바다에/태양이 솟아올라/하늘과 바다는 합궁을 한다//내 옆에 서있는/사스레피나무/할머니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린다//문득, 티티새 한 마리/동행을 재촉한다/‘목탁목탁’ 하면서/나에게 눈을 뜨라 한다
문장의 성격에 따른 한 갈래인 산문(散文, prose)은 주로 형식적인 뜻으로, ‘운문(韻文)’의 대립어로 쓰인다. 인용한 시에서도 산문적 요소가 많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보통 쓰는 문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줄글이라는 의미이다. 산문으로 된 산문시(散文詩, poem en prose)라도 거기에는 시정신이 깃들어 있고 시적 정감을 주기 때문에 보통 산문과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김길애-<낮 달>
시의 경향상 한 갈래인 주정시(主情詩)는 개인적인 감정과 주관적인 정서를 읊은 시를 뜻한다. 대개 서정시(抒情詩)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話者]을 서정적 자아(抒情的 自我)라고 한다. 보통 시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인의 시적 표현 효과를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흔히 ‘시적 자아’ 또는 ‘작중 화자’라고도 한다. 대개의 서정시에서 서정적 자아인 작중 화자는 한 사람이 등장하여 독백의 형식을 취한다.
열사흘 낮달이/하늘에 찍혀 있네/불덩이 하나가/공중에서/낮달을 갉아먹네//저 불덩이/산 밑으로 떨어지네/삼켰던 호흡/토해 내려나//낮을 견디는/창백한 얼굴/창공을 서성거리고 있네
서정시는 사람의 정서의 표현이라는 근본 욕구를 만족시킬 뿐 아니라 그 정서에 어울리는 형식을 마련함으로써 정서를 아름답고 의미 깊게 만드므로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친근한 문학장르일 수밖에 없다. 김길애의 낮달은 고고한 시적 자아와 밀도있는 구성, 그리고 적소에 자리매김한 시어들로 하여금 간결성과 함축성에서 예술적 가치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김창제-<나는 고물장수입니다>
시의 경향상 한 갈래인 주지시(主知詩)는 이미지를 중시하고 객관적 상관물에 의한 표현으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시를 뜻한다. 주지적 관조와 공시성(共時性) 등의 표현 기법을 도입하여 감각이나 경험보다는 일체의 인식을 이성에 의해 나타내려 한다. 따라서 기질, 풍자, 역설, 아이러니 등의 지적 작용이 동반된다. 대개 초현실주의나 이미지즘 시가 이에 해당한다.
세상 인심에 엉덩방아를 찧어/평생 절뚝거리는/어리석은 고물장수입니다/불구가 된 책상다리, 찌그러진 서랍장얼굴/속도 잃은 기억 복사기, 코팅 벗겨진 대머리/위통에 속 쓰린 전자렌지/각도 기울어진 청춘의 캐비닛까지/뭐! 별것들이 슬며시 내 등짝을 건드리며/용케 조금 행복한 나를 비웃는다
절박한 시대 상황일수록 효용성 있는 것이 알레고리(allegory). 즉 구체적인 심상의 전개와 동시에 추상적 의미의 층이 그 배후에 동반되는 것이 의식되도록 되어 있는, 풍유(諷諭) 또는 우유(寓喩)이다. 알레고리의 기본방법은 용기, 사랑, 덕성, 악, 지혜 등의 관념을 사람처럼 꾸미는 것이다. 김창제가 시도한 세태의 시각에 대한 의식이 ‘가진 자의 폭거’를 알레고리로 표출시킨다.
������������黃春錫-<先祖의 脈 二題>
사람이나 물체의 특징을 과장하거나 왜곡되게 그려서 해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글을 일컬어 캐리커쳐(caricature)라 한다. 본래의 모양을 약간 흐트러지게 그린 것이 보통이지만, 교묘하게 잘 다루어서 본질을 포착하는 데에 그 묘미를 둔다. 그래서 풍자 희극 등에서 캐리커쳐 된 인물이 때때로 등장하여 해학적인 희극을 이루는 것을 벌레스크(burlesque)라고 하며 ‘일치하지 않는 모작(模作)’이라고 정의한다.
