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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Reason For Hope
제인 구달Jane Goodall 1934~
Goodall in Tanzania in 2018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Jane_Goodall
「193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남부 해안에 있는 본머스에서 자랐다. 타잔을 읽으면서 타잔의 애인인 제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햇다고 회고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 밀림을 동경했다. 1957년 아프리카 캐냐로 간 그녀는 저명한 고생물학자 루이스 리키와 함께 침팬지 연구를 시작했고, 1960년 여름에는 혼자 탄자니아 곰베로 가서 야생 침팬지 연구에 착수했다. 196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동물행동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Gombe Stream Resesrch Center를 설립하기 위해 탄자니아로 돌아왔다. 1975년 야생 침팬지 연구를 계속 지원하기 위해 제인 구달 연구소를 설립했다. 1995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의 작위를 수여 받았으며, 뛰어난 연구, 탐험 그리고 발견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의 허바드 상을 받았다. 탄자니아 정부는 외국인 최초로 구달 박사에게 킬리만자로 상을 수여했다. 저서로는 <In the shadow of man>, <The chimpanzees of Gombe: Pattern of Bebavior>, <Through a Window: 30 Years Observing the Gombe Chompanzees>등이 있다.
[서문].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
보잘 것 없는 태고의 먼지가 우연히 선회하다가 바로 그 순간 이끌려 나왔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바흐의(토카타와 푸가)D단조 음악을 듣고)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때문에 필연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우주에는 인도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내 믿음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라 불리는 영적 존재의 힘을 믿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고 다른 신앙들에 대해서도 알게 됨에 따라, 결국은 단지 하나의 신이 상이한 이름들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시작]
이 이야기는 지구 시간으로 65년을 걸어온 한 사람의 여정, 바로 나의 여정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란 보통 처음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맨 처음이라 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세렌게티 평원에서 고대 생명체의 화석을 손에 쥐고 서 있던 순간부터, 침팬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사고하고 추론하는 그 어떤 존재가 나를 돼 쳐다보고 있다고 느꼈던 그 순간까지를 다루겠다. ~~~나는 간단히, 내가 첫 번째 숨을 내쉬고 얼굴을 찌푸린 채 첫 울음을 울었던 1934년 4월 3일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t라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로 큰 영향을 받아왔다. 다시 없이 즐거운 때도 보내고 때로는 깊은 슬픔과 고통에 잠기기도 하면서, 웃는 법, 특히 나 자신에게 웃는 법을 배웠다.
나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게임 시대 이전에 자라난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바깥에서 지내는 것, 뜰의 비밀 장소에서 노는 것, 자연에 대해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키우도록 격려 받아 경이감과 경외감을 발달시켰으며, 그리하여 영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집은 결코 부유한 편이 아니었지만 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먹을 것이 충분했고 약간의 입을 옷가지가 있었으며, 사랑과 웃음과 재미가 넘쳤다.
65년간의 생을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던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생각하면 , 모든 것이 1957년 아프리카로 초대된 그 놀라운 사건 쪽으로 자연스레 흘러간 듯싶다. 그곳에서 루이스 리키 박사를 만났고, 그는 나를 곰베와 침팬지의 길로 들어서도록 해주었다. 사실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어머니는 당신 어머니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성공은 늘 결단과 노력을 통해서 오며, 실패는..... 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족한 탓이라고 믿었다.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일생 동안 일한 것도 사실이지만 - 피할 수만 있다면 누가 실패를 바라겠는가!- 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가정에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가 막 한 살이 넘었을 때 우리 아버지(모티며 혹은 모트 구달이라 불렀다)가 주빌리를 선물로 주셨다. 주빌리는 커다란 침팬지 봉제인형인데, 런던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침팬지 새끼 주빌리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늙은 주빌리는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가슴에 하얀 반점이 있는 사랑스런 까만 잡종 개 러스티가 빠질 수 없다. 러스티는 나의 변함없는 친구였는데 러스티를 통해 동물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준비]
내가 열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어머니, 주디, 나는 버치스에서 계속 살았다. ~~~나는 배우는 것이 즐거워서 열심히 공부하였다.~~~절벽은 해안에 솟아올라 모래와 소나무로 덮인 곳이었다. 늦은 봄에는 가시금작화 관목이 밝은 노랑색으로 만발하고, 여름에는 만병초가 선명한 담자색과 진홍색으로 빛났다. 그곳에는 다람쥐와 각종 새와 곤충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유가 있었다!
이른 봄 어느 날, 바다 위 절벽 히더(진달래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속에서 위즐이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흥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뜨거운 여름날 밤, 고슴도치가 끙끙거리고 킁킁 냄새를 맡으며 가시투성이 짝에게 구애하는 것을 본 것도 그렇다. 늦가을 어느 신기한 오후에는 다람쥐가 너도밤나무 열매를 모아 묻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 열매들은 겨울잠에서 주기적으로 깨어날 때마다 식량이 될 것이다. 적어도 다람쥐의 계획은 그랬다. 그러나 다람쥐 위쪽에 앉아 있던 이치(참새과에 속하는 새)가 날아와 다람쥐가 조심스럽게 묻어놓았던 것을 빼앗아갔다. 그 장면은 일곱 번이나 계속되었다. 두 번은 다람쥐가 그 도둑을 실제로 지켜보았지만, 전과 같은 열의로 소용없는 일을 계속했다. 나는 또한 적갈색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를 얼핏 발견하고, 1월의 눈 위에 난 여우 길을 찾아 따라가 어떻게 여우가 토끼를 뒤쫓고 놓치는지도 보았다.
토요일에는 주로 부셜이라고 불렸던 비범한 셀리나 부쉬 소유의 승마학교에 나갔다. 어머니는 매주 수업료를 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나는 안장과 말 굴레를 청소하거나 마굿간을 치우고 농장 일을 돕곤 하였다.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을 해서 상으로 종종 공짜 승마를 즐기기도 했다.
