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같이 넓고 깊은 불교세계(佛敎世界)
<< 차 례 >>
◇ 강화도의 사찰(寺刹)들에 관한 설화
1.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강화 전등사(傳燈寺)
2. 강화 석모도 낙가산(洛迦山) 보문사(普門寺)
3. 마니산 정수사(精修寺/淨水寺)
4. 고려산 백련사(白蓮寺)
5. 고려산 적석사(積石寺/赤蓮寺)
6. 고려산 청련사(靑蓮寺/국정절)
7. 혈구산 황련사(黃蓮寺/穴口寺)
8. 선원면 선원사(禪源寺)
9. 강화읍 청수암(淸水菴/남산절)
<강화도의 사찰들>
강화도의 사찰(寺刹)들에 관한 설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로 꼽히는 섬(島) 강화도는 중부지방 전역의 물을 한데 모아 오는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 예성강(禮成江)이 합쳐져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물머리(合水머리)를 막고 있는 섬으로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이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 단군(檀君)께서 하늘에 제사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참성단(塹聖壇)이 있는 등 민족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옛 문헌을 살펴보노라니 수많은 사찰들이 강화도 곳곳에 산재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몇 개의 사찰만이 남아 있는데 소개하고자 한다.
<오련지(五蓮池) 설화(說話)>
고구려 장수왕 때 천축조사(天竺<印度> 승려)가 강화도 고려산 정상에 올랐는데 그곳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五蓮池)을 발견하고 연꽃을 따서 던져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곧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에 백련사(白蓮寺)를, 푸른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청련사(靑蓮寺),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적련사(赤蓮寺), 노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황련사(黃蓮寺), 검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흑련사(黑蓮寺)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積石寺)의 3개 사찰만 있으나 기록에 의거 혈구산(血口山)에 있던 혈구사(穴口寺)를 근래(1962년) 황련사(黃蓮寺)로 이름을 바꾸었고, 강화 가운데 우뚝 솟은 고려산(高麗山)은 지금도 봄이면 진달래 축제로 유명한데 정상 조금 아래쪽에 설화에 나오는 오련지(五蓮池) 흔적이 남아있다.
1.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강화 전등사(傳燈寺)<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전등사 입구 / 대조루 / 전등사 대웅보전 / 나목녀(나부상)
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는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AD 381(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AD 1266(고려원종 7년)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AD 1282(충렬왕 8년)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옥등(玉燈)을 시주해서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고쳤다고 하는데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AD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AD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AD 1605(조선선조 38년)에 불이 나서 사찰건물 절반가량이 소실되었고, AD 1613(광해군 5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스님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AD 1625(인조 3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찰이 들어서 있는 이곳은 자그마한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우리나라 건국신화에 보면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었던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삼형제가 성을 쌓아서 삼랑성(三郞城)이라 하였는데 산세 모양이 솥발이 앉은 모양이라 하여 정족산(鼎足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이후, 삼랑성(三郞城)을 정족산성(鼎足山城/국가사적 제130호)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성의 둘레는 약 2,300m 정도이다.
옛날부터 강화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여겨져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鼎足)은 강도의 두뇌』라 칭할 만큼 중요한 위치로 여겨졌던 곳이다.
전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一柱門)이나 불이문(不二門/일명 解脫門)이 없는데 대신 삼랑성 (정족산성)의 동문(東門)과 남문(南門/宗海樓)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되어있지만 서울에 있는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 창건된 사찰이니 명칭만 그러할 뿐이지 전등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이 틀림없다.
경내(境內)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178호), 약사전(藥師殿/보물 제179호),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향로각(香爐閣), 적묵당(寂黙堂), 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년 판각/104장 보관)이 있다.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현재의 전등사는 그리 큰 사찰은 아니지만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조루(對潮樓)가 특이하다.
