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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외국인) 독립운동 유적지 찾기(4)
◇ 육영공원 터(호머 헐버트) : 중구 덕수궁길 61 일대(서울시립 미술관)
- 육영공원의 교사로 재직한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미국의 선교사
육영공원(育英公院)은 1886년(고종 23년) 9월 23일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관립(국립) 교육기관이자 왕립 영어 학교이다.
고종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주선하여 초빙한 호머 헐버트(H. B. Hulbert), 델젤 벙커(D. A. Bunker), 조지 길모어(G. W. Gilmore) 등 미국인 엘리트 교사 3인이 교육을 전담하였다. 따라서 상류층이나 명문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입학생을 선발하여 일종의 '귀족 공립학교' 성격을 띠었다.
이 학교는 좌원(左院 : 이미 과거에 급제한 젊은 현직 관리)과 우원(右院 :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명문가 자제나 선비(15세~20대 초반) 중에서 선발)의 두 반으로 조직, 운영하였다.
수업 방식은 교과서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으며, 미국인 교사들이 100%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통역 조교를 두었으나 영어 습득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서 곧 해임하기도 했다.
이 학교의 시설은 한국 교육 역사상 최초로 교실에 교단과 흑판(칠판)이 설치되었고, 학생들이 바닥이 아닌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서구식 환경을 갖추었다.
육영공원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재정난과 운영 부실로 폐교되었으며, 이후 영어 교육만을 전문으로 하는 '관립영어학교'로 개편되었다가 한성 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 정동에 자리 잡고 있던 육영공원은 1891년 전동(현재의 종로구 견지동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구한말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미국의 선교사, 사학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헐버트 박사는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인물로 평가받으며, 2014년 한글날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그는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어 방한했다가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여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순한글로 집필하여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한글의 우수성을 꿰뚫어 보고, 최초로 한글의 띄어쓰기와 점찍기(문장부호)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주시경 선생 등과 함께 한글 연구 및 보급에 이바지했으며,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오선보에 채보하여 세계에 알렸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여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주시경,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을 지원하고 영문판 편집을 담당했다.
그리고 타임스(The Times), AP 통신 등의 객원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 상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친서(親書)를 품고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려 했으나, 미국의 방조로 실패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가 파견될 수 있도록 막후에서 긴밀히 지원하고, 본인 또한 직접 헤이그로 가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강제 추방된 이후에도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던 그는, 광복 후인 1949년 85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방한했다. 그러나 오랜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내한 일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여 장문의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는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을 억압한 경성재판소): 중구 덕수궁길 61 일대
-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의 양심적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서울시립미술관은 100여 년 동안 육영공원, 독일공사관, 상소심 재판소인 평리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교도소로 보냈던 경성재판소를 거쳐 광복 이후 대법원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28년에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짓고,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을 입주시켰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3심제에 해당하는 세 재판소가 한 건물에 모이게 되었다. 이를 경성재판소라고 불렀다.
경성재판소는 조선인을 억압하는 식민 지배의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이와는 달리 일제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억압받던 조선인을 진정으로 도와주려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 일본인은 영화 《박열》을 통해 잘 알려진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79~1953)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신념으로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의 양심적인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을 인정받아,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았다.
후세 다쓰지의 주요 업적을 살펴보면
(1)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
그는 조선의 독립 투쟁을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정당한 행위로 보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기소되었을 때 자청하여 무료 변론을 맡았다.
◈ 2·8 독립선언 변호 (1919년) :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주도한 2·8 독립선언 주역(최팔용, 송계백 등) 들이 내란죄 혐의로 체포되자 변호를 맡았다. 그는 일본 법정에서 "일본이 체코의 독립을 위해서는 군대까지 보내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했고, 결국 형량을 크게 낮추는 결과를 끌어냈다.
◈ 의열단 김지섭 의사 변호 (1924년) : 일본 황궁 이중교(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아 일제의 침략 책임을 당당히 지적했다.
◈ 박열 · 가네코 후미코 변호 (1926년) : 일왕 암살을 기획했다는 혐의(대역사건)로 체포된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변론을 맡아 끝까지 그들을 옹호했다. 그는 옥사한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을 거두어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히도록 도왔다.
2.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폭로 및 항의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정부와 경찰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후세 다쓰지는 이 사태가 일본 당국에 의한 '조선인 폭동 조작 사건'이자 인종 혐오 범죄임을 강하게 비판하고, 학살의 진상을 조사해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다.
3. 조선 농민·민중과의 연대
그는 법정 밖에서도 조선의 수탈당하는 민중들과 함께 연대했다.