[아프리카로]
어머니와 에릭 삼촌이 배웅하러 런던 부두까지 오셨다. 우리는 내가 다섯 명의 소녀들과 함께 쓰게 될 선실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다 조그만 짐 싣는 구멍도 발견했다. 나를 돌봐줄 승무원도 만났다. 앞으로 3주간 나의 집이 될 배를 여기저기 걸어보았다. 나는 스물 세 살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집, 가족, 조국을 두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여러 해가 흘러, 재미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하다. 항해 기간 동안 좋은 친구가 됐던, 선실을 같이 쓴 소녀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다.
몸바사로 가는 동안 단지 네 군데 항구에서 정박하였다. 카나리아 제도, 키이프 타운, 더반, 베이라가 그곳이었다. ~~~희망봉을 둘러 케이프 타운으로 입항하던 기억 역시 생생하다.
기차가 나이로비에 멈췄을 때, 클로와 그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당시 화이트 하이랜드로 알려진 지방의 일부인 키낭읍에 있는 농장까지의 자동차 여행은 완전히 마술 같았다. 열대 지방의 이른 땅거미가 질 무렵 길가에 혼자 있던 수기린을 지나치게 되었다. 가까이 멈춰서서, 긴 속눈썹과 거만해 보이는 표정을 띠고 있는 기린의 굉장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돌아서서 천천히 뛰어가는 기린의 뒷모습을 보니 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고 그 특이한 걸음걸이는 경탄할 정도였다.
몇 주간을 친구 집 농장에서 그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상쾌한 산 공기, 차가운 시냇물,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생소한 새들로 마음이 명랑해졌다. 거대한 표범의 발자국도 보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롭고 흥분되고 아름다웠다.
휴가 후에 나는 영국 회사의 케냐 지사 관리자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서 나이로비에 갔다. 영국을 떠나기 오래 전에 에릭 삼촌이 연줄을 통해 이 일자리를 준비해두었다.
누군가가 동물에게 관심이 있다면 루이스 리키를 만나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약속을 하고 유명한 고생물학자자 인류학자인 그를 보기 위해 코린돈 자연사 박물관(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아마도 그는 아무 학위도 없는 내가 어류학과 파충류학 같은 단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 당시 루이스는 쉰네 살이었고, 진정한 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 비서 일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다음해 동안 박물관에서 동아프리카 동물들에 대해 배웠다. 또한 다양한 부족들, 특히 키쿠유족에 대해서 배웠다.
루이스를 위해 일하기 시작한 후 얼마 안 되어 루이스와 그의 아내 메리는, 나와 박물관에서 근무하던 또 다른 영국 소녀 질리안 트레이스를 초대해서 탕가니카의 올두바이 계곡 발굴에 데리고 갔다. 1957년에 올두바이는 광대한 세렌게티 평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마사이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올드바이에서 나이로비로 돌아가서 나는 루이스를 위해 계속 박물관에서 일했다.
[곰베에서]
1960년 7월 16일, 배의 엔진이 가동되어 마침내 곰베를 향해 키고마의 북쪽으로 통통거리며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이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기 힘들었다. ~~~19킬로미터를 여행하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정부의 배를 타고 사냥감 감시인인 데이비드 앤스티와 동행했다.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될 작은 배는 선내에 실었다. 바람이 강했고 호수는 파도쳐서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서쪽으로 뒤숭숭한 콩고의 언덕들이 건기의 아지랑이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호수는 눈 닿는 데까지 북쪽으로 부룬디를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수정같이 투명한 담수의 대양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동쪽 해변을 가까이 끼고 계속 나아갔다. 호수 위로 균열된 절벽이 270미터 정도 솟아올라 있었는데, 가파른 경사면은 두터운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위가 많고 표토가 빈약한 꼭대기만 햇빛에 탄 풀들에 덮여 갈색을 띤 채 벌거벗고 있었다. 계곡에는 자그마한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약간의 개간지가 있었다. 모래가 깔려 있는 해변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말리는 정어리 크기의 작은 물고기 수천 마리가 은빛으로 빛났다. 데이비드 앤스티가 그 물고기는 ‘다가아’라는 것으로, 밤에 어부들이 카누에 있는 알라딘의 램프로 유인해서는 거대한 나비채 처럼 생긴 것으로 퍼 올려 잡는다고 설명했다. 어떤 어부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는 곧 데이비드 앤스티가 야영 장소로 결정한 감시인 초소에 도착했다. 나는 모래와 자갈로 덮인 호숫가에 뛰어내렸다. 그것이 장차 수 천 번이나 하게 될 상륙의 맨 첫 번째였다.
앤스티는 우리 텐트와 별도로 세운 자신의 작은 텐트에 머물렀다. 그런 후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몇 주 후 우리가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미친 두 영국 여자를 남겨두고 떠났다.
빽빽한 풀숲으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에 지쳐, 정오 무렵 그 봉우리로 향했다. 나는 약 40미터 앞쪽에 있는 키 큰 풀숲에서 어두운 형체와 희미한 움직임을 보고 멈춰 섰다. 재빨리 망원경의 초점을 맞춰서 혼자 있는 침팬지를 보니, 내가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침팬지였다.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덜 무서워하는 어른 수컷이었다. 나는 그 침팬지를 뺨에 독특한 하얀 털이 있다 해서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고 불렀다.
그를 더 잘 보기 위해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 침팬지는 흰개미 둥지의 붉은 흙무더기에 앉아서 구멍 속으로 풀줄기를 계속해서 찔러 넣고 있었다. 잠시 후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무언가를 한 마리씩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이따금은 새 풀을 주워서 사용했다. 그가 떠났을 때 나는 흰개미 더미로 건너갔다. 버려진 풀줄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흰개미들이 둥지 표면을 기어 다니며 풀들을 쑤셔 넣었던 구멍을 다시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시험 삼아 데이비드가 한 그대로 해보니 흰개미들이 턱으로 풀줄기를 물고 매달려 올라왔다.