첨성대(천제단)/태극 묘향 아래/백두산 정기 이어/한반도 중간 서해 우뚝 섰어라/마니산정 상상봉에/천신이 좌대하여/백의민족 자자손손/성은 베푸시니/한배검 조상 위시하여/누대로 감응하셔/공경하는 성신님/참배객 꼬리물어 장사진 이뤄/모든 체육행사 불뿜어 용기 주시고/조용한 아침의 나라/무궁한 꽃심되어/삼천리 방방곡곡/감감이 내려보인/촌촌마다 성수 드리워/민족정기/살아난다/피어난다
엘릭잰더 포프(alexander pope)는 18세기의 엉터리 시인들(poetasters), 즉 시작(詩作)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으면서도 시인 행세하는, 시예술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운(韻)을 간신히 이어나가려고 사용했던 일부 클리세에 대하여 비꼬는 투로 논평하기도 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인용한 글은 시가 아니다. 모두가 고루한 한문으로 된 이 글은 시를 모방하여 어떤 민족종교의 교리이거나 해설을 장난삼아 시의 형식을 도용한 것에 불과하다. 시적 요소가 전무하다. 그리고 내용도 뛰어난 산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하다. 黃春錫이 정녕 시인인가 의심스럽다. 이를 두고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하는가.
������������안진숙-<벚꽃나무아래서>
시의 형태상 한 갈래의 유형인 산문시(散文詩, prose poem)는 시적 요소를 갖춘 서정시의 일종으로, 규칙적인 가락, 즉 정형률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자유시처럼 행을 구분하지 않고 쓴 시를 가리킨다. 산문시는 일정한 형태가 없고 행이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운율이나 리듬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일상 언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어제/젖몸살을 앓던 그녀가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그녀는 수천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나는 날마다 그녀의 자궁 근처를 서성인다. 그녀는 늘 허공에 자궁을 걸어놓는다. 나는 아이를 가져본 적은 있어도 낳아본 적은 없다……(중략)……산부인과를 나서는 봄거리에 하얗게 아이들이 웃고 있다. 나는 아이를 잘 낳는 그녀의 자궁을 훔쳐본다. 오늘밤 몰래 그녀의 자궁속을 잠행할 것이다.
흔히 산문의 반대개념은 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산문시도 있고 시적인 산문도 있으니 잘못된 인식일 수 있다. 산문의 반대는 운문(韻文), 즉 정형의 율격을 판독할 수 있도록 조직된 글이다. 비시적, 비문학적인 글을 ‘산문적’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의 산문은 문학적, 시적 성격을 전혀 띠지 않은 산문을 뜻한다. 안진숙은 객관적 상관물인 벚꽃을 신생아로 은유하여, 생산의 경험이 없는 화자[나]의 시각에서, 다산하는 벚나무[그녀]를 부러워하는 심경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나무랄 데 없지만 유독 도입부분에 ‘어제’라는 시제(時題)를 행갈이한 까닭은 무엇인가.
������������최상환-<봉황대 올라>
문학에서 역사를 강조하고 그 개성을 중시하여 인간의 사고(思考)를 역사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을 일컬어 역사주의(歷史主義, historicism)라고 한다. 이는 18세기 유럽에서 추상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과거의 재구성에 주력하는 나머지 때로는 역사학과 구별할 수 없으며 작품의 독특한 의미와 가치의 발견에는 소극적일 경우도 없지 않다. 온고지신, 하지만 위대한 천재도 평범한 요소들로 구성된 시대가 생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나 위대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진리는 부정할 수 없다.
봉황대꼭대기 앉았더니, 서슬 퍼런 신라하늘이 꿈결처럼 흘려내린다/千年보다 깊은 머나먼 꿈의 곡선이 내 어릴 적 엄마의 젖무덤처럼 펼쳐진다/……/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물긷지않을 栗林井에 刹那와 永遠이 순식간에 살아서 들썩거리고//아, 이 푸르디푸른 신라의 품 안에 나는 어느새 알몸으로 뒹굴다
봉황대(경주소재, 125호 고분)는 봉황날개에 금을 달고 우물을 팠기에 신라가 멸했다는 고려 건국신화가 전해지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최상환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 들어, 시대의 비운을 찾아 관례적인 시간 구조를 일시 정지시키고 공간의 지배적 차원으로 성화를 읊는다. 설화는 독자의 믿음(belief)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제기되는 문제의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신념들, 즉 작품 속에 명시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과 일치하거나 상치하거나는 오로지 독자의 역사적 신념과 상상적 수용성에 있기 마련이다.
