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위대한 파병 결정
이미 우리 국군은 비전투부대인 이동외과병원과 비둘기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한바 있지만 미국이나 월남 당국은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병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1965년에 들어서자 베트남정세는 더욱 치열한 전쟁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2월 7일. 미해군기에 의하여 북부 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고 3월 중에는 미지상군 6만여 명이 증파된데다가 호주군 보병대대가 베트남에 도착하는 등 우방군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확전의 징후는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무렵 우리나라에서는 비둘기부대를 보내놓고 온 국민이 베트남전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언제 어디서나 화제의 중심은 베트남전쟁이었다.
아직은 명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국민들 사이에는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병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었다.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육군의 젊은 진취적인 장교 사이에는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의욕적인 참여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인 1965년 6월 14일에 월남정부는 다음과 같은 공한을 우리 정부에 보내왔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귀하.
본인은 월남공화국과 월남공화국 국군을 대표하여 대한민국정부에 베트남의 대공산투쟁을 원조하기 위하여 1개 전투사단을 파견하여 주실 것을 정식으로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월남공화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본국에 제공하여 주신 고귀한 원조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합니다.
1965년 6월 14일
월남공화국 수상
Phan Hoy Quat
이 공한을 받은 우리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관계 부서에서 활발한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미국의 파병 요청도 중요하지만 국가간 당사국인 월남공화국의 파병 요청 또한 명분상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은 일제히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여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온 국민은 찬반 양론의 토론이 일기 시작하였다.이와같이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여러가지 조치가 준비되는 동안 월남정부는 재차 지원요청을 호소하는 공한을 보내왔는데 이는 월남정부에 정치적인 변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쿠데타가 일어나 공군준장인 구엔 카오 키 수상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 정부나 정치인 심지어 국민들 사이에서도 전투부대 파병은 긍정하면서도 월남공화국의 정치적인 불안을 늘 염려하고 있었다.
이무렵 미국의 파병 요청 또한 집요했다.심지어 한국군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휴전선에 배치한 미군 사단을 베트남전선에 전환 투입할 수 박에 없다는 은근한 압력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리 육군은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 사실로 보고 실무진에서는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제반 준비를 은밀히 서두르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전투부대 파병을 적극 지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유에서였다.
첫째, 육군의 현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었다. 우리 국가의 경제력으로는 당시 현대화능력이 없었다.우리 육군의 모든 장비는 2차세계대전시 장비 그대로였다.개인화기에 있어서도 미군은 자동소총인 M14에서 M16으로 발전해 장비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반자동인 M1소총이 고작이었고 공용화기 또한 모두 노후화되어 있었는가 하면 기동장비를 비롯한 지원장비 모두가 낙후될대로 낙후되어 있었다.심지어 보병 대대장의 지휘용 찝차도 고장나기 일쑤였다.
둘째, 실전 경험을 통해 북한군보다 우위의 전투력을 구비하자는 것이었다.당시 휴전선에서는 소수의 북한군 또는 공비가 은밀히 침투하여 곳곳에서 교란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육군본부에서는 전투경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셋째, 만일 한국군 대신 미군 사단이 베트남전에 전환 투입된다면 한국방어에 차질이 생길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였다.
넷째, 한국전쟁시 미군의 참전으로 공산군을 격퇴시켰는데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는 명분론도 상당히 강했다.
끝으로 우리 육군을 세계에 과시 하여 한국군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우리 젊은 장병들에게 진취성을 구비케 한다는 이상론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정계를 중심으로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다.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일각에서도 적지않게 신중론을 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깊숙히 관여한다면 비동맹국과 중립국은 물론이요 대유엔 외교에 있어서 호전적인 국가로 인정되어 국제정치사회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둘째, 한국과 월남은 미국과 한국 관계와는 달리 상호방위조약이나 집단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때와 같이 유엔의 결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셋째, 휴전선을 경계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투사단을 파병한다는 것은 국토방위가 약화된다.
위와 같은 신중론은 사실상 찬성론 못지않게 논리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국군 수뇌부에서는 전투부대 파병을 기정사실로 해서 착착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그런 가운데 적극 반대하고 있던 야당에서도 파병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의 거목인 김홍일 장군은 국군 파병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국위를 떨치고 전투경험을 축적하여 세계 일류 군대가 되는 유알한 길이고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어서 박순천 여사 또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었다.그는 처음부터 국가와 국군을 위해서는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생가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국군 현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것이었다.
역사라는 이름의 대하의 도도한 흐름은 마침내 파병 찬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8월 13일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일부 야당 의원이 퇴장하는 가운데 표결에 들어갔다.그 결과 찬성 101표,부결 1표,기권 2표의 절대 다수표로 전투부대 파병안이 가결되었다.드디어 역사적인 전투부대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은 대한민국 국군의 우렁찬 전진에의 시동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출발점에 다가서게 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발표를 통하여 국군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아시아를 불사를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서 베트남을 불태우고 있는 하나의 불씨를 미연에 꺼버리는 데 협력하는 것은 안전을 위한 최상의 길이다.
이제 우리는 남의 관여나 도움을 받던 피동적 위치에서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일단의 책임을 질 수 잇는 전진적인 자세를 취해야 될 때가 왔다.
베트남의 자유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적게는 우리의 국가안전과 적극적인 반공투쟁을 강화하는 것이며 크게는 자유 세계의 대공 방위전선을 정비 강화하고 자유에 봉사하여 평화에 기여하는 영예로운 길이다."
이 담화의 내용은 명분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에는 그 명분 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이란 바로 국군 현대화의 실현과 함께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였고 새로운 세계 시장의 개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육군의 자랑스러운 수도보병사단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결정되었다.
필자는 당시 진해 육군대학에서 대부대학 강의중 파병 제1진 보병대대장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에 접하고 수강중인 학생장교와 함께 만세를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그날이었는데 벌써 45년이 흘러 노병이되었다.
지금도 맹호 재구대대 제1진 중대장과 대대참모들과 함께 분기마다 '재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는다.모든 참석자는 예비역 장군이다. 그 모임에서 필자의 호칭은 장군도 아니오 회장도 아니다.오직 '대대장님'이다.그 호칭으로 불리워 질 때 가장 행복하다. 그것이 바로 군인의 꽃인 전우애가 아니겠는가.
첫댓글 그렇고 말고요
파병의 결정은 어려운 과정 속에
이뤄낸 결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