며칠 후 나는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를 다시 관찰했다. 잎이 무성한 작은 가지를 주워서 어떻게 잎을 떼어내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물체를 변형하는 일이었다. 즉, 조잡한 도구 제작의 시작이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믿기 어려웠다.
곰베에서 나의 관찰들은 인간의 독특성에 도전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굉장한 과학적, 신학적 소동이 일어났다. ~~~몇몇 과학자들은 내가 침팬지에게 흰개미 낚는 방법을 가르쳤음이 분명하다는 말까지 했다.
[홀로]
때로는 수풀 위 나뭇가지 통로를 따라 시끄럽게 이동하는 붉은 콜로부스 원숭이 무리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조용히 움직이는 유연하고 매끄러운 붉은꼬리원숭이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새끼들은 이리저리 장난을 치고, 큰 놈들은 건방진 어린 것들을 혼내주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비비 무리도 나를 매혹시켰다. 다 큰 수컷들은 목 주변에 갈기 같은 두터운 털이 나 있었다. 내가 경솔하게 그들을 빤히 쳐다보면, 내게 겁주면서 커다란 송곳니-표범도 상처 입힐 수 있는-를 드러내 보이는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밖에 새와 도마뱀, 숨 막히게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들로부터 자기의 소중한 똥 덩어리를 굴리는 성가신 욍 쇠똥구리 딱정벌레까지, 온갖 종류의 신기한 곤충들이 있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지만, 진실로 그것을 까달을 수 있는 순간은 몹시 드물었다. 그 순간들이 예고 없이 다가오곤 했다. 희미하게 붉어지는 동틀 녘을 바라볼 때, 푸른색과 갈색을 띤 거대한 숲의 검은 그늘이나 살랑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한 점의 유혹적인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어둠이 드리워지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나무 둥치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탕가니카 호수의 부드러운 물 위로 흔들리는 초저녁달의 반짝임을 바라볼 때, 바로 그 순간 영원한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하였다.
나는 생명이 없는 사물들에게도 모두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로서 인사를 하였다. 매일 아침 봉우리에 도착해서는 “좋은 아침이야, 봉우리야”. 물을 뜰 때는 “안녕, 개울물아” 아, 바람아, 제발 잠잠해 다오 라고 말하곤 했다. 특히,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이 느끼게 되었다. 강한 햇빛을 받아 껍질이 따뜻해진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나, 서늘하고 부드러운 껍질을 가진 어린 나무를 만지면,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흡수되어 머리 위 높은 나뭇가지 끝까지 올라가는 수액을 이상한 직관적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봉우리에서 잠들지 않는 황홀한 밤들을 보내기도 하였다. 내 아래에서는 은빛 달빛이 숲 위의 무수한 나뭇잎에 반사되었고 반짝이는 매끄러운 야자 잎 위에 밝게 빛났다. 종종 달빛이 너무 밝아서 가장 밝은 별만이 빛났고, 회색 안개 같은 달빛 하늘이 산봉우리에 걸려 골짜기 아래로 흩뿌려졌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결국 달은 호수 저편 산 뒤로 사라지고, 남아 있던 잔광조차도 차츰 하늘에서 희미해졌다. 그러면 밤은 아주 다르게 보인다.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살랑거리는 소리, 작은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면서 밤은 점점 불길해진다. 키 큰 수풀 사이로 살금살금 걷는 표범이나 덤불을 뜯어먹는 한 무리의 들소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나를 해친 적은 없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침팬지에 대해서 점점 많아 알아갔다.
일단 침팬지들과 친숙해지면, 그들 서로서로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될수록 그들이 얼마나 우리들과 비슷한가를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그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바로 앞일을 위해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를 관찰하였다.
한 번은 해 뜰 무렵 나무 위에 있는 그의 잠자리아래에 도착했다. 데이비드는 혼자서 자고 있었다. 해가 점점 밝아 오자 나무 아래로 내려와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망설이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결정을 내린 듯 아주 빠르게 남쪽 방향으로 출발했다. 나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두터운 덤불을 헤치고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두 계곡 사이에 있는 풀로 뒤덮인 산마루에 도달했다. 데이빗은 거기서 멈춰 서서 아래에 있는 수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굵고 독특한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연달아 우우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소리가 되돌아오는지를 보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곧바로 계속의 저 아래에서 일제히 우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들 중에서 틀림없이 골리앗의 소리를 들었다.
데이비드는 침팬지 무리를 향해 출발했다. 곧 무리들이 맛있는 먹이를 먹으면서 기분 좋게 내는 작은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땅으로 껍질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잇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갑자기 데이비드는 우우 하는 소리를 다시 냈는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소리였다.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제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비드는 한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그네 타듯 타고서는 골리앗에게로 갔다. 그들은 흥분하여 털을 세우면서 서로 껴안듯이 팔을 둘렀다. 둘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털을 손질해주고 나서, 골리앗은 다시 먹이를 먹기 시작했고 데이비드도 뒤따랐다.
나는 그 모든 날 중에서도 어느 하루를 경외감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숲 속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과 잔가지들 위에 몸을 쭉 뻗고 누워 있었다. 매끄러운 돌들이 몸에 닿았고, 그 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데이빗 그레이비어드는 위쪽에서 무화과를 먹고 있었다. 과일을 따기 위해 뻗은 검은 팔, 달랑달랑 매달린 발, 나뭇가지들 사이로 능숙하게 움직이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갑자기 숲 속의 조화, 갈색과 보라색으로 짙어가는 노란색과 초록색의 그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잔가지와 나뭇가지에 들러붙어서 나무를 휘감고 올라간 넝쿨들은 서로 쌍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늙어 죽은 큰 가지를 둘러싸고, 생명과 색깔로 새로이 옷을 입혀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낮의 매미들의 합창은 시끄럽고 귀에 거슬렸는데, 한 무리가 새로 시작하고 또 사라지면서 숲 속의 공기가 물결쳐 마치 말없이 돌림노래를 부르는 소년 성가대 같았다.