◈ 나주 궁삼면 토지 회수 투쟁 (1926년) :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문서 조작과 사기로 나주 지역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자, 농민들이 직접 일본에 있던 그를 찾아와 혈서와 소송 의뢰서를 전달했다. 이에 후세 다쓰지는 직접 전남 나주까지 와서 수탈 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했고, 이를 "합법을 가장한 사기 사건"으로 규정하며 총독부를 상대로 끈질긴 토지 반환 소송과 투쟁을 벌였다.
◈ 차별 철폐 운동 참여 :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차별 철폐를 위한 조선의 민족 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에도 깊이 참여하는 등 신분과 민족을 초월한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4.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이러한 반제국주의 활동으로 인해 후세 다쓰지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총 3차례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신문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우리 민족을 위해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손수 저술하여 기증하는 등, 평생을 조선의 동반자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배재학당 터(한국 근대 민족 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아펜젤러) : 중구 서소문로11길 19
-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공원 내에 세운 근대교육기관
‘신교육’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산실’이라는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현재 배재공원 내에 설립한 근대교육 기관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는 부인과 같이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므로 입경을 만류한 미국 공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7월 19일에 일본에서 서울에 들어온 아펜젤러 부부와 어머니와 스크랜턴의 부부가 민 판서 집(현재 정동제일교회와 이화여고 사이의 주차장)에 짐을 풀었다. 서울성곽과 붙은 서쪽 집엔 아펜젤러 가족이, 그 아래 동쪽엔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가족이 각각 자리 잡았다. 이로써 정동길 서쪽 언덕에 감리교 선교 용지가 마련되었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못 된 1885년 8월 3일, 자기 집에서 이겸라, 고영필 2명의 학생에게 신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스크랜턴에게 서양 의술을 배우기 위해 먼저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온 학생들이었다.
아펜젤러는 이를 계기로 학교를 개설하고자 조선 정부에 설립 허가원을 내는 한편, 현재 배재학당 터 7,000여 평의 학교 용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형조참의 안기영(安驥泳)과 승지 채동술(蔡東述)이 살던 집이었다.
이들은 민씨 세력의 독주에 불만을 느끼고,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발각되어 1881년에 역적으로 참수당했다. 이 집을 아펜젤러가 568달러, 조선 돈으로 7,250냥을 주고 구매하였다.
아펜젤러는 급한 대로 이곳에 있던 두 칸짜리 한옥의 벽을 헐고, 교실 하나를 만들어 1886년 6월 8일에 배재학당을 열었다. 2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이해 11월에는 32명, 1887년 6월 방학할 때는 63명이 등록하였는데, 실제 출석 학생 수는 38명이었다.
그런데 배재학당에서 우리나라 첫 번째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개교할 때 학생이 없었으므로 아펜젤러는 당시에 희귀한 담배를 제공한다고 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그 뒤 학생이 늘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므로 금연령을 내리고, 담배를 주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여 담배를 지급할 것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벌였다는 것이다.
초창기의 학생들은 긴 도포에 큰 갓[黑笠]을 쓴 행전 차림이었다. 장죽을 허리춤에 끼고 다니는 바람에 도포 뒷전이 불룩하게 부풀어 있어서 그 부품 새의 크기로 ‘대작 학원(大爵學員)’ · ‘양반 학원(兩班學員) · 상민 학원(常民學員)’ 등으로 구분되었던 당시 학생들의 신분을 구별할 수 있었다.
유봉영의 『배재사(培材史)』에 보면
「정동 34번지 현재 학교가 깔고 앉아 있는 교문 수위실 뒷자리에 있던 김봉석(金奉石)이라는 사람의 기와집 100평과 대지 100평을 그때 돈 520냥, 미화로는 388불을 주고 사들여서 개축 수리하여서 교실을 옮겨다 놓았다. 그러나 학생의 수는 늘어가고 교실이 좁으므로 그 부근에 있는 초가집과 기와집과 향나무(지금의 동 교사 옆)까지 겹쳐서 3,000냥을 주고 사들여서 수리하여 교실을 분산시켜 놓고 수업하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이 학교가 개교하자, 1887년 2월에 고종황제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내리고, 학교 현판을 외무아문(外務衙門) 김윤식을 통해 아펜젤러에게 하사하였다. 교명을 하사받은 것은 교육 사업을 정부가 승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재’는 ‘유능한 인재를 교육하는 학당(培養 英才)’이라는 의미인데, 영어로는 ‘미국학교(American School)’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육영공원에 이어서 또 하나의 양학서당(洋學書堂)이었다.
