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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 소설 원문보기 글쓴이: 또랑또랑
평생 우리 사회의 대표적 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쯤 선종하셨다. 향년 87세. 강남성모병원은 김 추기경이 1989년 성체기증대회에서 약속한 대로 안구 등 장기 적출 수술을 했다. 1951년 사제 서품을 앞두고 그가 고른 성구는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였다. 그런 그가 어제 선종하면서 남긴 말은 “고맙습니다.” 한마디였다. 그는 그렇게 낮은 곳에서 온전히 헌신하며 살았다. 이제 그는 그가 따르던 분의 부름에 따랐고, 세상은 어둠을 밝히던 큰 별 하나를 잃었다. 그를 이끌어온 것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었다. 서구 중심의 세계관과 가톨릭의 독선에 갇혀 있던 교회의 문을 열고, 다른 종교, 다른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도록 한 게 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공의회를 계기로 검은 피부의 그리스도도 등장했고, 서구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신학도 용인됐으며, 다른 종교의 구원 가능성도 인정하게 됐다. 이미 전설이 되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의 길로 들어서던 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독재와 공포정치’를 규탄하는 강론을 하자 생중계하던 방송이 갑자기 광고만 내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일화로 기억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어록 ‣ 광주민주화항쟁 “우리는 지금 현대 한국 교회 사상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조선 말엽의 박해와 공산 학정을 제외하고 성직자가 이렇게 많은 수난을 받은 적은 근래에 없던 사실입니다. … 이들은 같은 동포요, 형제인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려 했던 것입니다. (중략)진실을 옹호하여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입각하여 행동하였을 뿐입니다.(1980년 7월22일 광주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시국에 관한 담화문 중)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 6월항쟁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저를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다음 신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를 밟고 가십시오.”(당시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 ‣ 사형제 관련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 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 낙태 논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1993년 낙태 논쟁에 대해) ‣ 남북문제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 가봐야 하는 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김 추기경과의 대담 평화신문은이 김 추기경과의 대담을 2007년 5월부터 8회에 걸쳐 회고록 형식으로 연재했는데, 당시 특히 화제를 낳았던 일곱 번째 ‘즉문즉답’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늙으면 섭섭한 게 많다고 하는데. “노인네 노여움 탄다는 말이 있다. 자식들 뜻은 그런 게 아닌데 그들 언행에 섭섭함을 느끼는 일종의 소외감이다. 나는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껴도 말이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웃는데, 난 영문을 몰라 소외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살아오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신부가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신부 외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은.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사제직 외에 동경한 것은. “코흘리개 시절 꿈은 읍내에 점포를 차려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사를 하지 않길 잘했다. 나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사기를 당해 알거지 되기 십상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동경했다. 유학 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잠시 서정길 대주교님 병수발을 들 때 값싼 입석표를 끊어 음악회에 자주 갔다. 열정적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의 손끝에서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많은 어휘를 함축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도 부럽다.”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특히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대목을 좋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서시도 참 좋은 시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애송시 한 편 읊어 달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고은 ‘가을편지’) ―애창곡은. “온 국민의 애창곡 ‘사랑해 당신을’. 예전엔 ‘저 별은 나의 별’을 자주 불렀는데 앙코르 요청을 받으면 ‘등대’를 이어 부르곤 했다.” ―별과 등대, 어둠 속 길라잡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잡기는. “신부님들 실력에는 못 미쳤지만 신학생 시절에 장기를 제법 잘 뒀다. 신부님들이 차포 떼주면 이길 때가 많았다. 덕분에 오징어를 자주 얻어먹었다. 화투는 고스톱보다 6백(600점 먼저 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좀 쳤다.” ―십자가와 성경을 제외한 애장품은. “성 김대건 신부님 성해 일부분, 성모상, 칫솔, 면도기, 그리고 20년 넘게 차고 있는 손목시계.” ―운전을 잘한다면 지금 차를 몰고 가보고 싶은 곳은. “특별히 가보고 싶은 곳은 없다. 젊었을 때 그런 질문을 받았으면 대답할 게 많았을 텐데….”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다면 어느 나라를. “뉴질랜드 공기가 맑고 경치가 좋다. 언젠가 한 번 갔을 때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는데 여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도 한번 다녀가라는 재촉을 받았다.” ―하느님께서 단 하루만 허락하신다면? “‘하루는 너무 짧습니다.’ 하고 하소연을 해야 하나? 아니다. ‘하느님 제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 사랑을 믿으며 당신 품에 들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겠다.” ―새내기 직장인이라면 연봉을 얼마나 기대하겠나. “1000만원 정도.” ―그 돈으로 어떻게 가족 부양하고 집 장만할 건가. “한 달에 80만원 정도면 밥먹고 전철 타고 다니고, 물도 사 마시고…. 그래도 20만원 정도 남을 것 같은데.”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사제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한 생을 잘 살다가 왔습니다.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도 털어놓고 싶은 게 좀 있기는 하지만.”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30년 가까이 내 발이 돼준 운전기사 김형태(요한) 형제. 성실하고 운전 잘하고 마음씨가 곱다.” ―추기경 김수환은 □□다. “추기경 김수환은 바보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22세기 사람들이 추기경 김수환을 어떻게 기억해 주길 바라나. “글쎄…. 참 못난 사람이라고 기억하지 않을까? 훌륭하지는 않아도 조금 괜찮은 구석이 있는 성직자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긴 한데.” ―묘비에 남기고 싶은 말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편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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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기경님의 어록들이 새록새록 합니다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