내가 들은 신지학 과제 중 가장 어려웠던 일 하나는 순환하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 참된 인생을 경험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으라는 것이었다. 가끔 실천을 했던 적도 있지만, 사느라 바빠 그러한 기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바로 그날, 오랜 신비가 어느새 나를 엄습하였고 내부로부터 울려나오는 소음이 중단되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꿈속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나는 거기, 숲의 한 부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술적인 소리가 다시 강해지면서 지각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무속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작은 줄무늬 다람쥐는 반짝이는 눈과 둥근 귀로 경계하면서, 나무껍질 속에 갈라진 틈새를 찔러보면서, 다람쥐들의 방식대로 나선으로 나무를 올랐다. 거대한 벨벳 검은 땅벌들은 자그마한 자줏빛 꽃을 찾아다녔는데, 숲에 아롱진 햇빛사이를 뚫고 날아갈 때마다 그 배가 화려한 오렌지 빛 붉은색으로 강렬하게 빛났다.
말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새로운 깨달음을 말로 묘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데이비드가 나뭇가지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가 뚜렷하게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시냇가의 빽빽한 덤불을 통해서 나아갔을 때, 나는 덩굴 속에 심하게 뒤얽혔기 때문에 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물가에 앉아 있는 데이비드를 발견했다. 거리를 두고 앉아 커다랗고 광채가 나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성품 전체, 침착한 자신감과 타고난 위엄을 보여주는 듯했다. 대부분의 영장류들은 직접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위협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침팬지는 그렇지 않다. 데이비드는 건방지지 않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고 바라보는 한,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날 오후에 그랬듯이 내 시선을 맞받아보기도 했다. 그의 눈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과 같았다. 내가 그런 기술을 가지고만 있다면 말이다.
데이비드와 내가 거기에 앉아 있었을 때, 나는 코코야자의 잘 익은 붉은 열매가 땅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손바닥 위에다 그 코코야자를 올려놓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데이비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열매를 가지러 다가왔다. 그는 그것을 떨어뜨렸지만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열매를 원치 않았으나 나의 동기를 이해했고 나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차렸다. 지금까지도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누르던 느낌을 기억한다.
[변화의 10년]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로부터 8년 뒤에는 스탠포드 대학의 외래 교수가 되어, 1년에 한 쿼터씩 대형 강좌로 학부생에게 인간생물학을 가르쳤다. 또한 침팬지 연구를 기록하기 위해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에서 곰베로 파견한 재능있는 영화작가이자 사진작가인 휴고 반 라윅과 결혼했다. 우리는 함께 작은 연구소를 세웠다. 그리고 아들 휴고 에릭 루이스를 낳았다. 그 후 10년이 지나 우리는 이혼을 했다.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행정 업무, 교육, 자료의 분석과 책 출간 등 많은 일을 햇고 개인적인 사람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되는 기쁨과 책임감을 알게 되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남편과의 친밀하고 즐거운 관계가 서서히 나빠져 가는 쓴맛과 이것이 가져다주는 격렬한 감정적인 고통을 경험했다. 그리고 실패감과 죄의식을 느꼈다.
휴고와 나는 1964년에 결혼했다. 그때는 플로가 새끼를 낳았을 때였는데, 나는 새끼 플린트의 발달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휴고는 이 과정을 16밀리 카메라와 스틸 카메라로 기록했다.
그 10년 동안 나는 곰베를 떠나 외부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첫 순회강연을 했다. 끔찍하게 겁에 질려 있었지만 나름대로 경험도 얻고 내 지식도 나누며 그럭저럭 견뎌내었다. 곰베를 떠나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었는데, 키고마로 가는 길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돌아볼 때면, 숲 언덕이 눈물로 약간 흐릿하게 보이곤 했다.
1967년. 우리 아들 휴고 에릭 루이스는 이런 세상에 태어났다.~~~출산하기 바로 직전에 휴고와 나는 은고롱고 화산 분화구에서 캠핑을 하고 있었는데, 젊은 수사자 세 마리가 캠프에 찾아와 요리사의 텐트를 찢었다. 우리는 랜드로버를 조심스레 운전하여 그들을 멀리 몰아내야만 했다. 우리가 텐트로 돌아왔을 때, 사자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불꽃을 휘두르려고 밝혀두었던 가스풍로에서 불이 옮겨 붙어 텐트 자락이 불타고 있었다. 근처의 작은 오두막으로 피해가자, 베란다에는 검은 갈기의 수사자 한 마리가 방금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앉아 있었고 암사자는 막 잡은 가젤 영양을 뜯어먹고 있었다.
1968년 숲 속 작은 캠프에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인 학생 중의 함 명이 침팬지를 뒤쫓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루이 데이비스는 똑똑하고 매력적이고 활기로 충만한 학생이었었다. 그녀는 곰베와 침팬지를 사랑했다. 그녀는 수컷의 지배 상호 작용에 대해서 열정적인 관심을 가졌고, 마이크, 골리앗,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휴고와 찰리 형제, 그리고 기타 침팬지들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연구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행 중인 관찰을 작은 녹음기에 기록했는데, 루스의 것은 그녀의 시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테이프는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같이 삶의 마지막 몇 시간의 기록을 담고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루스는 남쪽으로 멀리 휴고를 따라가고 있었다. 테이프에는 몰아쉬는 그녀의 호흡이 기록되어 있어 극도로 기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쩌다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졌고, 나중에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우거진 수풀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나는 아들에 대해서는 엄마 역할을 무리 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불행히도 남편과의 사이는 잘 되지 않았다. 휴고는 서아프리카에서 영화를 찍고, 나는 미국에 강연 여행을 떠나게 되어 우리는 많은 시간 떨어져서 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타협할 수 없는 기본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1974년에 이혼하기로 결정했다.