������������장월근-<백두산 해맞이>
한 나라의 민족이 오랜 동안 이루어 온 문학의 총체(總體), 또는 창작의 모태(母胎)를 이루는 정신적 기반을 민족에 두고, 민족을 위한 민족의 문학을 수립, 건설하고자 하는 문학을 일컬어 민족문학(民族文學)이라 한다. 그리고 민족 전체의 의식과 감정이 배어 있으며, 민족 구성원 사이에서 널리 애송되는 시를 일컬어 민족시(民族詩, volkspoesie[독])라고 한다. 특정 시인이 없고, 시인에 의해 창작된 ‘예술시(藝術詩)’와 구별된다.
아! 우리는/그동안 눈물도 많았고/때로는 형제간에 피도 흘렸다/지금 솟아오르는/저-눈부신 햇살에/우리는 모든 앙금과 저주를 불사르고/우리는 하나 되어/참으로 하나가 되어/저 찬란한 태양처럼/이제는 하나되거라/정말 하나가 되거라
시의 수사법상 강조법의 하나인 영탄법(詠嘆法, exclamation)을 감탄법이라고도 한다. 감탄사나 감탄형 어미, 의문문 등을 사용하여 놀라움, 슬픔, 기쁨 따위의 감정을 강하게 또는 간절하게 나타내는 표현기법이다. 장월근은 백두산에서 해맞이를 하면서 민족의 간절한 소망을 기원한다. 하지만 내용에 비해 언어가 상투적이면서 고루하고 외연적이라는 점에서 시창작법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양한민-<도시의 소음>
수사법상 비유법의 하나인 의성법(擬聲法, echoism)을 ‘사성법(寫聲法)’, ‘성유법(聲喩法)’이라고도 한다. 표현하려는 대상의 소리나 동작, 상태, 내용적 의미를 유사한 음성으로 직접 묘사하는 기법을 뜻한다. 이는 곧 지시하는 소리를 닮은 음성을 가진 단어나 단어끼리의 결합을 가리키며, 단어나 구절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옮겨 글로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의 소리를 사실적이고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 등이다.
덜덜덜커덩삐익쿠륵탁……/부르릉파파팍꽈앙……/쿵쾅쿵쾅뻑슈웅타타타타……/멍멍멍멍멍멍멍멍멍……/쏴아쏴아아아아쪼르르륵……/우당탕탕쨍그랑쿡……/까스슥까스슥드륵드륵철커덕……/따르릉따르릉따르릉빠앙앙앙……/쌔앵쌔앵쌔앵크릉크릉퍽……/웽웽웽웽……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6년에 취리히에서, 루마니아의 트리스반 차라(Tristan Tzara)와 알사스의 힌스 아르프(Hans Arp), 독인의 리하르트 흴젠벡(Richard Huelsenbeck)과 후고 발(Hugo Ball)은 완전한 자유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는 단어를 사전에 임의로 선택한 다다이즘(dadaism)을 연상하게 된다. 그들은 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 문명을 부정하며, 일체의 계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으로, 기존 예술의 인습과 철학, 논리 등을 부정하고 전쟁의 어리석음과 잔인성을 항변했다. 이후, 환상과 파괴 사이를 방황하다가 1922년에 다다이즘의 장례식을 치렀으며, 그 뒤에 추종자들은 1924년경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인용한 작품에서 나타난 양한민이 시도한 파격(破格)과 실험은, 시의 제재로 쓰이는 사물의 소리만을 강조하고 그 밖의 것들을 배제한 일종의 형이하적 시(形而下的詩, physical poetry)이자 이미지즘 시라고 할 수 있다.
������������최윤옥-<꽃들에게 희망을>
동시(童詩)는 좁은 의미로는 어린이를 위하여 어린이의 심리 세계와 감정을 성인(成人)이 쓴 시를 말하나, 넓은 의미로는 어린이가 쓴 동시도 이에 포함된다. 동시의 시작은 전래 동요에서 비롯되었지만, 현대시 이후에는 전래 동요의 정형률은 벗어나 내재율이나 산문율이 있는 동시로 등장했다. 그리고 아동 문학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내용상으로는 동시와 동화시(童話詩)로 나눌 수 있고, 형식상으로는 동시와 산문 동시(散文童詩)로 나눌 수 있다.