한편, 서재필 박사는 김홍집 내각과 개화파들의 도움으로 1895년 12월 26일, 서울에 들어왔다. 이 당시 서재필이 머물던 집은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의 집이었다. 1898년 11월 5일에 수구파로부터 몰리던 윤치호도 아펜젤러의 집으로 은신하고, 이즈음에 이승만도 아펜젤러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여기에서 만민공동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서재필은 귀국하자 배재학당에서 지리, 역사, 정치학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토론회를 열도록 권하였다. 강의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서로 토론을 벌임으로써 참다운 지식을 얻도록 하였다.
이 토론회의 명칭을 ‘협성회’라 하고, 주 1회씩 모였다. 이 협성회 회원은 서재필 외에 이승만, 윤치호 등과 배재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반 사람들도 찬성 회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이 협성회에서 「협성회보」를 발행하였다가 1898년 3월, 24호를 끝으로 폐간하였다.
1895년 2월, 조선 정부는 배재학당에 관비생 200명의 위탁 교육을 맡겼다. 이 계약은 1900년 2월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1900년 정부와 아펜젤러 교장 사이에 1년간 더 연장하였다.
1896년 7월 독립신문을 보면, 서울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추렴하여 배재학당 앞에서 독립 기념회를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 전해에는 미국 공사관에서 독립 기념회를 했다고 하니 미국 공사관과 배재학당이 미국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고종도 배재학당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동자들의 모임 장소가 되거나, 피신처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종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학교가 운영되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오므로 새로운 교사를 신축할 필요성을 느낀 아펜젤러는 1887년 초에 한옥 교사를 대신할 양옥 교사를 정동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9월에 준공을 보았다. 설계와 공사는 아펜젤러가 인도하는 외국인 예배에 참석하던 일본인 요시자와(吉澤)가 맡았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100여 평의 단층 벽돌 건물은 서울에서 처음 보는 서양 공관이었다. 이 건물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기금으로 지은 것으로 이 건물 준공식 때 미국 감리교 와렌(Warren) 감독은 “미국 국민이 한국에 보낸 선물”이라고 선포하였다.
이 건물은 강의실과 도서실, 예배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반 지하층이 있었다. 반지하실에는 1889년부터 인쇄시설을 갖추고 책을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한글·한문·영어 세 나라 활자를 갖추었다 하여 삼문출판사 혹은 ‘미이미’ 인쇄 관으로 불렸다. 이 출판사는 후일 학당 옆에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하고, 감리교출판사로 발전하였다.
단층의 배재학당 양식 건물은 1932년에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을 짓기 위해 헐렸다. 이 강당 건축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축기사로 알려진 도편수 심의석(沈宜碩)이 맡았고, 역시 명 목수로 이름난 김덕보(金德甫)가 그 밑에서 일하였다. 양식건축에 경험이 없었을 이들이 이 양식 건물을 짓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학당장인 아펜젤러와 이 학교의 어학 교사였던 송헌성(宋憲成)의 교습과 지휘·감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양식건축인 대강당은 그 건축물 자체보다 한국인 도편수와 목수가 양식 건물의 건축 기술을 최초로 터득하였던 데에 더 큰 뜻이 있었다.
대강당은 1층은 체육관, 2층은 예배실 겸 음악 공연장으로 쓰였다.
이 건물은 1984년에 배재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옮겨간 뒤 법무사 임대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 정면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1886-1932’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는 각자(刻字)가 보인다. 이 머릿돌 안에는 1932년에 대강당을 지으면서 헐린 정초석 안에 있던 엽전과 성경, 찬송가와 학당 내력을 써서 넣은 것이다.
배재학당은 대한제국 때인 1908년에 발표한 ‘사립학교령’에 의해 4년제 배재고등 학당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어서 1922년에 조선교육령 개정 때문에 배재고등 보통학교는 5년제로 바뀌었으며, 1925년 끝내 일제에 의해 배재고등 학당의 교명을 폐지당하였다. 이렇듯 일제가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두고, 집요하게 탄압의 끈을 늦추지 않은 것은 ‘배재학당’이 바로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음을 반증한다.
배재학당 동 교사(동관)는 1916년에 세워졌고, 서 교사(서관)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1923년에 세웠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노골화하여 1938년에 ‘개정 조선교육령’을 발표, 다시금 배재중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때 미국식 학제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6년제 학교로 되었다.