감정적으로 괴로웠던 중에, 공격성에 대한 유네스코 학회에 참가하러 파리의 노트르담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전에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를 읽은 뒤로 언젠가는 그 유명한 대성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방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될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서문에도 썼듯이, 바로 그때 무아경이라는 것을 경험했고 예전에 몰두했던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우주 가운데 인도하는 힘, 물질의 창조주, 즉, 삶 자체의 창조주는 있는가? 지구의 생명에 목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이 모든 것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가? 특히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여기 현세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첫째, 맥베드에 동의하여 삶은 바보가 하는 이야기, 즉 진화의 실수인 호모 사피엔스라는 영리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불행히도 파괴적인 종을 포함하는 생명 형태의 목적 없는 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피에르 테이아르드 샤르뎅이 말했듯이. 우주에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잉태와 탄생 같은 것이라고. 다시 말해 모든 것에는 계획, 즉 목적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혼을 한 시련의 시기에 이러한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숲 속에서의 경험들, 침팬지들에 대한 이해가 나에게 새로운 전망을 가져다주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나의 유한한 마음이 결코 그 형태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개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알라신 혹은 브라마라 부르는 거대한 영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 할지라도, 심지어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 할지라도, 수백만 년의 시간에 걸쳐 진화가 주목할 만한 동물 - 인간이라는 동물 - 을 창조했다는 진실은 옂너히 존재한다. 그래서 침팬지들이 아무리 우리와 가장 가까운 생물학적 친척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침팬지를 연구하면 유사성만이 아니라 가장 다른 점들도 알게 된다. 우리가 품성, 합리적 힘, 이타주의, 즐거움과 슬픔 같은 감정을 가진 유일한 존재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약 2백만 년 전 유인원 같은 존재로부터 처음으로 진짜 인간이 갈라져 나온 이래로 우리의 지적 능력은 급격하게 성장해왔다. 그리고 우리만이 복잡한 구어를 발전시켜왔다. 진화상 처음으로 하나의 종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사건에 대해 어린 세대에게 가르쳐주고, 과거의 성공과 실수로부터 얻은 지혜를 전승하며, 먼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아이디어를 서로 논의하여, 때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집단의 결집된 지혜에 의해 그것들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진화하였다.
노트르담에서의 일은 아마도 실천을 하라는 부름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귀에 적합한 형태로 하나님의 목소리 -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를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 소리 이외에 어떤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이거나 아니거나 그 경험은 강력하였으며, 내가 태어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20세기의 세계 속으로 나를 순식간에 되돌려놓았다. 그것은 내가 야생의 아름다운 숲의 세계에서 강렬하게 느꼈던 영적 힘이 하나이며, 트레버 목사의 설교를 듣던 어린 시절과 고대의 대성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하던 시절에 알고 있던 것이 같은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회고해보건대, 노트르담에 간 것은 인생 여정에서 하나의 이정표였다. 결국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 영광스런 경험을 기억하였고, 메시지를 깨달았다.
[잃어버린 낙원]
나의 세계가 완전히 전복되기 바로 그 직전, 몇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새로운 동반자 - 사랑과 일에서- 가 되어 준 데렉 브라이슨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탄자니아 국립공원의 관리자이자 다르 에스 살람 의회의 의원이었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1975년 5월 곰베에서 있었던 납치 사건으로 인해 연구가 종말을 고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데렉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투기 조종사로 영국 공군에 복무했다. 그러나 현역으로 복무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비행기가 격추당했다. 그 사고에서 척추를 다쳤고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그는 단호한 의지로 노력하여 결국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쪽 다리에는 앞으로 움직일ㄹ 수 있을 정도의 근육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리 하나는 엉덩이 아랫부분을 앞으로 당겨나가야 했다. 한 손으로 왼쪽 다리를 들어 클러치에서 브레이크로 발을 옮기는 방법으로 운전도 배웠다.
결혼 후에도 나는 연구 센터의 관리자로서 계속해서 곰베에서 살았다. 1975년경에는 때로 스무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침팬지뿐만 아니라 비비 원숭이를 연구하면서 곰베에서 살았다. 인류학, 동물행동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과에서 온 미국과 유럽의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5월의 어느날 갑작스러운 테러가 발생했다. 마흔 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자이레(지금의 콩고)에서부터 작은 매를 타고 탕가니아 호수를 건너와 캠프를 습격했다. 공원 관리인 에타 로하이가 고함소리에 깨어 살피러 나갔다. 곧 그녀는 사로잡혔고 부장한 남자들은 머리에 총구를 겨눈 채 학생들의 집까지 안내하도록 명령했다. 그녀는 거부하였다.
우리 집은 호숫가를 따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트가 떠난 후에야 습격 소식을 들었다. 일단 습격 자들이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놀라서 아연해진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해야 할 일을 정하려고 노력하였다. 학생 네 명- 미국인 세 명과 네델란드인 한 명-이 없었다. 누군가가 호숫가에서 네 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이야기하였고, 우리는 납치된 학생들이 죽임을 당했을까봐 두려워하였다. 몇 주가 지나서야 그 학생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탄자니아 사람이 아닌 사람은 모두 곰베를 떠나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 에스 살람으로 이동하여, 데렉의 조그만 손님 숙소에 모두 비집고 들어가 소식을 기다렸다. 악몽의 시간이었다.
2주 후 납치법들이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을 키고마로 돌려보내 몸값을 요구했을 때에야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다른 세 명의 학생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곰베는 몇 달 동안 민감한 지역으로 간주되었고, 방문할 때마다 매번 정부에 특별 허가를 요청해야 했다.