우리집 화단에 사는/나리꽃 세 자매는/팔뚝이 길고 굵어요//감꽃 하얗게 웃어도/장미꽃 붉게 익어도/모양낼 줄 몰라 꽃 아닌 줄 알았어요//헌데 요즘/뭔 일로 그러는지/대궁마다 불을 담구 있어요
문화적 원시주의(文化的原始主義)는 어떤 문화와 가치분야에서건 ‘인공(人工, art)’보다 ‘자연(nature)’을 선호한다. 그래서 문학 및 기타 예술들에 있어서는 예술의 기법을 정연하게 예견된 목적에 맞추고 ‘인공적’인 형식과 법칙과 관례에 의존하는 것에 반하여, 그것은 자발성(自發性), 정서의 자유로운 표현, 그리고 ‘천부적인 천재(natural genius)’의 직관적인 창작물들에 의존한다. 최윤옥은 호흡이 길다. 이미지는 좋으나 참신성과 함축성에서 다소 허전하다.
������������솔바람-<칡넝쿨>
문학이 몽상하는 동일성이 과학적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될 때는 허구이다. 그러나 적어도 ‘막연한 동일성(loose identity)’이 되지만 문학은 그 고유의 진실로서 동일성의 여러 양상을 가치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개인적 동일성(identity)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문학의 지배적 주제이면서 작품의 구조원리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 자아의 탐구란 이 개인적 동일성의 탐구 이외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대지의 살을/쏙쏙 발라먹고/아침부터 해를 향해/까치발로 섰구나//온몸에 푸른 단장/휑한 가슴 가슴엔/서리서리 바람 채워//배암의 혀를 빌어/뜨건 숨겨 친친 감아/오늘도 하늘 향해/목
을 쭉 뽑았구나//아서라, 사랑은/네 발치에 있음이야/쌉쌀한 물 고이는/거기에 있음이야
시인에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고 그 감정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어떤 심상, 상징, 사건 등으로 객관화시킬 때, 이러한 심상, 상징, 사건을 일컫는 말을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objective correlative)이라고 한다. 시인 개인의 정서가 이러한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문학의 재료는 다만 재료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은 대개 사물인데, 즉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나 사상을 투영하기 때문에 이 시에서 ‘칡넝쿨’은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의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김정래-<가을과 낚시꾼>
시에서 쓰이는 심상의 표현방법의 하나인 묘사적 심상기법(描寫的心象技法)은 어떤 시적 대상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것을 묘사하거나 감각적인 수식어를 사용하여 사물의 영상을 직접 드러나게 한 심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조지훈(趙芝薰)의 ‘고풍 의상’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한복을 입은 여인을 묘사하여 우리 민족의 옛 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이다.
드리운 월척의 꿈/노을되어 차오르고/풀벌레 속삭임에/엷은 잠 맴을 돈다/눈감은/물빛 아련히/또 하루가 접혀가고//쪼그려 앉은 채로/세월만 낚은 하루/먼불빛 밤을 새며/어둠을 밀어낼 때/하현달/꿈꾸는 새벽/장줄방울 눈을 뜬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정형시(定型試)라는 용어는, 일정한 틀에 의하여 정형화된 시라기보다 넓은 의미이어서 작품 전체의 형태나 구조는 일정하지 않아도 규칙적 운율(韻律)을 가진 것이면 정형시 또는 시조(時調)라고 한다. 김정래는 낚시를 하면서 모티프된 심상을 묘사하듯 읊는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에는 대개 그 나라나 민족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시의 정형이 있으며, 그 정서(情緖)를 담기에 알맞은 고유한 성격을 지닌다.
������������김진중-<송 of 서울․10>
유관순(柳寬順)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3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우리들의 대지(大地)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박두진(朴斗鎭)의 ‘3월1일의 하늘’ 중에서]……처럼 순수시와는 달리 시작(詩作) 의도가 조국애의 화신인 유관순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 다분히 설득적이고 격동적인 성격을 띤다. 이처럼 감각적이나 정서적인 이미지보다는 주로 관념이나 사상, 추상적인 의미 등을 강조한 시를 흔히 개념시(槪念詩)라고 한다. 예술성이 다소 낮으며 관념적 경향이 짙다.
