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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리고 쇼(show)하기
(*쇼 show는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이 모이면 인생이 된다. 인생을 연극 무대로 비유한 문인이 많다. 우리의 삶이 남에게 보여주기라는 것이다. 쇼라고 한 대표적인 인물이 세익스피어 이다.
일상이란 개인의 생활이다. 개인 생활이란 개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만 있는 특수한 생활이다. 일상은 그 사람의 특수한 생활양태로(개체 특이성) 나타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성(사물의 특징이나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보기로는 평범하게 살아간다. 수필은 개인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기의 일상을, 스스로 엿보기를 하고, 공개적으로 논쟁도 하면서 자신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글이다. 즉 나의 삶을 재현해 내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그냥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고 추상화하는 작업이다. 자기의 일상을 추상화 하지 못한다면 그냥 제시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말이 어려우므로 풀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일상을 엿보기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을 조금은 삐딱한 눈으로(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서 자신만의 특이한 점을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일상을 추상화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수필쓰기가 바로 이런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추상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의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일상의 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속성을 말한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속성이랄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미를 찾아낸다는 뜻이다. 평범함이 일상사라면, 평범한 일상사에서 평범하지 않는 어떤 의미를 찾아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상사란 그 사람의 지속적이고, 공통적인 삶의 행태이기도 한다. 일상사를 글로 써서, 글을 읽는 독자에게 평범한 삶의 너머에 있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글쓰기 전문가라는 수필가의 작업이다.
이 말을 다시 분석해보면 한 사람의 일상사란 하나하나의 행동에 그 사람만의 공통성이 있고, 행태들도 서로 닮아 있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고, 그 공통점이 속성이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가는 자기의 일상을 소재로 하여(엿보기를 하여, 자신의 은밀함을 찾아내서) 의미가 담겨 있는 수필을 쓴다.
자신의 정상적인 일상을 드러내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할 때는 사실 그대로이기 보다는 ‘이상화’하여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사람이란 언제나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말하였듯이 일상이란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하는 연극이다. 자신이 연기하는 연극에 관중이 빠져들기를 바란다. 일상이란 내가 쓴 희곡을 내가 연출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연기하기가 가장 좋다. 실제의 삶보다는 글로 나타내는 자신의 일상이 더 연극적이라고 한다. 글을 쓸 때 또 한 번 연출한다. 때문에 수필글은 자신의 연기를 멋지게 나타낼 수 있는(이상화하여) 가장 좋은 연극이다.
삶이란 인생사를 연극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배우가 무대애서 연기하는 연극은 어떤지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배우가 관객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행동과 몸가짐을 고프만은 ‘인상 관리’라고 하였다. 시쳇말로는 ‘이미지 관리’이다. ‘이미지 관리’라는 것도 따져보면, 자기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는 행동이다. 공주병이나 왕자병처럼 너무 심하면 관객의 호응을 얻기에 역효과일 수가 있다. 배우는, 아니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도 관객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이 말은, 우리의 행동들은 제 멋대로만이 아니고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수필(삶을 소재로 쓴 연극 대본이다.)의 소재가 되는 일상의 생활을 좀 더 관찰해보자.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하나 다르지 않게, 우리도 일상 생활에서 인상 관리를 하면서 연기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일상이 사적 생활이라 하여 보는 사람이 없이 저 혼자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보는 사람이 있고, 행동하는 우리도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례를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다.
의사 선생님의 진료실에 들어가면 외국에 가서 외극 의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걸려있다. 교수님의 방에는 자신이 읽어내는지는 모르지만 두꺼운 원서로 가득 채워있는 책장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상 관리이다.(이 내용의 사실 여부를 나는 모르고,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였음) 이런 현실은 하나의 코미디이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수도없이 나타난다. 수도 없이 나타나는 이런 것이 수필쓰기의 소재가 된다. 이것이 코미디라 하더라도 현실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의 사회이고 우리의 문화라는 것이다. 일상을 쇼(show-보여주기)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수필론으로 말하여, 수필가가 쓰는 수필은 일상을 추상화하는 작업이라고 말하였다. 일상이 쇼라면, 수필은 쇼를 단순히 제시(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쇼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사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일상사에는 사회의 공동 관심들과 공동의 가치들이 녹아 있다.
우리가 너무 보여주는 것만을 의식하여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 많이, 너무 멋지게 보여주면, 관객은 오히려 빨리 식상해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적당히 보여줌으로 관중들의 식상함을 줄이는 방법이 있을까. 우리의 삶 자체를 쇼라고 하였으므로 그런 방법이 거의 없다. 수필을 쓰는 우리에게는 그런 사실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현실의 생활이 보여주기가 아니고 완벽하다면 현실을 추상화하여, 그 너머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현상과 이상이 하나라면 의미를 찾아나설 이유도 없다. 찾을 필요가 없다면 수필쓰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쇼를 하느라 속임수와 거짓을 포함하는 일은 부지기 수라고 하였다. 인간의 삶이 쇼라고 하여,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보여주기 싫은 것들도 많이 있다. 보여주지 않으니 남에게는 숨겨진 행위이고,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사회의 주류적 가치관이나 이상적인 기준에 맞지않는 것들이라서 드러내기 싫어한다.
배우들이라면 관객들이 보지 않은 무대 뒤에서 자기의 속내를 털어내어 보이기도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이런 것들도 나의 삶이고, 나의 일상이 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의 경우는 거짓인 경우가 많다, 즉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의 행동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쇼라고 하였다.