[악의 뿌리]
나는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 몇 달 동안 애썼다. 마음속에서 끔찍한 폭력의 영상이 떠올라 종종 한밤중에 개어나곤 했다. 패션이 길카의 자그마한 새끼의 시체를 먹다 입술에 피를 묻히고 올려다보는 모습. 스니프의 상처 입은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모아 마시기 위해 손을 받치고 있는 사탄의 모습, 고디의 부러진 다리를 계속 돌려 뒤틀고 있는 파벤의 모습, rfl고 마담 비가 초목 아래에 숨어 누워서 끔찍한 상처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동안 그녀의 열 살 난 딸이 그녀를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게 털을 고르며 파리를 쫓고 있는 모습.
곰베 침팬지들의 집단 간 살육에 대한 책을 처음으로 출간했을 때, 나는 몇몇 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전쟁의 전조]
침팬지들이 인간의 원시적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적대적인 영역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매혹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쟁은 항상 인간만이 저지르는 행위처럼 보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오늘(1997년 8월).
[연민과 사랑]
곰베에서 보낸 처음 몇 년간 나는 침팬지들 사이에서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우호적이고 애정 어린 행동에 매료되었다. 한 무리 안에서는 공격적인 것보다 평화적인 상호 작용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돌봄과 협력, 동정, 이타심의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한 형태를 빈번히 보게 된다.
고아인 멜과 그의 보호자인 청년 스핀들에 관한 것이다. 어미가 죽었을 때 멜은 3년 3개월째였다. 그는 자신을 돌봐줄 형이나 누나가 없었다. 놀랍게도(우리는 그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열두 살짜리 스핀들이 그를 키웠다. 곰베에 있는 모든 침팬지 성원들은 약간씩은 혈연관계가 있지만, 스핀들이 멜과 가까운 관계였던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주가 지나면서 그들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스핀들은 이동 중에는 멜을 기다려 주었고, 자기의 등에 태웠고, 심지어 비가 오거나 멜이 놀랐을 때는 마치 어미가 자기 새끼에게 하듯이 배 밑에 달라붙게 해주었다. 더더욱 놀랍게도, 구성원들의 관계가 험악해진 사회적 동요기에 멜이 큰 수컷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스핀들은 얻어터져 쓰러지는 걸 무릅쓰고 멜을 위험에서 구했다.
[죽음]
침팬지도 삶과 죽음의 차이를 이해한다. ~~~하지만 젊은 어미인 맨디는 자신의 첫 번째 새끼를 잃었을 때 사흘 동안 시신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루었다. 죽은 새끼의 몸에서 냄새가 나고 파리가 몰려들게 되고 나서야 맨디는 이를 그만 두었다. 침팬지가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려면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데렉이 죽고 난 뒤 얼마 동안 나는 신을 저버렸다.
[치유]
1981년 5월. 나는 6주간의 미국 여행 -끊임없는 강연, 기금 모금 만탄, 학회, 회의, 침팬지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한 로비 등-을 마친 후에 마침내 곰베에 왔다. ~~~어느 날 아침 이른 새벽에 나는 호숫가에 있는 내 집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사방은 매우 조용했다. 콩고의 산과 탕가니카 호수가 맞닿은 수평선에 걸린 그믐달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물결에 실려 반짝반짝 출렁이며 다가왔다. 바나나 하나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나는 작은 쌍안경과 공책, 연필, 점심으로 먹을 건포도 한 줌을 가지고 집 뒤의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숲을 돌아 다닐때는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았고, 물도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내 영혼에 양분을 주었던 단순한 삶에 몰두하면서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행복한지!
이슬이 내려앉은 풀 섶에 반사되는 희미한 달빛 속에서 산길을 찾아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방에는 나무들이 지난밤의 신비함에 덮여 있었다.
오분 후에 머리 위에서 나뭇잎들이 서걱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침팬지들이 깨어난 것이다. 피피와 그녀의 새끼들이 프로이드와 프로도, 그리고 어린 페니였다. 페니는 엄마의 등에 작은 기수처럼 올라탄 채였고, 그들은 함께 언덕 위쪽으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갔다. 그들은 이제 커다란 무화과나무에 올라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화과나무 열매의 껍질과 씨앗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나는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폭풍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거의 검은 빛이 되었고 비구름이 산꼭대기들을 가려버렸다. ~~~~그러더니 컴컴하고 짙은 구름 속에서 쏟아붓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하늘과 땅이 마치 흐르는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나와 침팬지들은 조용하고 참을성 있게 불평도 하지 않으면서 일체가 되어 앉아 있었다. 한 시간여가 지나서야 비바람의 중심부가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빗발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피피와 그녀의 가족들이 멜리사와 그 가족들을 만나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인간이 침팬지에서 진화해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다(※지난 여행 때 텍사스 달라스 호텔에서 만난 벨보이). 또한 다윈의 진화에 대해서 믿고 있다고 말하고, 멸종된 생물들의 잔해를 직접 만져보았던 올두바이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수백만년 전에 원시적인 유인원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생명체가 있었는데, 그 일종은 변화해서 침팬지가 되고 다른 일종은 변화해서 결국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도덕적 진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1986년 10월부터 나의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간접적으로는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곰베의 침팬지들>을 출판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ㅡ기 위해 나는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학부 수준에서 배우는 여러 가지 것들 -호르몬과 공격성의 관계, 사회생물학 이론 등등-을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시카고 과학 아카데미 원장인 폴 헬트니 박사는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침팬지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학회는 나흘간 계속되었지만, 그 영향은 훨씬 오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서 크나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것은 타르소의 바울이 묘사했던, 이교도였던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가장 열성적이고 충실한 예수의 사도로 변하게 된 경험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에만 해도 나는 <곰베의 침팬지들>2권을 계획하고 있던 연구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카고를 떠날 때에는 이미 침팬지 보호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만 해도 아프리카 25개국에 약 200만 마리의 침팬지가 있었지만, 지난 50년 동안 그 수는 15만으로 줄어들었고, 5000마리 이상의 큰 개체군이 남아 있는 나라는 5개국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침팬지들도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점차적으로 살 자리를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침팬지들을 돕기 위해 침팬지들을 이해하기 전 사회가 중심이 되는 야생동식물 제대로 알기 주간 행사를 진행하면서, 침팬지 서식지가 있는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국가 원수들, 환경, 야생동식물 담당 장관들이나 정부의 담당자들을 만나기도 하였고, 환경 단체들 또는 침팬지 연구나 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도 이야기하였다.