돈 많은 사람들은 허파를 잘라 큰아가미로 갈아끼운다네/커다란 파초잎이 응급조치로 불티나도록 팔려나깠다네/그래도 그칠 줄 모르는 소음은 거품을 만들고/몇 안남은 지느러미는 웃돈 주고도 구할 수 없다네/……/우리는 서로서로 누군갈 위해 울음을 울어야 해/자꾸만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무엇을 위해 눈물 뿌려야 해/빙그르 돌아가는 회전문에 갇힌 아이의 투명한 진주알/눈물을 눈알의 땀이라고 우겨도 좋은 청개구리의 변명을 위하여
악사회의 부조리, 모순, 인간의 형태, 정치 현실 등을 비웃음조로 공격․폭로하는 시를 일컬어 풍자시(諷刺詩)라 한다. 우리나라 경우, 조선시대의 사설시조 중에 풍자적인 것이 있으며, 특히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은 풍자적 한시를 지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1970년 김지하(金芝河)의 ‘오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듯, 김진중의 시에서 나타난 관념과 풍자는 환경의 파괴, 인성의 변질 등, 질서의 혼동으로 종잡을 수 없는 시대 상황을 예리한 시각으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呂閏東-<맺은 인연 끊을 수 없어>
골계미(滑稽美)의 한 유형이 기지(奇智, wit, esprit)인 것이다. 문학에서의 가치는 지적(知的)인 것과 동시에 언어적 표현에 의존된다. 서로 다른 이성적 사고나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압축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을 일컫는다. 즉 지적인 ‘언어의 유회’로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나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사상(事象)을 의외의 곳에서 돌연히 서로 작용시켜 웃음을 유발해 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웃음을 수반하지 않는 문학미의 한 범주이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기지로는, 한 낱말에 두 가지 뜻을 곁들여 표현하는 중의법(重義法)이다.
고 계집 눈짓한다/하얀 꽃내음/바람에 날린다//실허리 끊어질라, 불꽃 댕기면/오르가슴에 오르가슴에/구름윌 날은다//그 입술 맛볼 땐/잊혀질까/온몸에 스민 고 계집내음 지울 순 없어/곁에 없으면/그립고 그립다
율격을 주시하면서 객관적 상관물인 담배를 의인화한, 군더더기 하나없이 아주 간결한 시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장인의 정신이 흠씬 깃든 예술품이다. 呂閏東, 그는 자신의 시학(詩學)에서 동일성(同一性)을 확립한 시인으로 보여진다. 옹골차게 직조된 이 시에서 그렇다. 시적 체험으로 유추하자면, 동일성의 감각이 시적 세계관을 비롯하여 언어, 리듬, 이미지, 비유, 상징, 시제 등 시의 제요소들 속에 작용하는 일체감이, 인용된 시의의 매력이자 상당한 흡입력인 셈이다.
������������윤건영-<어머니>
망자(亡者)를 조상(弔喪)하는 노래를 만가(輓歌, dirge)라고 하며, 격식을 덜 중요시한다는 뜻에서 ‘엘레지(elegy)’와 구별된다. 엘레지는 사람이 죽음에 임하여 만들어지는 만가체(elegiacs) 시가(詩歌)를 말하며 흔히 비가(悲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레퀴엠(鎭魂歌, requiem)은 원래의 뜻은 위령(慰靈) 미사 때 죽은 사람을 위해 명복을 비는 음악이나 시를 뜻하며 애가(哀歌)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더욱 넓어져 연인(戀人)이나 친구 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지어지는 시 등도 포함된다.
눈가에 어른거리는/그 길 뚝 떨어져//떨어진 그 길 따라가면/허리굽은 사랑을 만난다//가만히 귀기울이면/걱정마라 다독거리는/그 곳에서도/눈물발자국 선명한//할미꽃
우리나라의 고려 가사 중에 사모곡(思母曲)이 있다. 연대와 작자가 미상인 이것을 일명 ‘엇노리’라고도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낫과 호미로 비유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지극함을 읊조리었듯이, 윤건영은 유독 어머니의 사랑을 허리 굽은 할미꽃으로 비유한다. 인용한 시는 주제와 이미지의 조화가 빈틈없는 일체감을 이루면서 적절하고 정제된 짧은 시어가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모릅지기 자기에 대한 끝없는 탐색, 광대한 상상의 세계에 잠입해 자아를 찾고자 하는 외로운 노력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유미희-<바람아래 해수욕장>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를, ‘서정적 긴장(抒情的緊張)’이라고 한다. 즉 긴장의 직접적인 제시, 긴장에 대한 순종과 극복, 긴장에 대한 괴로움이나 슬픔의 토로 등에 대하여 시적 자아는 이를 해소하고자 하며, 이 긴장의 해소가 시를 구성하는 중심 내용이다.
