望雲樓 蘇軾(宋)
陰晴朝暮幾回新 (음청조모기회신)
已向虛空付此身 (이향허공부차신)
出本無心歸亦好 (출본무심귀역호)
白雲還似望雲人 (백운환사망운인)
구름 소식
흐리고 개이고 아침저녁 몇 번 바뀌는가?
나도 허공에 몸 맡기고 살아간다네.
무심코 생긴 터에 돌아가도 그만인걸,
흰 구름 너는 어찌 나를 그리 닮았느냐!
이른바 신법당(新法黨), 구법당(舊法黨)
사이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벽지로
유배를 가고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곤욕을 겪는 등 수없이 많은 인생 전환을
통하여 소동파는 자신의 모습이 허공에
무심히 피어올랐다가 또 사라져 없어지는
흰 구름과도 같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를
시로 옮겨놓은 것이다.
望雲樓(망운루) / 蘇軾(소식)
陰晴朝暮幾回新
已向虛空付此身
出本無心歸亦好
白雲還似望雲人
흐렸다 맑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몇 번 새롭게 하여
이미 허공을 속에 이 몸을 보냈으니
나올 때 본이 없던 속 돌아가도 역시 좋아
힌구름 돌아오는 것이 구름같은 사람 보는 것 같습니다.
소식(蘇軾)
11세기 송대의 대문호 소식은 시, 산문, 서예, 회화 등 많은 분야에서 걸출한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중국고대 문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식은 일명 소동파(蘇東坡)라고도 부르는데 1037년 중국 서남 사천성 미주의 한 관료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도 당시 유명한 문학가였는데 가정의 영향으로 소식은
어린시절부터 문학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특이한 천부를 자랑하기도 했다.
소식과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蘇轍)을 두고 중국문단에서는 "3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각기 7세기로부터 12세기까지의 중국 당송 두 조대의 가장 걸출한 8대가 행렬에 들기도 한다.
소식은 시 분야에서 아주 큰 성과를 이루었다. 중국의 고전시가는 당나라때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이백, 두보와 같은 걸출한 시인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9세기 말기에 이르러
중국의 고전시가 형식에 점차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는데 문구의 길고 짧음이 더욱
자유로워 지는 등 시인들의 창작 공간이 더욱 넓어졌고 시 표현 내용도 더욱 풍부해졌다.
이런 새로운 시의 표현 형식을 두고 사람들은 "사"(詞)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는 그후 발전과정에서 비록 많은 유파가 형성되였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협소한 등 제한을 받았다. 11세기에 이르러 소식은 사의 소재, 풍격, 기교에 대해
대담한 시도와 혁신을 단행하면서 당시 문단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소식은 일생동안 많은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3세기 장강유역에서
중대한 전역인 적벽대전의 옛 전쟁터를 소재로한 "적벽회고"(赤壁懷古)를 들수 있는데
전쟁터를 돌아본 자신의 느낌을 작품에 담아냈다. 대표적인 시구로는 "큰 강은 동으로 흘러,
천고의 풍류인물 싣고 가네"가 있다.
이는 대자연의 웅대한 정경을 묘사함과 더불어 당년 영웅인물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표현한 시구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강성자"(姜城子)는 돌아간 부인을 기념해
쓴 작품이다. 여기서 소식은
"십년의 생사이별 세월은 변했어도, 그대에 대한 그리움 시종 더해만 가네. 천리를 떨어져
괴로움마저 하소연 못하네. 설사 만난다해도 그대는 백발의 초라한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
라는 문구로 작고한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묘사했다.
한편 소식이 동생에게 보낸 "오래오래 살아, 저 아름다운 달을 함께 누렸으면"라는 구절은
이미 사람들이 서로 아름다운 축복을 주고 받는 명구로 정착했다.
오련산(五蓮山)에 남겨놓은 소식의 글씨
소식은 산문분야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여행기 분야에서 후세에 본받을 걸작을
남겨놓았는데 기재에 의하면 지금까지 전해지고 남겨진 소식의 시 작품은 무려 2천7백 여편에
달하고 이런 작품들은 모두 소재가 광범위하다. 서정시가 있는가하면 정치시도 있고 또한
정치평론, 회화평론 등도 있어 문학적인 가치는 물론 역사적인 가치가 아주 풍부하다.
문학분야의 성과를 제외하고도 소식은 또 서예, 회화 분야에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었다.
당시 그는 전국적으로 4대서예가라는 칭호도 소유하고 있었고 회화분야에서의 소식의 기여는
더욱 크다. 소식이전에는 중국 전통서예가 많이는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기예(技藝)로
치부되였을뿐이지 시가와 같은 고상한 예술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관해 소식은 처음으로
"문인화"(文人畵)라는 개념을 내놓고 시, 서예, 회화를 일체화할데 대해 주장했다.
그의 높은 성망과 인지도로 해서 이 이론은 출시되자 마자 지식인 계층의 호응을 받았다.
하여 소식의 시대로부터 "문인화"는 점차 중국 전통회화의 한 종류로 자리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학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식도 일찍 오랜기간 관리로 몸담고 있으면서
그 성망이 아주 높았다. 중국동부의 유명한 관광도시 항주시에 가면 지금도 그의 유적지를
볼수 있다. 항주의 지방행정장관직에 있으면서 소식은 항주의 서호에 대해 대규모 정리를
진행했는데 호수에서 파낸 흙을 이용해 긴 언제를 쌓았고 다리를 건설하고 길을 수건해
수상 교통에 편리를 도모했다. 후에 사람들은 소식이 호수에 건설한 언제를 "소제"(蘇堤)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 소제는 항주의 유명한 관광 명소로 남아있다.
알려진데 의하면 당시 항주 사람들은 소식의 이러한 거동에 감사를 표하는 마음으로 해마다
설이 되면 많은 양의 돼지고기를 소식에게 선물했는데 소식은 사람들을 시켜 이 고기를
전부 토막을 낸후 요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요리는
그 맛이 아주 일품이였다고 하고 그후 많은 사람들은 이 요리를 본따 만들었고 또 요리에
소식의 이름까지 달아 "동파육"(東坡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동파육"은 중국에서
유명한 요리로 이름높다.
소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중국인들한테 널리 알려졌다. 소식의 고향 사천성 미주시에 가면
소식의 3부자(三父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삼소사박물관"(三蘇祀博物館)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식의 가문의 역사와 생활에 대해 상세히 알아볼수 있다. 박물관에 설치된
소식연구회에서는 또 정기적으로 국제적 소식(蘇軾) 포럼을 개최하는것으로 이 걸출한
문학가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