1896년 「독립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영어 학교 학도들이 서양요리와 다른 음식을 많이 하야 손님 대접을 매우 잘하엿다더라.」고 보도하여 서양식 연회의 광경을 실어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 당시 서울에는 영어 학교가 설치되었는데 이 학교 학생들이 배재학당의 학생들을 초청하였다. 이 학교 외국인 선생이 네프론을 두르고, 수십 명의 학생을 거느리고 서양요리를 만들어 처음 서양식 파티를 본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외국이라면 청나라밖에 모르고 그 문물을 받아 온 처지에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조선 말에 외국에 다녀온 외교관 가운데 서양 풍속을 도입하여 널리 퍼뜨린 사람은 주미공사 대리 이하영(李夏榮)과 통역관으로 이름난 이채연(李采淵)이었다. 두 사람은 서양 문화의 선구자 노릇을 하여 서양 요리사를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외국 손님 대접을 도맡아 하였다고 전한다.
1896년 7월「독립신문」에
‘영어 학교 학도들이 배재학당 학도들을 그져끼 쳥하야 남산 밋해서 노리를 하엿난대, 두 학교 학도들이 군법으로 행진하야 길노 지내 가난대, 복색이 일정하야 보기에 매우 죠터라’
고 하였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설립되고, 신교육이 시작되어 외국인 교사들이 속속 늘어나면서 자연 서양 문화의 전달이 활발해졌다. 그 당시 정동 거리에는 외국 공사관들이 모여 있어 서양인들의 신기한 행동을 보느라 구경꾼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가 3·1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된 동기는 이 학교 재단의 이사이며, 33인 중 한 사람인 정동교회 담임목사 이필주 목사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진호, 이중화, 강매, 김성호 네 명의 교사와 학생 대표 김병호 등 18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배재학당은 배재중 고등학교로 바뀐 뒤 1994년에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건물이 거의 헐렸다. 이 학교 자리는 최근 시티뱅크에서 매입하여 일부는 사옥으로, 일부는 배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02년 봄에는 정동 34번지, 전일 배재고등학교 운동장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던 곳에 12층의 육중한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섰다. 현재 이 공원에는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2001년 2월부터 배재학당은 이곳에 지하 4층, 지상 10층짜리 대형 주상복합건물을 세웠다. 이에 따라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배재학당 동관(1916년 건축) 건물과 보호수로 지정된 향나무를 제외하고, 건물들은 모두 헐렸다. 2008년부터 배재학당 동관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정동 제일교회(벧엘 예배당) : 정동 34번지
- 독립협회 운동, 여성해방운동, 인권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한 교회
정동제일교회를 ‘양반교회’, ‘귀족교회’라고 불렀다. 이는 정동제일교회 건물 모습 때문에 주는 인상이기도 했다. 초기에 정동제일교회 교인들이 관리들과 이른바 신흥 귀족계급이 주를 이룬 것은 장소성에 큰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 개신교 교회는 의료, 교육, 사회사업을 벌여 우리나라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 1858~1902) 신혼부부는 1885년 2월, 일본을 거쳐 이해 4월 5일(부활절)에 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갑신정변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다”라는 미국 공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펜젤러 선교사는 부인과 같이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조선에 재입국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이 당시 정동의 스크랜턴 선교사 집 서쪽(정동 34-1번지)의 한옥을 구입하여 이들 가족과 이웃하였다.
아펜젤러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은 1887년 10월 9일이다. 우선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의 집 하나를 마련하여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이 집을 ‘벧엘 예배당’이라 하였다.
이 예배당 위치는 현재 한국은행 본점 자리로 추정된다. 5평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이 집에서 10여 명이 예배를 보니 비좁기도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 그 당시에 남녀가 한 방에 모이는 것이 외부에 시빗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에 이보다 두 배가 넓은 방을 사들여 방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간막고’식의 예배를 보았다.
‘벧엘 예배당’의 집회는 1888년 5월에 정부에서 내린 ‘전교 금지령’과 뒤이어 일어난 ‘아기 소동’으로 중단되었다. 선교사들은 이해 12월, 정동 구역회를 조직하면서 (1) 남녀가 다른 장소에서 예배드리고 (2) 가급적 찬송은 부르지 말고 (3) 찬송할 때 가사만 읽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남자 집회는 배재학당 · 정동병원 · 벧엘 예배당에서, 여자 집회는 이화학당과 보구여관에서만 예배를 보았다. 배재학당 강당에서는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었다. 따라서 정동교회의 출발은 배재학당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펜젤러가 선교사인 동시에 배재학당 교장이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찬송 없는 예배였지만 교인 수는 점점 늘어 1892년에는 두 곳의 집회에 200명이 넘었다. 그러자 1894년 12월, 정동의 남녀 교인들이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였다. 그때 아펜젤러의 바램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을 서양식으로 짓는 것이었다. 8,000달러가 넘는 건축비는 교인들의 건축 헌금과 대부분 아펜젤러가 미국에서 모금해 왔다.