바람아래를 아세요?/혹시, 가보신 적 없으세요?/서해 어는 바닷가에 있다는데, 들어보시지않았어요?/온종일 가도 좋으니/알려주세요/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곳을
외연(外延, extension)이란 한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 즉 ‘사전적(辭典的) 의미(意味)’ 또는 ‘지시적(指示的) 의미’를 뜻한다. 그리고 한 낱말이 어떤 특정한 문맥 속에서 갖는 사전적 의미를 ‘외연적인 의미’라고 한다. 이는 지시적 기능을 가지며 실제 사물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1:1의 대응관계를 이룬다. 예를 들어, 법률 조문이나 과학적 언어에 해당하지만, 문학에서나 특히 시에서는 외연이 아닌 내연적(內延的) 의미를 철저하게 표방한다. ‘바람아래’란 안면도에 있다는 그 해수욕장, 유미희의 작품에 담긴 외연적[平面的]인 요소로 인해 내연적[立體的]인 의미가 다소 불투명하다.
������������김철민-<가을의 문턱>
문학 언어의 한 특성으로 다의성(多義性)을 들 수 있다.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성질을 뜻한다. 이를 시에서는 애매성(曖昧性, ambiguity),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고 한다. 특히 애매성은 운문에서 어휘의 해석이 곤란한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이 용어는 시어(詩語)가 상징적인 의미 외에 풍부한 암시성을 수반한다거나 또는 다의적 복합적으로 쓰이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난해성(難解性)과 구별된다. 난해성은 문학 작품이 잘 읽혀지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성질을 뜻한다.
누르면 터져버릴 귀하신 몸!/보물을 숨겨놓은 듯/온몸에 새큰한 자국/‘입쩍쩍’/먹기 전 내 마음 채워준/사랑의 하머니//무더운 여름도 잊은 채/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자리/가을하늘 한 뼘 높아만 가/다시 눈돌려/가을빛속에 타들어가고
시는 그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형식이라고 주장한 말라르메(mallarme stephane) 이후, 상징주의다. 모티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느냐에 따라 시적일 수도 있고 시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시적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포착된 착상을 어떻게 시작품으로 형상화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인용한 시에서 나타난 수사법은 어설프다. 다시 말해 시를 아름답고 정연하게 꾸미고 다듬는 정성이 소홀하다는 것이다. 좋은 시를 위하여 시인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느낌을 보다 절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장표현 기술이나 방법에 먼저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안경례-<바람에 기대어>
서정시의 한 가지인 연애시(戀愛詩)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다. 우리나라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의 ‘황조가’를 비롯하여 고려 속요, 임 제(林悌)의 ‘한우가’에 답한 한우(寒雨)의 화답시조, 황진이(黃眞伊)의 시조 등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 왔다. 근대시에서는 특히 가버린 임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당신을 떠나/아무데도 갈 수 없다며 매달리려는 것이/부질없는 몸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연분홍으로 물든 가슴 드러낸 채/길위에 사그라질 것같아 두렵습니다//언제나 머무는 시간은럼 짧고/뒤틀거리며 돌아서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꽃은 가지에서 떨고 있습니다
시인의 생애 중의 사실이나 체험을 가감(加減)없이 다룬 서사적이고 서정적인 운문의 한 형식으로 고백시(告白詩, confessional poetry)를 들 수 있다. 안경례의 작품은 연애시와 고백시의 성격을 띤 서정시로써 잔잔한 독백 형식에 의해 그리움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정연된 시어에 운율미를 더한다.
������������김태신-<간격 좁히기>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어떤 것이다. 죽음은 다른 어떤 경계선과도 마찬가지로 경계를 그어놓는다. 죽음은 다른 모든 종말과 마찬가지로 끝을 맺는다……따라서 인간의 죽음에도 다른 자연현상의 항구적인 해체 과정과 다를 바 없는 과정이 수행되는 것이다(paul schulz).