대조루라는 명칭은 이곳 대조루에 올라가서 바라보면 산 아래로 아득히 바다가 바라보이는데 바로 김포지경과 강화도를 가르는 염하(鹽河/짠내)가 내려다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潮:조수 조)
대웅보전 앞마당 바로 밑에 세운 대조루는 기둥을 세워 다락처럼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으로 사찰로 올라오다보면 20여 개의 돌계단이 있고 그 위에 덩그마니 원두막처럼 있는 건물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건물이 대조루이고 통과하면 바로 대웅보전 앞마당이다. 이 건물은 들어갈 때(앞쪽)는 전등사(傳燈寺), 들어간 후 마당에서 뒤돌아보면 대조루(對潮樓)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이 대조루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식의 건물인데 지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48년(영조 24)에 주지 초윤(楚允)과 화주인 보학(寶學) 등이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41년(헌종 7년)에는 화주 연홍 등이 중건했다고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에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있는데 건물의 용도는 작은 강당처럼 되어있어 큰스님이 설법을 하시면 스님들이 줄지어 앉아 법문을 공부하던 강당(講堂)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등사 나목녀(裸木女, 일명 裸婦像)>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처마 네 귀퉁이에는 벌거벗은 여자(?) 모습의 조각상이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설치되어 있어 재미있다.
이 조각에 대해서 마당 구석에 설명판도 붙어있지만 그 내용과는 다른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① 전등사 대웅전을 고쳐지을 때 대목수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 주막집 여자를 원망하여 대목수는 벌거벗은 몸으로 추녀를 받치고 있도록 하여 영원한 벌을 받게 했다.
② 불교 설화에서 산에 있던 원숭이들이 몰려와 불사(佛事)를 도왔다는데서 벌거벗은 여인이 아니고 원숭이를 새겼다.
③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몽고황제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에 밀려 제2비로 책봉되자 그 원한으로 제국대장공주의 모습을 벌거벗겨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새긴 것 <해설판에는 ①②만 기록되어 있다.>
<화냥년(還鄕女)과 호로(胡虜)새끼>
고려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보면, 제23대 고종 때(AD 1232)때 강화로 피신하여 몽고(元나라)에 항전했으나 제24대 원종 때(AD 1270년) 항서(降書)를 쓰게 되고 34대 공양왕(恭讓王AD 1392년)에 이르러 이성계에 의하여 공양왕이 폐위(廢位)되면서 고려시대는 결국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이성계가 정권을 잡기까지 120여 년 간, 고려는 열 명의 왕이 대를 이어가지만 원나라의 사위 나라라는 부마(駙馬)국으로 격하되고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치는 수모를 당한다. 또, 충렬(忠烈)왕, 충선(忠善)왕, 충숙(忠肅)왕.... 모든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충성 충(忠)자를 붙여야만 했다.
고려 25대 충렬(忠烈)왕 또한 세자(世子)시절이던 25세 때 신종(申宗)의 증손녀 왕씨(훗날 정화궁주<貞和宮主>)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있었으나 39세 되던 해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의 딸인 16세의 쿠틀룩 켈미쉬(훗날 제국대장공주:장목왕후<莊穆王后>)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이듬해 아버지 원종(元宗)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정실부인인 정화궁주를 밀어내고 제국대장공주가 제1비(장목황후), 정화궁주가 제2비가 되고, 나중에 낳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 왕위(忠宣王)에 오르게 되었으니 정화궁주의 원한은 얼마나 사무쳤을까....
고려는 원나라에 매년 엄청난 공물(貢物)을 바쳐야했는데 특히 가슴 아픈 일은 처녀는 물론 부녀자를 포함하여 엄청난 수의 여인들(貢女)을 바쳐야 했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포로(捕虜)로 끌려가거나 공녀로 바쳐진 사람들이 총 60만이나 되었다는데 그 중에서 여성이 50만이었다고 한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은 하녀, 첩살이, 궁중의 시녀 등으로 그야말로 온갖 수모를 겪게 되는데 그 중에는 궁중의 시녀로 들어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기황후(奇皇后)도 있다.
공녀(貢女)로 간 고려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기회를 잡아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환향녀(還鄕女) - 해석하면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은 사실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몽땅 싸잡아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왔다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결혼도 할 수 없었고 부녀자의 몸으로 끌려갔다가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시집에서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내 쫓는 것은 물론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인조(仁祖)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환향녀들은 홍제원 냇물(현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고 오면 몸이 깨끗한 여인으로 간주하고 만일 그런 여인들을 보고 정조(貞操) 운운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공포(公布)까지 하였다니 웃지 못 할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기황후가 원(元)의 황후가 된 이후 고려의 공녀제도가 없어졌다니 기황후의 업적이라 하겠지만 기황후의 두 오빠들이 고려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공민왕에 이르러 제거되는데 그 연유로 기황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는 위대한 황후 중 한 명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때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 환향녀(還鄕女), 바로 ‘화냥년’의 어원(語源)이다.
