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불교에서는 우리가 지은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고 그 업에 따라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과보를 ‘업보(業報)’라고 합니다. 누구나 악업을 지으면 내가 그를 단죄하지 않더라도 그 악업에 대한 우주적인 과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과보를 받아야지만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거나, 내 돈을 훔쳐갔다거나, 나를 괴롭혔을 때 내가 직접 가서 그 사람을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고, 그것만이 정당한 판결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원한을 갚아야지 후련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영화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주인공이 직접 똑같이 갚아 주는 성공스토리에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똑같은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내가 굳이 복수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몫입니다. 내가 마음을 어지럽혀 가며 균형을 맞추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주법계에서, 진리의 세계에서 알아서 다 해 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어요. 인과응보를 주관하고, 균형의 법칙을 주관하는 쪽은 언제나 우주법계입니다. 그것을 우주법계에서 하도록 우리는 그저 맡겨 두어야 합니다. 법계에서 하면 단순하게 균형을 맞춰 일을 끝낼 수 있지만, 우리가 직접 하게 되면, 원한심, 복수심, 치욕, 분노에 이은 되풀이되는 복수심 등 수많은 번뇌를 야기하면서 끊임없이 윤회의 원동력이 되는 업만을 짓게 될 뿐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한을 커서 갚았는데, 그 원한 갚는 모습을 지켜 본 원수의 아들이 또 다시 복수심을 키워서 훗날 나를 다시 죽이는 일이 다음 생까지 이어지며 반복될 뿐인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주법계에 그 모든 것을 내맡긴 채,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움과 증오로 오염된 나의 마음을 청정히 정화시키고 동시에 상대방을 용서 해 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참회하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수행자가 균형이 깨진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며, 오염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누군가가 미워 마음에 원망과 증오가 생겼다면 그 원망과 증오의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요? 그것은 증오하는 대상의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내 마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미워하면 다치는 것은 상대방 쪽이 아니라 내 마음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증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증오로 인한 상처를 받게 될 뿐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할 때 사실 미워하는 그 마음은 내 안에서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상대방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나 자신에게 원한을 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이 우주법계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곧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복수하려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것은 우주법계의 몫으로 넘겨버리고, 나는 오직 용서하고 참회하면 그뿐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게 되었을 때 사실은 나 자신이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복수하려는 마음을 놓아 버리고 우주법계의 몫으로 넘겨 버려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수용서 감사랑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