예순일곱의 아버지가/무성하게 자란 풀을/제초기로 다듬으면서/이승과 저승만큼 떨어져있던/할머니와의 마음 간격도/좁혀가고 있다//아버지가 할머니의 무덤을 어루만진다/흘러내린 앞머리를/빗어넘길 때처럼/부드럽게 부드럽게//때로는 이렇게/풀 한 포기 뽑는 일이/산 자와 죽은 자도/가깝게 만들 수 있으니……
김태신은 조모의 산소에 벌초하는 부친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일종의 묘지송(墓地頌)이다. 박두진(朴斗鎭)은 1939년 <문장>에 ‘묘지송’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쓸쓸하고 음울한 묘지에서 밝음을 기다리는 희망적인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처럼 인용한 작품도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매우 관조적이며 죽살이를 재인식한다.
������������임솔내-<흰 하늘>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시를 전원시(田園詩)라고 한다. 예를 들면……남으로 창을 내겠소/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매지요……처럼 시<남으로 창을 내겠소(金尙容)>가 우리나라 전원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는 햇살이 비쳐 드는 집에서 밭을 갈면서 속세의 번거로움을 잊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순리에 따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겠다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천지갑산 끝동리/찔레꽃 꺾어 먹었네/거물거물 서산에 해지면/흰구름 노닐다 간/선녀탕 뛰어들어 멱 감 한 번 감아보네//서당마을 책바위 우리 우정 걸어두고/골부리국 끓여 새참은 어떻게나//하늘로 흐르는 강 이쯤에선/무엇이든 죄다 놓아 버리자//자는 일 잠시 접어두고/둔덕에 부는 바람으로/흰구름 둥둥 따다니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거나 자연 친화 또는 자연 귀의(歸依)의 정서가 담긴 시를 일컬어 자연시(自然詩, naturpoesie)는 산천초목(山川草木)이나 화조월풍(花鳥月風) 또는 정령(精靈)에 대한 가정이나 심적 상태를 재현하고 재구성하며 작품에 반영하는 정서를 주로 담고 있다. 이렇듯이 임솔내는 어린 시절, 고향과 가까운 천지갑산(安東 소재)의 동심으로 되돌아가서 몰아(沒我)적 내면세계를 유회한다.
������������조향숙-<붓 꽃>
충족되지 않은 욕구나 충동으로 인한 기장상태는 사람을 자극하거나 활력을 주어 적절한 만족감을 추구하게 하는데, 이를 동인(動因) 혹은 집합적으로 동기(動機)라고 한다. 특히 소설이나 희곡 등의 작품에서 인물이나 사건의 자연스러운 전개를 위하여 어떤 동기(motive)를 부여함으로써 사실성(事實性, reality)을 획득하는 것이다.
어린붓꽃이 울고 있습니다/엄마를 잡고 싶지만/그는 바람이어서/잡을 수가 없습니다//아버지도 가슴속에 갈탄을 안고/이혼은 할 수 없다며 쭈그리고 앉아/흰둥이만 어루만집니다/할머니는 거실모퉁이에서/열린 창문너머로 담뱃불에/긴한숨을 뽑아보내십니다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이 운명에 따라 사건이 전개되는 비극을 일컬어 운명 비극(運命悲劇)이라고 한다. 조향숙의 작품도 그러한 비극적인 운명을 모티프 하여 붓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의지가 약하고 생각이 소박한 화자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고난을 받는 유형으로 독자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다.