그리고 그 환향녀들이 낳은 자식들은 호로(胡虜)새끼 - 즉 ‘되(胡)놈들한테 포로(虜)로 잡혀갔던 사람의 자식’이라는 의미인데 변하여 호래자식, 후레자식이 되었고, 사람취급도 안했다니 슬픈 이야기이다.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
삼랑성 동문 / 정족산 사고 / 삼랑성(정족산성) / 범종
전등사 뒤편 골짜기를 조금 올라가면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있다.
잦은 외침(外侵)으로 귀중한 국가 기록물들이 소실되는 일들이 잦아지자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역사 기록물들을 4부(秩)를 출판하여 전국 4곳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이것을 4대사고(四大史庫)라 하며 서울의 춘추관사고(春秋館史庫), 경북의 성주사고(星州史庫), 전남 전주사고(全州史庫), 충북 충주사고(忠州史庫)가 그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제외하고 모두 불탔는데 전주사고도 위험에 처하자 선비들이 나서서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또 다시 정읍(井邑)의 내장산(內藏山)으로 옮겨서 보관하다가 황해도 해주(海州)를 거쳐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로 옮겨 가까스로 난을 피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지나고 난 후 사고(史庫)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국 5곳에 새로이 사고(史庫)를 짓고 기록물들을 5질(秩)을 출판하여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이것이 곧 조선 후기 5대 사고(史庫)이다.
5대 사고(史庫)는 서울의 춘추관사고(春秋館史庫), 경북 봉화의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인천 강화도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전북 무주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강원 평창의 오대산사고(五大山史庫)이다.
이 강화도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는 1660년(조선 현종 1년)에 건물을 짓고 이곳에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역사기록물들을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당시의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다.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전등사 앞마당 한 쪽에 종각(鐘閣)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다른 사찰에서 보던 종 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 종은 우여곡절이 많은 종인데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금속류를 강제 수탈(收奪)해 갔는데 광복이 된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富平 軍器廠)에서 범종이 발견하여 이곳 전등사로 옮겨와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일제가 일본으로 실어가려고 보관했는데 광복이 되자 가져갈 기회를 놓친 것이다.
종의 크기는 높이가 1.64m, 아래 입의 지름이 1m인데 종의 아래 부분이 곡선으로 되어 있는 것 등 한국의 종과는 전체적으로 다소 다른 느낌이 든다. 종의 모습을 살펴보면 종의 머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이 웅크려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한국의 전통 종과 가장 다른 것은 소리의 울림을 위하여 설치하는 음통(音筒)이 없다.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몸통에 새겨 넣은 문양도 한국 종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위쪽에는 8괘(八卦)를 그려 넣었고 그 밑으로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는데 그 사이사이에 명문(銘文)을 새겨 넣었다.
이 명문(銘文)의 내용이 중국 허난성(河南省)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北宋)의 철종 4년, 곧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새겨져 있으니 중국종이 확실한 셈이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우리나라에서 중국 종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라고 한다.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우리나라 보물 제393호>
전등사(傳燈寺)
내가 써본 시(旅浪 白忠基)
마리산 줄기 흘러내린 곳 / 솥발을 세우듯 / 정족산(鼎足山) 자락을 열고
단군의 세 아드님께서 삼랑성(三郞城)을 쌓으시다
정화궁주(貞和宮主) 옥등잔(玉燈) 시주 하시고 / 대웅전 앞 뜰 거니시며
북녘 하늘 바라고 바람 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실 제 / 세월은 살같이 천 년을 흘렀어라
세진(世塵)에 찌든 꺼풀일랑 훌훌히 벗어버리고
하늘을 향해 오롯이 합장 하신 / 나목녀(裸木女)의 모습은
가슴 저미는 아픔일랑 차마 말씀 못하시고 / 저토록 인고忍苦의 날들을 보내셨던
나의 어머니.....
핏빛으로
피안彼岸이 저기런가 어우러진 저녁노을 / 나지막한 임의 속삭임인 양
골짜기 마다 / 푸른 범종(梵鐘)소리 가득 담겨질 때
머리를 맞댄 마을 지붕들 / 숨죽이고 듣고 있다.