쇼가 허위성이 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적인 허위의식의 대표격인 체면이란 것도 사회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경조사에서 내가 봉투에 넣어야 하는 액수라든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데도 자녀의 결혼식장을 호텔로 잡아야 하는 일이라든지------, 체면 때문이라고 하지만, 따져보면 사회문화적인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는 행위가 대부분이다. 배우가 무대 뒤에서 털어놓는 독백처럼 체면과 사회문화가 나를 허위 의식으로 몰아갔다는 뺘아픈 반성을 하고, 이런 내용을 수필글로 표현하였다면, 삶이라는 일상 너머에 있는 추상성에서 의미를 찾아낸 표현이 아닐까.
여기에서 사례로 든 보기에서는 상식적으로 쇼의 허위성과 거짓이 단번에 드러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뼈를 깎는 아픔을 가지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다. 왜냐면 일상의 삶은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를 할 때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처럼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배우가 무대의 뒤에서 쏟아낼 수 있는 불만의 토로와는 다르다. 일상에서 서로 다른 양면을 무자르듯이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다. 우리의 일상은 이중성을 띄고 있으므로 쇼를 하는 행동이 오히려 쇼의 가식성을 폭로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타인을 너무 의식하면 쇼를 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잘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행동의 가식성이 타인에게 드러날까 봐서 또 불안해한다. 더 나아가면 나의 일상 행동에서 무엇이 속임수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나 지산도 가려내기 어렵다.
이처럼, 일상에서 이중적인 행동을 함으로 일상생활이 거짓과 속임수를 내포한 것이 부지기 수이다. 배우가 실제에서는 벨텔의 행위를 싫어하면서도 역을 맡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서는 관객이 보지 않는 무대의 뒤에 내려와서는 자기의 속내를 들어내 보이기도 한다. 예로서 벨텔의 역을 하고서는 무대 뒤에 내려와서 ’사랑 좋아하네‘ 죽기는 왜 죽어, 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하자. 그러면서 이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남이 모르기를 바라는 은밀함도 나의 삶이고 나의 일상이다. 이런 것은 나의 삶에도 허위성이 있고, 관객 앞에서 펼친 연기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쇼의 허위성에는 나의 허위의식만이 관여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문화도 있다. 개인적인 허위 의식의 대표적인 것이 ‘체면’이다. 체면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게 하고 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속 마음을 털어놓듯이 나의 불편한 속 마음을 은밀히 토로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체면과 사회문화가 나를 허위 의식으로 몰아갔다는 뼈아픈 반성이(후회이든, 자조이든) 쏟아진다. 이런 내용을 글로 표현하려면------, 삶이라는 일상 너머에 있는 추상성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서 가식과 진실을 구분해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상사를 욕하고, 동료를 비난히면 내가 그들의 말에 반드시 동조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들어가서 함깨 욕하고 비난하는 일도 자주 있다. 함깨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동류 의식이 느껴진다.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일어나다시피 한다. 또 후회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일상에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애매해진다.
수필쓰기를 우리는 진실을 찾아나서는 일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진실을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진실이란 없기도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순도 100%의 진실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오히려 거짓을 원한다고 한다. 슬픈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가슴 아픈 진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에써 진실을 외면한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하여 진실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에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진실을 속속들이 까발리면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더 힘들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탈 없이 유지되어야 하고, 이러기 위해서는 거짓도 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거짓, 바로 ‘위선’과 다름 아니다. 위선이 나쁘다는 오랜 통념과 달리, 실제의 생활에서는 위선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때도 있다고 함으로 위선은 진실과도 연결된다.
수필쓰기를 결론적으로 말하기 전에 위선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선의의 거짓말이라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올 때는 위선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위선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수필쓰기를 삶의 현상 너머에 있는 추상적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위선을 좋음과 나쁨의 어느 쪽으로 보아야 하느냐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가 좋다고 하여 위선을 수필이 추구하는 가치인 진실과 화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왜냐면 결과보다 방법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하는 일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에 ‘그 일을 왜 했느냐’고 묻는다면 ‘의례히 하는 일이라서 그냥 했을 쁜이에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이라고 하면 아무런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단순히 의례적인 행동이 의례적인 사실을 넘어서 그 이상의 힘을 가질 때도 많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트에서 년세가 많은 노인을 만나서 그냥 의례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노인에 대한 의례적인 행위에 불과했겠지만 이러한 행위가 함의하는 것은 아주아주 많다. 수필가가 글을 쓴다면 단순히 의례적인 이런 행위에서 수많은 진실을 꺼집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글쓰는 사람이 이런 행위를 두고, 속내는 인사하고픈 마음이 우러나와서가 아니고, 노인에게 인사는 의례적인 행위이고, 위선적인 행위라면서 삐딱하게 보아도 그렇게 보는 사람의 권리임으로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위선이더라도 필요하다라는 해석을 하였다면, 이런 판단도 글쓰는 사람의 권리이다. 그러나 독자도 작가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는 작가의 능력이다. 작가가 자기의 글에 어떤 진실을 담아내는가는 행위 자체가 아니고 행위에 대한 설명이고, 판단이다. 이에 독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선이 되기도 하고, 진실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독자를 설득하는 것은 작가의 권리이고, 능력이다.
인간의 행동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떻게 판단하느냐, 독자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의 문제이고,, 또 독자가 작가의 판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의 문제이다.
이처럼 가치판단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란을 준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수필을 쓰기 위한 좋은 환경이 아닐까. 수필의 진실 내용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나의 판단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골치아픈 수필을 왜 쓰느냐고? 생각없이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크다란 수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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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