DNA 구조상으로 우리와 1%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침팬지는 혈액 구성이나 면역 체계의 측면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전염성 질병에 감염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침팬지들은 감염이나 AIDS 같은 질병의 연구, 그리고 백신, 치료제 개발에 모르모트로 사용되어왔다.
침팬지들이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기쁨, 슬픔, 공포, 절망 등을 경험한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희망]
곰베는 어떤가? 처음 그곳에 갔던 1960년에는 호숫가 전체가 푸름 숲이었다. ~~~곰베를 처음 찾았던 1960년만 해도, 탕가니카 호숫가에는 몇 개의 작음 마을과 거기에 딸린 경작지들만이 있었을 뿐, 그 일대 전체가 숲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1995년에는 숲이 잇는 곳이 곰베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30제곱 마일 안쪽뿐이다.
제인 구달 연구소는 유럽 연합의 지원을 받아, 숲 재조성, 산림 보호 임업, 침식 방지 프로그램을 시작하였고, 다른 침식 방지책과 함께 계단식 농사법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27개 마을에 묘목장이 설치되었다. ~~~멸종될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다시 살려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있다.~~~1999년 4월 현재 40개 이상의 나라에서 약 2000개의 모임이 활동하고 있다.
나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이 장을 맺으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동물원을 방문햇다가 울타리를 둘러싼 못에 빠져죽을 뻔한 수컷 침팬지를 구해준 미국인 릭 스워프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사육사가 무섭게 경고하고, 침팬지 집단의 다른 수컷들이 위협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왜 목숨을 건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묻는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치 사람의 눈을 보는 것 같았지요. 그리고 그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어요.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나요?”
바로 그러한 눈빛을 나는 아프리카의 시장에 묶여 있는 침팬지들의 눈에서, 서커스 침팬지들의 주음 장식 아래에서, 그리고 실험실 감방의 철망 뒤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고통 받는 다른 동물들의 눈에서도 보이는 눈빛이다. 그리고 종족 갈등의 와중에서 부모를 잃은 부룬디 아이들의 눈에서도 보인다. 길거리에 사는 아이들의 눈에서, 도시 한가운데서 폭력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들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정말로 많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기도만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자신을 투신할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주변 생명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똑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그러한 눈들을 보게 되고,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어 전투에 투신하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여기에 미래를 위한 진정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후손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잇는 세계를 기대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이 이야기는 악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에 도달한 마음의 여행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성 안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악의 증거를 무서워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많은 고통을 초래한 독일인들을 미워하도록 배웟다. ~~~대니 할머니는 티타임 빵 위에다가 금빛 투명한 시럽으로 그들의 얼굴이나 몸 전체 형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나서는 그것을 입으로 베어 물어 그들의 목을 베고 팔다리를 자르는 것을 얼마나 만족스러워했는지,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방문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많은 수용소 중에서도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상징하는 이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을 한다고 해서 내가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시체와 같은 형상을 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하게 상처받은 마음, 절망에 번진 영혼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무엇이 존재하기에 그러한 황폐함과 절망에서도 생존할 수 잇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일 수박에 없다.
50년 동안 나는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안고 살았고, 어린 마음에 강하게 새겨진 학대와 죽음의 이미지는 항상 쉽게 의식의 표면에 떠올라 나를 괴롭히곤 했다. 아우슈비츠와 비르게나우를 방문한 것은 그러한 고통을 덜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은 과거와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두운 이미지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의 여행을 통해, 나의 좁은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잔인함과 같은 악을 내가 결코 수용할 수 없고, 그래서 항상 그것과 싸우기는 하겠지만, 악이 우리들 가운데에 존재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로서는, 유리를 통해 어두침침하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특별했던 이 마음의 여행은,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나의 영적인 순례에서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나의 영혼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작에서 끝맺기]
나는 지금 버치스에 살고 있다. 바깥 정원에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프리카와 타잔을 꿈꾸면서 바라보기도 하고 타기도 햇던 바로 그 나무들이 서 있다.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나는 늙은 영혼을 가지고 잇다는 말을 들었다. 즉, 인간으로 윤회한 경험이 많은 영혼이라는 것이다. 윤회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그 사람들의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나의 마음의 기억 창고에서 뽑아낸 것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씌어졌다.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지구상ㅇ서 보낸 나의 시간은 모두 서로 겹쳐지면서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일련의 단계들로 나눌 수 잇다. 우선 준비의 시간이 있다. 전반적으로 삶을 위한 준비를 햇고, 특별히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하고 침팬지를 연구하기 위한 준비를 했던 기간이다.
두 번째로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기가 있다. 정보를 수집했던, 침팬지들에 대해 그리고 침팬지들에게서 배우기 위해 수풀에서 보냈던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얻은 지식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었지만, 다마스커스의 경험이 있은 후에야 그것은 내 삶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나누는 작업은 나머지 삶 동안 항상 계속될 것이고, 죽은 후에도 책들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경험했던 황홀경의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경험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나의 존재 자체의 기반에 합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듣게 되면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
우리는 함께 자연 세계,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영적인 힘과 다시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기양양하고 기쁘게 인류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연적인 진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만하고 외람된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듣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고요하고 작은 음성이 그것이다. 바로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양심의 소리라고 흔히 불리고 있고, 만일 그러한 규정과 이름이 더 편하다면 그것도 무방하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음성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의 경험은 극적이었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지금 내가 귀 기울이는 것도 그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나누고 공유하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느껴야 할 죄의식, 인간과 동물에 대한 잔인한 행동들 때문에 느껴야 할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씻으려고 노력하였다. 인정 많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끝까지 그러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아마도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닐까?