임들이 꿈꾸시던 불국정토(佛國淨土)가 / 꿈만은 아니었던가.....
2. 강화 석모도 낙가산(洛迦山) 보문사(普門寺)<삼산면 매음리(席毛島) 낙가산<洛迦山>
보문사(普門寺) 대웅전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 / 석굴사원 / 천인대(千人臺)
보문사는 인천 강화도의 석모도(席毛島)에 있는 절로, 우리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곳인데, 이 절의 창건(創建)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AD 635년(신라선덕여왕 4년) 4월,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올라왔다고 한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바다에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돌덩이가 올라왔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버렸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하라고 하였다. 다음날 다시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洛迦山)으로 옮겼는데,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어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생각하고 굴 안에 단(壇)을 쌓고 모셨다고 한다.
고려 초,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선사(懷正禪師)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좌보처(左補處)는 미륵보살(彌勒菩薩), 우보처(右補處)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羅漢像)과 송자관음(送子觀音)이었다.
회정(懷正)은 이 22존 중 삼존불(三尊佛)과 18나한은 굴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洛迦山) 보문사(普門寺)라 하였다고 한다. 보문사는 이 지하 법당(臥佛殿)과 함께 또 하나의 자랑으로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과 천인대(千人臺)도 있다.
마애석불좌상(磨崖石佛坐像)은 보문사 뒤쪽 계단을 올라가면 있는데 눈썹처럼 튀어나온 바위절벽 밑에 조성한 마애불(磨崖佛)로,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裵善周)와 함께 조각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9.2m, 폭 3.3m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석불좌상은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받침위에 가부좌(跏趺坐)한 모습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어 더욱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불임(不姙) 여성들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는 곳이다.
또 보문사 뒤 절벽 위에는 천인대(千人臺)도 있는데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로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千人臺) 위로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千人臺)라고 명명하였다. 전하는 이야기로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 육영수 여사가 이곳 보문사에 크게 보시(布施)하고 치성(致誠)을 드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보문사(普門寺) 대웅전 앞마당에는 우리나라 농악(農樂) 사물놀이의 기원이 되는 불교의 사물(四物) 타악기(打樂器)들이 설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물놀이라 함은 농악(農樂-風物)에서 사용되는 주요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사물(四物)이라고 하는데 모두 타악기(打樂器)로 다양한 리듬을 연주한다.
그런데 이 사물(四物)은 원래 불교(佛敎)에서 사용하는 네 가지 악기를 나타내는 말로 지금도 큰 사찰에는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의 네 가지를 말한다.
쇳물을 부어 만든 범종(梵鐘)은 죽은 영혼들인 명부중(冥府衆), 가죽을 씌워 만든 북인 법고(法鼓)는 현세의 모든 생명체인 세간중(世間衆), 나무로 물고기형상을 깎아 만든 목어(木魚)는 온갖 물속(水中) 생물들인 수부중(水府衆), 철판을 구름처럼 잘라 만든 운판(雲板)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인 공계중(空界衆)으로, 모든 영혼들을 제도(濟度)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제도(濟度)는 불교 용어로, 모든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구제하여 열반(涅槃)의 언덕을 건너게 한다는 뜻이다.
목어(木魚)를 연주하는 방법은 연주자(打者-스님)가 채 두 개를 들고 구멍이 뚫려있는 배 부분 속으로 채를 넣어 쭉 돌아가며 연주하는 방법이다.
<범패(梵唄)와 바깥채비 소리>
중요한 불교의식에서 공연되는 범패(梵唄)는 ‘인도 소리’라고도 부르는데 스님들만의 공연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며,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가 있고 비교적 단순한 몸짓이 있다
안채비소리는 불경독송에 리듬과 약간의 고저를 넣어 비교적 쉽지만 바깥채비소리는 홋소리와 짓소리가 있는데 내용이 한문이나 범어(梵語)의 사설로 되어있고 복잡하여 익히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1964년), 오대산월정사 대웅전(寂光殿) 상량식에 갔다가 범패(梵唄)를 처음보고 감동했었다.
이 범패에 사용되는 악기도 사물(四物)이라고 했는데 태평소(太平簫), 징(澄), 북(鼓), 목탁(木鐸)이다.