������������김정학-<밤벚꽃놀이>
‘에로스(eros)’는 그리스 신화에서 즐거운 연애와 사랑의 신(神)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이 신을 큐피드(cupido)라고 한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활과 화살을 가진 장난기 많은 연애신(戀愛神)으로 그려져 그의 황금 화살을 맞은 신이나 인간은 격렬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납으로 된 화살을 맞으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무조건 일방적인 절대적 사랑인 아가페(agape)에 비하여,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기본위의 사랑을 의미한다. 프로이드(Freud, Sigmund)는 자신의 학설에서 ‘에로스’를 생명을 보존하고 추진시키는 일종의 에너지로 보고 성(性) 본능과 결합될 때 ‘리비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대/아직 벚꽃이 피어있다면 믿으시겠어요/밤마다 한 잎 한 잎 시름없이 피었다지고/막막한 가슴에 쌓여간다면/그대 기억처럼 쌓여간다면/믿으시겠어요?//한 컷씩 찍혀나오던 플라로이드 사진속/그대는 아직 웃고 있군요
문학 작품에서 여성의 경향을 나타내거나 여성적 어조를 사용하는 화자를 여성화자(女性話者)라고 한다. 여성화자는 대개 대상과 자아관계를 중시하면서 감상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남성 작가는 작품 속 화자 또는 그 상대자의 여성적 경향을 나타내기 위해 이별이나 사랑, 아름다움, 슬픔 등 사적(私的)이고 구체적인 화제를 택한다. 김정학이 이러한 정형적(定型的) 형식과 섬세하면서도 장식적인 언어를 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박예자-<파란 감>
아동문학(兒童文學, juvenile literature)은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나 어린이를 주대상(主對象)으로 하여 쓰여진 모든 문학, 즉 동요, 동시, 동화, 아동극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진부한 말을 하자면, 아동문학의 갈래는 운문적 갈래와 산문적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운문적 갈래에는 동요, 동시, 동시조가 있으며 산문적 갈래에는 옛이야기, 동화, 아동소설, 아동극본, 재화(再話), 아동문학평론 등을 들 수 있다.
놀러 온 아이들아/난/아직 아기감이야//바라만 보고/가거라//산이 붉게 물들 때면//내 얼굴도/빨갛게 익을 거야//그때/ 오렴
인용한 동시에서 박예자는, 아직 익지 않아 떫은 땡감[話者]이 행여나 아이들로 인해 해코지를 당할까, 지레 겁먹고서 달래듯이 동심을 읊는다. 여기서 색채, 모양, 동작, 상태 등을 눈[視覺]을 통하여 떠올리는 것, 즉 시각적 심상(視覺的 心象)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감각을 토하여 형성되는 심상은 독자들의 마음에 회화적인 인상을 주고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한상순-<해님의 하루>
아동문학의 기본적인 구조는 일반 문학과 다를 바가 없으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과 특별한 목적성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문학이 가지는 예술성에 아동의 교육적인 면을 더한 공리적(公利的) 윤리적(倫理的)인 것이 더해진 것이다. 따라서 내용을 구성할 주제나 소재, 등장 인물 등에는 아동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어야 하며, 아울러 흥미와 감동이 내포되어야 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해님은 마을앞 못자리논에/물방개랑 소금쟁이 띄워 놓고/같이 놀자, 우리들 발목을 붙들지/한참이나 신나게 놀던 우리들/흙투성이가 되어 하나둘/집으로 돌아가면/해님은 아쉬운 듯/뉘엿뉘엿
한상순이 어린이의 심리 세계와 감정을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시각으로, 객관적 상관물인 해님을 형상화한 동시이다. 우리나라 갑오경장 이후, 창가로 된 동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933년 윤석중(尹石重)의 동시집<잃어버린 댕기>를 효시로 동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작금의 한국문단에서, 문학과 관련된 토론이나 논제가 마치 학교 강단에서 행하는 강좌식(講座式) 범위에 벗어나지 못하여, 문학이 예술적으로 형성되어 왔다기보다 마치 무슨 모범답안지 같은 이론적이거나 학술적인 겉포장에만 맴돌고 있는, 소위 ‘강단문학(講壇文學)’이 아성처럼 첨예하게 자리하여, 문학이 추구해야 할 예술적 창작성을 발전시켰다기보다 저해시켜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비평의 편협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 통합적인 통찰에 입각한 새로운 가치의 모색과 창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된다. 일부 평자들은 꽤 괜찮은 작품을 확인해 주는 비평작업에 아주 인색하고 소홀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낡은 이론과 학술, 문학비평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새로운 작품의 가치를 조명하기보다 눈앞에 놓인 금전적 실리(實利)만 좇는, 유명무실한 평자들이 부도수표 남발하듯, 조잡한 서평, 작품해설 등을 대할 때, 왠지 부끄럽고 한심하다. 이제부터 그런 평자들의 글도 비평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사적 맥락에서, 문학연구나 비평의 대상은 전체보다 극히 일부에 고착되거나 편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필자는 가능한 한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의 참신한 작품을 발굴하여 언급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자유문학회 발전과 시인들의 문운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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