새 교회는 1895년(고종 32) 8월 7일, 스크랜턴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정동 34번지 3호)의 한옥을 헐고, 이해 9월 9일에 정초식을 하였는데 이때 법부대신 서광범이 축사를 하였다.
이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서양식 교회를 경험한 바 있는 일본인 건축가에게 교회 설계를 의뢰했다. 이 당시 요시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설계를 맡았고, 조선인 심의섭(沈宜燮)이 시공했다. 붉은 벽돌집의 이 예배당은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회란 뜻의 ‘하이 처치(High Church)’라고도 불리었다.
1896년 12월에는 지붕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1897년 12월 26일에 정동교회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은 이듬해 1898년(고종 35) 1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고딕풍의 이 교회는 그림 속에 보이는 유럽의 전원 건물을 연상케 하는데 내부는 평평한 천정에 기둥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 매우 간결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 예배당은 장안의 명물이 되어 인근 각처에서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이때 준공된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 교회의 신도들은 독립협회 운동, 여성해방운동, 인권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이승만·이상재·윤치호 등도 교인이 되어 이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새 교회는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예배를 보았으나(휘장은 1910년대 중반에 철거)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집회했다. 이 당시 교회 남쪽 문으로는 배재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이, 북쪽 문으로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이 줄을 지어 들어와 예배를 보아 정동 예배당은 예배를 매개로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자유공간이었다.
아펜젤러는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에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무지내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시흥 지역 경부선 철도 건설 현장을 지나가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인 노무자들은 이들을 러시아 간첩으로 잘못 알고, 아펜젤러 일행의 길을 막고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재판 증언 때문에 목포로의 출발이 지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어청도 부근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다른 배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침몰하자 한국인 비서와 어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다가 22명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정동제일교회는 1935년 그의 기념비를, 배재학교 총동창회는 1989년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에 추모비를, 전라북도 군산시 내초도 온누리교회는 2007년 6월 11일, 아펜젤러의 순교 105주년을 맞아 그가 조난한 바다에서 가까운 언덕에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를 완공하고, 입당 예배를 열었다.
정동교회는 내부 면적이 115평으로 비좁았으므로 1916년에는 늘어나는 신자의 수용 문제, 마루 예배 문제와 함께 건물 자체의 훼손이 문제가 되어 서북쪽을 증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에 이르러 교회당에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하자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리하여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에는 좌우익랑(左右翼廊)을 확장하여 현재와 같이 돌출한 현관 부분까지 벽면이 일직선으로 되는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여 175평으로 넓어졌다. 이에 따라 종래 라틴십자가 형태를 취하던 건물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바뀌었고, 내부구조도 많이 변했다.
1918년에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 가서 강연하고 모금한 돈으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사들여 설치하였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최근에 복원하였다.
1979년에 완공된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 현관에 안치된 이 종(鐘)은 1902년에 성경 번역차 목포로 가던 중 침몰 사고로 순직한 아펜젤러를 기념하여 미국에서 제작하여 들여온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신학자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이 종을 ‘세상을 깨우치는 종’이라는 뜻으로 ‘경세종(警世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종은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탄약 제조를 위해 징발하려고 떼어 놓아 주물공장으로 갈 뻔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반출하지 못했던 아슬아슬한 일화가 남아 있다.
6․25전쟁의 참화도 이 교회를 피해 가지는 않았다. 교회는 절반이나 부서져 버렸다. 따라서 예배당 중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수리 작업을 하여 1950년 11월 23일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당시 경제적, 건축적, 문화적 인식이 그 정도에 머물렀다. 1977년에 정동제일교회는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감리교 선교 80주년을 기념하여 1964년에 교회당 신축계획을 세우고, 1977년에 기공식을 올린 다음 1979년에 ‘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당’이 완공되었다.
1987년 3월 8일에는 화재로 인하여 사적으로 지정된 정동제일교회 건물의 내부 일부가 소실되었으므로 이를 보수하였다. 이 교회는 2000년 여름부터 복원 수리 문제로 내홍(內訌)을 겪었다. 1년에 걸쳐 보수 공사가 추진되어 2002년 3월 31일에 마감하고, 재헌당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