목탁(木鐸)은 목어(木魚)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돗자리 위에 놓고 치는 대형 목탁, 동그란 손잡이로 들고 치는 작은 목탁이 있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 생물로 경각심(警覺心)을 의미한다.
목탁과 비슷한 것으로 요령(搖鈴)도 있는데 손잡이를 잡고 흔들면 속에 혀(舌)가 부딪혀 소리가 나는데 혀를 쇠로 만들면 금탁(金鐸)으로 무사(武事)에 사용되었고, 혀가 나무면 목탁(木鐸)이라 하였으며 둔탁한 소리가 나는데 문사(文事)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커다랗게 만든 대(大) 목탁은 공양(供養:식사시간)을 알릴 때에는 길게 한 번 치고 스님들이 모여 공동으로 작업하는 시간을 알릴 때에는 길게 두 번, 불경(佛經) 학습이나 입선(入禪) 때에는 길게 세 번을 친다. 길게 치는 방법은 세게 치다가 차츰 작게 치면서 소리가 잦아들게 연주하는 방식이다. 손에 들고 치는 작은 소(小) 목탁(휴대용)은 염불(念佛)을 외면서 사찰을 도는 도량식(道場式)이나 불경을 욀 때, 또는 기도를 올릴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3. 정수사(精修寺/淨水寺) -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마니산<摩尼山>
정수사는 AD 639(신라 선덕여왕 8년)에 회정(懷正)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석모도(席毛島) 낙가산(洛迦山)의 회정선사가 마리산 참성단(塹城亶)을 배관(拜觀)한 뒤 그 동쪽 기슭에 앞이 훤히 트이고 밝은 땅을 있는 것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정수(精修)할 곳이라 하면서 사찰을 짓고 정수사(精修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함허(涵虛)대사가 중창하고 득도한 곳으로, 근처에 맑은 샘이 있어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인근의 골짜기가 함허동천(涵虛洞天)이다.
정수사(淨水寺) / 대웅보전 연화문(蓮花紋) 창 / 정수사 샘물
정수사(淨水寺)
내가 써본 시(旅浪 白忠基)
침묵(沈黙)으로 / 긴 수림(樹林)의 골짜기를 더듬어 올라 / 가쁜 숨으로 마주한 곳
암벽(岩壁)의 비좁은 틈새에 자리하고 / 천년(千年)을 굽어보시다.
숱한 영욕(榮辱)의 역사들은 / 한줄기 바람 되어 스치는데
고즈너기 / 풍경 소리 귀 기울이며 / 햇살 따사론 대웅전 마루에서
세월이 묻어 나오는 / 연화문(蓮花紋) 창살을 더듬다.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 한자 한자 법화경(法華經) 새기시고
함허(涵虛) 큰 스님 낭랑한 독경 소리 / 저녁 예불(禮佛) 드리오실 제
먼 골짜기에선 / 오늘처럼 / 산 비두로기 울음 울었을까?
<감상 노트>
꽃살문(蓮花紋) 창살 - 대웅전 전면 문은 아름다운 꽃으로 조각 된 4쪽문이 유명.
몽고병란(丙子胡亂) 때 이곳 정수사에서 팔만대장경 법화경(法華經)을 판각 하였다고 함.
4. 백련사(白蓮寺)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려산<高麗山>
백련사 극락전 / 삼존불(三尊佛) / 벽면을 채운 탱화(幀畵)
이 절은 AD 416(고구려 장수왕 4년)에 한 인도 승려가 창건했다고 전해오지만 고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매우 아담하고 조용한, 역사가 오랜 사찰인데 삼존불 중 가운데 모신 철조 아미타여래좌상은 우리나라 보물 제994호로 지정되었는데 1989년에 도난을 당하여 현재 모시고 있는 불상(佛像)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5. 적석사(積石寺/赤蓮寺) -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고려산<高麗山>
적석사 대웅전 / 종각(鐘閣) / 고려산 등산로 / 적석사 표지석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1934) 불교학자 안진호(安震湖)에 의하면 이 절은 백련사, 청련사 등과 함께 AD 416년에 창건되었고, 처음의 이름은 적련사(赤蓮寺)였다는 사실을 전설로 전하고 있지만, 고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고 한다. 다만 AD 1714(숙종 40년)에 세워진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에는 조선시대 중·후기 절의 중건 및 중수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적석사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겼을 때 임금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던 곳이며, 삼별초(三別抄) 항거 때 선원사(禪源寺) 등 다른 절들은 피해를 보았지만 적석사(積石寺)는 온전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적석사는 고려산 줄기가 서쪽으로 흘러내린 끝부분으로 일몰(日沒) 관광지로 유명하며, 고려산에서 시작하여 적석사까지 조성된 등산 데크(Deck) 길이 너무나 아름다운데 봄이면 온통 진달래 꽃밭이다.
