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님이 지은 『사람,장소,환대』에서 인용한다.
"인간은 타자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자기 보존의 욕구를 극복하고 이 인간적인 욕구를 따를 때, 즉 타자의 인정을 위해 생명을 걸 때 비로소 자신을 인간으로 확증한다. 이러한 생사를 건 위신투쟁이 없었다면 역사가 개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간적 현실이 인정된 현실로 구성되기 위해서, 최초의 두 인간 중 한 명은 타자에 의해서 인정받지 않은 채 타자를 인정해야 한다. 즉 인간은 최초의 상태에서 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주인이거나 노예이다. 하지만 여기서 변증법이 시작된다.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지만, 그가 획득한 인정은 그에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의 욕구는 그가 인정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인정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는 타자(주인)을 인정한다. 따라서 상호인정이 발생하기 위해서 노예는 단지 스스로를 이 타자에게 강요해서 그로부터 승인받기만 하면 된다. 주인은 노동하도록 노예를 강요한다. 그러나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예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노예는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와 더불어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을 창조해낸다." 60쪽
- 저자는 각 주에서 이 요지는 알렉상드로 꼬제브의 『역사와 현실변증법』에서 원용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이 문장이 헤겔의 주장인지, 코제브의 해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유명해진 것은 이 판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란다.
문장을 읽다 마지막에 '왠 해방투쟁?'이란 의아한 감정이 든다.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동을 하다보니 자신이 노예였음을 깨달았다는 거고, 보니 주인이 별거 아니라는 판단이 든 거고, 그렇다면 내가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거겠지. 그래서 머리 카락 검은 것은 갖다 키우는 거 아니라고 하나? 그런데 노예도 주인이 있었기에 능력자가 되고 노예임을 깨닫게 된거니 그 주인에게 감사해야하지 않을까? 아마 감사할거다. 그렇다면 그 사이 주인은 노예 덕택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노예에게 감사해야겠지? 물론 아닐거다. 그 것은 당연하거였으니까. 오히려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만으로 노예가 주인에게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했으니 주인이 노예를 인정하고 관계를 유지해 줬으니까.
책을 읽다 기억해 놓고 싶은 문장이고, 계속 되먹이 되씹기 위해서 이기해봤다. 졸리다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