■ 사람, 동물, 환경을 위한 제인 구달 연구소 안내
비영리 조직인 제인 구달 연구소(JGI)는 1997년에 아프리카 침팬지와 야생동물들의 현장 연구 및 보호 사업, 잡혀 있는 침팬지와 다른 동물들의 생활 조건 개선, 그리고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www.janegoodal.org
[Review]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컬러텔레비전이 가정마다 보급되고, 인기 있는 프로 중 ‘동물의 왕’국이 있었다. 동물들도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이나 지각이 있을까? 새롭게 인식이 바뀌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사냥감 정도로 여겨지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던 것이 감정적 교류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동물의 행동을 관찰할 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인간과 유사한 연결고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도 동물과 유사한 종으로 조상에 조상 대대로 올라가면 결국은 하나라는 교육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는 이 책의 저자인 “제인 구달’이라는 영국 태생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1957년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안고 23살의 나이에 영국 회사의 케냐 지사 관리자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 나이로비에 갔다. 그 인연으로 고생물 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코린돈 자연사 박물관’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침팬지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60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곰베’로 떠났다.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될 작은 배는 선내에 실었다. 바람이 강했고 호수는 파도쳐서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서쪽으로 뒤숭숭한 콩고의 언덕들이 건기의 아지랑이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호수는 눈 닿는 데까지 북쪽으로 부룬디를 향해 뻗어 있었다. 마치 수정같이 투명한 담수의 대양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동쪽 해변을 가까이 끼고 계속 나아갔다. 호수 위로 균열된 절벽이 270미터 정도 솟아올라 있었는데, 가파른 경사면은 두터운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위가 많고 표토가 빈약한 꼭대기만 햇빛에 탄 풀들에 덮여 갈색을 띤 채 벌거벗고 있었다. 계곡에는 자그마한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낸 약간의 개간지가 있었다. 모래가 깔려 있는 해변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말리는 정어리 크기의 작은 물고기 수천 마리가 은빛으로 빛났다. 데이비드 앤스티가 그 물고기는 ‘다가아’라는 것으로, 밤에 어부들이 카누에 있는 알라딘의 램프로 유인해서는 거대한 나비채 처럼 생긴 것으로 퍼 올려 잡는다고 설명했다. 어떤 어부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본문)
위험하고 낫선 땅에서 캠프를 짓고 함께 동행 했던 안내인들도 떠나자 그녀는 어머니와 단 둘만 남겨졌다. 그리고 곧 일을 시작했다. 침팬지를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된 그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침팬지에 대한 보다 내밀한 신비들이 하나둘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침팬지가 도구를 활용해서 땅속에 들어 있는 흰개미들을 낚아 올리는 일은 큰 화제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때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침팬지는 흰개미 둥지의 붉은 흙무더기에 앉아서 구멍 속으로 풀줄기를 계속해서 찔러 넣고 있었다. 잠시 후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무언가를 한 마리씩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이따금은 새 풀을 주워서 사용했다. 그가 떠났을 때 나는 흰개미 더미로 건너갔다. 버려진 풀줄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흰개미들이 둥지 표면을 기어 다니며 풀들을 쑤셔 넣었던 구멍을 다시 막으려 애쓰고 있었다. 시험 삼아 데이비드가 한 그대로 해보니 흰개미들이 턱으로 풀줄기를 물고 매달려 올라왔다.“(본문)
그녀의 연구는 그 후 학계의 관심을 받고 그녀는 일 년에 300회 이상의 강연과 세미나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로부터 8년 뒤에는 스탠포드 대학의 외래 교수가 되어, 1년에 한 쿼터씩 대형 강좌로 학부생에게 인간생물학을 가르쳤다. 또한 침팬지 연구를 기록하기 위해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에서 곰베로 파견한 재능있는 영화작가이자 사진작가인 휴고 반 라윅과 결혼했다. 우리는 함께 작은 연구소를 세웠다. 그리고 아들 휴고 에릭 루이스를 낳았다. 그 후 10년이 지나 우리는 이혼을 했다.”(본문)
그녀는 1977년에 곰베 연구를 지원하는 JGI(Jane Goodal Institute)를 설립했으며, 이 조직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100개 이상의 국가에 10,000개 이상의 그룹을 보유하고 있다. 2008년 이 조직의 회장직을 사임하고 계속해서 환경운동에 왕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 <희망의 이유>는 1999년, 그녀의 나이 65세에 쓰인 것으로 그녀의 삶 전체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우리가 학대하는 야생동물에 대한 죄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것은 곧 우리 양심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그 음성에 따를 때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만하고 외람된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듣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고요하고 작은 음성이 그것이다. 바로 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양심의 소리라고 흔히 불리고 있고, 만일 그러한 규정과 이름이 더 편하다면 그것도 무방하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음성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본문)
물론 이러한 견해에는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동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존중 받고 대우받아야 하는 것인지, 특히 그들을 향한 감정이 하나님 영혼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지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가까이에서 인간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눈여겨보고 관심을 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아마도 진화론적인 관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이유가 곧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침팬지에 대한 관찰보다는 ‘제인 구달’ 개인에 대한 자서 전격인 책이다. 그녀가 동물을 가까이하면서 갖게 된 생각들과 자기 삶, 그리고 영혼의 존재 가치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준다. 특히 책의 구성이 독특하고 수려한 문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녀는 2021년도에 기독교에서 수여하는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고,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방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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