적석(積石)은 돌을 쌓았다는 의미겠는데 절이 거의 절벽 꼭대기에 있어 주변은 온통 돌로 쌓아올렸다.
6. 청련사(靑蓮寺/국정절)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고려산<高麗山>
오련지(五蓮池) / 청련사(靑蓮寺) / 김소월 시비(詩碑:진달래꽃) / 고려산 정상
청련사(靑蓮寺)는 AD 416(고구려 장수왕 4년)에 인도의 승려가 중국 진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하기 어려운 설화이다.
고려산 정상 바로 조금 아래 있는 청련사는 근처에 다섯 색깔의 연꽃이 피었다는 오련지(五蓮池)를 조성해 놓았고, 봄이면 고려산은 온통 산 전체가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등산객을 불러 모은다.
청련사에서 적석사까지 그다지 멀지도 않고 등산로도 기막히게 조성해 놓아 봄이면 항상 등산객들로 붐빈다.
고려산 정상에는 북녘이 빤히 건너다보이니 공군부대의 레이더(Radar) 기지가 들어서 있다.
7. 황련사(黃蓮寺/穴口寺) -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혈구산<穴口山>
혈구산 등산로 / 혈구산 정상 / 황련사(黃蓮寺/穴口寺)
황련사(黃蓮寺)는 고려산(436m)과 마주보고 있는 혈구산(466m)에 있는 사찰(寺刹)이다.
이 절은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기고 흥왕이궁(興旺離宮)과 삼랑성가궐(三郞城假闕)을 지을 때 함께 세웠다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혈구사(穴口寺)로 고려시대 유일하게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이 베풀어진 사찰이라고 한다. 대일왕(大日王)은 밀교(密敎)의 본존인 대일여래를 지칭하는 마하비로자나불(摩訶毘盧遮那佛)로 이 대일여래를 받들어 공양하는 법회장이 대일왕도량이다.
1962년 오련지(五蓮池) 설화에 의거 절 이름을 황련사(黃蓮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8. 선원사(禪源寺) -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사적 259호)
선원사 / 우(牛)보살 / 선원사 연꽃 축제
선원사(禪源寺)는 1.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려의 문화를 꽃피운 가장 대표적인 사찰로 기록되어있고 세계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위한 대장도감이 설치되었던 대찰(大刹)로 민족의 성지였는데 기록으로만 있고 장소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1976년 동국대 강화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지표조사를 하면서 처음 확인되었다는데 주춧돌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1977년 ‘강화선원사지(江華禪源寺址:사적 제259호)’로 확정되었다.
현재 선원사지(禪源寺址) 앞에 작은 법당을 지어놓고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는데 진척상황은 미미한 편이다. 절 바로 앞에는 얼마 전 TV에서 혓바닥을 쳐서 목탁소리를 낸다고 알려진 ‘우보살(牛菩薩)’, 또, 상당히 넓은 면적의 연꽃연못(蓮塘), 매년 열리는 연꽃축제 등이 유명하다.
9. 청수암(淸水菴/남산절) -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남산<南山>
남산 청수암 / 청수암 약수 / 남산 둘레길(강화산성)
청수암은 1936년 봉법(奉法) 스님에 의해 창건된 암자라고 하는데 1969년 덕룡(德龍) 스님이 미륵전(彌勒殿)을 새로 지으면서 본격적인 절의 모습을 갖추었고, 1972년에는 대웅전을 중수(重修)하였으며 1976년에는 대웅전, 미륵전, 칠성각,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중건하였다.
이 절은 경내가 숲이 울창하고 조망이 좋아서 이름 높고, 또 절 뒤편에 있는 언덕은 임금이 되기 전 이곳 강화에서 살던 철종(哲宗)이 애용하던 약수터가 있다. 예전에는 강화 남산(南山) 북록(北麓)에 자리하고 있어서 남산절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